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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소금언약 (마5:13)

본문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복은 하나님의 의로 덧입혀지는 과정이요, 그와 동시에 인간의 하나님을 향하여 높아져 있는 모든 대적의 요소들이 허물어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자 하는 신앙의 열심까지도 포함해서 도대체 인간의 의로는 어쩌지 못한다는 절대적 절망의 벽에 부딪힌 연후 자신이 포기되어지고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는 모습이다. 이제는 모든 선진들이 그러했듯이 그 의를 인하여 살며 그 의를 인하여 그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 욕과 핍박과 모든 악한 말을 듣게 되는 것은 생리적으로 당연한 福人들의 삶인 것이다. 그것은 빛에 대한 어두움의 항거요, 그리스도에 대한 벨리알의 대적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福人들의 신분에 대해서 그 어떠함을 확실하게 기술해 주고 있다. Umei'" ejste to; ala" th'" gh'":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Umei'" ejste to; fw'" tou' kovsmou.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여기 기술된 표현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같고 빛과 같다는 식의 직유법이 아니다. 너희는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소금과 같은 존재요, 빛과 같은 존재라는 표현이 아니라, 소금이요 빛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의 너희는 팔복의 성취자임은 물론이요 의를 인하여 살고 있는 나를(ejmou') 인하여 사는 자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Umei'"(너희는)는 흔치 않게 대문자로 시작되고 있다. 바로 그러한 대상 향하여 소금이요 빛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설교가들이 위의 말씀을 예수께서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소금으로 비유하셨다고 한다. 그러기에 소금이 맛을 내며 또한 방부제로 쓰이듯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이 세상을 윤택하게 하고 부패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아주 그럴듯한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식의 성경해석 방법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결국 그러한 해석의 결론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한다는 쪽으로 내려진다. 설교가나 주석가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대상들에게 잔뜩 지워주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너희는 소금과 같은 존재이니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성경은 말한적이 없다. 다만 성경은 너희가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소금은 당연히 소금 역할을 하게 되어 있고 할 수 밖에 없다. 존재가 소금이지 역할을 소금처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금이(to; ala") 맛을 잃게 되는(mwranqh'/) 경우가 있으니 그것이 경계해야될 부분이요, 그러하면 무엇으로 짜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하는 반문이다. 맛 잃은 소금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 의해 밟힐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소금이 맛을 잃다니 맛을 잃은 소금이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그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같다.
그러나 유대의 소금은 석염(石鹽) 곧 돌소금을 사용하기 때문에 수리아나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맛을 잃은 소금이 땅바닥에 버려져 이곳 저곳에 쌓여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성경의 소금인 너희는 얼마든지 맛을 잃어버릴 수 있기에 오늘 본문과 같은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물질적 소금이 성경의 소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런지는 모르지만 성경의 소금은 성경의 소금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고 할 때도 동일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빛은 성경의 빛이요, 물질적인 빛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 분명하다. 물론 성경의 빛에 대한 그림자적 성격으로서 또는 자연계시의 성격으로서 물질적인 빛은 진리의 보충적 계시 성격을 띄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림자와 실체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므로 물질로서의 소금은 다분히 보충적 진술의 성격은 지닐 수 있어도 비유로서 등장되는 것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고 할 때 빛 을 비유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 그것은 해와 달과 별과 같은 물질적 빛의 개념으로 보충적 설명을 한다 해도 오히려 성경에서 말하는 빛의 진정성을 왜곡할 뿐더러 그 본질을 훼손할 우려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비유는 비유로서의 본래적인 의미전달의 가치가 있지만 존재의 직설적 진술을 비유로 이해할 때, 오히려 그 진술의 참의미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실피고 있는 본문의 경우가 그렇게 취급되기 쉽다. 앞서 말한것처럼 실제로 그러한 일이 많은 이들에 의해서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야 할 일은 소금의 화학적 성격과 그것의 역할을 방부제 의 성격이 어떻고 하는 식으로 접근하기 보다는그것은 성경으로부터 말씀을 듣고자 하기 보다는 그 본문에 자기의 의미를 주입해서 설명하고 적용하려는 자기식 성경이 되어버리고 만다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것에 귀를 기울여 보아야 할 것이다. ala"(할라스)를 쓰고 있는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선 신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는 경우를 보도록 하자.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 9:48-50) 여기서 소금은 심판적 상황의 묘사와 동시에 화목의 요소로서 사용되고 있다. 소금의 맛은 짜게 하는 것이요, 그 짜게하는 맛은 화목과 관련지어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어떻게 보면 무서우리 만큼 전율을 느끼게 하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다. 네 손이 너를 범죄(실족)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실족케)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 9:43-48) 이 말씀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바로 앞에는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라는 말씀도 있다. 이 소자중 하나 가 어느 사이 네 손이 너를 로 바뀌면서 말씀이 전개되고 있다. 너의 그 손이(hJ ceivr sou) 너를 실족케(skandalivzh/ se)하거든 그것을 찍어버리라 두손을(duvo cei'ra") 가지고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네가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니라(kalovn) 문제는 항상 두손(duvo cei'ra"), 두발(duvo povda"), 두눈(duvo ojfqalmouv")에 있다. 항상 두손, 두발, 두눈이 싸우고 끊임없이 괴롭힘을 더하게 하여 실족하게 하는 것이다(skandalivzw).
그러므로 해결책은 그 손(hJ ceivr)을 찍어버려야 하며 그 발(oJ pouv")을 찍어버려야 하고 그 눈을(oJ ojfqalmov") 빼어버려야(e'kballw) 한다.
왜냐하면 한손(불구자), 한발(절뚝발이), 한눈(monovfqalmon)이면 전쟁이 필요없을 뿐더러 실족할 일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너희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두손 두발 두눈이 화목하는 길은 미봉책으로는 되지 않는다. 이들이 화목하는 길은 적당한 방법이 도무지 없다. 단지 유일한 하나의 길은 불구자가 되는 길이요 절뚝발이가 되는 길이며 외눈박이가 되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 임시 미봉책은 언제나 그러하듯 다시 터지게 되어 있고 그것은 불로서 소금치듯함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와중에서 불구자가 되지 못하고 절뚝발이와 외눈박이가 되지 못하고 잘라져 나가던 손과 발, 눈을 붙잡으려던 한 많은 여인이 롯의 처 요 그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끊어버리지 못해 영원한 소금기둥으로 심판의 대명사로 오늘도 남아있는 여인이 바로 롯의 아내 인 것이다. 소
금으로 맛을 낼 일이지 소금기둥이 될 일이 아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유사한 말씀이 누가복음 14장에도 나오고 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눅 14:26-25) 무엇이 소금 기둥인가 맛잃은 소금이 어디에 버려질 것인가 그것은 롯의 처로부터 시작된 역사가 계속하여 반복되고 있으니 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소금 돌 무더기 위에 버리워지면 기둥 밖에 더 되는가 오늘날 팔레스틴 지역에도 이렇게 버리워진 돌무더기 소금기둥은 흔하게 볼 수 있단다. 그 기둥의 시초는 롯의 처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 때로는 길거리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기나 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말씀이다. 소금의 맛, 화목케 되는 길은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버리라는 그것에 있다. 그렇지 아니하면 능히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으니 이것은 구약에 나타나는 소금 언약에서 확실하게 증거된다. 구약에서 사용 사례를 살펴보자. 히브리어로 소금은 hl'm,(멜라흐)이다. 명사형으로는 27회 정도 쓰이고 있고 동사로(hl'm;, 말라흐) 4회, hl'm'(믈라흐) 형태로 3회 쓰인다. 주로 심판과 관련해서 롯의 처의 경우(창 19:26)가 그렇고 언약과 관련된 제물에서 쓰이는 경우가 자주 나온다(레 2:13, 민18:19, 대하13:5, 겔43:24).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 2:13, 겔 43:24 참조)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음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자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민 18:19) 이렇듯 소금(hl'm,, ala")은 구약에서 언약에 대한 결정적 표현으로 등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제한된 시대에 특정인에 한정하여 세워진 것만은 아니다.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에서 언약의 분명한 목적과 적용대상을 알 수 있다.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 까지니 (신 29:13-15)
이 언약의 성취는 분명하게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언약의 말씀을 따라 행한 자는 그의 백성이 되며 또한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지만 그와 반대편에 있는 자는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모든 저주(詛呪)대로 그에게 화가 미치게 되어 있다. 이때 저주의 내용 중에는 그의 땅이 소금 땅이 되며 불에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하는 저주도 들어있다. 도대체 소금 언약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이미 팔복의 성취자인들인 너희는 세상의(th'" gh'") 소금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이름하겠는가 사사기 9:45절을 살펴보자. 사사들 중에서도 유명했던 기드온이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그중에서 세겜에 있는 첩을 통하여 낳은 자가 아비멜렉이라는 자였다. 그는 스스로 지배자가 되려하여 이복형제중 요담외에 70인을 한반석위에서 죽이는 희대의 끔찍한 살인극을 벌인다. 또한 그를 반대하는 무리들에 대한 살육을 서슴치 않는 장면이 사사기 9장에 보도되고 있다. 그중 45절을 보면 아비멜렉이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라고 하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소금의 역할, 이스라엘의 풍속에 스며있는 소금의 어떠함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소금의 의미는 단순히 음식의 조미료적 역할, 그래서 부패를 방지하고 도덕회복 운동의 모범적 역할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소금은 성결케 함이요, 나누는 역사요,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의 분명한 예식이다(출 30:35).
소금은 산자를 살게하고 죽은 자를 죽게한다. 그것이 성경적 소금의 역할이요, 의미이다. 소금은 죽어야 할 요소를 철저히 죽게하고 동시에 살아야 할 것은 생동력 있게 살게한다. 소금은 심판과 부활을 이루게 한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에 대하여 에스겔을 통해 예언하는 말씀 중, 예루살렘의 처음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네 근본과 난 땅은 가나안이요, 네 아비는 아모리 사람이요 네 어미는 헷사람이라 너의 난 것을 말하건데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성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겔 16:3-4)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태어날 때의 배꼽줄을 자르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배꼽줄만 생명줄인 줄로 여기고 놓지 못하고 있으나, 한때는 그것이 절대적인 생명줄이었지만 그것을 끊어버리고 단절시키지 않으면 저주의 줄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은 왜 알지 못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란 말인가 성경은 누구나 쉽게 마음만 먹으면 버릴 수도 있고 취할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을 버리라고 하지 않는다. 적어도 버릴 수 없는 생명선을 버리라고 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것이 소금 언약이요, 사는 길이다. 소돔과 고모라성을 누구나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었더면 한 여인의 소금 기둥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소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JUmei'") 가 소금이다 . 바로 8복의 내용대로 버릴 것이 버려지고 그리스도로 다시 산 자 너희 인것이다. 버려야할 것을 도리어 취하는 것이 福이나 되는 것인양 성경 몇 구절 암송하면서 예수 믿고 복받으라고 악다구니하는 것이 소금의 역할인줄 알면 큰 오산이다.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그러한 것을 말함이 아니다. 곧 소금인 너희가 소금의 맛을 내는 것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곳에는 어미로부터의 배꼽줄이 잘려져 나가는 사건이 일어나고 죽어야 하고 버려져야 할 것이 분명히 구분되어 성결케 되는 일이 일어나며, 그래서 땅이(th'" gh'") 저주를 면케되어 풀잎이 돋아나며 많은 열매가 맺히게 하는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때문에 to ala" th'" gh'"인 것이다. 이것이 소금의 소금 역할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간략하게 살펴본대로 신약과 구약의 소금 의미의 일치성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언약의 성취에서 치루어야 하는 필연의 과정이다. 거기에는 적당히 어물쩍 넘어갈 수 없는, 그래서 능히 내 제자가 되느냐 아니면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는 신세가 되느냐이다. 소금언약이 성취된 그의 신분은 너희는 소금이니 할 때의 소금이 된다. 때문에 소금이 되고 이제 소금이 되게 하는데 그 맛을 내는 의미가 있다. 그것이 제자가 되고 제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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