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마21:1-11)
본문
예수께서 한 번도 사람을 태운적이 없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 성하셨습니다. "(눅19:30)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 고 오너라." 한 번도 사람을 태운적이 없는 나귀는 특별히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결례식에 사용되는 붉은 암송아지는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짐승이었습니다. "(민19:2)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 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 를 네게로 끌어 오게 하고.(신21:3) 그 피살한 곳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 곧 그 성읍의 장로들이 아직 부리우지 아니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한 암송아지를 취하고." 여호와의 법궤를 태울 수레는 한 번도 사용되어 본적이 없는 수레이어 야 했습니다.
"(삼상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 성하시는 것은 과연 성전을 청결케 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 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는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 은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의무적인 3대 명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 끝에서부터 예루 살렘으로 몰려 들었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유대인들의 소 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 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바로 이 유월절로 예루살렘과 더불어 주변 마을들은 모여온 순례자들로 메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마침 인구 조사가 행하여졌는데 그것은 유월절에서 제물로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기록에는 256,500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규정 에 의하면 어린 양 한 마리에 최소한 10명을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숫자대로 계산한다면 유월절에 약260만여명이 되는 많은 사람 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은 필히 유월절을 지키러 와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민족의 가장 큰 절기를 지키기 위 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좋은 극적인 순간은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망으로 잔뜩 고조된 사람들이 붐비고 몰려들어왔을 때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순간을 택하신 것은 예수님의 돌변적인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준 비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마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 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 로 끌고 오너라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 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21: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이같은 극적인 행동은 그가 메시야임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상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왕상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왕상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 스라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왕상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 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르호보암의 난폭과 사치한 낭비로 왕국이 기울어가고, 여로보암이 새 로운 세력으로서 대두했을 때, 실로 사람, 예언자 아히야가 미래를 예언 하기 위해 극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아히야는 새 옷을 입고 나아 가 여로보암을 만났는데 그는 새 옷을 벗어 열 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고 두 조각은 자기가 취했습니다. 이 극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열 두지파 중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도와 일 어날 것이며 단지 두 지파만이 르호보암에게 충성을 그대로 바치고 있을 것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극적인 행동으로 전달하는 예언자적인 메시 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온 나라에서와, 전 세계에서 모여와 예루살렘이 붐비고 있 을 때를 택하여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나타내 보 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기름부 음 받은 왕이란 것을 명백하게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행동을 취하 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일종의 영광스러운 도전 행위였으며 그 위에 더 없는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예수님의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11: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한다해도 뒷길 어느 은밀한 장소를 택해 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 중시키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오 시는 분의 당당한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용기 를 보이시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행동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최후의 호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 습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 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예언의 요점은 메시야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팔레스 틴에 있어서 나귀는 경멸받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나귀는 고상한 동물 이었습니다.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는 말을 타고 평화로울 때에는 나귀 를 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사인 야일의 아들 30명은 30마리의 나귀를 탔습니다. "(삿10:4)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 을 두었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하 더라." 사울의 아들인 왕자 므비보셋은 나귀를 타고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삼하16:1) 다윗이 마루 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 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 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삼하16:2) 왕이 시바에게 이 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 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나귀를 타시고 성에 입성하시는 행위는 예수께서 평화가운데 오시는 것이라고 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G.K.체스터튼(Chesterton, 영국 작가 1874-1936)의 시 가운데 현대의 나귀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날고, 숲이 걸으며, 무화과가 가시떨기 위에서 익어가고, 달이 피 빛처럼 붉을 때, 바로 그 때 나는 태어났다. 괴물같은 머리, 듣기 싫은 울음소리, 잘못 만들어진 날개 같은 귀를 가지고, 네 발 가진 짐승의 흉내를 내며, 악마는 비틀거린다. 갈가리 찢긴 땅 위의 무법자, 옛날부터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주인이, 나를 굶기고, 괴롭히고, 비웃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는 침묵만 지킨다. 어리석은 자여! 나도 좋을 때는 있었다. 맹렬하고, 감미롭던 때가, 나의 귓전에서 환호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종려나무 가지가 내 발 밑에 쌓였다." 오늘날의 나귀는 조롱을 받고, 경멸받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에는 왕의 동물이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의 모습은 어떻했습니까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평 화 속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고 있던 용사나 웅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당 시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하면서 호산나! 호산나!를 부르짖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참 메시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군중들 은 이 세상의 악의 세력을 부수고, 부정과 불의를 박살내며 파괴하는 웅 장한 정복자로서 예수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파괴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러 오셨으며,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 주려 고 오셨으며, 무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보이기 위해 오셨 던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여 그가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옷을 펼쳐 깔았습니다. 이것은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것이었습니다.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들은 이같이 환호합니다. "(눅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 에서 호산나 하더라." 본문 10절의 "호산나"라는 히브리 말은 "지금 구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인용해온 구절입니다. "(시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 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 말은 다음 성구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삼하14: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왕하6: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 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의 손에 원조와 보호를 구하는 사람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군중들이 "호산나" 라고 소리지를 때, 이는 메시야가 왔으니, 하나님이 개입하여 이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재난 중의 하나가 B.C. 175년경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입니다. 안티오커스는 유별난 왕으로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심취된 자로서 유대주의를 박멸하고 팔레 스틴에 헬라의 생활과 문화, 헬라의 사상과 종교를 어디서든지 될 수 있는대로 필요하다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이식(移植)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소위 헬레니즘 매니아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그는 고의적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기 위해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에 제물을 드릴 때와 같이 성전 제단에 돼지 고기 를 헌물로 드리고 성전에 있는 각 방들은 공인된 매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사본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면 사형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워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마카비 형제들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B.C. 167 년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고 안티오커스를 추방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 시 신성한 것으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마카비 제2서 10장 7절에서 이 큰 날의 기쁨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려나무의 작은 가지들과 곧은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주의 성전을 청결하는데 성공 을 그들에게 베푸신 여호와를 찬미했다." 그 날에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 지를 꺾어 들고 그들의 시편을 노래 불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은 아 마도 위대한 정결의 날, 유다 마카비가 안티오커스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썼거나 지은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은 정복자 의 시편입니다. ".(시118:11)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 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118:12)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 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 다 (시118:13)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 우셨도다 (시118:14)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시118:15)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시118:16)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 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시118:24)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 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시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 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지만 그 메시야는 마치 마카비 형 제같은 모습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한 그들의 이같은 환영 은 이스라엘의 적을 분쇄해 버리는 정복자에 알맞는 환영이었던 것이었 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오시는 예수님은 무력, 대단한 군사력을 동원해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며 겸손과 온 유, 사랑을 통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시고자 극적인 방법으로 입성하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입성 당 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한 예수님의 지상운명은 비참하게 끝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2-34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될 일을 알고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 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 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 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 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 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모든 면에서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벳바게로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도 다 아시면서 이 일을 진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으러 가는 인생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를 가진 사람은 진정한 용 기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요한복음 12장 15절에 인용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살인 음모 가 꾸며지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말씀에 붙잡힌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여러분들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한다해도 뒷길 어느 은밀한 장소를 택해 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 중시키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오 시는 분의 당당한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용기 를 보이시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행동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최후의 호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흐루시쵸프와 존 에프 케네디와 골다 메이어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 시고 정상 회담을 했다는 재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사람에게 질문 한 가지씩을 허용했습니다. 먼저 흐루시쵸 프 전 소련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있을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안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질문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흑 인과 백인이 화목하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러자 그 질문 역시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어 전 이스라엘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유태인과 아랍 인이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조금 달랐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니까 유태인과 아랍인의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 라는 농담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지만 우리는 아직 분단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인종 문제로 인한 것이며, 만 일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면 종교 전쟁일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싸움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전쟁이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전쟁도 종교적 대립이며,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그렇습니다. 또한 얼마 전의 이란과 이라크는 미국에 대해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선언했습니다. 중세기 십자군 때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을 거 룩한 전쟁으로 말하는 나라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국민을 전쟁터로 몰아 내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신께서 어지러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부시 대 통령은 종교 방송인들의 집회에서 "페르시아만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이므로 반드시 이긴다." 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능하신 신이 우리 편이므로 어떤 사탄의 세력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후세 인과 같은 회교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왕 파드는 "후세인을 대적하는 전 쟁이 곧 신의 뜻이다." 라고 국민에게 선언하였습니다. 알라신도 어느 편 을 들어주어야 할지 입장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부시는 중동 전쟁을 선포하던 날, 백악관에 부흥사인 빌리 그래이엄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인 성공회의 에드 워드 브라우닝 신부를 초청해야 자연스럽지만 브라우닝 주교는 페르시아 만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침례교 목사 그레이엄을 불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기독교, 같은 하나님은 어느쪽 기도를 들어야 할 것입니까 중동 지방은 종교를 내세우며 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3 천 년 동안 종교의 깃발 아래 군대들이 사람들을 살육한 곳이 중동 지방 입니다. 모두가 다 신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하고 신의 살인 결재를 받은 것처럼 큰 소리치며 싸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룩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이 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지체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뜻 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 이니라."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배와 친교시에 포도주와 빵으로 주의 애찬을 나 누게 되었고, 그 사랑의 나눔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몸 곧 인류를 하나로 묶으신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잔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피 곧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자신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극적인 상황 속에서 극적인 방법, 겸손 과 온유, 그리고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므로 인류에 대 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신 고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는 여러분과 가정, 이 땅 위에 참된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축원 합니다.
"(삼상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 보내고.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 성하시는 것은 과연 성전을 청결케 하는 성스러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21:12)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 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는 유월절 절기였습니다. 유월절 은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의무적인 3대 명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상 끝에서부터 예루 살렘으로 몰려 들었던 것입니다. 어느 곳에 살든지 간에 유대인들의 소 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이 외국 땅에서 유월절을 맞이하게 되면 그들은 "금년 에는 여기에서,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바로 이 유월절로 예루살렘과 더불어 주변 마을들은 모여온 순례자들로 메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마침 인구 조사가 행하여졌는데 그것은 유월절에서 제물로 죽임당한 어린 양으로 측정했던 것입니다. 기록에는 256,500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규정 에 의하면 어린 양 한 마리에 최소한 10명을 단위로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숫자대로 계산한다면 유월절에 약260만여명이 되는 많은 사람 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30km 이내에 사는 모든 성인 남자 유대인은 필히 유월절을 지키러 와야 하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인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민족의 가장 큰 절기를 지키기 위 해 모여 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좋은 극적인 순간은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망으로 잔뜩 고조된 사람들이 붐비고 몰려들어왔을 때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순간을 택하신 것은 예수님의 돌변적인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미리 준 비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마2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마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 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 로 끌고 오너라 (마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 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21: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이같은 극적인 행동은 그가 메시야임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 었습니다. 구약 성서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상11:29)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왕상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 두 조각에 찢고 (왕상11:31)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 스라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왕상11:32)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 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르호보암의 난폭과 사치한 낭비로 왕국이 기울어가고, 여로보암이 새 로운 세력으로서 대두했을 때, 실로 사람, 예언자 아히야가 미래를 예언 하기 위해 극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아히야는 새 옷을 입고 나아 가 여로보암을 만났는데 그는 새 옷을 벗어 열 두 조각으로 찢어 그 중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고 두 조각은 자기가 취했습니다. 이 극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열 두지파 중의 열 지파가 여로보암을 도와 일 어날 것이며 단지 두 지파만이 르호보암에게 충성을 그대로 바치고 있을 것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은 극적인 행동으로 전달하는 예언자적인 메시 지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온 나라에서와, 전 세계에서 모여와 예루살렘이 붐비고 있 을 때를 택하여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나타내 보 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메시야, 즉 하나님의 기름부 음 받은 왕이란 것을 명백하게 주장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행동을 취하 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일종의 영광스러운 도전 행위였으며 그 위에 더 없는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는 예수님의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11:57)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한다해도 뒷길 어느 은밀한 장소를 택해 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 중시키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오 시는 분의 당당한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용기 를 보이시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행동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최후의 호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구약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 습니다. 예언자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 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예언의 요점은 메시야가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팔레스 틴에 있어서 나귀는 경멸받는 동물이 아니었습니다. 나귀는 고상한 동물 이었습니다. 왕이 전쟁에 나갈 때에는 말을 타고 평화로울 때에는 나귀 를 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사사인 야일의 아들 30명은 30마리의 나귀를 탔습니다. "(삿10:4) 그에게 아들 삼십이 있어 어린 나귀 삼십을 탔고 성읍 삼십 을 두었었는데 그 성들은 길르앗 땅에 있고 오늘까지 하봇야일이라 칭하 더라." 사울의 아들인 왕자 므비보셋은 나귀를 타고 다윗에게로 갔습니다. "(삼하16:1) 다윗이 마루 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사환 시바가 안 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과 건포도 일백 송이와 여름 실과 일백과 포 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삼하16:2) 왕이 시바에게 이 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 왔느뇨 시바가 가로되 나귀는 왕의 권속들로 타게 하고 떡과 실과는 소년들로 먹게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곤 비한 자들로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나귀를 타시고 성에 입성하시는 행위는 예수께서 평화가운데 오시는 것이라고 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G.K.체스터튼(Chesterton, 영국 작가 1874-1936)의 시 가운데 현대의 나귀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날고, 숲이 걸으며, 무화과가 가시떨기 위에서 익어가고, 달이 피 빛처럼 붉을 때, 바로 그 때 나는 태어났다. 괴물같은 머리, 듣기 싫은 울음소리, 잘못 만들어진 날개 같은 귀를 가지고, 네 발 가진 짐승의 흉내를 내며, 악마는 비틀거린다. 갈가리 찢긴 땅 위의 무법자, 옛날부터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주인이, 나를 굶기고, 괴롭히고, 비웃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나는 침묵만 지킨다. 어리석은 자여! 나도 좋을 때는 있었다. 맹렬하고, 감미롭던 때가, 나의 귓전에서 환호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종려나무 가지가 내 발 밑에 쌓였다." 오늘날의 나귀는 조롱을 받고, 경멸받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에는 왕의 동물이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의 모습은 어떻했습니까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하여, 평 화 속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꿈꾸고 있던 용사나 웅장한 정복자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을 당 시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마저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환호하면서 호산나! 호산나!를 부르짖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은 참 메시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군중들 은 이 세상의 악의 세력을 부수고, 부정과 불의를 박살내며 파괴하는 웅 장한 정복자로서 예수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파괴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러 오셨으며,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도와 주려 고 오셨으며, 무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을 보이기 위해 오셨 던 것입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여 그가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옷을 펼쳐 깔았습니다. 이것은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행한 것이었습니다. "(왕하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무리들은 이같이 환호합니다. "(눅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마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 에서 호산나 하더라." 본문 10절의 "호산나"라는 히브리 말은 "지금 구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시편 118편 25절에서 인용해온 구절입니다. "(시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 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이 말은 다음 성구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삼하14:4) 드고아 여인이 왕께 고할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가로되 왕이여 도우소서.(왕하6: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 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의 손에 원조와 보호를 구하는 사람에 의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군중들이 "호산나" 라고 소리지를 때, 이는 메시야가 왔으니, 하나님이 개입하여 이 백성들을 구원해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이었던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비참한 재난 중의 하나가 B.C. 175년경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일입니다. 안티오커스는 유별난 왕으로 헬라의 사상과 문화에 심취된 자로서 유대주의를 박멸하고 팔레 스틴에 헬라의 생활과 문화, 헬라의 사상과 종교를 어디서든지 될 수 있는대로 필요하다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이식(移植)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던 소위 헬레니즘 매니아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팔레스틴을 정복한 그는 고의적으로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기 위해 올림피아의 신 제우스에 제물을 드릴 때와 같이 성전 제단에 돼지 고기 를 헌물로 드리고 성전에 있는 각 방들은 공인된 매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사본을 가지고 있거나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베풀면 사형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신앙을 지워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침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마카비 형제들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어났습니다. B.C. 167 년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되었고 안티오커스를 추방하고, 더럽혀진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하고, 다시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다 시 신성한 것으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마카비 제2서 10장 7절에서 이 큰 날의 기쁨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려나무의 작은 가지들과 곧은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주의 성전을 청결하는데 성공 을 그들에게 베푸신 여호와를 찬미했다." 그 날에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 지를 꺾어 들고 그들의 시편을 노래 불렀던 것입니다. 시편 118편은 아 마도 위대한 정결의 날, 유다 마카비가 안티오커스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썼거나 지은 것 같습니다. 이 시편은 정복자 의 시편입니다. ".(시118:11)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 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118:12)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 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 다 (시118:13)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 우셨도다 (시118:14)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시118:15)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시118:16)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 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시118:24)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시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 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시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 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했지만 그 메시야는 마치 마카비 형 제같은 모습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한 그들의 이같은 환영 은 이스라엘의 적을 분쇄해 버리는 정복자에 알맞는 환영이었던 것이었 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타시고 오시는 예수님은 무력, 대단한 군사력을 동원해서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에 대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며 겸손과 온 유, 사랑을 통한 평화의 왕이심을 선포하시고자 극적인 방법으로 입성하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입성 당 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 한 예수님의 지상운명은 비참하게 끝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32-34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될 일을 알고 죽으시기 위해 입성하 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 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 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 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 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모든 면에서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벳바게로 나귀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도 다 아시면서 이 일을 진행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처럼 죽으러 가는 인생길을 걷고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죽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가진 사람이요 진리를 가진 사람은 진정한 용 기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요한복음 12장 15절에 인용하시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살인 음모 가 꾸며지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히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을 말씀에 붙잡힌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여러분들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려고 한다해도 뒷길 어느 은밀한 장소를 택해 서 눈에 띄지 않게 숨어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집 중시키는 방법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서 오 시는 분의 당당한 용기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용기 를 보이시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최고의 사랑을 보이시는 행동이 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랑의 최후의 호소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흐루시쵸프와 존 에프 케네디와 골다 메이어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 시고 정상 회담을 했다는 재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 사람에게 질문 한 가지씩을 허용했습니다. 먼저 흐루시쵸 프 전 소련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 소련과 미국의 사이가 좋아질 날이 있을까요" 그러자 하나님은 "네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안 될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질문했습니다. "미국과 세계에서 흑 인과 백인이 화목하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러자 그 질문 역시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어 전 이스라엘 수상이 질문했습니다. "유태인과 아랍 인이 정답게 살아갈 날이 올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대답 내용이 조금 달랐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니까 유태인과 아랍인의 평화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 라는 농담입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무너졌지만 우리는 아직 분단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인종 문제로 인한 것이며, 만 일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면 종교 전쟁일 것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싸움은 개신교와 천주교의 전쟁이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전쟁도 종교적 대립이며, 인도와 파키스탄 역시 그렇습니다. 또한 얼마 전의 이란과 이라크는 미국에 대해 '거룩한 전쟁(Holy War)'을 선언했습니다. 중세기 십자군 때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을 거 룩한 전쟁으로 말하는 나라들이 많았으나 그것은 국민을 전쟁터로 몰아 내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요즈음처럼 신께서 어지러울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부시 대 통령은 종교 방송인들의 집회에서 "페르시아만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며,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전쟁이므로 반드시 이긴다." 라고 연설하였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부시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능하신 신이 우리 편이므로 어떤 사탄의 세력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후세 인과 같은 회교도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왕 파드는 "후세인을 대적하는 전 쟁이 곧 신의 뜻이다." 라고 국민에게 선언하였습니다. 알라신도 어느 편 을 들어주어야 할지 입장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부시는 중동 전쟁을 선포하던 날, 백악관에 부흥사인 빌리 그래이엄 목사를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자기가 속한 교단인 성공회의 에드 워드 브라우닝 신부를 초청해야 자연스럽지만 브라우닝 주교는 페르시아 만 전쟁을 반대했기 때문에 침례교 목사 그레이엄을 불러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같은 기독교, 같은 하나님은 어느쪽 기도를 들어야 할 것입니까 중동 지방은 종교를 내세우며 싸우는 전통이 있습니다. 지난 3 천 년 동안 종교의 깃발 아래 군대들이 사람들을 살육한 곳이 중동 지방 입니다. 모두가 다 신이 자기 편이라고 주장하고 신의 살인 결재를 받은 것처럼 큰 소리치며 싸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룩한 전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이 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지체없이 대답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뜻 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 이니라."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배와 친교시에 포도주와 빵으로 주의 애찬을 나 누게 되었고, 그 사랑의 나눔을 아가페라고 불렀습니다. 떡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몸 곧 인류를 하나로 묶으신 그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잔을 나누는 것은 예수의 피 곧 인류를 구원하신 그 사랑을 이어받는 것입니다. 자신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극적인 상황 속에서 극적인 방법, 겸손 과 온유, 그리고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시므로 인류에 대 한 최고, 최후의 사랑을 나타내신 고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 깊이 영접하시는 여러분과 가정, 이 땅 위에 참된 평화가 충만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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