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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않으려면 (마26:69-74)

본문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70-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72-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74-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세 번 부인을 하게 됨으로 그의 일생일대에 씻을 수 없는 큰 오점을 남기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가 살았을 때 돌이킬수 없는 가슴 아픔일이었을 것이며,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영원한 손해를 보는 이런 안타까운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베드로가 왜 이런 돌이킬수 없는 가슴아픈 일을 격게되고, 영원한 손해를 보게되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지 보면서, 우리도 이 땅에서 가슴아픈 일로 기억이 되고, 영원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영원을 손해보게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1.왜 베드로에게 후회할 일이 생겼습니까
1지나친 장담 때문입니다(33) (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가 이렇게 장담하게 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다른 사람들보다 믿음이 더 좋다는 우월감 때문이고,
둘째는,매사에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 때문이고,
셋째는,깊이 생각지 않고 감정으로 일을 처리하려는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장담하는 것을 보면 바로 이런 것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고백과 장담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진실한 고백은 진실한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수의 시발은 ‘다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던데 있습니다. ‘남들은 다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고백은 다분히 남들보다 자기가 최고라고 여기는 이런 마음, 남들보다 내가 더 낫고, 잘한다는 이런 우월감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손해보게하고, 후회하게하고,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리의 심정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눅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 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2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0) (마 26: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게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주님은 세 제자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당부를 듣고도 졸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졸고 있을 때 일이 일어나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여기서 말하는 원수는 마귀를 상징합니다. 잘때라는 것은 신자가 기도하지 않고 영적인 잠에 빠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신자의 마음속에 있어서는 안될 불신, 증오, 시기, 게으름, 악한 마음등입니다. 잠자는 사이에 원수가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갑니다. 졸고 있는 사이 심령속에 잡초를 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여기서 말하는 시험이 바로 잡초를 집어넣는 것을 말합니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기도하다 졸수 있고, 예배드리는 중에 졸수 있고, 말씀을 들을 때 졸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졸 때 마귀는 와서 잡초를 뿌려놓고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혈기를 부렸기 때문입니다(52) 베드로는 예수님을 잡으로 온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쳤습니다. 이때 주님은 ‘네 검을 도로 집어 넣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위기에 선 주님을 보호하는 방법이 칼을 휘둘러 지켜드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다혈질이 발동해 칼을 휘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충성의 방법이 아니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정의를 위한다든지, 주님을 위한다든지,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폭력을 휘두르거나, 혈기를 부르거나, 악한 감정을 가지고 도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칼로 주님을, 교회를 위한다고 칼을 빼서 휘두르지 마세요. 오히려 그것은 주님이나, 교회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잡으로 온 사람들을 칼 아니라, 그 무엇으로 못해서 그냥 있었겠습니까 그가 능력이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은 그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러오니 불쌍히 여기 달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손해보고, 후회하고, 망할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하거든 내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든 칼을 휘두르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부족함을 보거든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주세요. 힘을 달라고, 믿음을 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말입니다.
4멀찍이 좇아갔기 때문입니다(58) (마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 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일찌감치 도망한 제자들보다는 그나마 멀찍이라도 좇아가는 것이 더 낫기는 하지만, 그러나 ‘멀찍이’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아니 오히려 주님의 가슴의 못을 더 박게 되는 일들이 일어남을 볼수 있습니다. 목사의 입장에서 볼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도망한 사람들이야 정말 불쌍함을 가지고 있지만, 멀찍이 좇아가는 성도들을 볼때는 가슴이 찢어지고, 참 아픕니다. 여러분, 기왕에 예수님을 좇으리라 따랐다면 멀찍이가 아니라 가까이 좇아가기를 바랍니다. 멀찍이는 자기에게 조금 불리하면 여차하면 도망할 태세입니다. 관망하기 편합니다. 자신의 정체르 감추기도 좋습니다. 그래서 여차하면 도망해 버립니다. 우리는 멀찍이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간격이 크면 클수록 문제가 일어날 확률이 높습니다. 멀어서는 안될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 부부 사이, 친구사이, 교회와는 멀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죄와 불신과 의심과 게으름과는 멀수록 좋습니다. 지금 나와 주님과의 거리는 몇미터인지 한번 측벙해보세요. 5하속들 사이에 끼어 있었기 때문입니다(58) (마 26: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 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끌려 들어가신 현장 안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하속들 틈바구니 속에 끼어 앉았습니다.
그곳은 자신을 숨기기에 적당한 장소였습니다. 하속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말과 행동이 거친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명령 하나로 어떤 행동이든지 감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칠고 상스럽고 잘 떠들고 무질서한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는 앉아서는 안될 곳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죽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데 하속들 틈 바귀니 속에 끼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들은 하속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으면 내 영혼 손해보고, 후회할 일하고, 망하게 됩니다. 6바깥 뜰에 앉았기 때문입니다(69) (마 26: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는 흥분한 군중들과 하속들이 주님의 얼굴에 침뱉고 때리고 주먹으로 치는 치욕의 현장을 지켜보면서도 역시 바깥 뜰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깥뜰은 외곽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외곽을 멤돈 것입니다.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오지 않고 외곽을 맴돌면 주역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외곽만 돌기만 하고 깊이 참여하지 않으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시골 정미소에 가면 큰 바퀴가 돌기 때문에 필요도 없이 덩달아 따라 도는 작은 바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도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도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겉돌고, 교회를 겉돌면 축복의 역사를 이룰수 없습니다.
2.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1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하고난 직후 닭이 울었습니다. 그는 그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주님께서 34절에 ‘오늘밤 닭울기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은 영원히 타락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은 회개합니다. 어거스틴도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침체와 위기와 문제에서 극복하려면 그 순간에 말씀이 생각나야 합니다. 신령한 귀와 눈과 가슴이 닫힌 사람은 이 시간 하나님께 열어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2밖으로 나갔습니다 말씀이 생각나면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불신의 현장, 침체의 현장, 이심의 현장, 사탄이 머무는 현장, 죄악의 현장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 질식해 죽습니다.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밖과 죄의 밖입니다. 예수님 밖으로 뛰어나가면 죽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나 죄의 밖으로 뛰어 나가면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등지면 죽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삽니다.
3심히 통곡했습니다(75)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 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대부분의 주경가들은 베드로의 통곡을 회개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의 그날의 회개는 베드로를 새롭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베드로의 통곡은 그 동안 자신의 모든 잘못을 철저하게 회개하는 눈물이었고, 고백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베드로의 통곡이 있어야 합니다. 고침받고 강건한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면 통곡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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