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의 참 정신 (마2:1-12)
본문
예수님의 탄생은 세 가지 의미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목숨 을 걸고 예언한 예언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기회이었기 때문이다. 마 귀는 인간이 범죄하는 순간부터 세상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 사해 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 에 하나님의 개입을 성취하신 것이다. 세째는 새 역사의 현장이 었기 때문이다. 주전(B.C)의 역사에서부터 주후(A.D)의 역사 로 바뀌었다. 아담 안에서 진행되는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 역사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일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동안 온 세상이 기뻐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기 예수가 탄 생하시던 그 때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여 보자. 대 로 마 제국의 권위와 군대를 배경으로 한 독재자 헤롯왕 밑에서 피 지배자로서 고된 삶을 보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결코 축제를 올릴 사건은 아니었다.
1. 두려워한 헤롯 헤롯 편에서 보면 자기의 정권을 장차 위험케 할 위인 이 아닌가 경계를 하고 드디어는 아기 예수를 죽여버릴 계획 을 가졌다. 때문에 이 성탄 사건이 결코 축제적인 사건은 될 수 없었다. 헤롯은 로마 제국이 지원해 준 군대에 의해서 유대인 의 나라를 빼앗았다. 로마의 법과 조직으로 유대인의 자유를 유 린하였으며, 헤롯왕이 궁리해 낸 정보 정치로써 유대인들의 인 권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 헤롯은 그가 걸머지게 된 그 정권으 로 유대인들을 착취했다. 헤롯은 가이사만을 신으로 모시는 이교적인 생각으로 유대 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 받은 신앙적인 전통 을 짓밟고 있었다. 헤롯은 자기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그의 아내도 죽였고, 그의 자식까지도 무참하 게 죽여버리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자기 정권에 반대를 표시하는 유대인들은 그 지위나 신분에 구애없이 처단해 버렸다. 그는 자기 정권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안티고누스를 처단해 버림 으로써 홀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파의 사람이라도 헤 롯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에는 후한 벼슬을 주어 자기 의 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들 중 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하 여 백성을 대변하는 일치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할 뿐 아니 라, 헤롯 자신의 정권에 대한 종교인들의 비판을 못하게 만들 었다. 그당시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 아리스토불러스 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 그는 이 대제사장이 가진 종교적 권 위가 혹시나 자기의 정권을 약하게 하지나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궁전에서 그의 대제사장직 축하 파아티를 열 고 그를 초청한 다음, 그의 궁전 안에 있는 특설 수영장에서 수 영 파아티를 하는 도중 그의 하수인을 시켜 대제사장을 물 속 에서 죽여버렸다. 본문에서 나와 있듯이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일 계획을 하 다가 그것이 실패하자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아기 들을 죽여버린 것도 헤롯과 같이 자기의 정권에만 관심을 가지 고 있었던 사람으로서는 으례 할 수 있는 잔인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헤롯에게 있어서 첫 성탄절은 결코 기쁨이 아 니었고 두려운 것일 뿐이었다. 주님의 탄생이 자기 생활에 간섭 이나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의 위치, 자기의 세력, 자기 의 영향력에 어떤 침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2. 무관심한 대중 이제 그당시 유대인 일반 대중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예수라는 아기가 탄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기쁨과 축하의 사건이라 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개 인 인격이 존대받는 때가 아니라 헤롯의 법과 군대 아래 그 생 명들은 천대를 받았고, 그들이 가진 소유는 약탈당했고, 그들 의 소망도 멍이 들어 있었다. 자유, 그것은 그림에서 보는 떡같은 것이었고, 자기의 인 권과 사상을 소중히 여기는 민주적인 사고방식은 헤롯의 철통같 은 법과 질서 아래서 금지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가난하 게 살아야 했고, 침묵을 지켜야 했고, 천대를 받아야 했으 며, 헤롯의 법과 군대 아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 던 것이다. 가이사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반동분자 의 낙인이 찍힐까 전전긍긍하고 살아간 사람들이 아기 예수가 태어나던 당시의 유대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가 지내던 유대 나라의 시대상이요, 그 역사적인 현실이었다. 결국 그들은 현실 속에서 안주하는데만 급급하였고, 아 기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던 것이다. 제사장이 나 서기관들 역시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성전예식과 율법토론에 만 몰두했기 때문에 예수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했던 것이다. 오히려 이국 땅의 박사들이 관심을 더 갖고 먼길을 찾 아 왔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정작 예수님이 태어나신 땅 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러한 무관심은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 히 팽배하여 있다. 물론 우리는 성탄절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해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간의 죄 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민 을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에 희생시키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참 생 명, 참 길, 참 진리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를 통해 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사실을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계절이다. 그래서 기뻐한다. 축하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지키는 성탄절에는 정작 그리스도 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버렸다. 기뻐하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떠드는 흥에 장단을 맞추는 격이 되 었다. 사람들은 연말에 한번 즐겁게 노는 축제 분위기 속에 빠 져 있을 뿐인 것이다. 오늘의 크리스마스에서 그리스도는 그 저 들러리에 불과한 엑스트라일 뿐이며, 주인공은 산타클로 스, 선물봉투, 술잔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3. 예배 드린 동방박사 헤롯 정권 아래, 유대인들이 맞이한 그 시대적인 상황 아 래 아기 예수가 나셨다는 것은 하나의 장엄하고 엄숙한 하나님 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통하여 헤롯의 철저한 정 권욕이 잘못된 것임을 규탄하시고, 그의 정치가 하나님의 공정 한 법과 정의에 얼마나 어긋나는 것인지를 밝혀주신 것이다. 때문에 성탄절은 사실 인간이 즐기고 떠들기에 앞서 하나님의 권 위와 그가 인간 역사를 간섭하심에 대하여 두려워 하고 떠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성탄절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탄 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계절임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마 2장에 기록된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이 점을 우리에 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들이 헤롯을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 디 계시냐"고 물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물론 유대인이 아니면 서 유대인의 왕을 찾아왔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 유,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만족할 것 같으나 무슨 불만 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만일 심신의 만족을 가졌다면 정 처없는 위험한 먼길을 떠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가 족과 직장을 버리고 왕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면 보는 사람마 다 돌았다고 만류할 것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먼 길을 떠났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 별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세상 일에 끌 려 땅만 내려다 보며 하늘 일에는 무관심하게 살았기에 하늘 을 쳐다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늘의 비젼을 보 지 못하고 땅만 내려다 보고 속세의 걸음을 걷는 한 참으로 만 족한 삶은 살 수 없다. 박사들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아기를 찾자 그에게 경배했다. 그들이 별을 따라 정처없는 길을 떠났으나 결국 왕을 찾 은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즉,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탄의 비밀이다. 하나님 께서는 우리를 위해 염려하시고 우리와 같이 하신다. 세월이 가 도 그 진리는 변함이 없이 예수는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오 사 우리의 사정을 돌봐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거하심을 그가 증거하신다. 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드렸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가장 값진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 의 발 앞에 드리고자 하였다. 그들은 별을 바라만 본 것이 아니 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서 예배하였다. 뿐만 아니 라 가장 귀한 예물을 아기 예수께 드렸다. 예배, 이것이 성탄절의 참 정신이다. 예배는 자기 개인 의 일상생활의 일을 중단하고, 예수님을 그 모든 개인 사무, 가 정, 또는 공적인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배 태도는 너무도 우리 개인의 사정과 기분 여하 에 좌우되고 있다. 예배를 등한히 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돈독 해질 수 없다. 그에게는 항상 기도도 없고, 성경도 안읽고, 전 도도 못하는 형식적인 기독교인으로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배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는, 예 배를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발전할 수 밖에 없 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성경 말씀을 읽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속에 있는 신앙의 간증을 다른 사람 앞에 하지 않을 수 없다. 성탄절의 정신은 바로 이 예배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아 무리 천만 사람을 감동시킬만큼 축하의 노래를 잘 불러도 만 일 예배 정신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은 성탄절의 정신에 위배 된다. 호화찬란하게 차린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치장은 예배와는 멀다. 그것은 다만 상업적인 관심의 표시 이외에 아무 것 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성탄절을 아기 예수를 살해하 려던 헤롯의 성탄절로 만드는 것이다. 성탄절 때 사람들은 분주 하다. 그러나 거기에 얼마만큼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야 하겠다.
첫째는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예언자들이 목숨 을 걸고 예언한 예언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기회이었기 때문이다. 마 귀는 인간이 범죄하는 순간부터 세상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 사해 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 에 하나님의 개입을 성취하신 것이다. 세째는 새 역사의 현장이 었기 때문이다. 주전(B.C)의 역사에서부터 주후(A.D)의 역사 로 바뀌었다. 아담 안에서 진행되는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 역사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러한 중대한 일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동안 온 세상이 기뻐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기 예수가 탄 생하시던 그 때의 역사적,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여 보자. 대 로 마 제국의 권위와 군대를 배경으로 한 독재자 헤롯왕 밑에서 피 지배자로서 고된 삶을 보내고 있던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결코 축제를 올릴 사건은 아니었다.
1. 두려워한 헤롯 헤롯 편에서 보면 자기의 정권을 장차 위험케 할 위인 이 아닌가 경계를 하고 드디어는 아기 예수를 죽여버릴 계획 을 가졌다. 때문에 이 성탄 사건이 결코 축제적인 사건은 될 수 없었다. 헤롯은 로마 제국이 지원해 준 군대에 의해서 유대인 의 나라를 빼앗았다. 로마의 법과 조직으로 유대인의 자유를 유 린하였으며, 헤롯왕이 궁리해 낸 정보 정치로써 유대인들의 인 권을 마구 짓밟고 있었다. 헤롯은 그가 걸머지게 된 그 정권으 로 유대인들을 착취했다. 헤롯은 가이사만을 신으로 모시는 이교적인 생각으로 유대 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 받은 신앙적인 전통 을 짓밟고 있었다. 헤롯은 자기 정권 유지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그의 아내도 죽였고, 그의 자식까지도 무참하 게 죽여버리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자기 정권에 반대를 표시하는 유대인들은 그 지위나 신분에 구애없이 처단해 버렸다. 그는 자기 정권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안티고누스를 처단해 버림 으로써 홀로 왕이 될 수 있었다. 안티고누스파의 사람이라도 헤 롯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에는 후한 벼슬을 주어 자기 의 세력을 구축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의 종교적 지도자들 중 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하 여 백성을 대변하는 일치된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할 뿐 아니 라, 헤롯 자신의 정권에 대한 종교인들의 비판을 못하게 만들 었다. 그당시 유대인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 아리스토불러스 가 대제사장이 되었을 때, 그는 이 대제사장이 가진 종교적 권 위가 혹시나 자기의 정권을 약하게 하지나 않을까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궁전에서 그의 대제사장직 축하 파아티를 열 고 그를 초청한 다음, 그의 궁전 안에 있는 특설 수영장에서 수 영 파아티를 하는 도중 그의 하수인을 시켜 대제사장을 물 속 에서 죽여버렸다. 본문에서 나와 있듯이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일 계획을 하 다가 그것이 실패하자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모든 아기 들을 죽여버린 것도 헤롯과 같이 자기의 정권에만 관심을 가지 고 있었던 사람으로서는 으례 할 수 있는 잔인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헤롯에게 있어서 첫 성탄절은 결코 기쁨이 아 니었고 두려운 것일 뿐이었다. 주님의 탄생이 자기 생활에 간섭 이나 되지 않을까 그리고 자기의 위치, 자기의 세력, 자기 의 영향력에 어떤 침해가 되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
2. 무관심한 대중 이제 그당시 유대인 일반 대중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예수라는 아기가 탄생했다고 해서 그것이 기쁨과 축하의 사건이라 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개 인 인격이 존대받는 때가 아니라 헤롯의 법과 군대 아래 그 생 명들은 천대를 받았고, 그들이 가진 소유는 약탈당했고, 그들 의 소망도 멍이 들어 있었다. 자유, 그것은 그림에서 보는 떡같은 것이었고, 자기의 인 권과 사상을 소중히 여기는 민주적인 사고방식은 헤롯의 철통같 은 법과 질서 아래서 금지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가난하 게 살아야 했고, 침묵을 지켜야 했고, 천대를 받아야 했으 며, 헤롯의 법과 군대 아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 던 것이다. 가이사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반동분자 의 낙인이 찍힐까 전전긍긍하고 살아간 사람들이 아기 예수가 태어나던 당시의 유대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아기 예수가 지내던 유대 나라의 시대상이요, 그 역사적인 현실이었다. 결국 그들은 현실 속에서 안주하는데만 급급하였고, 아 기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던 것이다. 제사장이 나 서기관들 역시 무관심하였다. 그들은 성전예식과 율법토론에 만 몰두했기 때문에 예수에 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했던 것이다. 오히려 이국 땅의 박사들이 관심을 더 갖고 먼길을 찾 아 왔음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정작 예수님이 태어나신 땅 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러한 무관심은 오늘에 있어서도 여전 히 팽배하여 있다. 물론 우리는 성탄절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해서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으로 인간의 죄 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민 을 위하여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에 희생시키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참 생 명, 참 길, 참 진리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를 통해 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사실을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성탄절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계절이다. 그래서 기뻐한다. 축하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지키는 성탄절에는 정작 그리스도 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버렸다. 기뻐하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떠드는 흥에 장단을 맞추는 격이 되 었다. 사람들은 연말에 한번 즐겁게 노는 축제 분위기 속에 빠 져 있을 뿐인 것이다. 오늘의 크리스마스에서 그리스도는 그 저 들러리에 불과한 엑스트라일 뿐이며, 주인공은 산타클로 스, 선물봉투, 술잔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3. 예배 드린 동방박사 헤롯 정권 아래, 유대인들이 맞이한 그 시대적인 상황 아 래 아기 예수가 나셨다는 것은 하나의 장엄하고 엄숙한 하나님 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통하여 헤롯의 철저한 정 권욕이 잘못된 것임을 규탄하시고, 그의 정치가 하나님의 공정 한 법과 정의에 얼마나 어긋나는 것인지를 밝혀주신 것이다. 때문에 성탄절은 사실 인간이 즐기고 떠들기에 앞서 하나님의 권 위와 그가 인간 역사를 간섭하심에 대하여 두려워 하고 떠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성탄절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탄 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계절임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마 2장에 기록된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이 점을 우리에 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들이 헤롯을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 디 계시냐"고 물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물론 유대인이 아니면 서 유대인의 왕을 찾아왔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여 유,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만족할 것 같으나 무슨 불만 족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만일 심신의 만족을 가졌다면 정 처없는 위험한 먼길을 떠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만일 가 족과 직장을 버리고 왕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면 보는 사람마 다 돌았다고 만류할 것이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먼 길을 떠났왔다. 다른 사람들은 그 별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세상 일에 끌 려 땅만 내려다 보며 하늘 일에는 무관심하게 살았기에 하늘 을 쳐다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늘의 비젼을 보 지 못하고 땅만 내려다 보고 속세의 걸음을 걷는 한 참으로 만 족한 삶은 살 수 없다. 박사들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아기를 찾자 그에게 경배했다. 그들이 별을 따라 정처없는 길을 떠났으나 결국 왕을 찾 은 것이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 즉,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탄의 비밀이다. 하나님 께서는 우리를 위해 염려하시고 우리와 같이 하신다. 세월이 가 도 그 진리는 변함이 없이 예수는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오 사 우리의 사정을 돌봐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워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거하심을 그가 증거하신다. 박사들은 황금, 유향, 몰약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드렸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가장 값진 선물을 예수 그리스도 의 발 앞에 드리고자 하였다. 그들은 별을 바라만 본 것이 아니 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들어가서 예배하였다. 뿐만 아니 라 가장 귀한 예물을 아기 예수께 드렸다. 예배, 이것이 성탄절의 참 정신이다. 예배는 자기 개인 의 일상생활의 일을 중단하고, 예수님을 그 모든 개인 사무, 가 정, 또는 공적인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예배 태도는 너무도 우리 개인의 사정과 기분 여하 에 좌우되고 있다. 예배를 등한히 하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돈독 해질 수 없다. 그에게는 항상 기도도 없고, 성경도 안읽고, 전 도도 못하는 형식적인 기독교인으로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예배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서는 안된다고 하는, 예 배를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발전할 수 밖에 없 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성경 말씀을 읽지 않을 수 없다. 또 그 속에 있는 신앙의 간증을 다른 사람 앞에 하지 않을 수 없다. 성탄절의 정신은 바로 이 예배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아 무리 천만 사람을 감동시킬만큼 축하의 노래를 잘 불러도 만 일 예배 정신이 결여되어 있으면 그것은 성탄절의 정신에 위배 된다. 호화찬란하게 차린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치장은 예배와는 멀다. 그것은 다만 상업적인 관심의 표시 이외에 아무 것 도 아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성탄절을 아기 예수를 살해하 려던 헤롯의 성탄절로 만드는 것이다. 성탄절 때 사람들은 분주 하다. 그러나 거기에 얼마만큼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야 하겠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