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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아 ! 예루살렘아 ! (마23:37-39)

본문

한해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 아니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면서 살아 올 때도 있었다. 우리가 그 사랑을 잊어버리고 거부할 때도 주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지 아니하시고 계속 우리를 지켜보면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계속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어 주셨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 뜨거운 예수님의 사랑을 예루살렘이 받아 드렸습니까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했고 무시해 버렸다. 그 사랑을 거부당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계신다. 누가는 눅19:41에서 이때 예수님이 우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 사랑을 잊어버리고 거부할 때 예수님은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지 아십니까 나를 위해서 죽기까지 사랑하는 사랑이다. 주님의 뜨거운 이 사랑을 받고 계시죠 인간의 그 어떤 사랑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 아시죠 예루살렘아 ! 예루살렘아 ! 가슴이 메이는 탄식을 하시는 주님은 오늘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외침이다. 주님의 탄식 어린 외침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3가지로 살펴 보자.
첫째:말씀을 거부한 예루살렘 ! 37절 = "예루살렘아 ! 예루살렘아 !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 "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죽인 예루살렘 성을 보고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선지자들을 죽인 예루살렘 죄악이 너무나 커서 주님은 지금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이 보낸 자들을 죽였다는 것은 너무나 가슴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왜 저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외면하고 선지자들을 죽였을까요 자신들의 더러운 죄악된 모습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서 선지자들을 죽인 것이다.
 예루살렘 "평화"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 성전이 있는 곳이다. 복음적으로 교회를 의미한다. 선지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대언자이다. 특히 죄를 강하게 지적하는게 선지자의 사명이다. 그 선지자를 죽이고 돌로 쳤다는 것은 하나님은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였다. 저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게 아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는 악한 무리였다. 선지자는 곧 교회 목사를 의미한다. 목사가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대언해도 성도들이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외면하고 무시해 버린다면 성도들이 곧 목사를 죽이고 돌로 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예수님은 그러한 성도들이 있다면 그 교회를 보고 탄식하실 것이다. 교회를 보고 탄식한다는 것은 곧 성도들을 보고 탄식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평화가 있어야 할 예루살렘에 성전은 강도의 소굴로 변해 버렸고 평화가 있어야 할 곳에 탐욕과 시기와 미움만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성이다. 거룩한 백성들이 거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보내신 자들을 영접하고 그들이 대언 하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만 했지만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옥에 가두었다. 바로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고 만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종교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몰랐습니까 그들은 너무나 하나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이용하는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계속 자유롭게 하게 못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거룩해야 하듯이 교회도 거룩해야만 한다. 성전에서 목사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목사들 입을 통해서 죄가 지적되고 회개를 촉구할 때 성도들은 마음을 찢고 회개해야 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신앙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주님은 오늘 우리들을 보고 탄식하실 것이다. 저는 이 한해 동안에 수 없이 여러분의 죄를 지적하고 꾸짖었다. 여러분 죄를 지적하고 꾸짖는 것은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다 그 설교 속에서는 나 자신에게도 꾸짖는 말씀이 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두드러진 현상이 하나 있는데 교회에서 목사들이 성도들의 죄를 강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목사가 교회를 부임해서 간 곳은 더욱 그렇다고 한다. 죄를 강하게 지적한 설교를 하면 때리는 설교만 한다고 그 교회 오래 있지 못한다고 한다. 말씀을 듣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판단해서 목사들을 내 쫓고 하는 것이 저 유대인들이 한 짓과 무엇이 다른가 교회만 다닌다고 다 거룩케 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를 다녀도 우리 안에 회개하지 아니한 죄악이 있는 한 우리는 거룩한 자들이 될 수 없다. '엡5:26' 말씀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나님 말씀을 강하게 대언 하지 못할 때 성도는 거룩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강하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해야만 한다. 말씀을 강하게 증거해도 들을까 말까 하는데 적당히 듣기 좋은 말만 해서 거룩한 자들이 되겠는가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들의 죽음을 각오하고 강하게 외쳤지만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죽였듯이 오늘날도 목사가 아무리 강하게 외쳐도 변화되지 아니하면 변화되지 아니한 사람만 불쌍할 뿐이다.
왜 하나님 말씀을 듣고도 변하지 아니할까요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받지 않기 때문이다. (살전2:13)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 "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역사가 나타난다고 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유대인들이 마음을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나왔다. 베드로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였다. 베드로라는 사람을 보고 말씀을 받아 들였다면 누가 변화되겠는가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한 주제에 무슨 헛소리야! " 했다면 마음에 찔림도 없었을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할 때 목사의 말로 들어서는 안된다. 목사의 말로 설교를 들으니까 기껏 말씀 듣고 시험 드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으로 들으면 반드시 우리 마음에 찔림 올 것이다. 그 찔림이 올 때 찔림만 느끼지 말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있어야 만이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서 역사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이 왔는데도 회개가 뒤따르지 아니하면 더 강퍅한 마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행7:51-58' 다같이 읽어보자. 스데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고도 더 악해져서 스데반을 죽인 무리들의 모습이 나온다. 말씀을 듣고 찔림이 온다면 반드시 회개해야 할 것이다. '렘16:12'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 마음이 강퍅해서 하나님 말씀이 심령 속에 자리할 수 없다. '막10:5-6'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으로 들을 때 우리의 돌밭 같은 강퍅한 마음이 부서지고 옥토 밭이 될 때 말씀이 우리 심령 옥토 밭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행7:5
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 우리의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자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 성경은 우리를 책망하고 바르게 한다고 했다. 그것은 곧 택한 자를 온전케 함이라고 했다. 말씀을 외면하고 거부해서 주님의 탄식 소리를 듣지 말기를 바란다. 두 번째:사랑을 거부한 예루살렘아 ! '마23:37'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의 크신 사랑이 강하게 느껴지는 말씀이다. 말씀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선지자들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죽이기 까지 한 무리들을 예수님은 수 없이 구원하려고 사랑을 보이셨다. 그러나 저 악한 무리들은 예수님의 사랑의 품으로 들어오기를 거절했다.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속에 보호하듯이 주님은 그런 사랑으로 유대인들에게 찾아 왔지만 저들은 거부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주님 품을 싫어하고 품을 박차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 한해 동안에 우리도 주님의 사랑의 품을 몇 번이나 뛰쳐나와서 내 멋대로 살아 왔는지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보살펴 주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들은 보살핌 받을 때뿐이고 금방 하나님을 떠나 버리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버리는 저들을 볼 때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저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성경을 보면서 "아! 이 모습이 바로 내모습이구나 " 깨닫게 하여 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한 것이다. 올 한해에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의 사랑을 몇 번이나 우리가 뿌리쳤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도 못했습니까 유대인들도 주님의 사랑을 수 없이 보여 주었지만 저들도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주님의 사랑의 메시지 였지만 저들은 깨닫지 못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모두가 주님의 사랑의 메시지다. 이 사랑의 메시지가 우리에게도 한해 동안 얼마나 많이 들렸는지 모른다. 인간 스스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 아십니까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심령 속에 찾아올 때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택함도 우리가 주님을 택할수 없듯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간 스스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 주시면서 인류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그 사랑을 예수님은 이 땅에서 보여주시고 사랑을 주셨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예수님의 사랑은 인자한 모습만 보이지 아니했다. 주님의 사랑을 계속 거부하고 죄악 속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은 무섭도록 꾸짖고 책망 하셨다. 사랑을 거부한 자들에게 주님의 모습은 너무나 차가웠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탄식하기 전에 23:13절부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 7번 반복해서 소리 치셨다.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대표적인 자들의 모습이다.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들을 결국 누구라고 주님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33절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결론을 짖고 있다.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사랑을 거부한 자들의 끝은 너무 비참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가 받고 있는 주님의 사랑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인간의 사랑을 거부하고 외면하고서는 살아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외면하고서는 참된 삶을 살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주님의 사랑을 거부할 때 인간은 왜 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여러분 ! 이 사랑을 너무 소홀히 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의 간증' 제가 폐병 3기로 다 죽어 갈 때 저는 주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로 알았다. 그러나 88년 1월 8일 새벽 5시30분에 예수님은 나에게 뜨거운 사랑으로 찾아 오셨다. 말씀으로 찾아오신 주님은 "날 버리지 아니했다" 고 하셨다. '호11:8-1
1'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 " 그 뜨거운 사랑을 체험한 난 폐병을 단번에 치료함 받고 주님의 그 사랑에 한없이 울었다. 주님이 그 사랑을 체험한 나는 그 사랑 앞에 내 자신을 드리기로 작정하고 주님의 종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자는 그 사랑을 거부할 수가 없다. 이 한해에 우리가 주님을 사랑을 바쁜 세상 속에서 놓치고 외면하고 살아 왔다면 지금이라도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고 그 사랑의 품속으로 들어가시기 바란다,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우리가 주님을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할 때 우리도 이 세상 속에 주님을 모르고 사는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을 매일 매일 느끼며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말씀과 사랑을 거부한 자들의 최후 38-39절 "보라 !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 예수님은 말씀과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주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은 A.D 70년 8월28일 로마 군을 진두 지휘해온 디도 장군에 의해 황폐화되어 버렸다. 그렇게 화려했던 예루살렘 도시와 거대한 성전은 불 속에서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거부한 자들의 말로를 우리는 역사적으로 분명히 보았다
 보라 ! 예언적인 의미의 말이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 예루살렘 성전이 버린바 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예수님의 재림을 뜻한다 주님 재림이 있을 때까지 말씀과 사랑을 거부한 자들을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나를 보지 못하리라" 지옥으로 간 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보겠는가 주님의 말씀과 사랑을 저버린 자들이 역사적으로 로마에 의해 심판을 받았듯이 세상 끝날 에도 반드시 주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는 저 화려했던 예루살렘이 황폐케 된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비참하게 로마군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초토화되어 버렸다. 로마 황제가 된 베프시안은 아들 디도 장군에게 5만 8천명의 군사를 주어 주후 70년 4월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예루살렘을 총공격했다. 로마군들은 예루살렘 성 전체를 완전 포위했다. 시간이 갈수록 성안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다.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성안에 있던 사람들이 성밖으로 나오면서 금.은 보석 등을 입안에 삼키고 도망쳐 나왔다. 로마 군인들은 이것을 알고 도망쳐 나온 유대인들을 잡아 칼로 배를 가르고 배속에 든 금.은.보석을 찾아가졌다고 한다. 4개월간을 포위하던 로마군은 8월28일 예루살렘 성을 총공격해서 성전을 불태우고 금화를 삼킨 제사장과 유대인들의 배를 갈라 금을 찾아냈고 . 불길에 녹아 내린 성전 기둥과 돌 사이에 스며들게 되자 디도 장군은 모든 금화와 보석을 속속히 찾아내도록 명령했다. 어린이. 여자 할 것 없이 로마 군들의 칼에 다 죽어갔다. 로마 군에 짓밟혀 버린 유대 민족은 전세계에 노예로 팔려 갔다. 노예가 너무 넘쳐서 나중에는 공짜로 데려가라고 해도 사가는 사람이 없게 되자 식량 부족으로 하루에 11,000 명의 유대인들이 굶어 죽어갔다. 그후로 현재까지도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어야 한다. '눅21:20-2
4'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 이러한 일을 주님의 예언대로 역사적으로 일어났다.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사랑을 거부한 자들에게 나타났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다시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예언하고 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러한 일은 이제 우리에게 일어날 것이다. 말씀과 사랑을 거부한 자들이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 주님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이제 마지막 때에도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거부하고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자들의 끝이 어떠할 것인지 우리는 깊이 깨닫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눅21:3
3'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 주님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어진다 지금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적당히 보낼 수 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도 모른체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마지막 날에 다 드러나고 말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자. 주님의 사랑을 부인 하는 자 . 그 날에 주님도 "나도 너를 도무지 모른다" 할 것이다.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은 자가 말씀을 부인한자고 거부한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님의 사랑을 받고도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고 나타내 보이지 않은 자가 주님의 사랑을 거부한 자이고 부인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저 패역한 무리들 속에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천년 왕국에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예루살렘아 ! 예루살렘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말씀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고 목사를 통해서 들려지는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듣고만 끝나는 말씀이 거듭되어서는 안된다. 마음에 찔림만 받고 끝나는 말씀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 말씀이 생활화해야 하고 실천화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사랑도 받기만 하지 말고 주님의 사랑을 이제 전해야 하고 내 몸밖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요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주님 말씀 안에 거하고 주님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의 영적인 신앙도 육적인 생활도 주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다.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요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주님 오실 때가 심히도 가까운 이 때 우리는 저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시면서 탄식하신 주님의 모습이 우리를 보고 탄식하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루살렘아 ! 예루살렘아 ! 울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이 우리들의 눈앞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만이 우리들 눈에 가득 차기를 축원합니다.
 "영광 영광 할렐루야! 영광 영광 할렐루야 ! 영광 영광 할렐루야! 곧 승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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