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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탄생4 (마2:11-12)

본문

경배하려 온 박사들 1절 하반 절은 예수께 온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부터 온 박사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절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수께 온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경배를 한다는 것은 경배의 원래의 말의 의미는 ‘꿇어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는 말입니다. 즉 그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그 분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에 경의를 표하는 즉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동방의 박사들은 지금 외형적으로 그들과 같은, 아니면 그들보다 더 높아 보이는 사람 앞에 경배한 것이 아닙니다.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 갓난아기에게 경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아기 예수는 바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영적인 교훈을 얻습니다.
1.경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기에 경배를 합니다.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가져야 할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예배는 목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서, 누구 때문에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2.경배를 드리러 온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예배는 드리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경배를 하러 왔습니다. 그들이 갓난아기를 보지 못해서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들의 위치와 직분을 자랑하려고 온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의 형편이 어떠니 알아 달라고 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무슨 은혜를 받고, 그들이 무슨 인정을 받고, 그들이 무슨 만족을 얻기 위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요즘 현대 교회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예배가 일종의 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인 예배로 전략을 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내 문제를 해결함을 받기 위해, 내 영의 만족을 만을 채우기 위한 예배로 전략해 버렸다는 것에 있다. 예배는 사회 참여나 민주화를 부르짖는 정치의 장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 욕구와 내 필요를 채움 받기위한 주요소와 같은 곳이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적인 사고방식, 세상적인 방법, 세상적인 태도가 교회 안에 그대로 들어와서 하나님을 대신하고, 성경을 비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소홀히 생각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예배는 정치하는 곳이 아니고, 어떤 신비주의적인 체험을 하는 곳이 아니며, 내 만족을 채우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예배는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의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들은 주일날 예배 속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경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시간마다 드려지는 예배 갸운데 주님의 임재하심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분의 임재를 누리려 합니까 동방의 박사들을 보십시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감격이 얼마나 크고 대단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 분을 만나고, 그 모습을 보며 참회와 감격의 예배가 드려져야 합니다.
3.참된 경배에는 헌신이 있음을 보여줍니다(1-2)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먼길을 찾아 왔습니다. 여러분! 예배란 하나의 종교 의식이 아니고 생명을 바쳐 하나님을 만나는 결단이요 헌신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예언대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인류의 메시아를 경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먼 길 베들레헴까지 왔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2절에 보면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런 헌신 없이, 참된 경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높으신 보좌 위에서 인간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치르는 희생의 대가는 더 이상의 희생이 아닙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경배하는 태도에 따라 은혜 받는 양이나 질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 하느냐에 따라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만나러 오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따라 그 먼길을 올 때 그들은 죽을지도 모르고, 중간에 도적 떼를 만나서 보물을 다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의 목적지, 곧 예수가 어디에 태어날지도 모르고 무작정 별 하나만 바라보고 생명을 다해 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래서 만난 분이 예수님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태도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예배 한 번 안 드리면 무슨 좋지 않는 일을 하나님이 내리실까 겁나서 왔습니까 설교 한 번 들으면 안 듣는 것 보다 낫지 않겠나 싶어 나왔습니까 교회에 안 나가면 내 직분과 위치가 손상이 될까 봐 체면유지상 나왔습니까 먼저 믿은 사람의 손에 이끌려 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나왔습니까 이런 마음속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겠습니까 생명을 걸어서라도, 손해를 보아서라도 하나님을 꼭 만나야 하겠다고 나오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납니다. 왜 그많은 세월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줄 아십니까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생명을 걸고, 어떤 희생의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하나님을 만나야겠다고 결심하고 행하여 보십시오. 하나님이 만나 집니다.
4.참된 경배에는 예물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11) 동방박사들은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태도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정성어린 예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시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 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마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구약시대나 신약 시대의 예배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었습니다. 제물은 자기의 모든 것을 대신 드림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그 먼길을 생명 바쳐서 찾아왔을 뿐 아니라 보배합 속에 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예물을 준비하여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이들은 이 예물을 드릴 때에 단순히 예물 자체만 드린 것이 아니라 그 예물에 믿음을 담아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고백하며, 유향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신성), 몰약은 인간으로서 죽으실 것을 고백하며 드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가 능력이 없고 감격이 없고, 기쁨이 없는 것은 진정한 예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물을 드려도 예물을 드리는 믿음의 감격과 의미 없이 단순히 물질 자체만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까워 집니다. 오늘날 예물은 헌금이라는 형태로 드려집니다. 헌금을 드릴 때 많이 드리느냐, 적게 드리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헌금에 눈물이 있고, 그 헌금에 믿음이 있고, 그 헌금에 기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합니다. 헌금을 드릴 때에 등록금 내는 식으로, 세금 내는 식으로 믿음 없이 드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주 되심을 고백하며 드리십시오. 거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헌금은 우리의 믿음의 한 표현입니다. 주님을 참되게 경배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예물을 드리십시오.
5.참된 예배에는 순종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순종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배의 본질을 배울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드디어 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장소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경배를 하고 찬양을 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신 이 사건 앞에 무릎을 꿇고 보배함을 열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 기쁨은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라 경배를 했던 동방의 박사들의 것입니다. 예배를 통한 감격은 예배를 드리는 자의 것이지 구경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마다 환호성을 지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펄쩍펄쩍 뜁니다. 내 죄를 용서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드리는 자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구경하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를 만나고, 그 감격을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헤롯왕은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7-8절에 보면 자기에게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헤롯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합니다. 예배를 드린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예배를 드리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는 예배고, 그 다음의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순종이 없는 예배는 가짜입니다. 우리들은 이중적인 것에 길들여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거룩합니다. 어느 누가 손 하나 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고 나면 여전히 나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예배는 순종으로 이어져야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모여 한두시간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것은 가장 기초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예배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순종의 삶입니다. 예수를 내 성격대로, 내 마음대로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식으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사람, 이 사람은 여러 사람과 부딪히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식으로 예수 믿으려는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일이 맡겨지든지 순종하기로 결심한 평화가 있습니다. 바보같이 줏대도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 사람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순종이 큰 능력입니다. 순종하는 참된 예배를 드릴 줄 아는 사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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