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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주로 믿음 (마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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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라는 명칭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이유는 이 명칭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되새겨 보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의 문제는 신앙을 인정과 고백으로 생각하는 경향에 빠지더라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신앙의 다가 아닌데 다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라는 명칭을 생각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명칭이 신앙의 다른 모습을 요구하는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주라는 말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쓰였습니다.
첫째는 '소유주'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사람인 종이나 어떤 물건의 주인을 가리킬 때 주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둘째는 존칭어로 쓰였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부를 때 경칭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에 대하여 쓰였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이란 말 대신에 주라는 말을 썼습니다. 예를 들면 '주의 천사, 주의 음성, 주의 말씀, 주의 이름'이라고 할 때에 주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는 말로서 하나님이란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셨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자기가 사용하는 분 즉 자기가 구약의 하나님이라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을 가리켜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생각을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들을 가진 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오신 주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뜻도 포함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
예수님은 소유주도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서 존경받을 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소유주요 경배의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셨기 때문에 소유주면서도 또 경배의 대상이 되십니다. 이것을 계시록에는 "새 노래"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라고 했습니다. 자기 피로 구속하셨으니 구속받은 자가 경배하는 것은 당연하며 또 주님의 새로운 소유가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자기 백성의 소유주가 되시고 또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속에 계시니 하나님이 예수님 속에서 자기 백성의 주인이 되시고 또 경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그 후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셨고 또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가 서로에게 소속되는 관계가 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선택하사 구속 사역을 통하여 자기 백성 만드시고 그들의 주가 되신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소속 관계는 너무나 철저하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자기 백성 삼는다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후에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런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다른 민족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민족을 택하여 너희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진짜 이스라엘이 되어라고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마다 그 범죄한 이스라엘에 자기를 맞추시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계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들을 보내셨고 또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자손을 통해서 의도하시던 진짜 이스라엘인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을 모신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의 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의 주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중요한 뜻이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라는 것이 소유주라 뜻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요 나아가서 예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철저히 자신을 매어 오셨던 것과 같이 교회가 하나님께 매여 있다는 뜻입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섬기는 종노릇을 해왔던 것 같이 교회도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종은 종으로서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종이 종으로서 살지 않으면 더 이상 종으로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 종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까 종은 자기 것이 없습니다. 고로 하나님의 종도 자기 것이 없습니다. 종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종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의 것이요 그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종은 이것을 인정하고 주인의 뜻을 따라 사는 자입니다. 이것을 "따르는 삶"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나를 따라 오너라" 또는 "나를 좇아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따르는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지적으로 인정하고 어떤 신조를 암송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신경(조), 웨스터민스터 신조 등을 인정하고 외우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는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명상하고 찬양을 하며 신비한 체험을 하며 주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신앙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언약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없다면 다 종교적인 형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따르는 자가 신앙하는 자요 신앙하는 자는 따르는 자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따르는 것이 없이 신앙한다고 한다면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따르는 것은 신앙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따르는 것 자체가 신앙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보고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 즉 사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따르는 것이 이렇도록 신앙에 중요한 측면이라면 그러면 대체로 따르는 것은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먼저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에서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안에 다니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이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 아버지와 함께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도 즉시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마4:18-22). 이것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 고향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이 떠난 것과 제자들이 부모와 일터를 버리고 떠났던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예수를 따르는 것이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제자들처럼 자기의 집과 처자와 부모와 일터를 버리고 복음 전도자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편협한 이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신 것은 마음의 태도를 가리키는 실물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이 자기 일터와 부모를 버리고 주를 따른 것은 새로운 이스라엘을 위한 출발입니다. 이것은 옛날의 이스라엘에서 나와 새로운 이스라엘을 향해 출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옛 이스라엘에서 나오라고 합니까 그 곳은 불신의 세상이요 정죄 아래 있는 세상이요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을 세상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따라 오라는 것은 이러한 세상에 매여 있지 말고 벗어나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또 다른 세상이요 천국이기 때문에 천국을 향해서 망할 세상에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계시록에서는 '내 백성아, 장망성에서 나오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라고 한다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와 다른 세상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라는 이 말은 자기의 소속을 바꾸라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둘 곳이 없구나. 돈과 명예와 영화가 다 죄 아래 있어서 멸망할 것이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매어서 살던 사람이 이런 것들의 지배를 거부하고 털어 버리고 '이제는 예수 믿고 살아야지'라고 결심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든지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예수 믿고 살아야지. 시집을 가든 못 가든 장가를 가든 못 가든 예수 믿고 살아야지. 그래야 천당이라도 가지'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바뀌어져서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을 불러 예수님을 따르게 하신 것은 이런 의미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으십니까 '가난하게 살고 홀아비로 사는 것이 싫지만 그럴 지라도 예수 안 믿고 살 수야 없지 않는가 이런 판국에 예수라도 안 믿는다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자가 되겠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에라 그만 두자 요 모양 요 꼴로 사는데 예수 믿어 보니 뭐하노'라고 하십니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앞의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소속이 이 세상의 어떤 것 즉 가정을 이루는 것, 직장을 얻는 것, 명예나 돈을 모으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예수 따르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따르는 것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되면 이런 마음을 가진 흔적을 가질 것입니다. 욕심 좀 덜 부리게 되고 세상 것에 덜 집착할 것입니다. 이것을 거창하게 십자가 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아도 좀 포기하는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고 대신에 주님을 향해 좀 욕심을 부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각자의 생활 영역에서 그래도 주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하면서도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아파하면서 주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소속을 달리하고 있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하겠습니다. 경우에는 죽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주님을 따르는 마음을 가진 흔적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따르는 것이 자기의 결심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불러 주신 사람은 주님이 이런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주님께서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부르셨으면 또한 이러한 사람이 되게도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 속에는 주님께서 하실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도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여호와를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15:16)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이 주님을 따르도록 하셨습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님으로 다시 오심을 통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성령님으로 오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을 따르도록 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따라서 살도록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성이 가득하기 때문에 비록 더딜지라도 주님은 이것을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집시다. 그리고 또 우리가 어떤 자로 살고 있는 지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세상에서 주님께 소속된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르심을 받았는데 소속을 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반성해 보도록 합시다. 만약 여러분 중에 이렇게 부른 것이 싫고 화가 나거든 교회를 떠나가도 좋습니다. 세상에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부른 것이 싫거든 떠나가도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어쨌든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혹은 아직도 주님을 믿기는 믿는데 확실히 따라가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확실하지 않고 주저하는 사람이 있거든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이 여러분을 왜 불렀는지를 되새기십시오. 그래서 주저하거나 막연한 자로서 머뭇거리지 말고 따라가는 자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요 여러분은 주님의 소유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십시오. 주님이 주로서 여러분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되지 않으면 다른 것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주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주가 되고자 하지만 다른 것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주의 종으로 사는 것에서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자유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사람으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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