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주로 오실 때 (마21:6-11)
본문
2000년전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종려 주일입니다. 2000년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 하실 때 예루살렘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길거리에 자기의 겉옷을 깔고 종려 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 환호 열광 기쁨 기대 그 모든 것이 지금 이시간에도 전해 오는 듯 합니다. 우리는 오늘 종려 주일을 맞이 하면서 한 번 살펴 보아야 할 사건이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예수님은 그렇게 기뻐 하시지도 만족해 하시지 않으셨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한 사건과 마태복음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이 사건에서 바라볼 때 무언가 그렇게 좋지 안았던 사정을 우리가볼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으며 사도행전1:11절에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주님을 맞이 하기 위하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첫째. 성전이 께끗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의 형태가 유월절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나라의 사방에서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 들어 옵니다. 그대 성전에 들어 올려면 세금을 내어야 하는데 그 세금을 내는 돈이 예루 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이익을 취하면서 돈을 바꾸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양이나 비둘기를 재물로 드릴려고 가지고 오면 검사관이 트집을 잡아 부정한것이라고 드리지 못하게 하고 그곳에서 파는것과 바구던지 다시 사서 드리게 하면서 이익을 취하여 제사장들의 호주머니로 들어 갔던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게서는 용납 못하실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고전6:15-17)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 때문에 죄의 길에 들어 설수는 없는것입니다. 천사가 변질되면 사탄이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변질되면 죄인이 되고 종교가 변질되면 위선이 됩니다. 기도하는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변질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모시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찬가지의 현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성전된 우리 속에 이처럼 여러가지 잡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 처음에는 편의상 하나 둘 허용하다보면 그것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덤벼든다. 그래서 성전 안에 있을 것이 없게 만든다. 본래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예배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차츰 사람들은 소와 양을 드리는 그 자체로 복받을 것을 예상하였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최상급의 짐승들을 가져다 비싼 값으로 팔았다. 그들은 이윤을 많이 남겼고 제사하는 이들은 최고로 질 좋은 짐승을 드려 자부심과 함께 보상 심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부자는 좋은 짐승을 드려 복받고 가난뱅이는 못드려 못받는다. 이렇듯 예배는 형식으로 이해된다. 상한 심령 대신에 짐승을 바치고 그 짐승을 죽여서 자기 형벌을 대속한다는 의미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본래 사람들은 양을 잡기 전에 그 위에 손 얹고 두려움 속에 죽기로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양으로 내 죄악을 대신 하소서. 주께서 명령하신 방법입니다. 양이 대신 나를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는 자기가 죽은 마음으로 양을 죽였던것이다. 제물용 양의 값어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리는 사람의 심령인 것이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무능을 절감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양을 놓고 그 양을희생시키는 것이다. 즉 자기를 바치듯 짐승을 죽인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무엇을 드리는 마음도 그러하다. 헌금하는 마음도 그러하다. 소중한 것을 놓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바치듯, 떨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자 우리 속에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자 정성을 다해서 제물을 준비하자.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서자. 그래서 거룩하고 향내나는 제물로 우리 마음 성전을 채우고 늘 기뻐하며 찬양드리자. 이 성전에는 장사꾼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기도소리,찬송소리, 성경말씀으로 감사와 축복의 소리로 언제나 채워지게 하자. 예배하는 자는 언제나 마음성전을 먼저 청소한다. 하나님의 집에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치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 이러한것들이 없을때 주님은 떠나 가셨습니다. 겉은 보기에 좋았었지만 주님게서 거하실곳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마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몸된 주님의 성전이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주님게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떠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여 주님의 역사가 일어 나게하며 회개하여 영육간의 치료하심을 힘입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칭찬받는 귀한 성도 귀한가정 귀한교회가 될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고 꽃이 피기 전에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나무는 잎과 함께 열매를 맺기도 하고 잎이 막 나면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열매가 먼저 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구한 것은 당연합니다. 비록 무화과의 계절은 아니었지만 잎이 그처럼 무성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열매가 있어야 마땅한데 불행하게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이 없을 때 주님은 심판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많이 합니다.그러나 입으로만 하는 신앙고백,열매가 없는 신앙고백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경건의 모양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경건의 능력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즘에는 조화(造花)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 모양은 물론 심지어 냄새까지 생화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조화가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것은 열매입니다. 조화에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살아 있는 신자,어디를 가든지 그들은 냄새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으로 사는 사람 역시 그 신앙생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신앙인들에게서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믿음의 열매없는 성도를 벌하실 것이다. 무화과 나무의 사명이 열매를 맺는 것이고, 주께서 요구하실 때 그 열매를 드려야 하는 것이라면,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찾으셨을 때 그 때는 무화과 나무의 때가아니라는 말씀이 부연되어 있다. 준비된 믿음!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바이다. 성도들의 준비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의 할일은 이웃을 돕는 것이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기쁨을 주는 것이다.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잎만 무성한 나무.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이다. 과일나무를 심는 것은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주신것도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전도의 열매, 선행의 열매.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주님이 열매맺지 못하는 성도들을 어찌하실 것이라 생각 하는가 사람들은 과일나무가 아름드리 나무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키가 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일나무가 크게 가지쳐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것도 원치않는다. 그 보다는 나무는 작지만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한다. 무화과 나무의 가치와 목적은 열매맺는데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에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면 위기입니다. 열매가 끝까지 없으면 반듯이심판을 받습니다. 누가복음 13장 6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포도원 주인이 3년을 기다렸는데 열매가 맺지 않음으로 무화과 나무를 찍으라고경고한 말씀이 있습니다. 밭주인이 무화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이유는 보기 좋으라고 한것이아니라 열매 맺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심겼습니다. 햇빛을 쪼였습니다. 비와 이슬의 은택도 입었습니다. 좋은 공기를 마셨습바니다. 풀도 뽑아 주었고 북도 돋우어 주었습니다. 3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으면 주인은 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는데 무화과 나무 정도가 아닙니다. 무한한 은택을 내려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시고 죄에서구속해주시고 자녀라는 명분을 주셨습니다. 영적은혜도 육적 은택도 무한히 주셨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않는다면,도리어 땅만 버리는해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없으면 도리어 해로운 존재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주님게서 오실 때 마라나타 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3절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셨으며 사도행전1:11절에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주님을 맞이 하기 위하여는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첫째. 성전이 께끗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13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의 형태가 유월절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나라의 사방에서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 들어 옵니다. 그대 성전에 들어 올려면 세금을 내어야 하는데 그 세금을 내는 돈이 예루 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이익을 취하면서 돈을 바꾸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양이나 비둘기를 재물로 드릴려고 가지고 오면 검사관이 트집을 잡아 부정한것이라고 드리지 못하게 하고 그곳에서 파는것과 바구던지 다시 사서 드리게 하면서 이익을 취하여 제사장들의 호주머니로 들어 갔던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게서는 용납 못하실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고전6:15-17)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님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엡2: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계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기독교는 율법의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 때문에 죄의 길에 들어 설수는 없는것입니다. 천사가 변질되면 사탄이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변질되면 죄인이 되고 종교가 변질되면 위선이 됩니다. 기도하는 성전이 강도의 굴혈로 변질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길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모시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찬가지의 현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난다. 성전된 우리 속에 이처럼 여러가지 잡것으로 채워질 수 있다. 처음에는 편의상 하나 둘 허용하다보면 그것이 주인이 되어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고 덤벼든다. 그래서 성전 안에 있을 것이 없게 만든다. 본래 성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예배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차츰 사람들은 소와 양을 드리는 그 자체로 복받을 것을 예상하였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최상급의 짐승들을 가져다 비싼 값으로 팔았다. 그들은 이윤을 많이 남겼고 제사하는 이들은 최고로 질 좋은 짐승을 드려 자부심과 함께 보상 심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부자는 좋은 짐승을 드려 복받고 가난뱅이는 못드려 못받는다. 이렇듯 예배는 형식으로 이해된다. 상한 심령 대신에 짐승을 바치고 그 짐승을 죽여서 자기 형벌을 대속한다는 의미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본래 사람들은 양을 잡기 전에 그 위에 손 얹고 두려움 속에 죽기로 기도하였다. "하나님 이양으로 내 죄악을 대신 하소서. 주께서 명령하신 방법입니다. 양이 대신 나를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는 자기가 죽은 마음으로 양을 죽였던것이다. 제물용 양의 값어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리는 사람의 심령인 것이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기의 무능을 절감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양을 놓고 그 양을희생시키는 것이다. 즉 자기를 바치듯 짐승을 죽인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무엇을 드리는 마음도 그러하다. 헌금하는 마음도 그러하다. 소중한 것을 놓고 자랑스러운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바치듯, 떨리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자 우리 속에 장사꾼들을 다 몰아내자 정성을 다해서 제물을 준비하자.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 앞에 서자. 그래서 거룩하고 향내나는 제물로 우리 마음 성전을 채우고 늘 기뻐하며 찬양드리자. 이 성전에는 장사꾼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기도소리,찬송소리, 성경말씀으로 감사와 축복의 소리로 언제나 채워지게 하자. 예배하는 자는 언제나 마음성전을 먼저 청소한다. 하나님의 집에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치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 이러한것들이 없을때 주님은 떠나 가셨습니다. 겉은 보기에 좋았었지만 주님게서 거하실곳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마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몸된 주님의 성전이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주님게서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면 떠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여 주님의 역사가 일어 나게하며 회개하여 영육간의 치료하심을 힘입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칭찬받는 귀한 성도 귀한가정 귀한교회가 될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고 꽃이 피기 전에 열매를 맺습니다. 어떤 나무는 잎과 함께 열매를 맺기도 하고 잎이 막 나면서 열매를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열매가 먼저 달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구한 것은 당연합니다. 비록 무화과의 계절은 아니었지만 잎이 그처럼 무성했다고 한다면 적어도 열매가 있어야 마땅한데 불행하게도 열매가 없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이 없을 때 주님은 심판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많이 합니다.그러나 입으로만 하는 신앙고백,열매가 없는 신앙고백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경건의 모양도 물론 있어야 하지만 그것이 경건의 능력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요즘에는 조화(造花)를 얼마나 잘 만드는지 모양은 물론 심지어 냄새까지 생화와 흡사합니다.
그런데 조화가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것은 열매입니다. 조화에는 열매가 맺혀지지 않습니다.살아 있는 신자,어디를 가든지 그들은 냄새가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으로 사는 사람 역시 그 신앙생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신앙인들에게서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믿음의 열매없는 성도를 벌하실 것이다. 무화과 나무의 사명이 열매를 맺는 것이고, 주께서 요구하실 때 그 열매를 드려야 하는 것이라면,성도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무화과 나무를 찾으셨을 때 그 때는 무화과 나무의 때가아니라는 말씀이 부연되어 있다. 준비된 믿음! 이는 주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바이다. 성도들의 준비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인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의 할일은 이웃을 돕는 것이다.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기쁨을 주는 것이다. 확신을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잎만 무성한 나무. 그것은 쓸데없는 나무이다. 과일나무를 심는 것은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 주신것도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전도의 열매, 선행의 열매. 열매없는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주님이 열매맺지 못하는 성도들을 어찌하실 것이라 생각 하는가 사람들은 과일나무가 아름드리 나무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키가 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과일나무가 크게 가지쳐서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것도 원치않는다. 그 보다는 나무는 작지만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한다. 무화과 나무의 가치와 목적은 열매맺는데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에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면 위기입니다. 열매가 끝까지 없으면 반듯이심판을 받습니다. 누가복음 13장 6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포도원 주인이 3년을 기다렸는데 열매가 맺지 않음으로 무화과 나무를 찍으라고경고한 말씀이 있습니다. 밭주인이 무화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이유는 보기 좋으라고 한것이아니라 열매 맺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땅에 심겼습니다. 햇빛을 쪼였습니다. 비와 이슬의 은택도 입었습니다. 좋은 공기를 마셨습바니다. 풀도 뽑아 주었고 북도 돋우어 주었습니다. 3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으면 주인은 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사랑하시는데 무화과 나무 정도가 아닙니다. 무한한 은택을 내려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시고 죄에서구속해주시고 자녀라는 명분을 주셨습니다. 영적은혜도 육적 은택도 무한히 주셨습니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않는다면,도리어 땅만 버리는해로운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열매없으면 도리어 해로운 존재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주님게서 오실 때 마라나타 하고 주님을 영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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