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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유를 부은 여인 (마26:1-13)

본문

마태복음 26장에서는 중요한 사건들이 네가지 나타납니다. 1-5절까지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가 나타나는데 이는 벌써 네 번 째입니다. 6-13절까지는 베다니 마리아라는 여인의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습니다. 14-16절까지는 가룟유다의 배신이 나타나고, 마지막 부분은 성만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비한 사가지 사건들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하기 위해서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사건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 같은 외형 행위를 다 가지지만, 어떤 사람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서 자신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을 다 드리지 못해서 늘 안타까와하며 헌신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에 비해서 믿는다고 이름하고 제자라고 하는 자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쪽인지 . 향유를 부은 사건이 여기 말고 또 나타납니다. 하나는 본문 마태복음과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사건이 있고, 또 하나는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사건과 본문의 사건을 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다릅니다. 장소가 다릅니다. 누가복음은 바리새인의 집이요, 마태복음 본문은 베다니 시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다릅니다. 누가복음은 공생애 초기 사건이고, 본문은 공생애 후기 수난절에 일어난 것입니다. 또 사람도 다릅니다. 누가복음은 죄인인 한 여자라고 했는데, 본문에는 베다니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발레 향유를 부은 사건은 두 번 일어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베다니 마리아의 헌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 였습니다. 이 집은 문둥이의 집이라고 하는데 그 문둥이는 누구인가 모르지만, 전에 병들었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나은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잔치를 배설했는데, 이 때 마리아가 나아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아주 귀한 손님에게 대야에 물을 떠다가 발과 손을 씻겨주고 또 더 귀한 손님일 때에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이 관습입니다.
이 예수님께 마리아가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것도 예수님을 자신의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기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에 대하여 본문에 나타난 여러 가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행위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나 헌신의 행위요, 예배의 행위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낭비같이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자기를 사랑하여 목숨까지 버려 십자가 지실 주님에 대한 가장 존경의 표시이고, 헌신의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본 주변의 사람들, 제자들의 생각까지도 이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들을 세상의 시야를 가지고 볼 때에 참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볼 것입니다. 아니 우리 가운데서도 세상적인 눈으로 보는 사람은 이 마리아의 헌신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매주일 하나님께 드릴 헌금하는 것도, 십일조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의 소원은 하나님께 헌금을 자유롭게 하는 것인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몸으로 하나님의 일에 예배를 위해 수종드는 것을 아주 쓸데 없는 일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세상입니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일년에 몇 번 찾지도 않는 산속에 있는 절들을 짓고 보수하고 하는 것은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해야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매일, 매주 예배하는 교회당을 건축하는 것은 허비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우리들이 과연 믿음이 없는 눈으로 볼 때에 이는 낭비한 것 같이 보여집니다. 물질 낭비요, 시간 낭비요, 우리들의 재능 낭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이 향유의 가치는 매우 큰 것입니다. 우선 값으로 따져도 많습니다. 요한 복음에는 나드 한 근에 해당한다고 했는데, 이는 삼백데나리온의 가치를 가집니다. 일군의 일년 치 품삯입니다. 이 돈이면 5000명을 먹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이 돈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지 않는가 흥분을 했습니다. 제일 흥분한 사람은 가룟유다입니다. 이 사람은 실은 도적입니다. 돈 궤를 맡은 사람인데 연보를 했다면 그 돈을 쓸쩍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하여 잘 못했다고 오히려 책망을 했지만, 우리 주님은 다르게 평가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하는 일이 그 결과가 이렇게 귀한 일이 될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마26: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26: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마26: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마26: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누구에게도 하시지 않으신 칭찬을 이 여인에게 했습니다. 이 여인은 나의 장례를 위해서 한 것이다. 이 여인의 한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 마다 전하여 저를 기념하라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는 것은 25장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구제도 중요하고 봉사도 필요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 그들을 돕는 일은 항상 할 것이지만, 이 여인이 한 행위는 정말 좋은 일을 했다. 너희들도 이렇게하여야한다. 하신 것입니다. 내 장사를 위함이라 구원을 위한 내 장례를 생각하여 미리 예비하였다 했습니다. 참된 예배는 십자가를 행하며, 예배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교회의 일을 하다 보면 교회의 일보다 재산을 생각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어려운 때에지만, 교회의 물질은 쓰기 위한 것입니다. 어디에다가 써야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운동을 위해서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회는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아야합니다. 우리제직들이 교회 살림을 맡았지만, 재정 위주, 물질 위주로 모든 교회 살림을 살면 안됩니다. 우리들은 다 청지기입니다. 우리들 뿐 아니라, 교인들이 드린 물질을 어디에다가 쓸 것인가를 계획하고 의논하고 실행하는 것이 교회 제직회의 기능입니다. 경제가 어려운 때이니 무조건 줄이자고만 하면 물질 중심의 교회가 됩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들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쓰여지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여인 같이 아낌없이 드려야합니다. 서울 중계동에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는 주일학교를 당분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지출만 많고 성과가 없어여 그렇습니다. 했습니다. 옳은 말이 아닌 줄 압니다. 쓸 데 없이 쓰라는 것 아닙니다. 얼마나 귀한 연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교회에 맡겨준 재정을 어떻게 하든지 그 용도를 찾아서 부지런히 사용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집의 창고가 쓸 것으로 가득 찬다는 것은 교인들의 창고도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자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가장 아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물질입니까
그렇다면 주님께 물질을 드릴 수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까 그 소중한 것이라도 주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주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자가 됩니다. 이 여인은 자신에게 있는 것 중에 제일 귀한 것, 곧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행한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귀한 것을 드리려면 먼저 자신이 깨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름을 쏟아 부으려면 옥합을 깨뜨려야합니다. 옥합을 깨기 전에는 기름을 부을 수가 없습니다. 참된 예배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옥합이 깨어질 때에 향유가 흘러나오고 온 방에 그 향내로 가득차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가 깨어지기 전에는 우리의 귀한 것들을 드린다는 예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도 깨어져야합니다. 우리들의 교파주의, 권위주의의 교만의 옥합도 깨어져야합니다. 우리 겉사람이 깨어질 때에 우리 속의 보배인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우리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모든 인간 악취가 다 없어지고 향내로 온 방에 가득한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드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깨어져야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드리려해도 자신이 먼저 산산 조각이 나지 않고서는 드림이 되지 않습니다.
셋째로, 주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사람들에게 반대 받고 조롱 당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 마리아의 행위가 주님께서는 극히 칭찬하신 일이지만, 인본주의적인 사람들에서는 책망과 조롱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에 언제나 칭찬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 넘어집니다.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만 따져야합니다. 주님께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 들을 일이면 안심해도 됩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더라 하는 한 마디 말에 자존심 상해하고 상처 받는 사람들은 귀한 일에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마리아의 에배 행위, 헌신의 행위를 보면서 어떤 평가를 내립니까 혹 그 때의 무리들이나, 제자들 같은 마음은 없습니까 가룟 유다 같은 도적의 심보도 있었습니다. 자기 일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것을 드려도 아깝지 않고 어떤 것이 깨어져도 상관 없고 어떤 조롱이 있어도 담대합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과연 나는 내 귀한 것들 중에 무엇을 드렸으며, 무엇을 드릴 수 있겠는가 생각하시는 이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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