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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쁨의 좋은 소식 (마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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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탄생의 사건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박사들의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탄생 사건을 다루었고 누가복음에서는 목자들의 경배를 중심으로 해서 예수님의 탄생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두 복음서의 공통점은 모두 예수님(메시야)을 발견하고서 기뻐하고 기뻐하며 크게 기뻐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가 있는 12월은 큰 기쁨의 달입니다. 별을 보고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난 박사들의 복음은 ‘보는 복음’이요., 천사들이 전하여 준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난 목자들의 복음은 ‘듣는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로 마태복음은 ‘보는 복음’이요, 누가복음은 ‘듣는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들려오는 뉴스가 많지만 참으로 들어야 할 ‘굳 뉴스’(Good News)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점점 우울해지고 점점 비극적으로 기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박사들이 발견했고 목자들이 소리쳐 외쳤던 것과 같은 큰 기쁘고 좋은 소식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한 마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이란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에서는 이 복음을 세 가지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사야 41:27에서는 ‘기쁜 소식’, 이사야 52:7에서는 ‘좋은 소식’, 이사야 40:9에서는 ‘아름다운 소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믿음이 아니고서는 항상 기쁘게 산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요즈음처럼 불황이 심하고 인심이 사나울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기쁘게 사는 것이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것입니다.
1. 목자들의 기쁨의 의미 사람은 기쁜 소식을 들으면 기쁨이 생기고 슬픈 소식을 들으면 슬픈 마음이 생깁니다. 누구나 칭찬을 들으면 그 마음이 기쁘고 자랑하고 싶으며 꾸중이나 책망을 받으면 우울해집니다. 그래서 잔치집에 가는 사람은 얼굴에 환희가 넘치고 초상집에 가는 사람은 그 얼굴에 수색이 가득하게 되는 법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메시야 탄생의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던 양치기들은 본래 고대 문명국가에서나 유대 사회에서 그 신분이 매우 비천한 천민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 47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로가 요셉의 형들에게 그들의 생업(生業)을 물어 보았을 때, 그들은 바로에게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비옥한 고센땅에 거하게 해달라고 청하여 바로의 허락을 받았습니다(창 47:1-6). 요셉은 형들이 이렇게 대답하도록 미리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겼기 때문입니다(창 46:31-3
4). 그 결과 그들은 애굽 사람이 접근하지 않는 고센 땅에서 살 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목자들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여기에 아주 신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곳 베들레헴 목장(牧場)은 본래 예수님의 혈통적 조상인 다윗이 목양했던 장소입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출신의 목자로서 일하다가 후에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 장소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다시 다윗의 혈통으로 나신 메시야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목자들은 기뻐했습니다. 항상 싱글벙글하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식을 듣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받았거나, 그 사람과 전화 통화를 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기쁜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기뻐하게 됩니다. 목자들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었고, 따라서 그 기쁨도 매우 컸습니다.
2. 기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반응 기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기쁜 소식을 들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마태복음에는 동방박사들의 자세가 나오고 누가복음에는 목자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동방박사들의 반응 마태복음 2:11절에는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의 ‘열었다’는 동사에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찬송가 123장(저 들밖에 한 밤중에) 4절의 ‘다 열어’는 ‘썩 열어’ 또는 ‘기쁨으로 급히 서둘러 열어’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아까워하는 마음 없이 그리고 미련없이 예물을 드렸다는 뜻입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도 그랬고(요 12:3) 아버지가 탕자에게 좋은 것으로 아낌없이 선대할 때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눅 15:22). 주님께 내 마음의 기쁨을 드리는 자는 무엇이나 아낌없이 기쁨으로 드려야 하며 이것이 바로 박사들이 주께 드렸던 기쁜 마음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우선순위를 그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 질서입니다.
2) 목자들의 반응 누가복음 2:22에 의하면, 목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절기이며, 찬송으로 굳게 닫힌 인간의 마음의 문을 여는 계절입니다. 미국의 빌리라는 사람은 일생을 하나님께 찬양을 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길을 갈 때 한 발을 들면 저절로 ‘하나님께 영광’, 또 다른 한 발을 들면 ‘아멘’하는 소리와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당신도 주님께 기쁨으로 영광을 돌리기를 원한다면 그 우울한 표정부터 바꾸라고 빌리는 말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삶 복음의 기쁨은 결코 일시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이는 생활과 연결되는 지속적인 기쁨입니다. 기쁜 소식을 듣는 자는 항상 그 마음이 기쁠 뿐 아니라 세상을 늘 기쁘게 살아갑니다. 구약성경에는 세상을 즐겁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한 청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하란으로 내려가 라반이라고 하는 외삼촌의 집에서 여러 해를 수일처럼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창세기 29:18에 의하면 그 이유는 야곱이 젊은 나이에 라헬을 향하여 열렬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마음이 기쁜 것입니다. 기쁨이 있을 때 7년도 수일같이 한숨에 살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이 있는 사람의 안색은 항상 만면에 희색이 돕니다. 기쁨이 있는 생활은 기쁨이 있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큰 기쁨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복음을 소유한 사람의 삶입니다.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도 믿음을 통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의 작시자 윌리암 카우퍼(William Cowper,1731-1800)는 선천적으로 우울증 환자였으며 파란만장한 험한 세상을 비관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자살을 네 번이나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는 33세가 되었을 때 18개월 동안 정신병원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성경을 읽던 그는 로마서 3:25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사죄의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우울증이 없어지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쳐 새 소망이 넘쳤습니다. 이 성탄의 절기를 맞이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신 우리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또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과 동행함을 인하여 기뻐하고 기뻐합시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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