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종교개혁 (마5:13-16)
본문
여러분께서 기도하여 주셔서 지난 3주간 동안 미국과 캐나다 성회를 은혜 중에 끝마치고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갈보리 교회에서 이민 가신 분들의 문안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회적 사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양 속담에 아주 없어서 안 될 요긴한 사람이나 그 사회에서 유용한 사람을 가리켜서 “그 아무개는 세상에 소금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소금이 아주 귀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의 말 가운데 “세상에 해와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에는 ‘소금’하면 보통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소금은 순결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소금을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원시 종교에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헌물을 할 때 소금을 뿌렸는데 이것은 그들의 순결을 의미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구00에 보아도 레위기 2장 13절에 소제를 드릴 때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니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민수기 18장 19절에 보아도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 43장 24절에도 “흠 없는 제물을 드리되 여호와 앞에 드릴 것이며.”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소금을 곁들였는데 말하자면 순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할때 오늘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순결의 표본이 되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삶의 표준이 낮은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표준은 낮은 데 두지 말고 높은 데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직과 근면, 양심과 도덕의 기준이 말할 수 없이 낮아진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할 일은 말이나 행실에서 사상에 이르기까지 절대 순결을 위해서 힘써야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하나님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장1-2절에 보아도 “하나님 앞에 산제물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힘쓰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소금은 방부제로 사용했었습니다. 요사이는 소금 아니고도 특별한 약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소금 이외에는 방부제로 사용되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듣는 사람들은 얼른 방부제를 연상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헬라의 전기 작가인 풀루타르크는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고기는 죽은 몸이요 죽은 몸의 부분인데 만일 그냥 내버려두면 변하고 결국 썩어버립니다. 그러나 소금을 치면 썩는 것을 방지 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 영혼을 죽은 몸에 삽입시키면 썩는 것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만일에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면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어떤 방면으로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소금은 음식의 맛을 냅니다. 소금의 기능을 화학적으로 더 깊이 븐석할 수가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어떠한 특별한 과학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원리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일반 시민과 가정부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상식적인 소금의 기능을 말씀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보통으로 우리가 어떤 음식을 만들때 소금 없이 요리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상식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음식물에 있어서 소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의 생명에 맛을 줍니다. 비극적인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대개 기독교를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신앙인이 되면, 세상에서 사는 맛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청년들은 젊어서 마음껏 멋대로 살아보고 늙어서 예수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먼저 믿는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 우리가 우리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더 재미가 있고 신앙 생활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 미국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에 감사하게도 어떤데서는 여덞 시간 드리이브를 해서 집회를 참석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두 시간, 세 시간 걸려서 오신 분은 많고요. 그 분들의 간증이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받고 오늘까지 신앙 생활 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만일 예수님을 몰랐다면 이 고된 이민 생활을 어떻게 해냈을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언제나 목사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이런 간증을 들을 때마다 목사로서 복음을 증거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세상에 이 이상의 더 큰 츅복이 어디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생활을 지배하게 하십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께로 오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귀한 교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를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다투고 시기하는 무서운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만족과 평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맛이 있었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비극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는 믿는다고 하고, 교회는 다닌다고 하고, 직분은 맡았다고 하지만 참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의 맛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수는 아무리 많아도 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손해를 끼칠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오히려 거친 돌이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항간에서 교회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아니라 빈축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 종종 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사랑해야 할 교회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워서 이웃 지역 사회에 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정말 요긴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한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무디선생이 성경 읽기를 장려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이 당신을 범죄에서 막거나 죄가 당신을 이 책에서 막거나 할 것입니다.” 귀한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타락을 막지 못하면,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의 소금으로서 그 맛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에게 기능을 다하려 열심을 다한 나머지 나 자신이 신앙의 맛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고 있을 때가 있는데 이것 또한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잊어버리게 되면 교회에도 사회에도 아무 소용이 없어 능욕적인 밟힘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소금은 어디까지나 대중적이고 평범하고 그 값이 쌉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일수록 풍부하고 값싸게 주셨습니다. 가령 다이아몬드나 금같은 것은 희귀하고 그 값이 비쌉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가 일상 생활에 다이아몬드나 금은 특별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없어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나 공기나 태양광선이나 소금같은 것은 아주 흔합니다. 그러나 없으면 살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저희 가정에서는 평생 다이아몬드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물이나 소금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과학과 다른 학설이나 구약의 율법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오늘의 복음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대중적이면 쉽게 열려진 문입니까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비싼 존재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소금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 5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명 가운데서 소극적인 면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빛은 적극적인 면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소금은 가만히 있어 자기에게 접촉하는 물체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빛은 어두운 데 나아가 비치는 적극성이 있습니다 빛이라고 하면 우리는 누구나 태양을 연상하게 됩니다. 빛의 현상으로 보는 태양에는 열, 광선, 살균성 혹은 과일이나 곡식을 결실하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주안점이 빛, 그러니까 광선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빛은 물체의 정체를 나타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물체의 모양이나 색채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빛은 진상을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정직하게 모든 사실을 판단하는 것이 빛의 작용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진단을 정확히 내려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치료하는 데는 그 형상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직분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이사야나 아모스나 예레미야나 세레 요한 같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모두 이러한 빛의 사명을 이행했고 이 사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수난을 당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밀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깨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자됨이 비밀을 깨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사람 앞에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 믿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만 보이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활동은 교회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서 일반적인 사회활동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교사는 학교에서, 종업원은 공장에서, 사용주는 기업체에서, 상인은 상점에서, 사무원은 사무실에서, 공무원은 관청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운전기사는 자동차에서, 의사는 병원에서, 법조인은 법원에서, 정치인은 정계에서, 군인은 부대에서, 우리가 매일 쓰는 말에서, 우리가 읽는 책에서, 모두가 주님 앞에서 일하는 것 같은 태도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빛은 사람을 안내합니다. 여러분, 혹시 부둣가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거기 가보면 캄캄한 밤에도 배가 안전하게 부두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 표지등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비행기가 밤에 어떻게 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도 안내등이 켜져 있습니다. 활주로를 향한 등불이 직선으로 보일 때 비행장에 착륙하면 안전합니다. 빛은 이렇게 우리를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일에 거리에 신호등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안전하게 예배당까지 올 수가 있겠습니까 빛은 우리의 가는 길을 분명하게 하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을 행하기 위한 그 초점이 되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길을 구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있습니다. 어제 보도된 대로 소위 12.12 사태에 반란을 주동한 사람들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 노릇을 했으니 우리 나라의 질서가 얼마나 어지러워졌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요사이 일어나고 있는 끔찍스런 일들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아니 행주대교, 팔당대교는 공사 중에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도둑놈인 세상에 하는 일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져 좌충우돌하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 사는데 안내하는 빛이 없으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빛인데 우리가 빛을 발하지 못하니 문제는 심각하지 않습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앞 못보는 친구의 안전을 위해 등불을 켜 들려주면서 이것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맹인 친구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화를 벌컥 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설명을 들은 맹인 친구는 오해를 풀고 친구가 마련해 준 등불을 들고 한참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부딪쳤습니다. 맹인은 또 화를 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앞 못보는 나를 위해서 친구가 마련해 준 등을 들고 가는데 이렇게 사람을 업신여기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맹인은 자기 손에 들린 등이 이미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불이 이미 꺼진 지 오래지 않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안내하는 불이 필요합니다. 바로 서서 의의 길로 인도할 사람을 긴급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셋째, 빛은 우리를 경고합니다. 우리가 위험한 곳에 이르게 되면 경고의 빛이 우리에게 위험 신호로 말해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민족의 위기를 경고해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을 깨우치고 위험 앞에서 경고하다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까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경고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결국 한방울의 이슬처럼 헤롯의 칼에 그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 3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경고의 빛을 발해야 할 사명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교사로, 교장으로 오랫동안 봉직한 바 있는 플로렌스 얼슨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그 교장이 학생들을 책망할 수 밖에 없는 때가 되면 그 학생을 품에 안고 책망했다고 합니다.“만일 우리의 경고가 분노에서가 아니고, 안달에서가 아니고, 비판에서가 아니고, 정죄에서가 아니고, 헐뜯기 위함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 한다면 반드시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의 세계인의 염려의 대상이 된 것은 숫자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의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내 백성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경고의 빛을 발했다면 이 모양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경고의 빛을 발하기는 고사하고 함께 묻혀 돌아가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잘못된 길로 가는 통치자들은 교회의 축복을 받으면서 그대로 달려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물량주의에 휩쓸려서 돈벌고 출세하기만 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서 잘못된 방법으로 출세하고 돈 벌어 국민의 빈축의 대상이 된 대부분의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 수치를 무엇으로 가릴 수 있습니까 오늘 교회는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보이는 세상을 따라가던 잘못 된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국민이 삽니다. 한강물은 여전히 흐릅니다. 그러나 공해 때문에 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천만이 넘는 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력이 있어서 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냐 하는 데는 자신이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를 조명해보면 나중에 어떤 평가가 나올까요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해서 거의 모든 국민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때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바로 감당해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것이 오늘의 종교개혁이라고 믿습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 앉으신 여러분, 그리고 이 방송을 들으시는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오늘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져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이 민족이 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첫째, 소금은 순결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소금을 순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원시 종교에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에게 헌물을 할 때 소금을 뿌렸는데 이것은 그들의 순결을 의미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구00에 보아도 레위기 2장 13절에 소제를 드릴 때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니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민수기 18장 19절에 보아도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 43장 24절에도 “흠 없는 제물을 드리되 여호와 앞에 드릴 것이며.”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렇게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소금을 곁들였는데 말하자면 순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드렸습니다. 그런 의미로 생각할때 오늘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순결의 표본이 되어야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삶의 표준이 낮은 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의 표준은 낮은 데 두지 말고 높은 데 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직과 근면, 양심과 도덕의 기준이 말할 수 없이 낮아진 이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할 일은 말이나 행실에서 사상에 이르기까지 절대 순결을 위해서 힘써야겠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 “하나님앞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2장1-2절에 보아도 “하나님 앞에 산제물된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힘쓰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소금은 방부제로 사용했었습니다. 요사이는 소금 아니고도 특별한 약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소금 이외에는 방부제로 사용되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듣는 사람들은 얼른 방부제를 연상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헬라의 전기 작가인 풀루타르크는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고기는 죽은 몸이요 죽은 몸의 부분인데 만일 그냥 내버려두면 변하고 결국 썩어버립니다. 그러나 소금을 치면 썩는 것을 방지 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 영혼을 죽은 몸에 삽입시키면 썩는 것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소금은 썩는 것을 방지합니다. 만일에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면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어떤 방면으로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소금은 음식의 맛을 냅니다. 소금의 기능을 화학적으로 더 깊이 븐석할 수가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어떠한 특별한 과학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원리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일반 시민과 가정부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상식적인 소금의 기능을 말씀하셨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보통으로 우리가 어떤 음식을 만들때 소금 없이 요리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상식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음식물에 있어서 소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인간의 생명에 맛을 줍니다. 비극적인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대개 기독교를 그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신앙인이 되면, 세상에서 사는 맛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청년들은 젊어서 마음껏 멋대로 살아보고 늙어서 예수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먼저 믿는 우리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 우리가 우리의 직분을 다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으면 더 재미가 있고 신앙 생활 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 미국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에 감사하게도 어떤데서는 여덞 시간 드리이브를 해서 집회를 참석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두 시간, 세 시간 걸려서 오신 분은 많고요. 그 분들의 간증이 “목사님, 저는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받고 오늘까지 신앙 생활 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제가 만일 예수님을 몰랐다면 이 고된 이민 생활을 어떻게 해냈을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언제나 목사님께 감사드리고 있어요.” 이런 간증을 들을 때마다 목사로서 복음을 증거한 보람을 느끼곤 합니다. 세상에 이 이상의 더 큰 츅복이 어디있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생활을 지배하게 하십니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께로 오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보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예수님의 귀한 교훈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속사업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를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서로 누가 높으냐 다투고 시기하는 무서운 신경전을 벌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주님께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만족과 평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맛이 있었을까요 그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비극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는 믿는다고 하고, 교회는 다닌다고 하고, 직분은 맡았다고 하지만 참 그리스도와 함께 살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의 맛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수는 아무리 많아도 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손해를 끼칠 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오히려 거친 돌이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항간에서 교회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아니라 빈축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 종종 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사랑해야 할 교회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워서 이웃 지역 사회에 본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영향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소금은 정말 요긴한 것입니다.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한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무디선생이 성경 읽기를 장려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이 당신을 범죄에서 막거나 죄가 당신을 이 책에서 막거나 할 것입니다.” 귀한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타락을 막지 못하면,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이 세상의 소금으로서 그 맛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에게 기능을 다하려 열심을 다한 나머지 나 자신이 신앙의 맛이 있는지 여부를 모르고 있을 때가 있는데 이것 또한 위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잊어버리게 되면 교회에도 사회에도 아무 소용이 없어 능욕적인 밟힘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귀한 소금은 어디까지나 대중적이고 평범하고 그 값이 쌉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일수록 풍부하고 값싸게 주셨습니다. 가령 다이아몬드나 금같은 것은 희귀하고 그 값이 비쌉니다.
그런데 보세요. 우리가 일상 생활에 다이아몬드나 금은 특별한 분야를 제외하고는 없어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이나 공기나 태양광선이나 소금같은 것은 아주 흔합니다. 그러나 없으면 살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저희 가정에서는 평생 다이아몬드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물이나 소금이 없으면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과학과 다른 학설이나 구약의 율법을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오늘의 복음과 비교해 볼 때 우리의 신앙은 얼마나 대중적이면 쉽게 열려진 문입니까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비싼 존재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소금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켜서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 5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사명 가운데서 소극적인 면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빛은 적극적인 면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소금은 가만히 있어 자기에게 접촉하는 물체에 적용합니다.
그런데 빛은 어두운 데 나아가 비치는 적극성이 있습니다 빛이라고 하면 우리는 누구나 태양을 연상하게 됩니다. 빛의 현상으로 보는 태양에는 열, 광선, 살균성 혹은 과일이나 곡식을 결실하게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 주안점이 빛, 그러니까 광선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빛은 물체의 정체를 나타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물체의 모양이나 색채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빛이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빛은 진상을 드러냅니다. 마태복음 5장 37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정직하게 모든 사실을 판단하는 것이 빛의 작용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진단을 정확히 내려야 하는 것처럼 세상을 치료하는 데는 그 형상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먼저 필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요한 직분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이사야나 아모스나 예레미야나 세레 요한 같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모두 이러한 빛의 사명을 이행했고 이 사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수난을 당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숨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밀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깨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자됨이 비밀을 깨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사람 앞에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 믿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만 보이는 것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활동은 교회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아가서 일반적인 사회활동을 통해서 나타나야 합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교사는 학교에서, 종업원은 공장에서, 사용주는 기업체에서, 상인은 상점에서, 사무원은 사무실에서, 공무원은 관청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운전기사는 자동차에서, 의사는 병원에서, 법조인은 법원에서, 정치인은 정계에서, 군인은 부대에서, 우리가 매일 쓰는 말에서, 우리가 읽는 책에서, 모두가 주님 앞에서 일하는 것 같은 태도로 일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빛은 사람을 안내합니다. 여러분, 혹시 부둣가에 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거기 가보면 캄캄한 밤에도 배가 안전하게 부두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 표지등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비행기가 밤에 어떻게 비행장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습니까 거기에도 안내등이 켜져 있습니다. 활주로를 향한 등불이 직선으로 보일 때 비행장에 착륙하면 안전합니다. 빛은 이렇게 우리를 안내하는 역할을 합니다. 만일에 거리에 신호등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안전하게 예배당까지 올 수가 있겠습니까 빛은 우리의 가는 길을 분명하게 하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갈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을 행하기 위한 그 초점이 되는 인물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길을 구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있습니다. 어제 보도된 대로 소위 12.12 사태에 반란을 주동한 사람들이 나라의 최고 통치자 노릇을 했으니 우리 나라의 질서가 얼마나 어지러워졌는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요사이 일어나고 있는 끔찍스런 일들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진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아니 행주대교, 팔당대교는 공사 중에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도둑놈인 세상에 하는 일이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어두워져 좌충우돌하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 사는데 안내하는 빛이 없으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빛인데 우리가 빛을 발하지 못하니 문제는 심각하지 않습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친구네 집에 놀러 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앞 못보는 친구의 안전을 위해 등불을 켜 들려주면서 이것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맹인 친구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화를 벌컥 냈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설명을 들은 맹인 친구는 오해를 풀고 친구가 마련해 준 등불을 들고 한참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부딪쳤습니다. 맹인은 또 화를 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앞 못보는 나를 위해서 친구가 마련해 준 등을 들고 가는데 이렇게 사람을 업신여기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맹인은 자기 손에 들린 등이 이미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불이 이미 꺼진 지 오래지 않습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안내하는 불이 필요합니다. 바로 서서 의의 길로 인도할 사람을 긴급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셋째, 빛은 우리를 경고합니다. 우리가 위험한 곳에 이르게 되면 경고의 빛이 우리에게 위험 신호로 말해줍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민족의 위기를 경고해 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그 백성을 깨우치고 위험 앞에서 경고하다가 얼마나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까 세례 요한은 헤롯의 잘못을 경고하다가 감옥에 갇혔고 결국 한방울의 이슬처럼 헤롯의 칼에 그 목이 잘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 3장 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값을 네 손에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경고의 빛을 발해야 할 사명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교사로, 교장으로 오랫동안 봉직한 바 있는 플로렌스 얼슨씨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그 교장이 학생들을 책망할 수 밖에 없는 때가 되면 그 학생을 품에 안고 책망했다고 합니다.“만일 우리의 경고가 분노에서가 아니고, 안달에서가 아니고, 비판에서가 아니고, 정죄에서가 아니고, 헐뜯기 위함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 한다면 반드시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한국의 세계인의 염려의 대상이 된 것은 숫자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의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내 백성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경고의 빛을 발했다면 이 모양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경고의 빛을 발하기는 고사하고 함께 묻혀 돌아가며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잘못된 길로 가는 통치자들은 교회의 축복을 받으면서 그대로 달려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말지 않았습니까 물량주의에 휩쓸려서 돈벌고 출세하기만 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서 잘못된 방법으로 출세하고 돈 벌어 국민의 빈축의 대상이 된 대부분의 사람이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 수치를 무엇으로 가릴 수 있습니까 오늘 교회는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보이는 세상을 따라가던 잘못 된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국민이 삽니다. 한강물은 여전히 흐릅니다. 그러나 공해 때문에 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는 천만이 넘는 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명력이 있어서 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냐 하는 데는 자신이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한국 교회를 조명해보면 나중에 어떤 평가가 나올까요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해서 거의 모든 국민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 때를 암흑시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종교개혁 기념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바로 감당해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는 것이 오늘의 종교개혁이라고 믿습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 앉으신 여러분, 그리고 이 방송을 들으시는 여러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오늘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져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이 민족이 사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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