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따름 (마4:18-22)
본문
우리 한국 사람들은 믿음을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믿어서 자기가 잘 되고 또 자기가 은혜를 누리고 자기가 천당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을 자기 개인을 위하여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지배적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종교란 보편적인 것이요 따라서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통해서 자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 자기 추구는 바로 육에 속한 추구입니다. 이러다 보니 나타나는 대표적인 현상을 두 가지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생각되는 것이 기복주의적인 경향입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복인데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해서 기를 쓰는 경향입니다. 이러다가 보니 이 세상 것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불의한 일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너무나 많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터지면 으례 기독교인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기복적인 경향은 치유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 치유의 독특한 의미가 있는 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간 중심으로 성경 치유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병을 치유한다고 야단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기복적인 생각이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종교를 통한 자기 추구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비주의란 종교를 자기화하고 내면화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듣고 깨닫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경험하고 깨닫는 어떤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체험해 보니 어떻더라' 혹은 '기도해 보니 하나님이 어떤 것을 가르쳐 주시더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에 빠지고 방언을 추구하고 신비한 경험을 추구합니다. 최근에 고신의 경향도 이런 것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회에도 손을 들고 고함을 치고 있고 찬양하는 집회에도 손을 들고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 하나의 풍토가 되어 있습니다. 손을 드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하겠지요. 참으로 들고 싶어서 드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신앙을 자기화하는 경향을 보편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마치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또 이런 것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통하여 마음이 시원하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좀 부더러워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마음속에서 죄와 죄 아닌 것을 알고 있다면 주님 앞에서 죄는 회개하고 고치고 죄 아닌 것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것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인데 이런 객관적인 것을 따르려고 하지는 않고 자기 감정의 만족을 통해서 부더러워지고 시원해지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넓게 생각하면 결국은 신앙을 자기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더욱 이런 행위를 추구하게 됩니다. 어쨌든 자기화하는 현상은 성경의 신앙 현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신앙은 자기 중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주님을 주로 믿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자기와의 단절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제자들은 자기의 하던 직업을 버렸고 부모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의 고향 친척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실제로 오늘 우리에게 육신으로 난 자기와 단절되고 이 세상과 단절되는 정신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을 알고 죽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의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을 아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것을 알면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그 출발은 주님을 향해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향해서 출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신자의 삶이요 신앙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자의 삶이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의 삶을 새 삶이라고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신자를 새 사람 또는 중생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중생한 사람이 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중생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주님을 향해서 방향이 정해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열려져 있는 사람 즉 언제든지 주님이 가신대로 따라 가려는 마음으로 변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옛날의 자기는 죽은 줄 알기 때문에 관심이 자기에게 쏠려 있지 않고 주님을 향해 쏠려 있는 것을 말합니다. 관심이 주님을 향해 쏠려 있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다른 세계를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이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옛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새로운 다른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해 있고 밖의 세계를 향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모습을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율법 선생이 와서 계명 중에서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강령 즉 핵심 요지라고 하셨습니다(마22:34-37). 중생한 사람의 관심인 밖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셈입니다. 곧 자기 아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과 주 안에서 형제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과 형제사랑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사람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란 그의 자녀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그의 자녀 된 사람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에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 대한 사랑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기가 오래 사귀어 왔고 가까이 하여 친하게 지내고 정을 주고 받은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고 형제라고 생각하면서 사랑하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관심과 사랑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사랑이라고 해야 관심을 가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자기가 가까이 하고 친하게 지낸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죽어버린 육신을 따라 가는 것이지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의 백성 된 것은 주님 때문에 되었지 우리가 가까이 하고 친하게 한 것 때문에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면 주님이 형제로 만들어 주심 때문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가까이 하고 못한 것을 가지고 사랑하고 또는 하지 않을 대상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육정을 따라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믿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좋아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혹은 여러분이 친하고 가까이 한 것 때문에 사랑스러워 보입니까 주님의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사랑스러워 보여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 자기와 가깝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앙이란 자기 밖을 향하여 생각하고 자기 밖을 향하여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신앙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향해서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선택하신 백성을 위해서 자신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달려가시는 주님의 모습은 무섭도록 단호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0:32절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앞서 가시는데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놀라고 뒤따르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놀란다'는 말은 보통 놀라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다, 경악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단호하고도 결연한 모습 때문에 따르던 사람들이 경악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얼마나 아버지 뜻을 따라서 자기를 드리기에 단호하고 결연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도 주님과 같은 류의 믿음을 가지는 그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의 관심이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또한 그의 백성된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불러주신 사람들 모두에 대하여 관심이 가고 사랑스런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심은 곧 자기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동지를 만들고 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 때문에 복음은 전파되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셨고 또 이러한 명령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러한 명령을 하셔서 제자들을 준비 시켜 놓고는 부활 후에 성령님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져 온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향하는 주님의 마음이 성령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전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버지를 향한 주님의 신앙이 인간 속에서 역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이와 같이 주님이 주신 신앙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의 백성 된 사람을 향하는 신앙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아예 자기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고 죽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와서 있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임하여 있는 형식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와서 계신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의 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때문에 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밖을 향한 관심을 가진 신앙을 가진 것이 곧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와 계시는 표적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해 있다는 뜻이요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신앙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요 또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밖을 향하는 신앙이 있거든 자기에게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서로서로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고 이미 모두가 한 하나님으로 한 몸이 되어 있는 줄 확신하십시오. 따라서 교회에는 먼 사람도 없고 가까운 사람도 없습니다. 특별하게 친한 사람도 없고 또 특별하게 친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똑같이 소중한 자들이요 사랑스런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나되게 해 놓으신 것을 사람이 자기의 육정을 따라서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보고 싶지만 이런 저런 거리감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있다는 것과 이러한 감정에 매이고 지배를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신자는 이러한 감정이 있을 수는 있어도 이러한 감정에 지배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감정을 무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육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무시하고 주님이 이미 만들어 놓으신 한 몸을 고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한 몸 된 것을 따라서 행동해야 합니다. 서먹해도 형님, 동생, 선생님 또는 집사님이라고 불러보고 이야기도 해보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서로서로가 알 것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고유한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 느린 사람, 사교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 고유한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들이 어떤 때는 서로에게 오해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씨름할 것은 못됩니다. 이런 것들도 이미 예수 안에서 죽어버린 육신의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면들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나가면 될 것이지 씨름할 대상이 못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육적인 모습들이고 이 세상 사람의 모습들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죽었다고 생각할 대상이지요. 반면에 신자가 고수할 것은 예수의 모습을 고수하고 예수 있는 사람을 고수할 것입니다. 항상 이런 사람만을 인정하고 고수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을 따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인정하고 고수하면서 살도록 하십시오. 제가 고수한다는 말을 쓰는 것은 이것을 지키고 안될 때라도 이런 모습만을 인정하고 주장하라는 뜻에서입니다.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진 자가 따라가야 할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육신 따라 행동하지 말고 신앙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자기를 향해서 골몰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향해서 골몰하십시오. 신앙은 자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의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을 자기를 위해서 끌어 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던져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버린 육에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살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은 옛날의 자기 즉 육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육이 죽고 거기에 하나님이 오셔서 사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신자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 생각되는 것이 기복주의적인 경향입니다. 예수 믿는 것 자체가 복인데 또 다른 복을 받기 위해서 기를 쓰는 경향입니다. 이러다가 보니 이 세상 것에 대하여 욕심을 부리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불의한 일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너무나 많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터지면 으례 기독교인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기복적인 경향은 치유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 치유의 독특한 의미가 있는 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인간 중심으로 성경 치유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병을 치유한다고 야단입니다. 이것도 일종의 기복적인 생각이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종교를 통한 자기 추구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신비주의란 종교를 자기화하고 내면화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듣고 깨닫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이 경험하고 깨닫는 어떤 진리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체험해 보니 어떻더라' 혹은 '기도해 보니 하나님이 어떤 것을 가르쳐 주시더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자기만의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에 빠지고 방언을 추구하고 신비한 경험을 추구합니다. 최근에 고신의 경향도 이런 것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집회에도 손을 들고 고함을 치고 있고 찬양하는 집회에도 손을 들고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 하나의 풍토가 되어 있습니다. 손을 드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하겠지요. 참으로 들고 싶어서 드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함으로써 신앙을 자기화하는 경향을 보편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마치 신앙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고 또 이런 것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통하여 마음이 시원하게 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좀 부더러워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신앙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 마음속에서 죄와 죄 아닌 것을 알고 있다면 주님 앞에서 죄는 회개하고 고치고 죄 아닌 것을 따르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것은 누구나 객관적으로 알고 있는 것인데 이런 객관적인 것을 따르려고 하지는 않고 자기 감정의 만족을 통해서 부더러워지고 시원해지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것도 넓게 생각하면 결국은 신앙을 자기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은 더욱 이런 행위를 추구하게 됩니다. 어쨌든 자기화하는 현상은 성경의 신앙 현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신앙은 자기 중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주님을 주로 믿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주님을 따르는 것에는 자기와의 단절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보았던 바와 같이 제자들은 자기의 하던 직업을 버렸고 부모를 떠났습니다. 아브라함도 자기의 고향 친척을 떠났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실제로 오늘 우리에게 육신으로 난 자기와 단절되고 이 세상과 단절되는 정신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 부정을 알고 죽음을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육의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을 아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것을 알면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새로운 출발이 있습니다. 그 출발은 주님을 향해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향해서 출발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신자의 삶이요 신앙의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자의 삶이 이러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의 삶을 새 삶이라고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신자를 새 사람 또는 중생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중생한 사람이 이러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중생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주님을 향해서 방향이 정해진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열려져 있는 사람 즉 언제든지 주님이 가신대로 따라 가려는 마음으로 변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옛날의 자기는 죽은 줄 알기 때문에 관심이 자기에게 쏠려 있지 않고 주님을 향해 쏠려 있는 것을 말합니다. 관심이 주님을 향해 쏠려 있다는 것은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다른 세계를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이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옛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새로운 다른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해 있고 밖의 세계를 향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모습을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율법 선생이 와서 계명 중에서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강령 즉 핵심 요지라고 하셨습니다(마22:34-37). 중생한 사람의 관심인 밖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셈입니다. 곧 자기 아닌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신자는 하나님과 주 안에서 형제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과 형제사랑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사람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이란 그의 자녀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그의 자녀 된 사람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에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에 대한 사랑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기가 오래 사귀어 왔고 가까이 하여 친하게 지내고 정을 주고 받은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고 형제라고 생각하면서 사랑하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관심과 사랑을 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사랑이라고 해야 관심을 가지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도 자기가 가까이 하고 친하게 지낸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죽어버린 육신을 따라 가는 것이지 주님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의 백성 된 것은 주님 때문에 되었지 우리가 가까이 하고 친하게 한 것 때문에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면 주님이 형제로 만들어 주심 때문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가까이 하고 못한 것을 가지고 사랑하고 또는 하지 않을 대상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따라가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육정을 따라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믿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좋아 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습니까 혹은 여러분이 친하고 가까이 한 것 때문에 사랑스러워 보입니까 주님의 백성이라는 것 때문에 사랑스러워 보여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 자기와 가깝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앙이란 자기 밖을 향하여 생각하고 자기 밖을 향하여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신앙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향해서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선택하신 백성을 위해서 자신을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달려가시는 주님의 모습은 무섭도록 단호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 10:32절에 보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앞서 가시는데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이 놀라고 뒤따르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놀란다'는 말은 보통 놀라는 것이 아니라 '깜짝 놀라다, 경악하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단호하고도 결연한 모습 때문에 따르던 사람들이 경악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얼마나 아버지 뜻을 따라서 자기를 드리기에 단호하고 결연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도 주님과 같은 류의 믿음을 가지는 그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의 관심이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또한 그의 백성된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불러주신 사람들 모두에 대하여 관심이 가고 사랑스런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심은 곧 자기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따라서 동지를 만들고 사회를 이루고 나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 때문에 복음은 전파되어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셨고 또 이러한 명령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러한 명령을 하셔서 제자들을 준비 시켜 놓고는 부활 후에 성령님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마음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져 온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향하는 주님의 마음이 성령님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에게 전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아버지를 향한 주님의 신앙이 인간 속에서 역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이와 같이 주님이 주신 신앙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로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의 백성 된 사람을 향하는 신앙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아예 자기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고 죽어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와서 있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임하여 있는 형식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와서 계신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의 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때문에 신앙을 가진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밖을 향한 관심을 가진 신앙을 가진 것이 곧 하나님이 그 사람과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인간 속에 와 계시는 표적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임재해 있다는 뜻이요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신앙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요 또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시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밖을 향하는 신앙이 있거든 자기에게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서로서로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고 이미 모두가 한 하나님으로 한 몸이 되어 있는 줄 확신하십시오. 따라서 교회에는 먼 사람도 없고 가까운 사람도 없습니다. 특별하게 친한 사람도 없고 또 특별하게 친하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똑같이 소중한 자들이요 사랑스런 자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하나되게 해 놓으신 것을 사람이 자기의 육정을 따라서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까이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보고 싶지만 이런 저런 거리감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이 있다는 것과 이러한 감정에 매이고 지배를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신자는 이러한 감정이 있을 수는 있어도 이러한 감정에 지배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감정을 무시해야 합니다. 이러한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육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무시하고 주님이 이미 만들어 놓으신 한 몸을 고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한 몸 된 것을 따라서 행동해야 합니다. 서먹해도 형님, 동생, 선생님 또는 집사님이라고 불러보고 이야기도 해보는 것이 좋겠지요.
하지만 서로서로가 알 것은 인간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고유한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 느린 사람, 사교적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등 고유한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면들이 어떤 때는 서로에게 오해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씨름할 것은 못됩니다. 이런 것들도 이미 예수 안에서 죽어버린 육신의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면들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지나가면 될 것이지 씨름할 대상이 못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육적인 모습들이고 이 세상 사람의 모습들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죽었다고 생각할 대상이지요. 반면에 신자가 고수할 것은 예수의 모습을 고수하고 예수 있는 사람을 고수할 것입니다. 항상 이런 사람만을 인정하고 고수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을 따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인정하고 고수하면서 살도록 하십시오. 제가 고수한다는 말을 쓰는 것은 이것을 지키고 안될 때라도 이런 모습만을 인정하고 주장하라는 뜻에서입니다. 이런 것이 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진 자가 따라가야 할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육신 따라 행동하지 말고 신앙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자기를 향해서 골몰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향해서 골몰하십시오. 신앙은 자기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밖의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을 자기를 위해서 끌어 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던져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버린 육에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살게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믿음은 옛날의 자기 즉 육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육이 죽고 거기에 하나님이 오셔서 사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신자는 하나님과 그 백성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