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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과 그의 사역 (마3:1-6)

본문

마태복음은 왕국의 복음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울리는 주음(keynote) 이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왕의 요람 곁에 서서 박사들이 왕에게 드린 경배와 외경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위 찬탈자의 증오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는 왕의 사자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 단락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전반부는 1-6절까지로, 침례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일반적 개요이며. 후반부는 7-끝절까지로, 그의 설교에 대한 보다 상세한 기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의 사자로서의 침례 요한의 인물과 그의 사역에 대한 개략적인 줄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침례 요한과 그의 메시지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왔습니다. 예언의 목소리는 4백년 간이나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예언성이 들려오면서, 그 소리는 옛날 중단되던 때와 똑같은 어조를 발하였습니다. 그 예언의 마지막 말은 주의 날에 대한 예언보다 엘리야가 다시 오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3:5). 누가는 요한에 대해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눅1:17)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어느모로 보나 엘리야였습니다. 옷차림, 고립된 생활, 두려움 없는 태도, 엄하고도 무서운 강인성. 방자하게 날뛰던 왕들에 대한 불같은 정열로 책망한 점 등 모든 것이 흡사하였습니다. 요한과 헤롯 및 헤로디아는 엘리야와 아합 및 이세벨의 복사판입니다. 마태는 특이하게도 인용하지 않고 있지만, 말라기의 마지막 말은 침례 요한의 성격과 사역에 대한 최상의 설명입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시에 오는 것입니다. 때가 왔을 때, 엘리야가 대담한 심령으로 갈멜산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참 하나님을 나타내어 많은 사람을 주게로 돌아오게 한 것처럼(왕상18:20-40), 요한도 대담한 심령으로 요단강에서 악한 새대에 심판을 선언하고 회개의 침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나타내어 많은 사람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정의에 불타는 심령으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으며, 아합과 이세벨의 불의를 책망하다가 박해를 받은 것처럼 요한도 정의에 불타는 심령으로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정을 책망하다가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요한은 사실 엘리야와 같은 심령과 과 능력의 사람입니다. “그 때에” 엘리야가 갑작스럽게 역사의 현장에 출현하고 있듯이 침례 요한 역시 돌연히 선교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마태는 요한과 예수님의 친족 관계, 요한의 탄생이나 광야 은둔 생활에 대해서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 라는 모호한 표현에 얼마의 긴 세월이 포함되어 있다는 힌트도 주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렇게 갑자기 광야에 나타난 침례 요한의 출생 및 그의 고독한 생활에 대하여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 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눅1:80). 혹자는 요한이 부모의 슬하를 떠나 광야를 찾아간 것이 어린 시절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의 어린 시절과 광야 생활 사이에 상당한 기간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제사장의 혈통이기 때문에 그 직무를 위한 준비를 하며 청소년 시절을 보내었을 것이며, 그가 광야로 들어간 때는 아마도 성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이제 관습에 따라 제사장에 임명될 것이나 더 큰 소명을 위한 복종으로 제사장직을 포기하고, 모세가 미디안 광야를, 엘리야가 호렙산을 찾은 것같이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광야”에 해당하는 에레모스(2048)는 본래 ‘버림받음, 포기’를 뜻하며, 따라서 ‘적막하거나 사람이 별로 살지 않은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고, 그 다음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황무지, 광야’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유대 광야”는 사사기 1:16에서 “아랏 남방”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여리고에서 남쪽으로, 곧 사해의 서북 쪽에 있는 울퉁불퉁한 여러 지역들-십 황무지(삼상23:14,15), 마온황무지(삼상23:24), 엔게디 황무지(삼상24:1), 여루엘 들(대하20:16), 드고아 들(대하20:20)를 통틀어 지칭합니다. 이 모든 지역은 유다 영토에 속합니다. 유전에 의하면, 이 때에 요한은 여리고 근처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는 요단강 건너 편 베다니에서(요1:28), 다음에는 살렘 가까이에 있는 에논에서(요3:23) 사역하였습니다(A. L. Williams). 이 요한은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 이 광야 생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요한은 백성의 죄악과 고통, 성전 안에 까지 침투한 온갖 부정과 부패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사명자로 더욱 인식하고, 그 사망자가 되려는 열의로 불탔으며, 곁국 그 준비로 광야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려고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외치기 전에 오랫 동안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완벽한 채비를 가추고 활동 무대로 뛰어 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려는 자나 선언하는 자들은 요한과 같이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같이 교통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선지자의 옷, 거친 가죽 옷을 걸처 입은 옛 선지자의 계열에 속하였음을 보였습니다. 그의 생활 양식은 그의 의복과 어울리는 생활이었습니다. 요한이 거친 의복을 걸치고 조악한 음식을 먹은 것은 어떤 감명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엘리 야와 같은 옷을 입었지만 한낱 옛 선지자들의 모방자는 아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사역자는 그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한다면 감각적 욕망과 안락을 구하는 일에서 철저히 해방되어야 합니다.
요한은 이러한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A.Maclaren) 그는 안정되고, 여건이 좋은 생활, 유망한 장래가 보장된 제사장 가정을 떠나서 광야의 가난하고 외롭고 고달픈 금욕 생활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 세상과 친하게 되거나 깊이 관계를 맺게 되면 그의 영안을 어둡게 하여 세상의 악덕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의 정의감을 소멸하여 그의 충고의 외침을 침묵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친 의복, 삭도를 대지 않은 긴 머리, 강인한 모습, 햇빛에 그슬린 얼굴, 금욕생활은 모두 그의 성격을 잘 나태며, 매우 감명적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선(善)을 위해 외치는 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자신 확신에 찬 설득력이 있으면서도 결코 세속적이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속적인 이득과 안위를 조금도 욕심내지 않은 사람들은 천국의 멧신저(사자)가 되었습니다. 헌신된 생활에서 나타나는 능력과 같은 능력은 세상에 없습니다(M. Dods). 그의 사역은 한 단어로 묘사었습니다.-“전파하여”. 현대인들은 이 낱말을 들을 때 지루하고도 따분한 장광설을 연상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러한 관념은 없어져야 마땅합니다. ‘전파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륏소(2784)는 ‘사자이다, 사자로서 직무를 수행하다, 사자의 방식을 따라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언제나 격식, 엄숙성을 시사하며, 청종해야만 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알리다, 선포하다. 공포하다’를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이러한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이 낱말은 무언가를 선포하는 것, 사자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가 앞을 달리면서 ‘왕의 행차시다! 왕의 행차시다!’ 를 외쳐대는 자의 고양된 목소리와 짤막하고 급박한 메시지가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두 문장, 두 개의 나팔 소리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회개의 촉구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일깨움의 선포입니다:“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전자에 있어서, 그는 마음의 철저한 변화와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을 촉구합니다.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노에오(3340)는 본래 ‘어떤 일에 대해 죄송하게 여기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니함(5162)에 상당하는 말로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다, 후회하다’라는 의미를 지니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메타노에오가 ‘돌이키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슈브(7725)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바꾸다, 회심하다, 회개하다’라는 의미가 된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도 이 단어의 의미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생활, 행위에 있어서 마음의 태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리빙 바이블은 ‘회개하라’를 ‘너희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의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침례 요한의 주제입니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이 거짓. 사기, 절도. 험담, 복수, 악용. 성적 부도덕과 같은 악행으로 이끄는 자기 중심적 본능에서 180도 전환하여, 성경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규정된 행위 규범(way)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옛 선지자의 어조를 재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후자에 있어서 요한은 선배들보다 횔씬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선배들도 왕국과 왕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나 그 실채가 ‘가까이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옛날의 소망을 거의 망각해버린 자기 세대의 둔감한 귓전을 향해 그 나라가 바로 문 앞에 이르렀음을 울려보내야 하였습니다. 아직 얼굴을 내밀지는 않은 채 위로 치솟아 오르고 있는 태양 빛을 붙잡아 그늘진 골짜기 앞에 길게 반사시키는, 외로이 우뚝 선 바위산처럼. 요한은 타오르는 빛을 발하며, 자기 세대를 향해 비추었습니다. 그의 빛은 어느 순간 그 나라의 광명이 동쪽 수평선 위로 떠오를 것이라는 증거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것이 그들에게 결코 유쾌한 메시지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의 선포에서 주님의 날에 대한 그의 기대감이 침울한 색깔로 채색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주의 날이 너희에게 어떠한 것이 되겠는가 그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것은 심판이다.
그러므로 회개만이 이에 대한 대비책이다’라는 것입니다. 요한 당대의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독점적 특권과 이교도들에 대한 자신들의 통치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나라가 먼저는 자신들의 의지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 하늘 나라에서와 같은 즐거운 순종을 의미한다는 생각은 그들에게서 이미 떠난지 오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만족을 단호히 떨쳐버리고, 왕의 제복은 순결이며 그의 오심에 대한 준비는 회개라는 사실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2. 침례 요한을 통한 예언의 성취 많은 학자들은 이 예언의 전부를 요한의 사역으로 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요한의 사역의 성질과 그의 사역이 서론적 역할을 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성질을 의미하는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M. Henry). 여기에 인용된 이사야 40:3-5은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곧 찾아들 해방을 배경으로 하여 장차 오시는 메시아와 그 선구자에 대한 예언을 한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역시 그떻게 보았는데 특히 마가는 말라기 3:1과 함께 인용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원래 바렐론 포로 말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의 메시지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그것은 자기 백성을 포로 생활에서 구속하려 오시는 여호와를 위해 광야에 길을 예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곧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 신적(神的)으로 정한 이스라엘의 운명의 변화에서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는 것을 실감하였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대로(大路)였습니다(R. V. G. Tasker). 이스라엘의 이 해방의 역사는 예언적인 것이며, 그들의 포로 생활파 해방은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시는 보다 쓰라린 (영적)포로생활과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시는 보다 위대한 구원에 대한 모형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포로의 선지자의 고지(告知)를 통하여 유사하나 더 큰 구원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프호네 보온토스)는 문자적으로 ‘외치는 소리’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이 구절을 예언의 성취로 보며, 요한은 이 인용문을 침례 요한의 자기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으로 돌립니다. 아마 마태도 종교계 당국으로부터 파견된 자들에게 요한이 주었던 그 감동적이면서도 겸손한 대답, 즉 자신의 선지자적 권위에 대한 주장과 동시에 자기 일신의 중요성을 부인하였던,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와 소리”라는 답변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길”에 해당하는 호도스(3598)의 그 일차적 요소는 동작의 요소이며 ‘행동’으로서 ‘여행, 항해’ 라는 의미를 지니며, 그리고 지역적, 공간적 의미에서 ‘길, 작은 길, 도로. 항로’를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초기에 벌써 비유적인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이용하거나 그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호도스는 어떤 것에 도달하거나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 방책, 절차. 무엇을 행하거나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의미를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삶은 때때로 길에 비유됩니다. 옳지 못한 행동은 ‘그릇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길은 또한 인간의 행위와 처신, 즉 생활의 영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의미하며, 혹은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이 취하시는 방법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주의 길”이란 그리스도의 길이며,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지고 우리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 길입니다(참조, G. Ebel). ‘예비하다’에 해당하는 헤토이마조(2090)는 ‘예비하다, 준비하다, 필요한 준비를 갖추다’ 등을 뜻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주, 곧 메시야를 걸맞게 영접하고 그의 축복을 획득하도록 인간의 마음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왕들이 여행하기 전에 앞서 사람들을 보내어 도로를 평탄하게 만들어서 왕이 통행할 수 있게 하는 동양의 관습에서 끌어낸 비유적 표현입니다.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한글개역의 “첩경”이란 사전적 의미로, ‘지름길’을 뜻하지만, 헬라어 트리보스(5147)는 ‘밟아 다져진 길’이며, ‘잘 알려지고 잘 알고 있는 길, 오솔길, 소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단어의 복수가 사용되었습니다. “평탄케”에 해당하는 유뒤스(2117)는 본래 의미로는 ‘곧은, 똑바른, 평평한’을 뜻하며 비유적으로는 ‘바른, 정직한, 진실한, 신실한’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본래의 의미로 번역하지만 비유적 의미를 함축합니다. 따라서 ‘평탄케 하라’는 말은 굽은 길을 ‘곧게 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평평하게 하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베드로후서 2:15에서 “바른 길”(유테리아 호도스)는 그 목표, 즉 구원에 이르는 삶의 법칙으로서 진정한 신앙에 대한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그 예언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그 선지자를 통하여 한 대로(大路)가 광야에 수축될 것이며, 이 혁명의 유일한 표적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될 것이며, 선지자를 통해 전파되는 메시지들은 이스라엘에게 엄중한 회개와 겸손한 대망(待望)을 요구할 것이며, 모든 사람은 구원을 보게 될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참조,눅3:46). 하나님의 자자(使者)로서 요한의 출현은 이 약속 성취의 첫 전략적 단계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메시아의 인격과 사업으로 층분히 이스라엘에게 곧 나타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 군림하는 위대를 위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 한 길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은 이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의 백성에게로 보냄받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1) 주의 길은 광야에서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것이 유목적 의복과 박한 식물을 가진 광야에서 일어나야 합니까 그것은-도시의 관례와 문화와의 엄격한 단절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그의 권위(勸慰)를 받을 사람들의 요구에 요구한 금욕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 하여,-엘리야의 영과 능력으로 온 이 선지자는 기성 종교 지도자들의 자기 만족과 우상 숭배를 대항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눅l:17; 막9:l
3)입니다(P. S. Minear).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에 찾아 올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일은 오직 세상과 세상의 것들과 단절되고,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우상 숭배와 자기 만족을 단호히 배겨하는 광야 같은 곳, 그런 교회에서 행해지는 것입니다.
(2) 요한의 사명은 주의 길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하여 보냄받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한 명확하고 독특한 아주 큰 소리였습니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고 평탄케 하라’고 소리쳤습니다. 왕이 행차할 때는 왕의 사자는 왕의 행차를 알리고 백성은 길을 딱고 환영아치를 만들고, 미화작업 및 일대청소를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일생 동안의 추구할 일들로부터 사람들의 사상을 전환시키는 것이 사명입니다.-오랫동안 어떤 다져진 신념과 관습에서 마음을 돌리고, 비틀어진 고집과 부정직은 바르게 하고, 시기와 투기, 분쟁은 버리게 하고, 교만한 마음은 겸손하게 하고, 연약한 무릎은 힘을 얻게하여, 성령님을 수여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오시는 분의 길을 마음에 준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분은 오직 하나님과 의(義)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왕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환영하려고 준비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죄에서 구원을 기쁜 소식으로 환영하는 상태에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요한은 백성의 마음에 주의 길을, 회개하라는 설교와 침례라는 표징으로 준비시킨 것입니다. 요한은 오시는 왕을 위한 필요한 준비는 회개, 내부의 청결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구비해야할 조건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단순히 아브라함의 자손의 수효를 메시아의 백성으로 삼은 문제라면, 하나님은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만드셨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을 제명하고, 곧 그들의 기득을 박탈하고, 그들 역시 회개하고 성령님으로 침례를 베푸실 분의 은혜에 의해서만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있게 하였습니다.
요한은 상징적 형태로 자신의 가르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회개로 부르고 침례의 표징을 그들에 둠으로 그 결심을 더욱 굳게 하여 메시아의 구원을 기대하게 하였습니다. 이 의식은 자신의 사역을 특징지워주는 것입니다. 그는 침례자이며, 생래의 유대에게 이 의식을 행하여 개종(회심)시키었습니다. 유대인에 의하면 개종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할례, 침례, 제사의식입니다. 개종자에게 시행되는 침례의식의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개종자에게 침례를 주기 위하여 그를 데리고 옵니다. 그를 물 속에 서게 한 후에 율법에 관한 제반 경중(輕重) 사항을 다시 가르칩니다. 그 기르침을 듣고 물 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 옵니다. 이떻게 하여 그는 모든 일에서 이스라엘인이 됩니다. 따라서 침례는 새로 태어나는 것을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상징입니다. 이방인들은 무덤 속에 들어가는 것같이 물 속에 내려 가서, 옛 사람은 장사지내고 새 사람으로 오라 옵니다.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으로 물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에게 이와 같은 의식을 받도록 요구하는 것은 육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는 그들의 왕을 위한 준비를 하는데 불충분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려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설교와 침례로 오시는 메시야로 말미암은 구원의 지식을 전함으로 백성을 준비시킨 것입니다. 한 선지자는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고 하였습니다(슥13:1). 그 예언은 막 성취려고 하였고 요한의 침례는 그것의 적당한 표정이었습니다. 또한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내가…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려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리라”고 하셨습니다(겔36:25,26). 그러나 요한은 실제적 침례, 곧 성령님의 침례를 베풀도록 위임받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물로 침례를 베푸므로서, 오시는 메시야로 말미암은 그 성령님의 침례, 사죄와 정결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진실로 회개한 마음에 표징과 확신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 앞에 앞서 가며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고 믿도록 하는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3) 백성의 의무는 요한의 지도로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침례 행위는 그 자체 새 날의 극적인 표징이요, 선지자와 백성이 다 같이 그들의 신앙을 선언하는 표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자백하고 침례를 받고, 구속의 날올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들을내맡기 위하여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의 요단강 여행은 옛 세상과 그것에 얽힌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의 물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의(自意)를 보였습니다. 그것은 이것 이상 여호수의 인도하에 요단강을 건넌 것의 상징적 재현이었습니다. 그 때 그의 지도로 과감히 모든 것을 할 각오가 되어있는 자들을 하나님은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지금 다시 하나님은 새결심을 부르고 약속의 새 땅을 열고 있습니다. 요한은 요단을옛 것과 새 것의 경계로 하였습니다. 이 경계를 건너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든 세속적 안전과 포부(抱負)들 위에 두기를 스스로 서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속으로 내려갔을 때 이것은 관례적 행동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부인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었습니다. 그들은 저주의 과거와 복된 미래 사이에 있는 경계를 힘써 건너는 것이었습니다(P. S. Minear). 요한과 백성은 이와같이 이 회개의 침례로 주님을 환영할 수 있고 주님이 찾아 들어 올 수 있는 한 길을 준비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길로 오사 그의 백성의 완전한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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