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최고의 보물 (마27:62-28:10)
본문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장 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부활의 날입니다. 이 부활은 하나님이 인간에 게 주신 최고의 보물입니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 보다는 다른 의미 의 부활을 강조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어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였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고,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운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소식을 천사들로 부터 전해듣고, 예수님의 무덤을 떠난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전팔레스틴에 다 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갔던자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요한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의 빈무덤을 다녀온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의 대적들 중에 도,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갔던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적들 중에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하러 갔던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그 어디에 도 없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가지 않았을까 요 그리고 예수님의 적들은 왜 가지 않았을까요 당시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입니다. 유대 나라가 온통 예수님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럼 그 무덤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어야 합니다. 구경을 하러 나온 사람들, 예수님이 정말로 살아 났는가 수사를 해야 하는 로마병정들로 사람들 이 북적 거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빈무덤을 다녀 온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 자리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빈무덤엘 가보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들이 빈무덤을 확인하러 가지 않은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들이 사랑하던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 아 나셨다고 하는데, 12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장사지낸지 얼마 안되어서 두 려워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한 거짓말이였기 때문에 가 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거짓말인데, 그 말도 되 지 않는 거짓말을 듣고 그것을 확인하러 갈 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무도가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아무리 분명한 거짓말이라도,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그 곳을 가봐야 합니다.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확인 하고 "예수님의 시체가 여기 있지 않느냐 "하고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한 일이 정당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 인 자들의 입지를 더욱더 공고히 하는 길입니다. 자기들이 한 일을 정당 화 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길까바 두려워서 예수님을 죽인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더욱더 공고히 할 수 있는 호기 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빈무덤을 다녀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빈무덤엘 가지 않은 것을 볼때 당시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 나 분명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분명한 거짓말이라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 성이 없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빈무덤을 사람들이 확인하러 갔다는 기록이 전혀 없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셔서,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빈무덤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도 더 이상 그 무덤에 가서 확인하고 조사할 필요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간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전 혀 나오지 않았 던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은 예수님 당시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였 습니다. 그 누도 진실여부를 확인할 필요가없는 분명한 사실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사실을 분명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부활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요 이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저는 이시간 너무나도 분명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참 뜻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겼다는 선언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싸움은 사망과의 싸움이였습니다. 사망을 정복하려는 싸움이였습니다. 지금도 온 인류는 죽음을 정복하려고 일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고, 죽음 앞에 두려워 떨 고 있고, 죽음 때문에 희망을 잃어 버리고 사는 인류를 죽음에서 해방시키 기 위하여 죽음과 더블어 싸우셨습니다. 죽음도 이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장사를 지낸 후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는, "예수님이 살았을 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사흘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소서.
왜냐하면 만약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 셨다고 하면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큰 난리가 날 것이기 때 문입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파숫군들을 데리고 가서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은 바위를 봉인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파숫군으로 그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사망은 이렇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막으려고 했읍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큰 돌로 막았습니다. 군사들을 시켜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대제사장의 권세로 그 돌을 열지 못하도록 봉인을 했습니다. 사망은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모 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막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망 이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 이겼습니다.
죽엄 속에 갇어 두려고 했던 바 윗돌을 옮겼습니다. 다시는 열지 못하도록 대제사장의 권세로 봉인해 둔 것을 찢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에서 나오지 못하게 지키던 군사들 을 다 기절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사망의 세력들을 다 물리치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 어떤 사망의 방법도 예수님을 사망에 묶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사망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온 인류를 지배하고 있던 죽음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원수의 대장인 죽음을 물 리친 사건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죽음이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더이상 사망에 붙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더이상 사망이 우리를 자기의 종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먼저 예수님의 부활 의 확실성을 말씀하고, 다음에 우리의 부활의 확실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는 우리 인류를 늘 괴롭혔던 사망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 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 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 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6-58)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골리앗 군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물리친 것과 같이,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조금도 죽음의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1505-72)까지 살았던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이며, 정치가이 며, 역사가였던 죤 낙스(John Knox)는 죽을 때, 그의 부인의 손을 잡고는 "여보, 내가 처음 나의 닻을 내렸던 성경을 읽어 주세요"라고 말을 했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인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그가 마지막 병 에 걸려 죽어 갈 때 "누가 죽음을 어둠의 골짜기라고 했는가 이곳은 온통 빛과 사랑 뿐이다"(It is all light and love)라고 말을 했다. 버마에 첫번째 선교사로 갔던 아도니람 져드슨(Adoniram Judson)은 죽을 때 "나는 학교에서 공부가 끝이나서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아이 들과 같이 그렇게 기쁘게 지금 길을 가고 있다"고 말을 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그가 더이상 말 을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그의 자녀들에게 "얘들아, 내가 죽자마자, 너희 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노래하라"고 말을 했다. 그의 아들 요한 웨슬레는 88살에 극단적으로 약해져서 죽어갈 때 "내 호 흡이 있는 동안 나의 창조주를 찬양합니다"라는 찬송가를 갑자기 불러서 모 여있던 그의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은 다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서 첫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 도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은 인간에게 가치와 존엄성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하고 있습니다. 인간 을 가장 귀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천하보다도 귀하 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인간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 인생에 전부라면, 그래도 우리 인간이 존엄하고,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 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인간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다른 짐승들보다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의 인생에 부활이 없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의 삶 이 전부라면, 우리 인간도 짐승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고 하 셨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 인간은 한갓 동물에 불과 합니다. 소련에서 망명해왔던 문학가 솔제니친의 보고에 의하면 구소련은 1920년 대에 우크라이나에서 600만명의 농민을 굶겨 죽였다고 합니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도 600만의 유대인을 독가스실에서 죽였읍니다. 중공이 중화민국을 점령했을 때도
3,000 만명을 숙청해 죽였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 만은 사람들의 생명을 파리 목숨같이 죽였을까요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생명은 한갓 파리생명과 같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 습니다. 1946년, 나찌 정권의 전직 관리 한 사람이 나찌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가스실에서 250만명을 살해하는 살인극에 참여했다 고 자백하는 그의 표정이 얼마나 태연하고 담담했던지 관계자들 모두가 놀 랄정도였습니다. 심문을 계속하던 중 관계자들은 다른 가스실에서 200만명 이상을 살해한 또 다른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이번에도 그의 얼국색 하나 변하지 않았 습니다. 그의 말을 거의 믿을 수 없었던 한 조사관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결코 그런 것 믿지 않소 !"라고 대답을 했읍니다. 하나님이 없고, 부활의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파리 목숨 과 같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같이 막잡아 먹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다른 동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 인생도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에 국한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무가치한 인간에게 존엄성과 무한한 가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심으로서, 인간은 다른 짐승과는 달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넘어 에도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다른 짐승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부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이 존엄성과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해스팅이라는 학자의 친구가 1844년에 피지섬을 방문했을 때 총 한자루 값인 7 불로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7 불로 산 사람은 굶겨 죽일 수도 있었고, 매질 할 수도 있었고, 그 당시 풍습대로 잡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폐습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 때보다 85만 7천 배가넘는 600만 불을 준다고 해도 단 한 사람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 섬의 사람들의가치를 이렇게 바꿔 놓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부활의 신앙이였습니다. 지금 피지섬에는
3,000여개의 교회가 있어서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이 들어 갈 때, 7불 밖에 되지 않던 짐승과 같던 무가치한 사람이 무려 85만 7천배가 넘는 600만불을 주고 도 살 수 없는 존귀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미국에 카렌 퀴란이란 어린 여자아이가 태어 났습니다. 그 어린 아이는 생후 4 주만에 다른 집에 입양되었습니다. 그후 20살의 귀여운 처녀 로 별 무리 없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술에 환각제를 타서 마셨 다가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소생 불가능"이라는 진단이 내려졌 습니다. 그러자 양부모는 법원에 안락사를 신청했습니다. 뉴저지 지방법원은 이 신청을 허락했습니다. 의사들이 소생 불가능을 선언했고, 부모가 의식이 없는 당사자를 대신하여 "우아하고 품위 있는 죽 음"(death with grace and dignity)을 원했으므로 호흡을 중단시켜도 살인 이 아니고 자연사라는 판결문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거부로 카렌의 생명이 유지되었는데 놀랍게도 9년 이상 을 실물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카렌의 연명은 엄청난 국고금의 손실을 가 져왔습니다. 부모가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미국 대법원은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아무 의식도, 희망 도 없는 카렌양의 생명을 이어 갔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부활 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생명이 돈이나 제 3 자의 정신적인 고통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인류에게 존엄성과 놀라운 가치를 가져다 주 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 할 수가 없 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진흙덩어리로 만들어진 무가치한 우리에게 존엄성 과 가치를 주시려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믿으시 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3. 부활은 인간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20-22)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 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 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인간은 영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죽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습니다. 첫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그 후에 계속해서 이 부활의 열매들이 맺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 부활하고, 부활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후에도 계속해서 부활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람의 운명이 죽을 운명이 된 것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이 죽을 인생의 운명이 부활의 운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생의 운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영어로 부활절을 이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게르만의 빛과 봄의 여신인 이이스트라(Eastra)에게 경의를 표 하기 위하여 게르만 민족이 행하던 봄의 축제에서 유래한 말이다. 약 8 세기 경에 앵글로 색슨족들이 이 이이스트라 여신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하여 고안된 기독교의 축제에 옮겨 놓았다. 그래서 부활절을 이이스터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음의 계절인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계절시작하는 것과 같다. 부활은 새로운 삶의 시간이다. 죽었던 것 이 다시 사는 시간이다. 어둠이 가고 따듯한 태양이 비취는 시간이다. 죽어야 했던 우리 인간의 삶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꿔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의 삶이 시작됩니다. 옛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죽어야 할 운명이 영생을 얻는 운명을 바뀝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여, 운명이 바뀌는 복을 받으시 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 보다는 다른 의미 의 부활을 강조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못하면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어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였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고,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운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절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이 부활 하셨다는 소식을 천사들로 부터 전해듣고, 예수님의 무덤을 떠난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전팔레스틴에 다 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갔던자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요한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외에 예수님의 빈무덤을 다녀온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님의 대적들 중에 도,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갔던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적들 중에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하러 갔던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그 어디에 도 없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가지 않았을까 요 그리고 예수님의 적들은 왜 가지 않았을까요 당시 유대 땅에서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 입니다. 유대 나라가 온통 예수님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 나셨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럼 그 무덤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들었어야 합니다. 구경을 하러 나온 사람들, 예수님이 정말로 살아 났는가 수사를 해야 하는 로마병정들로 사람들 이 북적 거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예수님의 빈무덤을 다녀 온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고, 그 자리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빈무덤엘 가보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들이 빈무덤을 확인하러 가지 않은 이유를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가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들이 사랑하던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 아 나셨다고 하는데, 12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장사지낸지 얼마 안되어서 두 려워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한 거짓말이였기 때문에 가 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분명한 거짓말인데, 그 말도 되 지 않는 거짓말을 듣고 그것을 확인하러 갈 자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무도가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아무리 분명한 거짓말이라도, 예수님을 죽인 자들은 그 곳을 가봐야 합니다.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확인 하고 "예수님의 시체가 여기 있지 않느냐 "하고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한 일이 정당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죽 인 자들의 입지를 더욱더 공고히 하는 길입니다. 자기들이 한 일을 정당 화 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길까바 두려워서 예수님을 죽인 그들은 자기들의 입장을 더욱더 공고히 할 수 있는 호기 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빈무덤을 다녀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빈무덤엘 가지 않은 것을 볼때 당시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 나 분명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나 분명한 거짓말이라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은 타당 성이 없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부활하신 빈무덤을 사람들이 확인하러 갔다는 기록이 전혀 없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셔서, 그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빈무덤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자들도 더 이상 그 무덤에 가서 확인하고 조사할 필요 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빈무덤을 확인하러 간 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전 혀 나오지 않았 던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은 예수님 당시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였 습니다. 그 누도 진실여부를 확인할 필요가없는 분명한 사실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이 사실을 분명하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 부활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요 이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요 저는 이시간 너무나도 분명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참 뜻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부활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겼다는 선언입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의 싸움은 사망과의 싸움이였습니다. 사망을 정복하려는 싸움이였습니다. 지금도 온 인류는 죽음을 정복하려고 일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 고통을 당하고 있고, 죽음 앞에 두려워 떨 고 있고, 죽음 때문에 희망을 잃어 버리고 사는 인류를 죽음에서 해방시키 기 위하여 죽음과 더블어 싸우셨습니다. 죽음도 이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 동원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장사를 지낸 후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몰려가서는, "예수님이 살았을 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 사흘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하소서.
왜냐하면 만약 그의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는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 셨다고 하면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보다 훨씬 더 큰 난리가 날 것이기 때 문입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파숫군들을 데리고 가서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은 바위를 봉인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파숫군으로 그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사망은 이렇게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막으려고 했읍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큰 돌로 막았습니다. 군사들을 시켜서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지켰습니다. 대제사장의 권세로 그 돌을 열지 못하도록 봉인을 했습니다. 사망은 이렇게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하도록 모 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막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사망 이 방해하는 모든 것을 다 이겼습니다.
죽엄 속에 갇어 두려고 했던 바 윗돌을 옮겼습니다. 다시는 열지 못하도록 대제사장의 권세로 봉인해 둔 것을 찢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에서 나오지 못하게 지키던 군사들 을 다 기절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사망의 세력들을 다 물리치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 어떤 사망의 방법도 예수님을 사망에 묶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사망을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 온 인류를 지배하고 있던 죽음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부활은 우리의 대장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원수의 대장인 죽음을 물 리친 사건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죽음이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더이상 사망에 붙잡아 둘 수가 없습니다. 더이상 사망이 우리를 자기의 종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먼저 예수님의 부활 의 확실성을 말씀하고, 다음에 우리의 부활의 확실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는 우리 인류를 늘 괴롭혔던 사망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 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 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 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6-58)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골리앗 군대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물리친 것과 같이,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조금도 죽음의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1505-72)까지 살았던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이며, 정치가이 며, 역사가였던 죤 낙스(John Knox)는 죽을 때, 그의 부인의 손을 잡고는 "여보, 내가 처음 나의 닻을 내렸던 성경을 읽어 주세요"라고 말을 했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인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그가 마지막 병 에 걸려 죽어 갈 때 "누가 죽음을 어둠의 골짜기라고 했는가 이곳은 온통 빛과 사랑 뿐이다"(It is all light and love)라고 말을 했다. 버마에 첫번째 선교사로 갔던 아도니람 져드슨(Adoniram Judson)은 죽을 때 "나는 학교에서 공부가 끝이나서 학교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아이 들과 같이 그렇게 기쁘게 지금 길을 가고 있다"고 말을 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그가 더이상 말 을 할 수 없게 되기 전에 그의 자녀들에게 "얘들아, 내가 죽자마자, 너희 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노래하라"고 말을 했다. 그의 아들 요한 웨슬레는 88살에 극단적으로 약해져서 죽어갈 때 "내 호 흡이 있는 동안 나의 창조주를 찬양합니다"라는 찬송가를 갑자기 불러서 모 여있던 그의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들은 다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걸어 갔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서 첫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 도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은 인간에게 가치와 존엄성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 평하고 있습니다. 인간 을 가장 귀한 존재로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천하보다도 귀하 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 인간에게 부활이 없다면,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 인생에 전부라면, 그래도 우리 인간이 존엄하고, 천하보다 더 귀한 가치 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 인간의 삶이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다른 짐승들보다 우리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약 우리의 인생에 부활이 없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이 땅에서의 삶 이 전부라면, 우리 인간도 짐승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고 하 셨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 인간은 한갓 동물에 불과 합니다. 소련에서 망명해왔던 문학가 솔제니친의 보고에 의하면 구소련은 1920년 대에 우크라이나에서 600만명의 농민을 굶겨 죽였다고 합니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도 600만의 유대인을 독가스실에서 죽였읍니다. 중공이 중화민국을 점령했을 때도
3,000 만명을 숙청해 죽였습니다. 어떻게 이들은 이렇게 만은 사람들의 생명을 파리 목숨같이 죽였을까요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는 자들에게는 인간의 생명은 한갓 파리생명과 같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 습니다. 1946년, 나찌 정권의 전직 관리 한 사람이 나찌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가스실에서 250만명을 살해하는 살인극에 참여했다 고 자백하는 그의 표정이 얼마나 태연하고 담담했던지 관계자들 모두가 놀 랄정도였습니다. 심문을 계속하던 중 관계자들은 다른 가스실에서 200만명 이상을 살해한 또 다른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이번에도 그의 얼국색 하나 변하지 않았 습니다. 그의 말을 거의 믿을 수 없었던 한 조사관이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결코 그런 것 믿지 않소 !"라고 대답을 했읍니다. 하나님이 없고, 부활의 신앙이 없는 곳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파리 목숨 과 같습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다른 동물들과 같이 막잡아 먹습니다. 사람의 가치가 다른 동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부활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 인생도 단지 이 세상에서의 삶에 국한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짐승들과 다를 바가 없읍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무가치한 인간에게 존엄성과 무한한 가치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심으로서, 인간은 다른 짐승과는 달리,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 넘어 에도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다른 짐승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이 부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활의 신앙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이 존엄성과 가치를 갖게 됩니다.
해스팅이라는 학자의 친구가 1844년에 피지섬을 방문했을 때 총 한자루 값인 7 불로 사람을 살 수 있었습니다. 7 불로 산 사람은 굶겨 죽일 수도 있었고, 매질 할 수도 있었고, 그 당시 풍습대로 잡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 폐습이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 때보다 85만 7천 배가넘는 600만 불을 준다고 해도 단 한 사람도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이 섬의 사람들의가치를 이렇게 바꿔 놓았을까요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부활의 신앙이였습니다. 지금 피지섬에는
3,000여개의 교회가 있어서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앙이 들어 갈 때, 7불 밖에 되지 않던 짐승과 같던 무가치한 사람이 무려 85만 7천배가 넘는 600만불을 주고 도 살 수 없는 존귀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입니다. 미국에 카렌 퀴란이란 어린 여자아이가 태어 났습니다. 그 어린 아이는 생후 4 주만에 다른 집에 입양되었습니다. 그후 20살의 귀여운 처녀 로 별 무리 없이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술에 환각제를 타서 마셨 다가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소생 불가능"이라는 진단이 내려졌 습니다. 그러자 양부모는 법원에 안락사를 신청했습니다. 뉴저지 지방법원은 이 신청을 허락했습니다. 의사들이 소생 불가능을 선언했고, 부모가 의식이 없는 당사자를 대신하여 "우아하고 품위 있는 죽 음"(death with grace and dignity)을 원했으므로 호흡을 중단시켜도 살인 이 아니고 자연사라는 판결문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거부로 카렌의 생명이 유지되었는데 놀랍게도 9년 이상 을 실물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카렌의 연명은 엄청난 국고금의 손실을 가 져왔습니다. 부모가 많은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왜 미국 대법원은 이렇게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아무 의식도, 희망 도 없는 카렌양의 생명을 이어 갔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는 부활의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부활 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생명이 돈이나 제 3 자의 정신적인 고통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렇게 인류에게 존엄성과 놀라운 가치를 가져다 주 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이해 할 수가 없 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진흙덩어리로 만들어진 무가치한 우리에게 존엄성 과 가치를 주시려고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믿으시 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3. 부활은 인간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20-22)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아담 안에서 모 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 셨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한 인간은 영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가지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운명이 죽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운명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었습니다. 첫열매가 되었다는 것은 그 후에 계속해서 이 부활의 열매들이 맺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만 부활하고, 부활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후에도 계속해서 부활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람의 운명이 죽을 운명이 된 것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이 죽을 인생의 운명이 부활의 운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생의 운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영어로 부활절을 이이스터(Easter)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게르만의 빛과 봄의 여신인 이이스트라(Eastra)에게 경의를 표 하기 위하여 게르만 민족이 행하던 봄의 축제에서 유래한 말이다. 약 8 세기 경에 앵글로 색슨족들이 이 이이스트라 여신의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하여 고안된 기독교의 축제에 옮겨 놓았다. 그래서 부활절을 이이스터라고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활은 죽음의 계절인 겨울이 지나고,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계절시작하는 것과 같다. 부활은 새로운 삶의 시간이다. 죽었던 것 이 다시 사는 시간이다. 어둠이 가고 따듯한 태양이 비취는 시간이다. 죽어야 했던 우리 인간의 삶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우리의 운명을 바꿔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의 삶이 시작됩니다. 옛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죽어야 할 운명이 영생을 얻는 운명을 바뀝니다. 이 부활절 아침에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여, 운명이 바뀌는 복을 받으시 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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