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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의 증거 (마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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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몰간이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는 미국의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어느 시골 교회를 목회 하시는 목사님인데, 목회 중에 경험한 사실을 잡지사에 기고해서 나왔던 사실 이야기입니다. 아주 건강이 매우 좋지 못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발로 걸어다닐 수도 없는 그런 처지여서 휠체어에 태워 가지고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나 아주 총명했고 그는 신앙이 특별히 좋았습니다. 이름은 톰이라고 합니다. 어느날 부활절을 앞두고 교회학교 선생님이 어린아이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계란 하나씩을 주었습니다. 그 계란 속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일주일 동안 잘 생각해서 이 계란 속에 생명을 넣어 가지고 오라." 그랬습니다. 아이들은 그 속에다가 꽃을 꺾어서 넣어 오기도 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곤충을 잡아서, 꿈틀거리는 곤충을 잡아서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톰은 빈 플라스틱 계란을 가지고 왔습니다. 애가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그런 것을 잡을 수가 없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선생님은 오히려 위로를 해 주었습니다. "괜찮다. 숙제를 못 했어도 괜찮다."그랬습니다. 이 아이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속에 생명을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명을 담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 않았습니까" 이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 어린이의 부활 신앙, 빈 무덤을 통하여 증거된 그 신앙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일 후에 얼마 안 되어서 이 톰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기독교 신학에는 '험증학'이라고 하는 신학이 있습니다. 요새는 이런 것을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만은 오래 전에 제가 이것을 가리켜 본 일이 있는데 이 험증학에는 특별히 이 부활에 대해서 증거할 때 이것을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혹은 역사적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나, 예수님의 이적이나 혹은 이 부활의 사건들을 전부 증명합니다. 그런 과목인데 거기에 이 빈 무덤에 대한 이야기는 대단히 중요한 소재가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무덤이 비었다! 우리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도대체 시체가 어디에 간 겁니까 예수 부활이라는 이 사건으로 해서 이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부활했다고 증거합니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 온 성은 난리요, 유대 나라가 난리요, 온 세계가, 당시 온 세대가 난리예요. 예수 부활! 이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온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자 또한편 부활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부활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저지할 수가 없어요. 아주 기쁨으로 순교를 하는 거예요. 부활의 증인은 순교하는 거예요. 생명을 믿으니까.
자 이렇게 되니 역사적으로 말야 2000년 동안 이렇게 크고 놀라운 사건이 여기서 시작이 되는데 상상해 보세요. 이 빈 무덤에 대한 사건이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먼저는 시체에 대해서 우리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시체를 어떻게어떻게 해서 감추었다고 생각합시다. 아마 거기에 있는 군사들을 좀 뇌물을 줘 가지고 잠들게 하고 시체를 도적질 해갔다. 그래 어디다 감추어 놓고 예수 부활했다고 소리 질렀다면은 상상해 보세요. 거짓말을 사실이라고 하면서 목숨 바치는 사람 봤습니까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의 손에 있는 건 아니고 또, 이렇게 복잡한 문제가 돼서 자 보세요. 빌라도가 예수를 죽였는데 그 예수가 부활을 했거든, 이제 빌라도는 또 로마는 완전히 정죄되는 거예요. 여기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시체를 찾아내가지고 빌라도가 "여기 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하면 그만 아닙니까 그 많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시체만 찾아 놓으면 그만이예요.
그런데 이걸 못 했어요. 더구나 가야바, 제사장,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아주 원흉인데 그야말로 큰 고민입니다. 메시아를 죽여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죄가 되는데 이걸 어떻게 벗어날 길이 있습니까 시체만 내 놓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못 했어요. 그리고 정죄당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보면 이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무덤이 비어 있다" 하는 것, 이건 굉장한 신학적 의미가 있고 상징적 의미가 있고 엄청난 메시지가 그 속에 있어요. 무덤이 비었습니다. 시체는 없습니다. 여기서 부활 증거의
첫째가 빈 무덤이라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의 끝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인간은 죽음을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다 갈 것이니까 말이에요. 대단히 실례지만 이제 앞으로 여기서 모름지기 한 백년 후에는 여기 앉았던 분이 한 분도 없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인생이에요. 죽으면 끝입니다. 뭐 지식이라고 해봐도 죽음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에요. 명예요 혹은 부귀영화요,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죽음 앞에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 모든 권세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으면 그만이예요. 그래서 우리는 흔히 죽음을 끝이라고 말합니다. 간혹 장례식에 가보면은 아주 위로를 받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요. "조금 더 살아야 할텐데 죽었다고, 답답하다고" 더 위로하느라고 애쓰고, 위로 받지 못해서 몸부림치고,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먼저 내리는 사람도 있고 좀 뒤에 내리는 사람도 있는 거 아니에요. 조금 먼저 간 거지 뭐 이상 할 것도 없어요. 누가 누구를 위로한단 말입니까, 다 같은 처지에……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죽으면서도 농담을 잘해요. 아내가 몸부림치면서 당신 없으면 난 어떻게 사느냐고 뭐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남편이 죽으면서 그랬답니다. "걱정 마라, 너도 곧 죽을텐데 뭘." 사실이 그래요. 우리 웃으면서 죽고, 웃으면서 보냅시다. 그렇게 몸부림 칠 건이 아니에요. 나도 갈 거니까요. 누가 누구를 위로하고 말고 해요. 슬퍼할 얘기도 아닙니다 이거는요. 죽음은 엄연한 실제요 우리 앞에 있는 사건이에요. 자 여기까지는 좋은데 또 하나 문제가 있어요. 그것이 바로 죽여서 해결하겠다는 것이죠. 최후의 해결책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많은 독재자들이 그랬습니다. 엄청난 사람을 숙청해 버렸어요, 죽였어요. 그러면 다 해결된다. 조용해진다는 거죠, 정말 그렇습니까 구 소련이 일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했습니다. 중국의 천안문 사건이 있을 때, 사건 바로 뒤에 제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제가 그 천안문 광장에 여러 곳에 널려있는 핏자국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많은 사람 죽었습니다. 거기에 있는 이야기, 신문에도 났었지요. 많은 청년들이 죽고 있을 때, 중국의 지도자, 실례가 되기 때문에 이름을 대지 않겠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중국에서 11억 인구요. 11억 인구 앞에 백만 명은 적은 것입니다." 그 말에 광장이 조용해졌습니다. 백만명을 죽여서라도 조용하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할 말 있습니까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중국이 조용해졌어요. 자 우리 북한 땅에도 말이지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며칠 전에 신문에 났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너무 가난하고 어려웁고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깐 도둑질도 많고, 부정부패가 많아져요. 그래서 700명을 총살했다는 거 아닙니까. 앞에다 세워놓고 쏴버려요. 아주 조용합니다. 죽여서, 죽여서 해결하겠다는 거요. 자 그래서 해결이 되는 겁니까 역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뭐 이런 얘기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심지어는 예수님을 중심해서도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49절로 50절에 보면, 제사장 가야바가 이런 엉뚱한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조용할 수 있다면, 죽어야지. 그가 메시아든 말든 의인이든, 죄인이든 알바아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조용할 수 있다면, 죽여버려." 이것이 가야바의 생각이요. 죽여서 문제를 해결할려고 하는 이 엄청난 죄악. 이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소란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아는 바와 같이 그렇게 해결된 일은 없습니다. 보세요. 빌라도 법정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가야바, 바리새인, 빌라도, 헤롯당, 사두개인, 서기관. 이 사람들이 원래 사이가 좋은 게 아닙니다. 서로 철천지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들이요.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은 하나가 됩니다. 합작을 합니다 협력을 합니다. 연합해서 예수의 십자가를 작품으로 만듭니다.
교묘하게 씌어서 빌라도의 이름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립니다. 상상해 보세요. 이것은 악의 성공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모아놓은, 만들어 놓은 하나의 성공 작품입니다. 이렇게 빌라도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딱 못박아 놓고, 아마 손을 씻으면서 '성공했다. 어이구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랬겠지요. 다 끝났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입장도 한번 봅시다. 그들의 기대감, 그들의 청운의 꿈, 정치적 욕망, 메시아의 대망사상. 이런 것들도 이제 다 끝나버렸습니다. 하늘로서부터 온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고 끈질기게 물어온 사람들도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절망과 실망으로 끝났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1절에 보면은 여기서 실망하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가 있었어요. 그들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메시아인줄로 알았노라.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라고 믿었노라. 그렇게 바랬는데 비참하게 죽어가고 말았다. 우리의 기대와 간절한 소원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군사까지 세워서 문을 지키게 했습니다. 이제 밤은 고요합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인생들은 여기까지 생각합니다. 이러면은 모든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 무덤에서 새로운 사건이 시작됩니다. 창조적 능력이 나타납니다. 초월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 빈 무덤에서부터 이것이 기독교요 이것이 신앙이요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대로 부활 하셨느니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일찍이 바로 깨달았더라면 절망할 필요가 없었는데, 말씀대로 부활하셨어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합니다. 성경대로 부활하셨다고, 성경에 곳곳에 계속적으로 부활신앙이 있습니다. 이 부활에 대한 말씀들을 똑바로 이해했더라면은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실망할 필요가 없었는데.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대로 부활하셨느니라' 또 하나는 엄청난 복음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저는 이 말씀이 너무 가슴이 뜨겁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예수님 너무 좋은 분입니다. 이 제자가 누굽니까, 이 멍청한 제자들. 예수님의 그 많은 능력을 보고 그 많은 말씀을 배우고 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 부탁까지 받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예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다 도망갔어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했어요. 모른다고 하고 마지막엔 맹세하고 마지막엔 저주까지 했어요. 이 형편없는 제자를 왜 찾아갑니까 예수님, 저들이 실망하고 갈릴리에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갈 줄 알고 "거기서 만나자." 얼마나 고마우신 분입니까 "거기서 만나자." 여기 아무 책망도 없어요. "내가 죽을 때 이 도망간 놈들아!" 그 얘기 안해요. "이 형편없는 놈들아!" 그런 말씀이 없어요. 부활하신 예수,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일러라." 말씀하십니다. 이 부활의 큰 은혜 앞에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생각해 보세요. 이것이 바로 절대적 은혜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제가 이렇게 늘 생각해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 저 같으면은요 빌라도 법정을 아예 벼락 내리고 말겠어요. 이 가야바 벼락맞아 죽도록 하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뭐 그렇게는 안 하더라도 최소한도 빌라도를 찾아가서 "이 사람아 정치 똑똑히 해라. 재판 좀 정신차려해 이놈아!" 이런 한 마디 안하겠습니까 한 마디쯤 할 만 하잖아요 또 가야바 이 대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이 꼴이니까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섬긴다는 대제사장 가야바야 정신 좀 차려라." 한 마디쯤 할 수 있잖아요. 예수님은 이제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는 원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 여유와 그 넉넉한 능력, 그 권세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거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미련해서 이런 것은 모르고 지금도 무덤만 장식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요새 우리 나라도 어지간히 무덤 때문에 신경들 쓰드만요. 여러분 역사를 이런 시각에서 보면요 놀라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 모든 사람들이요 그 모든 문화가 무덤 때문에 망했어요. 그 사원이니, 뭐 비석이니 흔적 전부 무덤입니다 그게. 무덤을 장식한 거예요. 애굽의 피라미드, 그 무덤하나 만들기 위해서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수백년 동안 만들었어요. 무덤하나 만들려고 이 짓을 한 거예요. 또 중국에 씨안에 가서 보면은 진시황의 무덤 굉장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하고 있었나 한심하죠. 무덤입니다. 종교적으로 보아도 소위 유명한 사원이라는 거 전부 무덤입니다. 말이 베드로 성당이지 베드로의 시체가 그 안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무덤입니다. 무덤장식 하느라고 온통 정력을 다 쏟았어요 그리고 끝난거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그런데 에수의 제자들의 무덤은 왜 이렇게 큽니까 여기에 넌센스가 있는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87년 미국에 기발한 아이디어로 돈을 번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쑴멈보눔" 나도 잘 모르는 단어요. 라틴어라고 하는데 최고선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이름의 회사를 차렸는데 뭘하는 곳인고 하니 미이라를 만드는 곳이에요. "당신들 죽거든 돈을 미리 내시요. 그러면은 아주 영원히 썩지 않는 기가 막힌 미이라를 만들어 주겠소. 그리고 호화로운 관을 만들겠소. 관 하나에 100만불. 보석으로 장식한 무덤." 이런 것을 내 놓았는데 정신 빠진 사람들이 수없이 거기에서 돈을 내서 이 회사가 짭짤하게 돈을 벌었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요. 우리 나라에도 이거 사업될걸요 왜 이런 것입니까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거기에서 심지어는 자식들이 굉장한 무덤을 만들 때 "왜 그렇게 하느냐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번 돈 아버지가 쓰는데요." 이렇게 밖에 생각이 안됩니까 한심한 얘기죠. 여러분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또한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을 보십시다. 무서움과 큰 기쁨, 두려움과 큰 기쁨이요. 아 두려울 수밖에. 빌라도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할 때 죄인이 됩니다. 가야바는 예수가 부활했으니 자기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됩니다. 두렵지요. 심판이 두렵지요. 또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부끄럽고 죄송하고 두렵지요. 그러나 이 모든 부끄러움은 잠깐이요 두려움도 잠깐이요 예수 부활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오로지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신앙입니다. 사도행전에 그 교회의 시작은 부활신앙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 부활!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부활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순교의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며 폭발적으로 교회를 세우게 됐고 선교하게 된 것입니다.
저들은 충만함이 있었습니다. 그 충만함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부활 신앙으로 충만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림 대망 신앙으로 충만하고 특별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현재, Living Christ, 현재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그리스도의 현재적 생명을 느끼고 사랑을 느끼고 생명력을 느끼면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큰 기쁨이 있고 이 큰 기쁨 앞에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고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요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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