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마5:13-16)
본문
무엇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겠습니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인정받고 영향력있는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와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최고의 찬사, 최고의 칭호를 붙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는 "빛과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 없이 귀한 일을 하며 인류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말 할 때에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사람"이라고 주저없이 말합니다.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을 인종차별의 높은 벽을 부순 아프리카의 자유의 등불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감리교선교학교 를 마친 만델라는 정치 경제적 평등이 보장되었던 평화로운 사회, 그러나 일단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제 한몸 아끼지 않고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선조의 빛나는 전통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부족 족장의 아들 로 태어났습니다. 1912년에 결성된 남아프리카민족회의에 가입하여 그 안 에 청년동맹을 만들고 의장으로 선출된 만델라는 1952년 대대적인 운동 을 벌이다가 1962년 경찰 끄나풀의 밀고로 체포되어 27년 동안을 감옥에 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국제여론의 질책과 세계 각국의 경제봉쇠 등에 시 달린 백인정부는 1990년 2월 11일 조건없이 만델라는 석방했습니다. 그리고 만델라는 민족회의를 합법정당으로 바꾸어 1994년 4월에 실시된 최초 의 자유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20세기 세계사에 하나의 획을 긋게 됩니다. "우리는 자유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고 공정하며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할 것을 자임합니다. 우리는 동 포들의 가슴마다 희망을 심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국의 몇몇 장기수를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복역한 정치범이었다가 일국의 대 통령으로 변신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1994년 5월 10일 대 통령 취임식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입니다. 그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1964년 4월의 마지막 재판에서 "(자유, 평등, 민주사회라는)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밝힐 때의 비장한 어조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게 희망에 차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이 연설은 그 사이에 가로놓인 30 년이란 세월의 엄숙함을 실감케 합니다. 이 연설은 혈통과 피부색이 다른 모든 조건에 우선해서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20세기 최대의 희비극에 조종을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조선인 말살책, 히 틀러의 유대인 탄압, 미국의 흑인 차별 등이 자취를 감춘 뒤에도 끝까지 남아 있던 인류의 마지막 수치-남아공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아파 르트헤이트)이 그 종소리 너머로 사라져갔습니다.
그것은 넓게는 2차 대 전 이후 시작된 제3세계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국가 건설, 좁게는 1960년 으로 상징되는 '검은 아프리카' 의 독립물결이 한 세대 또는 반세기 만에 마침내 마무리되는 대역정의 끝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기도 했습니다. 만 델라의 삶은 시대착오적이며 반인간적인 인종차별의 감옥과 그것을 마침 내 넘어선 인종간 평등의 신기원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니, 그의 삶이야말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어둠을 자유 아프리카의 빛으로 탈바꿈시 킨 동력으로서의 순결한 투쟁 그 자체였습니다. 참으로 만델라는 검은 아 프리카의 흑인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억압했던 백인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 가 되시기 위해 인류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옛날에는 소금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소 금을 신과 같은 것(theion)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태양과 소금 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Nil utilius sole et sale)라는 노래까지 불렀 습니다. 예수 당시에 사람들은 소금은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소금은 순결을 연상케 합니다. 소금의 반짝이는 백색이 바로 순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 은 무엇보다도 소금이 제일 순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은 순수한 태양과 바다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이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순결의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순결, 순수 이 말들은 깨끗하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영육간의 삶 이 깨끗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 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 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 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자 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 으므로 느브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토록 만들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 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 게 구하니.(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금년에는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소금처럼 깨끗하게 성결보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회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 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 소금은 한 마디로 부패방지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성도는 세상 의 소금이 되어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의 역활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은 부패하기 쉬운 사회이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은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권력이나 물질이 아니라 소금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불러주신 곳은 교회외에는 아무 곳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 이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에 교회가 소금이 되지 못하면 세상은 당연히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어느 곳에 있든지 소금이 되어 부패를 방지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가 정치를 하면 정치가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기업을 경영하면 기업이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사 법부에 있으면 사법부가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있는 곳이 어디 든 처해 있는 곳의 부패가 방지되어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부패되지 않도록 하는 소금 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부패한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것이 확산되는 것은 막아 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소금은 신선함을 드러내며, 또한 그 상태가 계속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성도에 게 부패한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그 일은 우리 주님께서 맡 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제아무리 더러운 사람도 자신의 정결함만큼이나 정결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발휘할 영 향력은 아직 부패하지 않은 것을 뒤덮어서 그것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부패하게 하는 세력들의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신선한 상태가 계속 보존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서 우리 가 세상에 살고 존재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부패함이 확산되지 않고 선 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소금의 가장 크고 가장 분명한 특성은 음식에 맛을 주는 것입니다. 소금이 들지 아니한 음식은 좋아 보여도 맛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인 생에 맛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것과 정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란 인생의 즐거움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교회가 사회에 서 소금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기독교가 맛을 상실했 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빛을 발하며,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 희망을 심어주며, 불안과 혼동 속에 삶의 평안과 질 서를 심어줄 수 있어야 맛을 내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의 소 금이라 할진댄 그가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빛과 희망과 그리고 삶의 기쁨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도 없으며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용 지물은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가 소금의 역할 을 다 하지 못하면 당연히 버림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경제위기 시대를 맞아 부실 기업은 모두 정리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명을 다 하지 못하는 부실 교회는 정리해고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약시대 회당에서 유대인들 사이에는 만일 유대인이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그가 회당에 정식으로 받아 드려지기 전에 참회하는 의미에서 회당문에 가로 누워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갈 때에 밟고 가게 하는 풍습 이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이 관습을 받아 들여 지금도 그대로 행하 고 있습니다.
규칙상 교회에서 제적되었던 자가 다시 용서함을 받기 전에 교회 문에 누워서 사람들이 들어갈 때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버리워 짓밟히지 않도록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본문 14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흘륭한 찬사입니다. 왜냐 하 면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성도에게 자신의 본질인 빛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요 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 고 명하신 것은 바로 그들이 주님 자신과 같이 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의 빛"이라 했고 유명한 랍비를 흔히 "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이 표현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알 필요 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확실한 것은 사람이 자신의 등불에 불을 붙이 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실로 이방인에게 비치는 빛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등불에 불을 붙이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하나님의 사람이 비치는 빛은 반사하는 빛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도 같이 적용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요구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빛을 비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빛 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서 비치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켜주심을 받는 빛입니다. 우리는 흔히 얼굴에 광채가 나는 신부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여자에게서 비치는 그 빛은 그 여자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에서 나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게 될 때 진정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믿는 자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무엇 을 의미합니까
첫째, 빛은 어두운 곳에 비추어야 합니다. 팔레스틴의 가옥은 지름이 50센터미터도 안 되는 작고 등근 창문 하나 만 있어서 대단히 어두웠습니다. 등잔은 깊은 접시 모양의 그릇으로 그 안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담가두고 있습니다. 성냥이 있기 전이므로 등잔 불을 한 번 끄면 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상시는 등잔은 등 잔대에 얹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외출 할 때는 안전을 위해서 등잔불을 등잔대에서 내려 흙으로 만든 위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위험이 없이 탈 수 있었습니다. 등잔불의 본래적인 직능은 보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사람에게 보여지게 함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보일 수 있게 되 어야 합니다. 더욱이 기독교는 다만 교회 안에서만 보여져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문 안에만 효력이 머물러 있는 기독교라면 누구에게도 소용이 별 로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 밖, 세속 생활에서 더 많이 보여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교회의 빛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 때에 기독교 신앙 이 모든 사람에게 밝히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너회는 세상의 빛 이라."는 말씀은 우리 존재의 목적이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있음을 말해 줍니다.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다만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에게 인간의 참다운 삶에 대한 진리를 전해 주고 그 삶의 밑 바닥에서 흐르는 원리들을 가르치며,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빛이 되 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우주를 밝혀 주려고 애를 쓰는 것 보다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충성하며 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 실이다. 세상을 밝혀 주는 일은 그 세상을 밝혀 주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빛되신 주님의 뜻에 거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빛이 널리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발등상의 등불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으면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중세 암흑기의 기독교에 불을 밝힌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2차대전 중 미국 해군의 역사 중에 가장 용감했던 지휘의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1944년 6월 20일에 있었던 필리핀 바다의 전투였습니다. 지휘 관은 미쳐(Marc Mitscher)제독이었습니다. 대규모의 일본 함대를 미군 항 공기들이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출격했던 전투기들이 항공모함으로 귀환 할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파도는 높았으므로 착륙이 위험했습니다. 전투지구에서 함정들은 적의 공격을 피하여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쳐 제독은 "불빛을 밝히라!"고 유명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험을 강행한 것입니다. 적의 표적이 되더라고 아군 항공기 들을 무사귀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종사들은 뒤에 그날의 감명을 이 렇게 술회했습니다. "우리 군함들은 너무나 찬란하고 분명하고 아름다웠다. 할리우드 개봉축하연과 중국인의 설날과 독립기념일을 합친 것처럼 우리 군함들은 밝게 드러나 마치 지옥에서 오아시스를 보는 것 같았다." 이날 80대가 무사귀환 착륙하고 불과 세 대만이 희생된 것은 기적이라고 들 합니다. 미쳐 제독의 과감한 작전이 성공한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리 위험부담과 희생이 뒤따른다할지라도 분명히 불을 밝혀야 합니다.
둘째, 빛은 인도자의 역할을 합니다. 빛은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 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은 무엇보다도 선을 위해서 굳세게 서서 진리와 생명으 로 인도할 선도자가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부정 부패를 보고서 그대로 방치한다면 엄격히 말해 그 사람은 부정 부패 방조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정 부패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더불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진리와 정의를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도덕적 힘과 용기를 결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 일 한 사람이 먼저 이끌고 가면 그들은 따를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의지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어떤 힘있는 사람을 가질 경우에는 그들은 곧 어떤 일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형제가 지탱할 수 있고 솔선해서 용 기가 부족 한 자들이 따를 수 있도록 강하게 일어서는 것이 성도가 받은 빛의 사명입니다. 세상은 진리와 정의와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빛을 필요 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가 솔선해서 용기 있게 행하고 태도를 명확히 해 주기 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어두운 사회를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 을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하여 짐 맥클로스키(Jim Mcclosky) 씨는 특별한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들을 가려내는 일입니다. 그는 지금 까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세 명이 무죄 판결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뉴저지 프린스턴에 Centurion Mistries란 작은 간판을 걸고 혼자 일합니다. 그는 거기서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는 심증이 가는 복역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무보수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법정 증인들의 거짓 증언 때문에 억울한 죄명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클로스키 씨는 증인들을 다시 만나보고 배후 조사를하고 끈질긴 설득을 통하여 진실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한 가지라도 바로잡는 것이 온 세상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며칠 전에도 그는 기쁨의 개가를 올렸습니다.
1976년에 경찰관을 살해한 죄로 복역중 이던 제임스 란다노의 무죄를 증명한 것입니다. 뉴욕 법정에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절망 속을 살던 란다노 씨는 눈물의 포옹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두 명을 살해한 죄로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할 산토스 씨의 무죄를 증명하여 6년 만에 광명을 보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강간 살인 죄로 12 년간 복역중이던 사람의 무죄를 증명하여 자유를 안겨 준 일도 있었습니다. 현재 그가 매달리고 있는 사건은 열 건에 달합니다. 맥클로스키 씨는 개인 사업을 하다가 중단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들어가 1984년에 졸업 하여 교도소 목사로 사역하던 중 자기의 무죄를 호소하는 한 죄수를 돕 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에 평생을 바칠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돈 벌이도 되지 않고 숨어서 하는 일이지만 정의를 추구하고 거짓말쟁이들 을 가려내는 것이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과 정의의 정신은 인종을 초월합니다. 그는 텍사스 주에서 여고 생 강간 살인으로 역시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흑인 브래들리의 무죄를 증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죄수는 고등학교 청소부였는데, 백인 동료 청 소부 네 명의 위증으로 꼼짝할 수 없이 죄를 뒤집어쓴 것입니다. 그런데 맥클로스키 씨의 사랑과 정열에 넘친 설득이 효과를 거두어 네 명의 증 인 모두가 위증을 자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만이 사회를 밝게 한다."는 그의 좌우명은 흔탁한 전세계에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 들이 있을 때 내일의 세계는 밝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본문 "착한 행실"은 선하며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행위를 뜻합니다. 성도는 "착한 행실"은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과 힘,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 을 끄는 선이 있고 사람에게 반발을 느끼게 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은 아름다운 것이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 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선을 베풀면서도 추한 모습과 반발을 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선을 베풀고서도 사람을 이끄는 매력과 호감, 그리고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반 발을 사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선한 행실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경우 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소위 남 에게 보이기 위한 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찬은 결코 자기가 성 취한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로 말미암아 하게 하신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관심만 가질 뿐입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눈을 자기에게 집중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자 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에 그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 영향력의 성격은 진실무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됨됨 이가 예수님을 닮아야만 참다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공부 잘 해서 잘 되라는 말을 통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간됨됨이 를 통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들을 성장시키든 그들을 버려 놓든 상관 없이, 바로 가장 깊은 곳에 형성되어 있는 여러분의 인격입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착해야 한다고 늘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악한 상태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다른 사람이 그들을 성장시켜 준다든가 그들을 이끌어 준다든가 하여 그 아이들이 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선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선해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향력은 우리의 인간 됨됨이에 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이미 방부제의 기능을 발휘할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 을 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 사회에서 소금의 영향력도, 빛의 영향력도 발 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발휘해야 하는 영향력의 성격은 바로 됨됨이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공시함으로써 시작 되었습니다. 이미480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용기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길이 길이 빛날 것입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특히 그 권위가 나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상황 아래서의 항거는 매우 어 렵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 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를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선두에 섰 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바로 진실을 추구한 마틴 루터의 빛의 열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교회에 영향력있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됨됨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성령님의 역사가 충만하시기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최고의 찬사, 최고의 칭호를 붙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는 "빛과 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 없이 귀한 일을 하며 인류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말 할 때에 "세상의 소금과 같은 사람"이라고 주저없이 말합니다. 남아프리카의 만델라 대통령을 인종차별의 높은 벽을 부순 아프리카의 자유의 등불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감리교선교학교 를 마친 만델라는 정치 경제적 평등이 보장되었던 평화로운 사회, 그러나 일단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제 한몸 아끼지 않고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선조의 빛나는 전통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부족 족장의 아들 로 태어났습니다. 1912년에 결성된 남아프리카민족회의에 가입하여 그 안 에 청년동맹을 만들고 의장으로 선출된 만델라는 1952년 대대적인 운동 을 벌이다가 1962년 경찰 끄나풀의 밀고로 체포되어 27년 동안을 감옥에 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국제여론의 질책과 세계 각국의 경제봉쇠 등에 시 달린 백인정부는 1990년 2월 11일 조건없이 만델라는 석방했습니다. 그리고 만델라는 민족회의를 합법정당으로 바꾸어 1994년 4월에 실시된 최초 의 자유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20세기 세계사에 하나의 획을 긋게 됩니다. "우리는 자유를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하고 공정하며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할 것을 자임합니다. 우리는 동 포들의 가슴마다 희망을 심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국의 몇몇 장기수를 제외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복역한 정치범이었다가 일국의 대 통령으로 변신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1994년 5월 10일 대 통령 취임식에서 행한 연설의 한 대목입니다. 그가 종신형을 선고받은 1964년 4월의 마지막 재판에서 "(자유, 평등, 민주사회라는)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도 되어 있다."고 밝힐 때의 비장한 어조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게 희망에 차 있고 자신감에 넘치는 이 연설은 그 사이에 가로놓인 30 년이란 세월의 엄숙함을 실감케 합니다. 이 연설은 혈통과 피부색이 다른 모든 조건에 우선해서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20세기 최대의 희비극에 조종을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조선인 말살책, 히 틀러의 유대인 탄압, 미국의 흑인 차별 등이 자취를 감춘 뒤에도 끝까지 남아 있던 인류의 마지막 수치-남아공의 악명 높은 인종차별정책(아파 르트헤이트)이 그 종소리 너머로 사라져갔습니다.
그것은 넓게는 2차 대 전 이후 시작된 제3세계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국가 건설, 좁게는 1960년 으로 상징되는 '검은 아프리카' 의 독립물결이 한 세대 또는 반세기 만에 마침내 마무리되는 대역정의 끝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기도 했습니다. 만 델라의 삶은 시대착오적이며 반인간적인 인종차별의 감옥과 그것을 마침 내 넘어선 인종간 평등의 신기원 사이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니, 그의 삶이야말로 아파르트헤이트의 어둠을 자유 아프리카의 빛으로 탈바꿈시 킨 동력으로서의 순결한 투쟁 그 자체였습니다. 참으로 만델라는 검은 아 프리카의 흑인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억압했던 백인들에게까지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빛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 가 되시기 위해 인류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빛과 소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옛날에는 소금을 대단히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소 금을 신과 같은 것(theion)이라고 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태양과 소금 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Nil utilius sole et sale)라는 노래까지 불렀 습니다. 예수 당시에 사람들은 소금은 세 가지 특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소금은 순결을 연상케 합니다. 소금의 반짝이는 백색이 바로 순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로마 사람들 은 무엇보다도 소금이 제일 순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소금은 순수한 태양과 바다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 이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순결의 모범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순결, 순수 이 말들은 깨끗하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도는 영육간의 삶 이 깨끗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 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 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 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자 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다니엘은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마음을 확정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 으므로 느브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토록 만들었습니다.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 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 게 구하니.(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금년에는 무엇보다 몸과 마음을 소금처럼 깨끗하게 성결보존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회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 시기를 기원합니다.
둘째, 소금은 한 마디로 부패방지를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성도는 세상 의 소금이 되어 세상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의 역활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은 부패하기 쉬운 사회이기 때문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은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는 권력이나 물질이 아니라 소금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불러주신 곳은 교회외에는 아무 곳도 없습니다. 오직 교회만 이 세상의 소금이기 때문에 교회가 소금이 되지 못하면 세상은 당연히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교회는 어느 곳에 있든지 소금이 되어 부패를 방지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가 정치를 하면 정치가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기업을 경영하면 기업이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사 법부에 있으면 사법부가 부패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가 있는 곳이 어디 든 처해 있는 곳의 부패가 방지되어야 소금의 역할을 다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보다 자기가 섬기고 있는 교회가 부패되지 않도록 하는 소금 이 되어야 합니다. 소금은 부패한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환원시키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것이 확산되는 것은 막아 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소금은 신선함을 드러내며, 또한 그 상태가 계속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줍니다. 성도에 게 부패한 사람을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그 일은 우리 주님께서 맡 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제아무리 더러운 사람도 자신의 정결함만큼이나 정결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발휘할 영 향력은 아직 부패하지 않은 것을 뒤덮어서 그것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부패하게 하는 세력들의 활동을 억제함으로써 신선한 상태가 계속 보존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금"이 되어서 우리 가 세상에 살고 존재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부패함이 확산되지 않고 선 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그러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소금의 가장 크고 가장 분명한 특성은 음식에 맛을 주는 것입니다. 소금이 들지 아니한 음식은 좋아 보여도 맛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인 생에 맛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이것과 정 반대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란 인생의 즐거움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교회가 사회에 서 소금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말해 기독교가 맛을 상실했 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빛을 발하며,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며, 좌절과 절망 가운데 희망을 심어주며, 불안과 혼동 속에 삶의 평안과 질 서를 심어줄 수 있어야 맛을 내는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세상의 소 금이라 할진댄 그가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 빛과 희망과 그리고 삶의 기쁨을 나누어 주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 데도 없으며 밖에 버려져서 사람에게 밟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용 지물은 멸망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가 소금의 역할 을 다 하지 못하면 당연히 버림받게 되고 말 것입니다. 경제위기 시대를 맞아 부실 기업은 모두 정리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명을 다 하지 못하는 부실 교회는 정리해고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약시대 회당에서 유대인들 사이에는 만일 유대인이 배교했다가 다시 돌아오면 그가 회당에 정식으로 받아 드려지기 전에 참회하는 의미에서 회당문에 가로 누워 사람들로 하여금 들어갈 때에 밟고 가게 하는 풍습 이 있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이 관습을 받아 들여 지금도 그대로 행하 고 있습니다.
규칙상 교회에서 제적되었던 자가 다시 용서함을 받기 전에 교회 문에 누워서 사람들이 들어갈 때 "나는 맛을 잃은 소금이니 나를 밟고 지나가시오."라고 하게 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버리워 짓밟히지 않도록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으로, 본문 14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흘륭한 찬사입니다. 왜냐 하 면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성도에게 자신의 본질인 빛이 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요 9: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 고 명하신 것은 바로 그들이 주님 자신과 같이 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이방인의 빛"이라 했고 유명한 랍비를 흔히 "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이 이 표현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알 필요 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확실한 것은 사람이 자신의 등불에 불을 붙이 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실로 이방인에게 비치는 빛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등불에 불을 붙이신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나 하나님의 사람이 비치는 빛은 반사하는 빛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도에게도 같이 적용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요구는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빛을 비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빛 을 받아서 반사하는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서 비치는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켜주심을 받는 빛입니다. 우리는 흔히 얼굴에 광채가 나는 신부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여자에게서 비치는 그 빛은 그 여자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에서 나타 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사랑을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랑을 나타내게 될 때 진정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믿는 자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무엇 을 의미합니까
첫째, 빛은 어두운 곳에 비추어야 합니다. 팔레스틴의 가옥은 지름이 50센터미터도 안 되는 작고 등근 창문 하나 만 있어서 대단히 어두웠습니다. 등잔은 깊은 접시 모양의 그릇으로 그 안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담가두고 있습니다. 성냥이 있기 전이므로 등잔 불을 한 번 끄면 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평상시는 등잔은 등 잔대에 얹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외출 할 때는 안전을 위해서 등잔불을 등잔대에서 내려 흙으로 만든 위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위험이 없이 탈 수 있었습니다. 등잔불의 본래적인 직능은 보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사람에게 보여지게 함인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보일 수 있게 되 어야 합니다. 더욱이 기독교는 다만 교회 안에서만 보여져서는 안됩니다. 교회의 문 안에만 효력이 머물러 있는 기독교라면 누구에게도 소용이 별 로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 밖, 세속 생활에서 더 많이 보여져야 합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교회의 빛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 때에 기독교 신앙 이 모든 사람에게 밝히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너회는 세상의 빛 이라."는 말씀은 우리 존재의 목적이 어두운 곳을 밝히는 데 있음을 말해 줍니다.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사람들로 하여금 참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다만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들에게 인간의 참다운 삶에 대한 진리를 전해 주고 그 삶의 밑 바닥에서 흐르는 원리들을 가르치며,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삶이 과연 무엇인가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는 빛이 되 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우주를 밝혀 주려고 애를 쓰는 것 보다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충성하며 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 실이다. 세상을 밝혀 주는 일은 그 세상을 밝혀 주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빛되신 주님의 뜻에 거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 빛이 널리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발등상의 등불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으면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중세 암흑기의 기독교에 불을 밝힌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였습니다.
2차대전 중 미국 해군의 역사 중에 가장 용감했던 지휘의 사례가 남아 있습니다. 1944년 6월 20일에 있었던 필리핀 바다의 전투였습니다. 지휘 관은 미쳐(Marc Mitscher)제독이었습니다. 대규모의 일본 함대를 미군 항 공기들이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출격했던 전투기들이 항공모함으로 귀환 할 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파도는 높았으므로 착륙이 위험했습니다. 전투지구에서 함정들은 적의 공격을 피하여 등화관제를 실시하고 있 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미쳐 제독은 "불빛을 밝히라!"고 유명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험을 강행한 것입니다. 적의 표적이 되더라고 아군 항공기 들을 무사귀환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종사들은 뒤에 그날의 감명을 이 렇게 술회했습니다. "우리 군함들은 너무나 찬란하고 분명하고 아름다웠다. 할리우드 개봉축하연과 중국인의 설날과 독립기념일을 합친 것처럼 우리 군함들은 밝게 드러나 마치 지옥에서 오아시스를 보는 것 같았다." 이날 80대가 무사귀환 착륙하고 불과 세 대만이 희생된 것은 기적이라고 들 합니다. 미쳐 제독의 과감한 작전이 성공한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리 위험부담과 희생이 뒤따른다할지라도 분명히 불을 밝혀야 합니다.
둘째, 빛은 인도자의 역할을 합니다. 빛은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다른 사람 들에게 길을 분명하게 밝혀 주어야 합니다. 성도는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세상은 무엇보다도 선을 위해서 굳세게 서서 진리와 생명으 로 인도할 선도자가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부정 부패를 보고서 그대로 방치한다면 엄격히 말해 그 사람은 부정 부패 방조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부정 부패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더불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진리와 정의를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자기 혼자서는 일어날 수 없을 만큼 도덕적 힘과 용기를 결핍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 일 한 사람이 먼저 이끌고 가면 그들은 따를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의지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어떤 힘있는 사람을 가질 경우에는 그들은 곧 어떤 일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형제가 지탱할 수 있고 솔선해서 용 기가 부족 한 자들이 따를 수 있도록 강하게 일어서는 것이 성도가 받은 빛의 사명입니다. 세상은 진리와 정의와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빛을 필요 로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누군가가 솔선해서 용기 있게 행하고 태도를 명확히 해 주기 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어두운 사회를 빛으로 인도하는 역할 을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합니다. 밝은 세상을 위하여 짐 맥클로스키(Jim Mcclosky) 씨는 특별한 일에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거짓말쟁이들을 가려내는 일입니다. 그는 지금 까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세 명이 무죄 판결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뉴저지 프린스턴에 Centurion Mistries란 작은 간판을 걸고 혼자 일합니다. 그는 거기서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는 심증이 가는 복역수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하여 무보수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법정 증인들의 거짓 증언 때문에 억울한 죄명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클로스키 씨는 증인들을 다시 만나보고 배후 조사를하고 끈질긴 설득을 통하여 진실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한 가지라도 바로잡는 것이 온 세상을 밝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며칠 전에도 그는 기쁨의 개가를 올렸습니다.
1976년에 경찰관을 살해한 죄로 복역중 이던 제임스 란다노의 무죄를 증명한 것입니다. 뉴욕 법정에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절망 속을 살던 란다노 씨는 눈물의 포옹을 했습니다. 그는 또한 두 명을 살해한 죄로 평생 감옥에 있어야 할 산토스 씨의 무죄를 증명하여 6년 만에 광명을 보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강간 살인 죄로 12 년간 복역중이던 사람의 무죄를 증명하여 자유를 안겨 준 일도 있었습니다. 현재 그가 매달리고 있는 사건은 열 건에 달합니다. 맥클로스키 씨는 개인 사업을 하다가 중단하고 프린스턴 신학교에 들어가 1984년에 졸업 하여 교도소 목사로 사역하던 중 자기의 무죄를 호소하는 한 죄수를 돕 기 시작하면서 이런 일에 평생을 바칠 결심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돈 벌이도 되지 않고 숨어서 하는 일이지만 정의를 추구하고 거짓말쟁이들 을 가려내는 것이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과 정의의 정신은 인종을 초월합니다. 그는 텍사스 주에서 여고 생 강간 살인으로 역시 무기징역 판결을 받은 흑인 브래들리의 무죄를 증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죄수는 고등학교 청소부였는데, 백인 동료 청 소부 네 명의 위증으로 꼼짝할 수 없이 죄를 뒤집어쓴 것입니다. 그런데 맥클로스키 씨의 사랑과 정열에 넘친 설득이 효과를 거두어 네 명의 증 인 모두가 위증을 자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진실만이 사회를 밝게 한다."는 그의 좌우명은 흔탁한 전세계에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사람 들이 있을 때 내일의 세계는 밝은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본문 "착한 행실"은 선하며 매력있고 아름다우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행위를 뜻합니다. 성도는 "착한 행실"은 단순히 선할 뿐만 아니라 역시 마음을 끄는 매력과 힘,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 을 끄는 선이 있고 사람에게 반발을 느끼게 하는 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은 아름다운 것이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 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선을 베풀면서도 추한 모습과 반발을 사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지극히 작은 선을 베풀고서도 사람을 이끄는 매력과 호감, 그리고 인정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반 발을 사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선한 행실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경우 들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착한 행실"로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소위 남 에게 보이기 위한 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크리스찬은 결코 자기가 성 취한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로 말미암아 하게 하신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관심만 가질 뿐입니다. 성도는 사람들의 눈을 자기에게 집중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자 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빛과 소금이 되라는 말씀은 세상에 그만큼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그 영향력의 성격은 진실무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됨됨 이가 예수님을 닮아야만 참다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으로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공부 잘 해서 잘 되라는 말을 통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간됨됨이 를 통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들을 성장시키든 그들을 버려 놓든 상관 없이, 바로 가장 깊은 곳에 형성되어 있는 여러분의 인격입니다. 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녀들에게 착해야 한다고 늘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악한 상태에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다른 사람이 그들을 성장시켜 준다든가 그들을 이끌어 준다든가 하여 그 아이들이 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 선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선해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향력은 우리의 인간 됨됨이에 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금이 되지 아니하면 이미 방부제의 기능을 발휘할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아니하면 세상 을 비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올바르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코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 사회에서 소금의 영향력도, 빛의 영향력도 발 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엡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발휘해야 하는 영향력의 성격은 바로 됨됨이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의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논제를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공시함으로써 시작 되었습니다. 이미480년 전의 일이지만 그의 용기는 인류 역사와 더불어 길이 길이 빛날 것입니다. 권위에 대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할 때, 특히 그 권위가 나에게 죽음을 줄 수 있는 상황 아래서의 항거는 매우 어 렵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 임을 믿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의 모든 기왓장이 나를 거스를지라도 나는 진실을 추구하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의 선두에 섰 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바로 진실을 추구한 마틴 루터의 빛의 열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지역사회, 그리고 교회에 영향력있는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인간됨됨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성령님의 역사가 충만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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