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대한 세 가지 질문 (마28:1-10)
본문
세계 만민이 가장 기뻐하며 축하해야 할 날이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도 부활이 없었다면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나 버렸다면 십자가를 소중히 여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속 사업이 완성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인 동시에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승리하는 것이 기독교이며 죽은 것 같지마는 결국에는 새로운 생명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과학이 극도로 발달되어 우리 인간의 기술로 그야말로 못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돈으로, 권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숙명적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는 “인생아! 너는 죽음의 길로 달리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고 죄악이 많은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위에 오셔서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 고발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사흘 되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세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무덤 입구에 막혀 있던 돌문은 열려 있었고 무덤 속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던 여인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깜짝 놀라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서 마태복음 28장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둘째,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어떤 형체를 가졌는가
셋째,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이렇게 부활에 대한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하면서 부활절에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2천년 전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늘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초대 교회 당시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12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한 몇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1. 가사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잠깐 잃고 죽기 직전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그 당시 법으로는 죽은 것을 확인하지 않고 매장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2. 시체 도난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다시 살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을 조작했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병정들이 창을 들고 밤낮으로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환상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여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환상을 잠깐 동안 보았다면 모르겠는데 40일 동안이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 조작설이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사실도 아닌 부활 사건을 조작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불신하는 사탄 마귀의 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서 제자들이 시체를 도저히 훔쳐 갈수 없었습니다. 무덤은 돌로 막혀 있었고 더군다나 황제의 봉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봉인을 찢게 되면 사형을 당합니다. 또한 무장한 군인들이 겹겹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보여주시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500여 성도들에게도 보여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보여주셨고, 그렇게 의심 많던 도마에게 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회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만나서 자랑하기를 “우리 회교는 아라비아 메카에 가면 우리 교주 마호메트의 분묘가 있으며 지금도 분묘 안의 관 속에는 시체가 있어서 마호메트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당신에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밖에 볼 수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기독교인은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무덤을 자랑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마호메트가 창시한 회교는 죽음으로 끝이 난 죽은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부활이 있는 산 종교,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땅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지난 2천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세계 각곳에 교회를 세우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헌신 봉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선교 활동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너무도 분명합니다. 거짓이 없는 성경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살아나신 후에 열한 번씩이나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이 사실만으로도 어느 누가 이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도 “그는 거룩한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과연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고대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확고한 부활 신앙을 체험하여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떤 형체를 가졌는가 다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35에 사도 바울은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이 땅에서의 생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땅에 뿌려진 씨는 썩어서 없어지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성도의 죽음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부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 22:23절 이하에 보면 한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한 여인이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유대 나라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을 해서 자식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생과 결혼을 했지만 이번에도 자식을 얻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 집안에 후손을 이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동생과 다시금 결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7형제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자식도 낳지 못하고 결국 그 여인도 죽었습니다. 이 다음 부활 때에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사두개인의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 만약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시집가고 장가간다면 그곳에서도 아들 낳고 딸 낳고 또 자식 키우느라 얼마나 고통이 심하겠습니까 성도의 부활의 몸은 그 형체가 ‘신령한 몸’으로 된 것입니다. 고전 15:44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오늘 우리들의 육체와 똑같은 몸입니다. 때리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열심히 일하면 피곤한 몸이지만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몸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육신의 제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령한 몸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령한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나 음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간이나 시간의 지배도 받지 않고 질병이나 침해도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요, 영생하는 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가 있는 몸이었지만 신령한 몸으로서 육신의 몸이 가지는 제한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과 같이 동행하다가 영안이 뜨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을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꼭 닫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방안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몸은 시간과 공간, 어떤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 육신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있다면 사무실에 올라가면 없습니다. 우리 집에 가서 보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육신의 몸이 가지는 공간적인 제한을 초월하신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몸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육신의 몸은 시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모두가 수명이 있습니다. 60년, 70년 살다보면 육신의 장막집은 점점 주름살이 늘어납니다. 자꾸만 육신의 장막집은 낡아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서 시간의 제한을 초월했습니다. 영생하는 몸입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죽음을 초월한 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6:9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사망이 신령한 몸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의 형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저는 장례식 때마다 죽음이라는 신령한 몸으로 옷을 갈아 입는 하나의 관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죽음이라는 과정,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반드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죽음이란 관문을 통과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의 몸은 결국 무덤에 묻힐 것이고 부활 때에는 옛 몸의 실체는 완전히 변형되고 새로운 영광을 입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적합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으나 부활 후에는 하늘나라에 적합한 영원히 살수 있는 신령한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신령한 몸을 갈아입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때 신령한 몸으로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날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신앙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이 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과거 2천년 전 유대 땅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하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승리는 통쾌하고 신나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중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심문을 받고, 잔인한 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시면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으면서 운명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완전한 패배로 보였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이긴 것 같고 거짓이 진리를 이긴 것 같고 공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철통같이 큰 바위로 막아 놓은 무덤 문을 박차 버리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승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했다고 해도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고 소용도 없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위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요, 미움과 저주와 분노에 대한 사랑의 승리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 안에 성취될 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드러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 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요즘 환경문제로 심각합니다. 보통 한 줌의 흙 속에 미생물이 수천만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미생물이 있어야 땅이 기름집니다. 물 한 컵에는 수 천만 개의 미생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물로써 식수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연이 오염되고 썩고 있는 것을 방지하고, 생명 있는 물, 생명 있는 땅, 생명 있는 공기를 가꾸어 가는 것도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라는 부활 신앙을 가진 자의 생활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모든 생활 속에서 부활의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의미는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고전 15:20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예고하는 첫번째 열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의 삶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인류의 최대의 원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괴물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으나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은 비록 죽어도 영혼은 주님과 함께 있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마치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강력한 자서기에 쇠붙이가 딸려가듯이 주님 오실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래밭에 나뭇조각, 유리 조각, 돌맹이 같은 온갖 것들이 섞여 있어도 강한 자석을 갖다 대면 오직 쇠붙이만 끌려 올라가는 것 같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우리는 성도들만 들림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들림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자석을 갖다 대기 전에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어떤 것이 가짜인지 분별이 안되는 것 같이, 세상에 섞여 사는 동안에는 영생을 얻을 사람들과 멸망을 받을 사람들의 구분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재림 하실 그때에는 믿는 성도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 수술을 받아야 할 중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의사 선생님의 손을 붙들고 “나는 돈과 명예와 지위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나의 건강만 회복시켜 주신다면 얼마든지 돈을 드리겠습니다.” 라며 잘 고쳐 달라고 거듭거듭 간곡히 애원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의사 선생님은 그 환자에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지위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당신이 건강이 없으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건강은 우리 인생의 삶에서 그 모든 것들의 기본이 됩니다. 재물의 부유함도 권력도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죽는다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고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 모든 것의 존재의 의미를 말소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하고 죽음자체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요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50년 안에 자기가 기독교를 다 파괴시키겠다고 하고 100년 안에는 성경이 없어지고 만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죽음이 임박할 때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성의 시대란 책을 쓴 무신론자 토마스 페인은 죽어가면서 “내가 쓴 이성의 시대란 책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모두 거두어 들일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오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나 혼자 있으면 지옥같이 무섭습니다.”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신론자요 죽음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들도 이렇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죽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1815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해상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국민은 웰링턴 장군으로부터 보내 오는 전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신호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신호는 “웰링턴이 패했다”는 비보였습니다. 그때 영국 국민들은 이 비보를 듣고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금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그신호의 내용은 “웰링턴 장군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국민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셨던 그 시간은 “예수님이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전 지역에 퍼졌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주일 새벽,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과 여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새 역사의 아침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가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승리의 축제의 날입니다. 인류의 최대 승리가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죽음을 패배시킴으로 최대의 승리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증거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숙명적입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는 “인생아! 너는 죽음의 길로 달리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버리고 죄악이 많은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땅위에 오셔서 지도자들의 미움을 받고 빌라도 법정에 고발이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 위에서 처형을 당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사흘 되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세 여인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무덤 입구에 막혀 있던 돌문은 열려 있었고 무덤 속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있던 여인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깜짝 놀라 두려워 떨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서 마태복음 28장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많은 제자들을 만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러한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말할 때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둘째,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어떤 형체를 가졌는가
셋째, 예수님의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이렇게 부활에 대한 세 가지 문제를 생각하면서 부활절에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2천년 전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늘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초대 교회 당시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12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한 몇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1. 가사설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신 것이 아니라 의식을 잠깐 잃고 죽기 직전에 장사되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림도 없는 말입니다. 그 당시 법으로는 죽은 것을 확인하지 않고 매장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2. 시체 도난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전에 다시 살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가 부활을 조작했다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병정들이 창을 들고 밤낮으로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환상설이 있습니다.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모하여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부활이 환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환상을 잠깐 동안 보았다면 모르겠는데 40일 동안이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4. 조작설이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사실도 아닌 부활 사건을 조작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불신하는 사탄 마귀의 말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서 제자들이 시체를 도저히 훔쳐 갈수 없었습니다. 무덤은 돌로 막혀 있었고 더군다나 황제의 봉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누구라도 봉인을 찢게 되면 사형을 당합니다. 또한 무장한 군인들이 겹겹으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완전히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그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베드로에게도 보여주시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500여 성도들에게도 보여주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도 보여주셨고, 그렇게 의심 많던 도마에게 도 보여주셨습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성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날 회교를 믿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만나서 자랑하기를 “우리 회교는 아라비아 메카에 가면 우리 교주 마호메트의 분묘가 있으며 지금도 분묘 안의 관 속에는 시체가 있어서 마호메트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당신에 기독교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더라도 빈 무덤밖에 볼 수가 없다”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에 기독교인은 “그렇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무덤을 자랑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께서 부활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마호메트가 창시한 회교는 죽음으로 끝이 난 죽은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부활이 있는 산 종교,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 땅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지난 2천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세계 각곳에 교회를 세우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헌신 봉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선교 활동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주님의 부활의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너무도 분명합니다. 거짓이 없는 성경 말씀을 보면 분명히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살아나신 후에 열한 번씩이나 부활의 몸을 보여주신 이 사실만으로도 어느 누가 이 부활의 역사적 사건을 부정할 수 있습니까 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도 “그는 거룩한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과연 사흘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고대사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확고한 부활 신앙을 체험하여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을 확실히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떤 형체를 가졌는가 다시 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어떻게 생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35에 사도 바울은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고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이 땅에서의 생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는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땅에 뿌려진 씨는 썩어서 없어지지만 거기에서 새로운 식물이 자라는 것처럼, 성도의 죽음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부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 22:23절 이하에 보면 한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한 여인이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유대 나라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을 해서 자식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동생과 결혼을 했지만 이번에도 자식을 얻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 집안에 후손을 이어갈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 동생과 다시금 결혼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7형제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자식도 낳지 못하고 결국 그 여인도 죽었습니다. 이 다음 부활 때에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사두개인의 질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으니라” 만약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시집가고 장가간다면 그곳에서도 아들 낳고 딸 낳고 또 자식 키우느라 얼마나 고통이 심하겠습니까 성도의 부활의 몸은 그 형체가 ‘신령한 몸’으로 된 것입니다. 고전 15:44에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은 오늘 우리들의 육체와 똑같은 몸입니다. 때리면 아프고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열심히 일하면 피곤한 몸이지만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몸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육신의 제한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신령한 몸에 대해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신령한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으나 음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간이나 시간의 지배도 받지 않고 질병이나 침해도 받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이요, 영생하는 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우리와 똑같이 살과 뼈가 있는 몸이었지만 신령한 몸으로서 육신의 몸이 가지는 제한성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과 같이 동행하다가 영안이 뜨이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을 때에 갑자기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19을 보면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꼭 닫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때 예수님이 방안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몸은 시간과 공간, 어떤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 육신의 몸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여기 이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있다면 사무실에 올라가면 없습니다. 우리 집에 가서 보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육신의 몸이 가지는 공간적인 제한을 초월하신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령한 몸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육신의 몸은 시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모두가 수명이 있습니다. 60년, 70년 살다보면 육신의 장막집은 점점 주름살이 늘어납니다. 자꾸만 육신의 장막집은 낡아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서 시간의 제한을 초월했습니다. 영생하는 몸입니다. 다시는 죽지 않는 죽음을 초월한 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6:9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사망이 신령한 몸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의 형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었습니다. 저는 장례식 때마다 죽음이라는 신령한 몸으로 옷을 갈아 입는 하나의 관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죽음이라는 과정,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반드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죽음이란 관문을 통과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의 몸은 결국 무덤에 묻힐 것이고 부활 때에는 옛 몸의 실체는 완전히 변형되고 새로운 영광을 입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적합한 육신의 몸을 가지고 있으나 부활 후에는 하늘나라에 적합한 영원히 살수 있는 신령한 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신령한 몸을 갈아입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때 신령한 몸으로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날마다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바른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신앙의 승리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이 오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 과거 2천년 전 유대 땅에 있었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느냐하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승리는 통쾌하고 신나는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중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온갖 수모를 당하고, 심문을 받고, 잔인한 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시면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짖으면서 운명하실 때에는 예수님의 완전한 패배로 보였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이긴 것 같고 거짓이 진리를 이긴 것 같고 공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철통같이 큰 바위로 막아 놓은 무덤 문을 박차 버리고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승리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예수님의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했다고 해도 부활하시지 못했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없고 소용도 없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패배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위대한 승리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에 대한 진리의 승리요,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요, 미움과 저주와 분노에 대한 사랑의 승리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 신앙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알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승리가 내 개인과 우리 가정과 우리 사회 안에 성취될 때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있고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진리가 뿌리를 내리고, 정의와 사랑이 실천되고, 생명의 존엄을 드러내고 살 수 있을 때 부활이 안겨 주는 승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봅시다. 요즘 환경문제로 심각합니다. 보통 한 줌의 흙 속에 미생물이 수천만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도 생명이 있습니다. 미생물이 있어야 땅이 기름집니다. 물 한 컵에는 수 천만 개의 미생물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물로써 식수에 적합하다고 합니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연이 오염되고 썩고 있는 것을 방지하고, 생명 있는 물, 생명 있는 땅, 생명 있는 공기를 가꾸어 가는 것도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라는 부활 신앙을 가진 자의 생활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모든 생활 속에서 부활의 승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또 하나의 의미는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고전 15:20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모든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예고하는 첫번째 열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의 삶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인류의 최대의 원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라는 괴물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으나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 죽음이 두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은 비록 죽어도 영혼은 주님과 함께 있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 남아 있던 사람들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마치 번데기가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이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강력한 자서기에 쇠붙이가 딸려가듯이 주님 오실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모래밭에 나뭇조각, 유리 조각, 돌맹이 같은 온갖 것들이 섞여 있어도 강한 자석을 갖다 대면 오직 쇠붙이만 끌려 올라가는 것 같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우리는 성도들만 들림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들림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자석을 갖다 대기 전에는 어떤 것이 진짜인지 어떤 것이 가짜인지 분별이 안되는 것 같이, 세상에 섞여 사는 동안에는 영생을 얻을 사람들과 멸망을 받을 사람들의 구분이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재림 하실 그때에는 믿는 성도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 수술을 받아야 할 중한 환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의사 선생님의 손을 붙들고 “나는 돈과 명예와 지위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보시다시피 건강이 좋지 않습니다. 나의 건강만 회복시켜 주신다면 얼마든지 돈을 드리겠습니다.” 라며 잘 고쳐 달라고 거듭거듭 간곡히 애원을 했습니다. 바로 그때 의사 선생님은 그 환자에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지위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당신이 건강이 없으므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건강은 우리 인생의 삶에서 그 모든 것들의 기본이 됩니다. 재물의 부유함도 권력도 자신이 불치의 병으로 죽는다면 한낱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고 모든 것의 가치를 부정해 버리고 모든 것의 존재의 의미를 말소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하고 죽음자체를 멀리하려고 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요 무신론자인 볼테르는 50년 안에 자기가 기독교를 다 파괴시키겠다고 하고 100년 안에는 성경이 없어지고 만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죽음이 임박할 때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성의 시대란 책을 쓴 무신론자 토마스 페인은 죽어가면서 “내가 쓴 이성의 시대란 책을 출판하지 않았더라면, 그 책을 모두 거두어 들일 수 있다면 내 모든 것을 다 바치겠습니다. 오 주님!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를 구원하옵소서. 나 혼자 있으면 지옥같이 무섭습니다.”라고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신론자요 죽음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들도 이렇게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죽음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1815년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해상에서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국민은 웰링턴 장군으로부터 보내 오는 전쟁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신호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 신호는 “웰링턴이 패했다”는 비보였습니다. 그때 영국 국민들은 이 비보를 듣고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다시금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그신호의 내용은 “웰링턴 장군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영국 국민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셨던 그 시간은 “예수님이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갈릴리 전 지역에 퍼졌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주일 새벽,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과 여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새 역사의 아침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은 “예수가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승리의 축제의 날입니다. 인류의 최대 승리가 예수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죽음을 패배시킴으로 최대의 승리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증거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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