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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목마른 자의 복 (마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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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문을 읽을 때마다, 밝은 얘기가 좀더 많았으면 싶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문은 들출 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그런 기사들이 너무 많아서 또 그게 태반이라서 신문을 열어 보기가 겁이 날 때가 있습니다. "또 무슨 끔찍한 사건이 있나" 이렇게 두려움마저 있습니다. 그러나 간간 좋은 기사라고 해서 딴에는 기자들이 애써서 수집해 가지고 좋은 이야기, 선한 이야기들을 신문에 낼 때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 가끔가끔 신문에 실리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택시 기사가 손님이 자동차 안에 두고 잊어버리고 내린 분실물을 찾아서 그 주인에게 주었다, 혹은 파출소에 갖다 맡겼다 하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 돈지갑을 열어보니 삼십만원이 있었다 그런 얘기입니다. 이걸 착한 일이라고 해서 큰 글자로 보도하고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이것은 결코 기사거리가 못 됩니다.
왜냐하면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의는 기준입니다. 결코 이것은 선행이 아닙니다. 남의 돈 내가 안 쓰는 것,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거 무슨 선행이라고 칭찬할 게 못되고, 내 돈을 남을 주어야 적든 크든 그게 선행입니다. 남의 돈에 손 안대는 것 당연한 거죠! 그게 무슨 자랑거리고 기사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착한 일이라고 기사화 되어야 하는 사회 정황, 그것이 마음 아픈 것입니다. 간혹 이러한 효자, 이러한 효부가 있다고 기사가 납니다. 여러분 '효'라고 하는 것은 자식이 되어서 부모님 모시는 건데 그게 무슨 선행입니까 남의 부모를 모셔야 선행이지 내 부모 내가 섬기고 봉양했다고 해서 그것이 선행이 될 수는 없는 거요, 마땅한 거지요. 당연히 그러해야 돼는 거지요. 이게 바로 의로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의란 기준입니다. 기독교를 흔히 생명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특별한 특징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종교학적 차원에서 정의를 내릴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계시자로 믿는 윤리적 유일신 종교다"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런데 거짓 종교가 뭐냐 거짓종교라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란 그 속에 의의 개념이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샤머니즘을 통해서 무속종교를 비롯한 모든 거짓종교들은 어떠냐 "복 받는다, 소원 성취한다, 만사 형통한다. 그리고 아니면 저주받는다" 이 이야기뿐이지 의의 개념이 없습니다. 도대체 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종교의 특징입니다. 오늘도 종종 잘못된 신앙을 봅니다. 무조건 복 받는다, 잘된다, 형통한다 그렇게 구하고 그렇게 응답 받는다고들 합니다만은 그 속에 의의 개념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를 통해 역사 하시고, 의를 통해 복을 주시고 의를 기준해서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걸 외면할 때 그건 거짓신앙이 되는 것이올시다. 세계적으로 이 젊은 사람들의 윤리가 있습니다. 그걸 간단히 말하면 이렇게 요약한 분이 계십니다. "
I am O.K. You are O.K. We are O.K.", 내게 좋고 네게 좋고 우리 좋고 그러면 좋은 거다. 내게 좋고 네게 나쁘면 그건 나쁜 거예요. 네게 좋고 내게 나쁘면 그건 불쾌한 거예요. 너 좋고 나 좋으면 좋은 거다. 이것이 무서운 철학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도 의가 없습니다. 의가 없기 때문에 I'm not O.K. We are not O.K.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의가 먼저요, 기준이요, 중심이요, 바탕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미국의 어느 칼럼리스트가 조사를 해 보았더니, 성공의 비결과 그 기준이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건강, 충분한 건강.둘째는 좋은 직업.셋째는 행복한 가정.넷째는 좋은 교육. 그 다음에 다섯번째는 마음의 평화. 여섯번째가 좋은 친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이 있어야 성공하고 또 이것들이 있으므로 성공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잘못됐습니다. 이 속에 의로움이 없습니다. 의가 없이는 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는 것을 잊고 사는 세대이기 때문에 이 세대는 점점 불행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올시다. 노벨상 받은 두 사람을 비교를 해봅니다. 한 사람은 유명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아서 많은 돈을 받아 가지고, 상금을 받아 가지고 바로 자기가 일하던 현지에다 병원을 짓고 약품을 사서 나머지 생을 그들을 치료하며 불쌍한 사람을 도우며 살다가 갔습니다. 또한사람, 여러분이 잘 아는 까뮤라고 하는 문학가는 노벨 문학상을 받아서 역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가지고 교외에다가 고급 별장을 짓고 거기서 향락하고 고급 차를 몰고 다니다가 차사고로 죽었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누가 말립니까 누가 정죄할 것입니까 그 돈 내 것 이니까 내 마음대로 쓰겠지요. 단 거기에 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불행한 것입니다. 그는 잘못 산 것이올시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고요.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는데 해는 뉘엿뉘엿 져 갑니다.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을 잃었습니다. 해 지기 전에 오아시스를 만나야 되는데,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보니까 마치 모래 위에, 사막에 발자국이 있어요. '먼저 간 사람이 있구나' 요 발자국을 따라가면 오아시스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발자국을 따라 갔습니다. 아무리 따라가도 끝이 없어요. 자세히 보았더니 그게 자기 발자국이에요.
자기 발자국을 한평생 따라간들 그에게 새로운 생이 있을 수는 없지요. 궤도 이탈을 하기 전에는 참 생명의 길은 없는 것이예요. 여러분 잘못 그려진 지도를 가지고 여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의를 떠나서 잘못된 지도를 가진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어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여도 다 허사예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저는 자그마한 무슨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할 때가 많습니다. 또 여러 모임에 가서 강연도 하고 설교도 하는데, 그때 보면 사회하시는 분이 평신도가 하게 될 때가 태반입니다. 그 교대교대 하니까 어떤 분은 잘 하는 분도 있고 어떤 분은 잘 못하는 분도 있어요. 모처럼 자기 차례가 돌아 왔으니까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사회석에 떡 나서가지고 자기 시계를 보면서, "시간이 되었으므로" 하고 시작하는데 5분전이에요. 자기 시계에 기준한 거지요. 고장난 시계를 기준으로 시간을 지켜 봤댔자지 이게 지켜지는 겁니까 자기는 지켰다고 하겠지요. 병든 양심을 따라 진실하게 산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제가 그래서 늘 웃는 말로 하지만은 진짜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소신껏 사는 것처럼 불행한 일이 없다고. 자기 나름대로 양심대로 진실하게 고집스럽게 사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겁니까 그런고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의라고 하게 되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주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건 과학자의 말입니다. 자연과학자 물리학자들의 말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자연법칙대로 되고 유전공학적 고리에서 이루어지고 그렇지만은 이 생명공학적인 고리보다 더 높은 것이 우주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가 있는데, 그 의지에 따라 살고 의지를 받아서 순응하는 사람에게 성공도 있고 행복도 있고 창조도 있다는 것이죠 건강도 있고. 이걸 역행할 때에 불행이 온다고 과학적 차원에서 말합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법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의요 이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의를 포기해야 합니다. 내 고집, 내 고정관념, 내 익숙해진 것, 내 병든 양심, 이걸 깨끗이 포기하고야 하나님의 의를 영접하고 수용할 수가 있는 것이요.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말씀하십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 자기 의지를 바쳐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올시다. 또한 이 의라고 하게 되면 이제 윤리적 차원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이것은 질서를 말하고, 화목과 화평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또한 공의입니다 공적인 의, 그래서 공정함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가 무엇입니까 언젠가 일본사람이 쓴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 비평을 하는데, 한국에 기독교인들이 많다.
주일날 교회에 가까이 가면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지 교통이 어려워질 정도로 그렇더라. 지나가면서 보니까 차량 정비하는 사람들이 어깨띠를 두르고 땀을 흘려 가면서 "이리 오세요, 저리가세요" 호각을 불면서 이렇게 차량 정비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는 이렇게 느꼈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바로 믿어서 공정과 공의를 배워 가지고 살면 저 사람들은 필요없는 건데' 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이 자동차가 이렇게 엉기느냐 이거예요. 차량정비 위원은 필요없는 거예요. 그래야 그리스도인이에요. 기독교인이라면은 공정하게 법을 지켜야지, 이걸 잘 안 지켜주는 몇 사람 때문에 이 밖에서 지금 많은 분들이 수고하고 있는 거예요. 게다 또 말도 안 들어요 또 게다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간혹 종종 난 보는데 이 교회 주변이 지금 일방도로로 돼 있어요. 일방도로의 길을 거꾸로 오는 사람이 있어요. 길을 당장 막아놓고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싸우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만은 이거는 유치원 때부터 배워야 되는 거예요. 배냇병신이라 못 고칩니다. 그게 또 생글생글 웃는 여집사예요. 자기가 지금 얼마나 실수하고 있다는 걸 몰라요. 의를 몰라요 의를.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의로움이라는 게 먼저입니다. 최우선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것이 그거예요. 네편 내편만 알았지 공의를 몰라요. 네 당 내 당 만 생각을 했지 의가 뭐냐를 망각하고 정치를 한다구요. 이러니까 하나가 안돼는 거예요. 내 당이든 네 당이든, 내 편이든 네 편이든 그게 중요하지 않아요. 어느 쪽이 진리냐 어느 쪽이 공의냐 이것이 중요하죠. 공정하기만 하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거요. 엎드려 절 할 것 없어요. 백성에게 아첨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제발 공의를 따라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또 하나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진실과 정직함을 말하는 것이요. 이에 따라서 화평이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이익보다도, 번영보다도, 자유보다도, 명예보다도 그 모든 것보다 먼저가 정직함이에요. 우선 정직하고 볼 거예요. 출세하고 못하고 합격하고 못하고 잘 되고 안 되고, 이의가 있고 불의가 오고 어떤 불이익…… 문제가 아니에요. 먼저 정직하고 의로움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함으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웰링턴 장군이 있습니다. 이 웰링턴 장군이 어떤 때 한가한 시간에 여우 사냥을 나갔습니다. 말을 타고 총을 쏘면서 여우를 쫓아가는 중에 자기가 좇는 여우가 어느 목장 속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목장은 담장으로 쭉 둘러 있는데, 그는 대문 앞에 가서 목장 문 앞에 서서, "문을 열어라. 내가 좇는 여우가 여기 들어갔다." 어린아이가 나와서 하는 말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아 그래서 "내가 웰링턴 장군이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넙죽 엎드려 절을 하고, "늘 뵙고 싶었습니다, 존경하는 장군님" 아 인사를 벌떡해 놓고는, "안됩니다" 그래요, "이놈아 왜 않되느냐",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어떤 일에도 열지 말라고 했고요, 이 목장을 여우사냥터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웰링턴 장군은 고개를 숙이고 "네 말이 맞다"하고 돌아섰습니다. 힘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 겁니까 옳고 바르게 할 때에 용기도 있고 능력도 있는 것이에요. 그걸 잊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그랬어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된 아이들,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모습을 보세요. 이 어린아이들 보면은 부드러운 입술이 하얗게 부르터 있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젖을 빠는데 어떻게 힘들여 빠는지 그 어른도 그렇게 못 빱니다. 이 젖 빠는 힘은 대단합니다, 큰 노동입니다. 땀을 뻘뻘 흘려 가면서 어머니 젖꼭지를 빨아 당깁니다. 왜요 이게 살았다는 증거요, 그래야 사니까. 이게 생명력이라는 거요. 젖을 힘있게 빨아야 산다. 그 힘이 줄어들면 죽는 겁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의를 어느 정도 사모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의를 사모하고 의를 배우고 의를 따르고 의를 위하여 온 정력을 기울이는데, 이것은 기본적인 것이에요. 원초적인 것입니다. 모든 것보다 우선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는 97%가 물이고 신생아는 77%가 물이고 어린아이는 70%가 물이고 성인은 60%가 물이고 노인은 50%가 물이요. 결국은 점점 물이 모자라 가지고 말라서 죽는 거예요. 그래 여러분이 병원에 입원하면 입원하자마자 '링게르'라고 하는 주사를 꽂아요. 그거 맹물입니다 그거요. 어떤 건 99%가 물입니다. 증류수라고하는 맹물을 피 속에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물 모자라서 병들었으니까요. 자 여기에 말씀하십니다. "주리고 목마름 같이!" 주리고 목마름 같이 의를 이렇게 간절히 사모하는 거예요. 없으면 죽어요. 이걸 떠나면 살지 못해요. 이건 절대적 관계예요. 먹지 못하고 못살아요. 그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필요합니다. 이것이 양식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 학생들 학교갈 때 보면 그 무거운 가방에다가 또 도시락을 두개씩 싸가지고 가요. 먹어야 사니까, 먹어야 공부 하니까. 일용할 양식, 이것은 제일 관심사요 지속적 절대 필요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 들어 보셨어요 사람이 미리 못하는 것 세 가지가 있어요. 좀 미리미리 준비하면 좋겠는데, 이건 안됩니다.
첫째가 미리 자지 못해요. 앞으로 며칠 못 잘 거니까 아예 미리 좀 많이 자 놓고 했으면 좋겠는데, 안돼요 안됩니다. 미리 먹지 못해요. 한끼 좀 많이 먹어 놓고 한 달 살았으면 좋겠는데 안돼요. 그거 하루에 세끼 꼬박꼬박 먹어야 되요. 미리 자지 못합니다. 아예 미리 며칠 자 두고 그리고 살면 좋겠죠 안돼요. 깊이 생각해 보세요. 이게 중요한 진리예요. 매일 먹어야 하고 매일 운동을 해야 돼요. 미리 운동 못 해요. 미리 운동 다 해 놓고 그 다음에 안 해도 되느냐 안돼요. 그러니까 미리 자지도 못하고, 미리 먹지도 못하고, 미리 운동하지도 못해요. 결국은 계속적으로 해야 되요. 계속적으로 먹어야 되고, 계속적으로 마셔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와 같이 의는 과거에 의를 이루었다고 오늘이 의로운 게 아닙니다. 가끔 보면 한평생 나라를 위해 수고한 분을 오늘 조그만 부정이 있다고 해서 감옥으로 보냅니다. 왜요 이건 일용할 양식이니까. 과거에 당신이 어떤 좋은 일을 많이 했더라도 오늘의 잘못한 일을 그로 인해서 용서받을 수가 없어요. 사건마다 매일매일 시간마다 의로워야되는 것이지, 의라고 하는 것은 결코 미리 충족할 수 없는 것이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아주 귀한 말씀이에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요' 하나님이 배부르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 책에 이렇게 섰습니다. "
경제위기 맞이하게 된 이유" 우리가 이렇게 국제 통화 금융을 맞아서 어려워지게 된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이 잘못된 슬로건을 철학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래요.
첫째가 자기 돈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은 미친놈이다.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 "돈 가지고 사업하나, 남의 돈 가지고 하는 거지" 이게 일반화되어 있어요. 은행돈 가지고 하는 거지. 남의 돈 가지고 잔치하다가 다 망한 거예요. 이 철학이 잘못돼서. 내 돈 없으면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남의 돈 가지고 해야 되는 것처럼, 그게 또 잘 하는 것처럼 생각했어요. 그래 다 망한 거죠. 의롭지 못해서. 또한 가지,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왔습니다. 풍청풍청하게 사업하다가 망하면 자기 것만 챙겨가지고 도망가면 되는 거예요.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고 했는데, 이건 공의롭지 못한 거예요. 기업이 망했으면 기업주는 더 망해야지. 그게 공정한 거지요.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공의를 외면하고 살았단 말입니다. 이것이 망조요. 번연히 부정을 정당화할 수 있는 줄로 착각을 했어요. 이것이 망조예요. 아무리 사업이 크고 아무리 큰 일을 했더라도 불의는 불의요, 불의는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예요. 이것을 외면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요. 우리는 생각해 봅시다. 가끔 이러지요, "야 이놈아 진실이 밥먹이냐" 성경은 말합니다. 공의가 배부르게 한다고요. '의로우면 배부를 것이라.' 이것이 진리입니다. 의를 떠나서 절대로 배부르지 못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진실, 실종된 정직을 찾아야 됩니다. 의를 찾을 때,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하실 것입니다. 바닷물은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납니다. 오로지 생수만이 우리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겁니다. 의를 사모하고 의를 갈구하고, 의에게 우리의 운명을 거는 겁니다. 이때에 주께서 은혜 베풀어주십니다.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여기에 이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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