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탄생3 (마2:3-10)
본문
3.예수 탄생에 대한 세 가지 반응
1헤롯왕의 반응입니다. 헤롯왕은 겉으로는 예수 탄생함을 환영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적의의 찬 태도를 보입니다. 헤롯왕은 예수가 탄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4절과 7절에 보면 예수가 어디에 태어났는지를 제사장들과 박사들에게 묻습니다. 8절에서는 찾아서 자기도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13절은 그가 아기를 찾고자 하는 것은 죽이려고 찾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찾지도 만나지도 못합니다. 예수에 대해서 들어서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일이 없기 때문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실상은 죽은 자들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왕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나 세상의 것이 떠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게 될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오늘날 헤롯왕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겉으로는 믿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모양은 있습니다. 그러나 알맹이는 없습니다. 찬송은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감격이 없습니다. 예수를 부릅니다. 그러나 마음에 구 속의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찾는 것은 자기의 배나 불리고자, 자기의 유익을 얻고자 찾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돈을 벌어 보고, 예수를 통하여 건강을 얻어 보고, 예수를 통하여 대인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하여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왕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예수를 잡아죽이고자 하는 무리로 전략을 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모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알기는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를 떠나가게 되면 이들이 더 무섭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게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알고자, 그를 따르고자 해서 아니라 단지 눈에 보이는 빵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가 베푸는 병고침에 더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주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빵을 주는 것보다, 병고치는 것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바로 그라고 가르치고, 그를 믿고 따를 것을 말씀을 전하였을 때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라고 외쳐 댔던 사람들이 바로 기적과 이적을 보고 쫓았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를 따르므로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이 되던가 아니면 예수를 떠나서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이 되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되어지지 않으려면 겉모습만 따르지 마십시오. 겉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믿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예배드리는 껍데기 가졌다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내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예수가 믿어지지 않고 있다면 가슴을 치면서 통탄을 해야 합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주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되어지도록 매달려야 합니다.
2제사장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5-6절입니다.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찾지도, 경배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전문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이 탄생을 했으면 그들이 제일 먼저 찾아가 경배를 해야지 경배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한 번에 뀁니다. 줄줄줄 합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박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아는 것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가진 것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많이 알고, 많이 가진들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나누지 않으면, 드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생된자(아는 자)가 오히려 심판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더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알지만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헤롯왕보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더 불쌍합니다. 알고도 행치 않으니 말입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있음을 알고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도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분명히 해야 할 일임을 알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이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머리로만 판단만 하며 심판 거리를 쌓습니다. 제사장들이 예수가 베들레헴에 메시야로 태어난 것을 안다면 와서 경배를 해야 그 믿음이 옳은 것입니다. 믿는 다면 행하여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날지라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견고합니다.
그러므로 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앎에도 불구하고 행하여지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고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행함의 믿음이 세워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들은 습관적으로만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헤롯왕이 부르니까 나와서 습관적으로 알려 줍니다. 이들이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습관적으로 말씀을 알려주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헤롯왕이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예수의 행적을 조사하고, 반응을 보이는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결코 흥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담담하게 표현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신앙의 태도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것, 경계해야 할 것은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많았습니다. 목사니까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습관적으로 이 일, 저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감동이 없습니다. 오히려 힘이 들고, 귀찮을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그렇게 힘쓰고 애쓰는데 그것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야속만 해졌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니까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합니다. 그것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되어질 때 하기는 하나 역사가 없습니다. 힘만 듭니다.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듣고,인사하고, 등등. 감동이 있습디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 실수 있던가요 참 오늘 내가 교회 오기 잘했구나 마음이 들던가요 습관적으로 헌금을 해보십시오. 주님이 물질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주신 이에게 감사하며, 앞으로도 주실 것을 믿으며 드림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십일조, 주일, 선교, 장학, 건축 헌금을 드릴 때 어떨 때는 솔직히 아까워 집니다. 계산이 되어집니다. 이들에게는 회개가 없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헌금 도하고, 예배도 빠짐없이 드립니다. 그러니 회개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가슴이 뜨겁지 않더라 이겁니다. 감동이 없더라 이겁니다. 답답해지더라 이겁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 중에 제일 불행한 사람들은 한 번도 은혜에 감격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입니까 예수 믿은 오랜 세월만 자랑하고 훈장만 자랑하는 사람, 한 번도 회개의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한 사람, 주님의 피 묻은 손을 보며 가슴을 쳐보지 못한 사람, 부활하신 주님께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헌신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즘, 종교를 하나의 사치로 생각하는 사람, 주일을, 예배를 의레껏 행하는 하나의 행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배 한시간 떼운 것으로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 헌금 얼마 한 것으로 조금이라도 했다고 좋아하는 사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은 어쩌면 저 같은 목사 그룹에 속한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집사님들 그룹에 속한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오래 믿은 것 자랑하지 말고 예수 만난 것 자랑합시다. 훈장 자랑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자랑합시다. 직분 자랑하지 말고 쓰임 받음을 자랑합시다.
3동방박사들의 반응 1절에 보면 이들은 동방에서부터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방이 어디냐라고 말할 때에 대부분 성경의 학자들은 바벨론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에는 예루살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유대인 포로들이 정착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구약의 예언의 사건을 알고 때가 되어 왔다고 봅니다. 동방(바벨론)과 예루살렘의 거리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이들이 왔습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가 만나야 할 예수가 있는 곳, 내가 경배해야 할 예수가 있는 곳, 내 고향, 내 나라, 내 집이 있는 예루살렘에 예수를 경배하러 왔습니다. 2절에 경배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 그들이 경배할 곳을 찾은 것을 가장 기뻐하고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그들은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1헤롯왕의 반응입니다. 헤롯왕은 겉으로는 예수 탄생함을 환영하나 속으로는 저주하고 적의의 찬 태도를 보입니다. 헤롯왕은 예수가 탄생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4절과 7절에 보면 예수가 어디에 태어났는지를 제사장들과 박사들에게 묻습니다. 8절에서는 찾아서 자기도 경배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13절은 그가 아기를 찾고자 하는 것은 죽이려고 찾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찾지도 만나지도 못합니다. 예수에 대해서 들어서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일이 없기 때문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실상은 죽은 자들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왕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으나 세상의 것이 떠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게 될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오늘날 헤롯왕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겉으로는 믿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모양은 있습니다. 그러나 알맹이는 없습니다. 찬송은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감격이 없습니다. 예수를 부릅니다. 그러나 마음에 구 속의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를 찾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찾는 것은 자기의 배나 불리고자, 자기의 유익을 얻고자 찾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돈을 벌어 보고, 예수를 통하여 건강을 얻어 보고, 예수를 통하여 대인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하여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헤롯왕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예수를 잡아죽이고자 하는 무리로 전략을 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모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금 알기는 안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를 떠나가게 되면 이들이 더 무섭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랐습니다. 게중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알고자, 그를 따르고자 해서 아니라 단지 눈에 보이는 빵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가 베푸는 병고침에 더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주님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빵을 주는 것보다, 병고치는 것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바로 그라고 가르치고, 그를 믿고 따를 것을 말씀을 전하였을 때 다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라고 외쳐 댔던 사람들이 바로 기적과 이적을 보고 쫓았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를 따르므로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는 사람이 되던가 아니면 예수를 떠나서 예수를 대적하는 사람이 되던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되어지지 않으려면 겉모습만 따르지 마십시오. 겉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믿는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으십시오. 예배드리는 껍데기 가졌다고 나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정말 내 마음속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이 예수가 믿어지지 않고 있다면 가슴을 치면서 통탄을 해야 합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주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되어지도록 매달려야 합니다.
2제사장들의 반응입니다. 이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5-6절입니다.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알기는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찾지도, 경배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전문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이 탄생을 했으면 그들이 제일 먼저 찾아가 경배를 해야지 경배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쭉 한 번에 뀁니다. 줄줄줄 합니다.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박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아는 것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가진 것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많이 알고, 많이 가진들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나누지 않으면, 드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생된자(아는 자)가 오히려 심판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더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알지만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떻게 보면 헤롯왕보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더 불쌍합니다. 알고도 행치 않으니 말입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있음을 알고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도는 주님의 명령이기에 분명히 해야 할 일임을 알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주님이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마음이 강퍅해집니다. 머리로만 판단만 하며 심판 거리를 쌓습니다. 제사장들이 예수가 베들레헴에 메시야로 태어난 것을 안다면 와서 경배를 해야 그 믿음이 옳은 것입니다. 믿는 다면 행하여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날지라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견고합니다.
그러므로 안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앎에도 불구하고 행하여지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고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행함의 믿음이 세워지도록 기도하십시오. ㉯이들은 습관적으로만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헤롯왕이 부르니까 나와서 습관적으로 알려 줍니다. 이들이 정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서 하나님께로 이끄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제사를 드리고, 습관적으로 말씀을 알려주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헤롯왕이 시키니까 시키는 대로 예수의 행적을 조사하고, 반응을 보이는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결코 흥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교적으로 그럴 수 있다고 담담하게 표현했던 사람들일 뿐입니다. 신앙의 태도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것, 경계해야 할 것은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많았습니다. 목사니까 습관적으로 기도하고,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습관적으로 이 일, 저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까 감동이 없습니다. 오히려 힘이 들고, 귀찮을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그렇게 힘쓰고 애쓰는데 그것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야속만 해졌습니다. 습관적으로 하니까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합니다. 그것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되어질 때 하기는 하나 역사가 없습니다. 힘만 듭니다. 습관적으로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순서에 따라서 일어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듣고,인사하고, 등등. 감동이 있습디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 실수 있던가요 참 오늘 내가 교회 오기 잘했구나 마음이 들던가요 습관적으로 헌금을 해보십시오. 주님이 물질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주신 이에게 감사하며, 앞으로도 주실 것을 믿으며 드림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십일조, 주일, 선교, 장학, 건축 헌금을 드릴 때 어떨 때는 솔직히 아까워 집니다. 계산이 되어집니다. 이들에게는 회개가 없습니다.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헌금 도하고, 예배도 빠짐없이 드립니다. 그러니 회개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가슴이 뜨겁지 않더라 이겁니다. 감동이 없더라 이겁니다. 답답해지더라 이겁니다. 오늘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 중에 제일 불행한 사람들은 한 번도 은혜에 감격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입니까 예수 믿은 오랜 세월만 자랑하고 훈장만 자랑하는 사람, 한 번도 회개의 눈물을 흘려 보지 못한 사람, 주님의 피 묻은 손을 보며 가슴을 쳐보지 못한 사람, 부활하신 주님께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헌신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요즘, 종교를 하나의 사치로 생각하는 사람, 주일을, 예배를 의레껏 행하는 하나의 행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예배 한시간 떼운 것으로 마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 헌금 얼마 한 것으로 조금이라도 했다고 좋아하는 사람. 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이런 사람들은 어쩌면 저 같은 목사 그룹에 속한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집사님들 그룹에 속한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는 사람들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오래 믿은 것 자랑하지 말고 예수 만난 것 자랑합시다. 훈장 자랑하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자랑합시다. 직분 자랑하지 말고 쓰임 받음을 자랑합시다.
3동방박사들의 반응 1절에 보면 이들은 동방에서부터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동방이 어디냐라고 말할 때에 대부분 성경의 학자들은 바벨론으로 봅니다. 그 이유는 바벨론에는 예루살렘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유대인 포로들이 정착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구약의 예언의 사건을 알고 때가 되어 왔다고 봅니다. 동방(바벨론)과 예루살렘의 거리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이들이 왔습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가 만나야 할 예수가 있는 곳, 내가 경배해야 할 예수가 있는 곳, 내 고향, 내 나라, 내 집이 있는 예루살렘에 예수를 경배하러 왔습니다. 2절에 경배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 그들이 경배할 곳을 찾은 것을 가장 기뻐하고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 그들은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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