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마23:37-39)

본문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사랑하시므로 한 심령이라도 멸망에 이르지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생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 초청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구원받기를 원하셔서 초청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말씀은 인생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 말씀에서 외식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화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까지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저주를 선포하셨던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면서 통곡을 하신 내용을 기록한 이 본문은 주님의 인생들을 향하신 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이 이스라엘을 보시면서 탄식하시고 우셨겠습니까
첫째는 주님의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로 인하여 우는 때가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그 중심은 다 사랑입니다. 길가에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을 보고 우는 일은 적습니다. 더러 연속극을 보고서도 우는 일이 있지만, 정말 자녀들 때문에 우는 일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님들의 사랑이라도 온전하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주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들이 자녀를 사랑하므로 권면도 하고 징계도 하고, 매도 들지만,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매를 들고도 그 때린 것 때문에 우는 것이 부모심정아닙니까 어떤 어머니가 그 딸이 본드를 마시고 아주 안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고서는 몇 번이고 타일렀지만, 안 듣게 되자 그 아들을 신고해서 수용소에 넣었습니다. 그것은 보기에는 냉정한 일이지만, 그 딸이 미워서곘습니까 그 어머니 사랑은 그래도 그 자녀들을 짐승같이 사랑하는 사랑은 아닙니다. 진정 사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놓고 부모의 마음이 시원하고 쾌활하겠습니까 어제 새벽의 본문에는 (사1:24)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하나님께서 하도 말 안듣는 이스라엘을 그 대적들을 들어서 복수하겠고,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을 알려면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을 살피면 알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부모들이 자식들이 말 안들으면 너희들을 다 포기하겠다. 버리겠다 그러면 내 마음이 편하리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그런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시면서 저주를 하시면서도 우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그들에게 대한 기대가 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온갖 좋은 것으로 먹이고 입히면서 공부 시키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입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공부시켜놓으니 제가 잘난 줄 알고 부모 은혜를 모르고 그 부모의 기대도 모르고 오히려 그 부모를 대적하고 치며, 제 친구를 따라서 나갈 때에 그 부모의 마음으로 어떠하겠습니까 그 부모의 기대라는 것은 이기적이고, 잘못되고 지나친 것으로 오히려 자녀들을 망치는 결과도 낳습니다. 그러나 온전하신 하나님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불러 세우심은
첫째는 그들을 사랑하심이요, 다음은 그들에게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을 그 멸망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로 세운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요,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세움을 입은 것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기대는 다 잊어버리고 제가 잘나서 하나님의 선민이 된 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하여 만방에 대하여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도록하여 이방에게 까지 복을 전하는 복의 기관, 제사장나라가 되게 하시려 했지만, 그들은 잘났고, 교만하여져서 이방을 정죄하기만 했지,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잊었던 것입니다. 출애굽을 거부하는 바로 왕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그것은 애굽을 완전히 꺾어 버리고, 그들에게 항복을 받아내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이스라엘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런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제일 큰 목적이 아닌 것을 말씀합니다. (출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니미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여호와로 영광받으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출9:15) 내가 손을 펴서 온역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출9:16) 네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애굽에 나아가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온 천하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도록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여기에 쓰임 받은 백성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를 위해 구별하여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알지 못하고, 이 기대를 저버리고, 믿지 아니하고,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 아들 까지 죽이려 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저주할 수 밖에 없고, 그러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또 사랑하시므로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똑같은 본문이 있고, 19장에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정말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울게됩니다. 정말 사랑하여 많은 기대를 하였으면 안타까와서 울게 됩니다.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 같은 마음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울고 계십니까 믿지 않는 남편의 그 영혼을 생각하며, 믿음이 없는 자녀들을 걱정하며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십니까 소돔과 고모라 성과 같은 이 세상을 보면서 주님과 같은 심정으로 탄식하며 우신 적이 있습니까 목회자라면, 구역장이라면 그 교인들의 심령 상태가 어떤 것을 살피고 패역한 길을 걷는 사람들로 인하여 우는 마음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찢어지는 심정으로 탄식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세상을 따라 나가는 것을 보고 탄식해야합니다. 이 마음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 사랑을 잊고, 하나님의 기대가 있음에도 그 하나님의 기대를 잊어버리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성도들을 볼 때에 우리들은 아무리 그의 삶이 윤택하고 건강하고 아무런 사고나 어려움이 없을지라도 망하는 길로 가는 줄로 알고, 급한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인생같이 쉽게 포기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몇번이냐고 하셨습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품은 것 같이 내가 내 자녀들을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돌이키시려고 많은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진노하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 아니고 암탉이 그 새끼들을 날개 아래 품는 것 같이 하나님게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품으시는 일인 줄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하나님의 오라하시는 부르심은 망하게 하심이 아니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원치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이는 죄의 의도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파송시킨 선지자들을 받지 않는 죄 뿐아니라,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을 그 날개아래 품으려 하는데도 그 초청까지 거부하였습니다.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모르고 죄를 짓는 것과 알면서 대적하는 마음으로 죄를 범하는 것은 다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몰라서 죄를 범한 실수의 죄가 아닙니다. 그들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인했고, 원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너희가 의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럴 때에 부모라도 자녀에게 행할 제일 쉬운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제일 쉬운 방법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버리면 쉽고 마음도 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심지어 포기하시지 못하여 마치 작 사랑하는 사람이 응하지 않는 상대에게 간청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암만 개망나니라 부모 욕을 먹여도 그 자녀와 부모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제는 단절되어도 그 관계를 지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부자관계는 교제가 어떠하더라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롬8장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또 부르시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것을 업신여기면 안됩니다. 이것이 은혜인 줄 알아야합니다. (롬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온 천하에 전파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롬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롬3: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사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방은 이스라엘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데, 그러나 정작 구원을 받아야할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아야하는 이 사실에 대하여 주님은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마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했습니다. (마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24: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했습니다, 그 아름다웠던 성전이 그 화려했던 도성이 돌위에 돌 하나 첩놓이지 않게 다 훼파될 것을 예언하신대로 그들은 주후 70년에 로마의 침략을 받아 다 멸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재림의 때에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황폐된 이후에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유대인들은 그후에 근 1900년 이상을 국가 주권없이 전세계로 흩어지고,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주님이 입성하실 때에 아이들이 호산나 찬송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했습니다. 이 찬양이 예루살렘에 다시 울려 퍼질 때에 그 때에 내가 오겠다. 다시말하면, 내가 다시올 때 쯤이면 너희들도 회복되겠다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우리는 약속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절하므로 이방에게 이 복음이 전해졌지만, 그러나 (롬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누구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의 자손인 유대인들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부하므로 우리들이 복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역할을 하지 않으므로 원치 않으므로 우리에게로 이 복음이 오고 저들은 유리방황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찬양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11: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시사합니까 우리들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었지만 이루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가 되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를 이루면 복된 민족이 되겠고, 이를 듣지 않으면 우리들도 버림을 받을 것입니다. (롬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롬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롬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예수님은 23장에서 외식하는 신앙에 대하여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화가 있을지어다! 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과 사명은 이루지 않고 외식되게 형식적으로 숫자위주의 부흥만을 꿈꾸고 나아간다면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 교회 안에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공의와 사랑과 신앙이 있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이런 것은 없고 인간끼리의 모임이 된다면, 이런 것이 없이 형식적인 예배행위만을 하고서 우리가 만족하고 있다면 우리들이 예수님께 정죄 받은 이전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서 주님께로 돌아가야합니다.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품으려고 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품으시려고 몇번이나 부르십니까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예사롭게 여기면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데, 오늘 우리가 당한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우리 할 일 하지 않고 정신없이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이 어려움에서 사는 길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지 어려우니까 더 세상을 찾아나가는 것, 수단과 방법을 지혜를 인간에게서 찾는 것, 이것은 다 황폐케 되는 일입니다. 외식과 위선의 신앙을 버립시다. 진실한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흥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8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