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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과 선택 (마22:1-14)

본문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여러 가지 형태의 교회생활을 합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교회의 직분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누군가에 의해 초청을 받고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은 다 선택받은 사람이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일까요 교회당에 출석하고 있으면서도 교회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믿는 사람도 구원함을 받은 사람일까요 의외로 오늘날 교회 안에 자기 생각에 맞지 않다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구원함을 받은 사람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초청을 받고 교회당에 다니고 있다고 하여서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당에 다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구원함을 받은 천국백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구원함을 받아 천국백성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신분됨을 표현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될 본문의 주제는 초청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다 택한 사람이 아니고, 택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는 천국의 개념, 두 번째로는 이 비유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반부 비유의 내용, 세 번째로는 후반부 비유의 내용, 네 번째로는 비유의 결론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천국의 개념 이 비유는 천국에 관한 비유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천국에 관하여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비유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천국의 개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일반적으로 천국이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 항상 미래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종말론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국은 항상 죽어서만 갈 수 있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이해는 자연히 현실 도피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성격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러한 성향이 성령님체험이나 은사를 강조함으로 현세에서 받는 축복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많이 바꾸어지게 되어 현세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모두는 천국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생겨난 결과들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우리 교회 믿음의 가족들은 다 이해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천국은 구원, 영생이나 생명,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의미입니다(마19:16-27). 특히 천국을 정의할 때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만 죄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 들어가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천국에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모든 삶의 영역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면 천국을 내세적으로만 또는 현세적인 개념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을 경험하는 것은 내세에만 제한되어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천국은 현재에도 우리가 경험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천국이 현재적인 성격과 미래적인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지게 되면 우리 신자의 생활에 많은 변화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2. 첫 번째 비유의 내용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현재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누릴 수 있으며, 또한 미래에는 완전한 천국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천국 비유에서 이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한 비유이지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먼저 이 본문 2절에서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천국에 관한 교훈을 얻으려면 임금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비유의 중심되는 내용을 이 임금의 행동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그 임금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임금은 여러 사람들을 초청하여 이 잔치에 참여해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임금의 초청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임금의 초청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 차로 가고" 임금이 잔치를 베풀고 초청을 하였는데 이 초청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도 않고 밭으로 가기도 하고, 상업 차로 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임금의 초청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임금의 이러한 초청이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주어진 초청이라면 이러한 거부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는 오히려 임금이 무례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제각기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임금 아들의 혼인잔치라고 하여서 가야한다고 하는 것은 때로는 많은 희생과 불이익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이러한 초청이 갑작스러운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미리 다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사실은 3절에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라고 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 "청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 말은 헬라어 성경에 케크레이메누스(, who had been invited NIV)라고 하는 말인데, 동사의 시제가 관심거리입니다. 이 시제는 과거완료 분사형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의미는 과거에 이미 초청장을 보내어 초청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법적인 특징은 이미 과거에 초청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지금 종들을 보내는 것은 혼인자치가 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오십시오"라고 하는 초청입니다. 그러면 이 초청이 몇 번째 초청입니까 두 번째 초청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4절에 다시 한번 더 종들을 보내어 혼인잔치에 나와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초청까지 합하면 모두 세 번의 초청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사실 임금은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벌을 내릴 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세 번씩이나 초청하고 기회를 주는 것은 임금이 사랑이 있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임금의 초청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 초청을 전하는 자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임금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밭으로, 상업 차로 간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어떤 사실을 느꼈습니까 밭을 돌보는 것이나 장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만 왜 이 사람들은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였겠습니까 그 이유를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이 사살들은 임금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임금의 위치와 자기들의 위치와는 전혀 다른 분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 본문 7절과 13절에 보면 이 임금이 어떤 위치에 있는 분이신 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살인한 자들을 죽이고 동리를 불태우시는 분"이시고, "바깥 어두운 곳에 쫓아 낼 수 있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임금의 위치를 안다면 어떻게 임금의 초청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임금이 어떤 사람들을 특별히 초청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들을 특별한 관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청 자제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의 초청은 자기가 산 밭을 돌보는 일이나 자신의 사업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임금의 초청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누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판 성경에 보면 1절에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라고 되어 있어서 누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지 정확하게 표현이 안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문에 있는 대상을 지적하는 대명사 하나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성경에 보면 "그들에게"(, them)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영어 번역성경을 대조해 보아도 이 사실은 대번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을 때 "그들에게"라는 말을 넣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문제는 항상 전후문맥을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1:43-46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를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서워 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믿지 아니하고 도리어 잡으려고 하는 이들의 행동을 보시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이 전파하신 천국복음에 관한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대제사장들은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히브리어에서 "분리한다"고 하는 의미인 파라스(, devide)라는 말에 유래된 이름인데, 이들은 이름 그대로 분리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유대교 순수주의자들이었고, 죄악되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일체 관계를 맺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열심을 가진 자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산 넘고 물을 건너 전도하는 열심을 가진 자이기도 하였습니다만 율법을 가지고는 지키지는 못하는 이중성으로 인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하는 책망을 주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마23:15). 대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의 공통점은 두 집단 모두 택한 백성인 자기들만 구약의 약속에 따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비유가 우선적으로 당시에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잡으려고 하는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임금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다는 것은 큰 특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 특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로부터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순종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라는 언약의 말씀 가운데 잘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었습니다만 구약성경에 자주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이며 혼인잔치의 초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초청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였습니까 그들은 약속을 받은 것으로 좋아했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초청에는 응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사상은 이스라엘이 천국의 혼인잔치에 초청하는 언약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으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초청에 응하도록 그의 종들인 선지자들을 보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본문의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심지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첫 번째 내용에서 초청의 말씀인 언약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본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거절하였다고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하여 가르쳐 주시는 부분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복되고 좋은 나라에 누가 들어갈 수 있느냐에 대한 교훈을 주시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약속을 받고도 그 초청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3. 두 번째 비유의 내용 그러나 주님은 여기에서 이 비유의 말씀을 끝맺지 아니하시고 이어서 혼인잔치의 초청대상을 확대하고 누구든지 불러모으고 있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초청을 해도 오지 않는 사람들 대신에 모든 사람들을 초청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악한 자들도 있을 것이고, 선한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지금 현재 어떤 사람인지, 또는 과거에 어떤 일을 하였는지 그것을 묻지 않고 누구든지 혼인잔치의 초청에 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임금의 초청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제 임금은 이들을 둘러보기 위하여 잔치자리에 왔습니다. 그러나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어떤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마22:11-12). 임금은 그에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에 들어왔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이 사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임금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는 청함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청받은 자로서 하게 되어 있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 연구하였습니다. 여기에 예복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만 본문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관습과 관계된 것으로 초청자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잔치에서 초청자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복을 한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예복을 입음으로 초청자를 존중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증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에 비추어 볼 때 분명 그는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입도록 되어 있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청자의 요구대로 행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화란의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Hermam N. Ridderbos)는 "그는 청함을 받은 사람이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는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초청자이신 임금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하는 증거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예복을 입지 않은 일에 대하여 물어도 그 사람은 입이 있어도 대답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볼 때도 이 사람은 반드시 하도록 되어 있는 어떤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마22:12).
4. 비유의 결론 그러면 여기서 다시 임금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천국의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열려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복음이 온 세상에 열려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만 제한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하여 가르쳐 주시는 비유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이 사실은 이 비유의 결론인 14절에 명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비유의 결론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청함을 받았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1:43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관련하여 생각한다면 열매 맺는 백성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듣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해서 모두 다 구원을 받고 천국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초청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에 따라 순종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함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청함을 받고 동시에 택함을 입은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초청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선택교리의 중요성이 있는데 하나님의 선택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7장 "사람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3항에 보면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님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믿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게 하기를 약속하셨다"(요3:5-8; 6:37; 44; 겔36:26,27) 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천국복음을 듣고 그 초청에 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 그는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영원토록 교제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천국의 초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국에 대하여서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매사에 잘 되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이 다스리는 천국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나 파산이나 불치병, 심각한 재난을 당하게 되면 인생을 돌아보고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돌아보고 하나님과 천국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세상만사가 우연하게 되어지거나, 또는 자기 생각대로 되어 지는 것처럼 잠시 잠깐 여겨질 때도 있으나 하나님이 한시라도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우리가 현상적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밭을 살 수도 있고, 장사할 수도 있고, 사업을 할 수도 있고, 학업에 열중할 수도 있고, 연구에 전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은 잊어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천국에 관한 관심입니다. 천국에 관한 초청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아들이고 나온다고 곧바로 천국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의 초청을 받고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비유에 나오는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번 교회 안에 초청을 받고 들어오면 영원히 천국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교인으로 등록은 되어 있고 성경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는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천국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등록하고 다니는 경우들이 그러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는 사람이 그러한 경우인데 이 사람은 청함을 받았으되 택함을 받은 자는 아닙니다. 참으로 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초청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이 사람들은 적은 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소수인 교회에 의해 천국은 확장되어 갑니다. 이 본문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에 대하여 보여주시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초청에 응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결론은 구원과 행위는 다른 것이 아니고 같은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만 천국의 즐거움을 이 세상에서도 누릴 수가 있고, 미래에는 완전한 천국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성경의 가장 중심되는 주제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고, 누가 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천국은 정말로 좋은 곳입니다. 지금 현재에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은혜로운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만,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고통과 눈물과 슬픔이 없는 완전한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나라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이 문이 열려 있습니다만 주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초청자이신 주님이 정해주신 방법에 따라 순종하는 자가 이 나라에서 은혜로운 축복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 순간부터 생이 다르게 변화되어 가는 것과, 예전에 경험해 보지 않았던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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