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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기 (마26:4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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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의 재산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재산은 대체로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재산과 보이지 않는 재산입니다. 둘 다 소중한 재산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져 보면 보이는 재산보다 보이지 않는 재산이 훨씬 더 값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것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재산입니다. 눈에 보이는 재산들은 사실 없어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재물이나 집 같은 재산은 적거나 혹은 없어도 좀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그만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재산은 비록 무형의 재산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재산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 소망, 사랑 같은 재산이 없다면 사람들이 살아 갈 수가 없는 재산입니다. 소망이 없는 삶, 사랑이 없는 관계, 이것은 실로 비참한 삶의 모습들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삶에 있어서 무형의 재산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형의 재산 중에서도 더욱 소중한 재산이 있습니다. 그것이 용기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용기라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 것이고 필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작게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로부터 크게는 삶을 운영해 나가는 일에 이르기까지 이 용기는 굉장히 큰 역할을 해냅니다.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들은 세상을 늠름하게 살아갑니다. 또 세상의 난국을 잘 헤쳐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네카는 “운명은 부를 박탈할 수는 있으나 용기는 박탈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업적들을 보면 모두 다 용기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성경을 보아도 용기 있게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철권통치자 바로와 싸워 이긴 모세의 용기,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의 용맹,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ㅈ던 스데반의 용기, 그리고 일생을 예수님을 위하여 희생을 하면서도 벅찬 감격 속에서 살아갔던 사도 바울의 용기들은 모두 멋진 모습들입니다. 참으로 용기는 이렇게 좋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그런데 용기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용기는 선용될 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지 악용될 때는 말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용기 있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용기의 모습들은 모두 다른 뜻을 지닌 용기입니다.
1. 가룟 유다의 용기입니다. 가룟 유다는 누구보다도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그 용기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용기입니다. 유다가 최후의 만찬석상에 참석하고 있을 때 주님은 침통한 모습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내일 나를 팔 것이다.” 그 때 제자들은 저마다 당황했습니다. 그것이 누구인가, 저마다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그게 내니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다른 제자들은 스승을 팔아 먹을 생각도 없었고 그럴 만한 용기도 없을 뿐 아니라 꿈에도 생각조차 못하였던 일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게 내니이까 하고 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입장이 다릅니다. 지금 주님을 팔아 먹기로 흥정을 다마친 상태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넘겨 주기로 시가까지 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그러고도 천연스럽게 그 자리에 나와 앉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다른 제자들처럼 그게 내니이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앉아 있다 할지라도 주님의 얼굴을 뵙는 순간 고개가 숙여졌을 것이고,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실 때는 마음이 찔려서라도 그 앞에 무릎을 꾾지 않고 견디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천연덕스럽게 그게 나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얼마나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다음 날 새벽 군인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주면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입을 맞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이 같은 용기도 있습니다. 이 같은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용기입니까 그것은 타락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사람이 한번 타락을 하게 되면 이렇게 무서운 사람으로 변해 버립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타락을 하게 되면 두렵기만 하던 여호와 하나님도 부인하게 되고, 하나님을 감히 저주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다”라고 자칭 예수가 될 수도 있는 용기 있는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타락입니까 사람이 욕정으로 한번 타락하면 어제까지만 해도 현숙했던 가정의 주부요. 아내요, 어머니였던 사람이 갑자기 집을 뛰쳐 나가는 만용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물욕에 타락을 하게 되면 형제도, 이웃도, 부모도, 신의도 없어집니다. 사람이 정신이 병 들면 웬만한 일에는 양심의 가책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이 같은 용기는 모두 타락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사람이 타락을 하면 이렇게 무서운 마력의 힘을 입게 됩니다. 가룟 유다도 처음에는 꿈이 많고 장래가 촉망되던 순수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의 가룟 땅에서 살고 있던 그가 북쪽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주님을 친히 찾아와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처음에 그는 아주 청순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타락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가룟 유다의 용기는 병든 용기입니다.
2. 베드로의 용기입니다. 겟세마네 산 위에서 밤을 세워 기도를 하시던 주님은 지쳐버린 제자들과 함게 산을 내려옵니다. 그러나 산 밑에는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가 온 것입니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결박하려고 합니다. 그때 제자들의 눈에서 순간 불이 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드로의 눈에서는 더욱 세찬 빛이 났을 것입니다. 그는 성격상 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 곳은 산중이고 광야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강도를 만날 기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행 중 한 명은 대검을 준비해 가지고 다니도록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대검을 차고 있었습니다. 의분을 이기지 못한 베드로는 누군가를 내리쳤습니다. 여기서 주석자는 베드로가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재빨리 피했기 때문에 한 쪽 귀조각만 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고라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용기를 보게 됩니다. 주위에는 칼과 창으로 무장된 군인들이 포위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곳은 인적이 드문 산중입니다. 한 사람쯤 죽어도 모를 그런 곳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맨주먹입니다. 상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 같은 환경에서 베드로가 단신으로 칼을 빼들고 상대를 내리칠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그에게 남다른 용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한 사람은 스승을 팔고 또 다른 제자들은 무서워 질려 있는 그때 혼자서 적과 대항하는 베드로의 용기는 굉장한 용기입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뒤를 따르는 데는 이와 같은 용기와 용맹이 요구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위 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 꾸준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면서 살아가는 데도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책을 끼고 길을 걸어가는 데도 이 용기는 있어야 합니다. 용기 없는 그리스도인은 소신 있게 신앙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 같은 베드로의 용기는 사실 용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 같은 베드로의 용기 있는 행동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그를 냉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느니라.” 얼마나 준엄한 책망입니까 이 같은 베드로의 용기는 다름 아닌 혈기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혈기에서 나온 용기는 때로 용감해 보이고, 씩씩하게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경솔한 용기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위험한 용기입닏. 회의를 할 때 자기의 의견과 맞지 않는다고 큰 소리를 내는 사람, 부부 싸움에서 언제나 큰 소리로 싸우며 부수는 사람, 자기 이성을 조절하지 못하고 언제나 흥분하는 사람, 이것이 모두 혈기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실수하게 하는 요인들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의협심 때문에 칼을 빼드는 용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주님은 그 행동에 감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그 같은 베드로의 용기 있는 행동은 주님의 가시는 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생활은 의협심이나 의리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예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실패의 경험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혈기에서 나온 용기는 용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만용입니다. 혈기일 뿐입니다.
3. 예수님의 진정한 용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용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여주신 용기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용기 있는 행동는 우리들에게 두고두고 깊은 감명을 던져 주는 그런 용기입니다. 어제까지 자기를 따르던 제자가 오늘은 자기 앞에 배신자로 나타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주님의 심정은 괘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배신당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앞에 서 있는 제자에게 “친구여”라고 부르십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하늘의 12영도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단칼에 물리칠 수도 있었지만 무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은 참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은 병력 6천 명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12영은 곧 72,000명의 힘을 지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곧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을 도로 꽂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기입니다. 할 수 없어서 참는 것은 용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진정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웬델 필립스라는 사람은 “육체적인 용기는 본능이고, 도덕적인 용기는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용기이고, 신앙적인 용기는 최상의 용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종류의 용기를 보았습니다. 가룟 유다의 용기는 분명 타락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그것은 마비된 양심이지 용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이 같은 마비된 양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베드로의 용기는 혈기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의분일 뿐 좋은 용기는 아닙니다. 진정한 용기는 주님의 용기입니다. 그것은 참음으로 나온 용기입니다. 무능해서가 아니라 보다 높은 뜻을 위해 참는 데서 나온 용기입니다. 주님은 이 같은 용기로 십자가를 지셨고 무덤에서 승리하셨고 우리에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고난 주일 아침에 주님의 용기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용기 있는 성도들이 되기 위하여 힘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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