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역전케 하는 은혜 (마19:23-30)

본문

이런 말이 있습니다. 프로골프가 골프를 잘 치다가 슬럼프에 빠져서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저조하게 되어지면 말입니다. 그 해결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맨 처음 골프를 배우던 기본 자세부터 다시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골프채를 손에 쥐는 것부터 시작해서 몸과 발과 심어지는 마음까지 다시 원점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훈련을 쌓아 올려야 슬럼프에서부터 벗어나고 발전하는 향상된 성적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할 때 그 잘못된 자세, 잘못된 방법을 그대로 반복하고 열심을 내고 부지런을 낸다고 되는게 아닙니다. 이제 제 스스로도 무엇이 잘못된지도 지금 모르고 있어요. 그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런 말씀입니다. 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미국의 프로 야구계의 원로인 그리고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요기 베로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게임은 끝나보아야 안다. 결국은 마지막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끝이 언제냐 내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시간이 끝입니다. 누가 뭐래도 이건 끝이 아니요. 끝까지 가봐야 알겠는데 지금 이 일은 오히려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절대로 끝이 아닙니다. 승부는 끝에서 나는 것이올시다. 그래서 잘 나가다가도 역전패할 수도 있고 끝이 아니니까 아직도 끝이 아니기 때문에 맨 끝에 가서 역전승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게임은 끝에 가서 봐야 한다. 그래 야구에서는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9회말 2아웃부터 시작한다. 야구를 아시는 여러분 9회말에 2아웃 됐으면 딱 이제 한사람 남았습니다. 여기서 역전패도 되고 역전승도 되는 것이예요. 끝까지 다 됐다고 하지도 말 것이고, 다 끝났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9회말 2아웃 그 시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실패라고 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보세요. 아주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공짜는 결코 소유가 아닙니다. 땀흘리고 수고해서 얻은 것만 내것입니다. 공짜로 주어진 것은 내 손에는 있지만 내 의식, 내 능력, 내 구차한 능력속에서는 내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이것을 내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문제가 있어요. 돈관리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짜로 돈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거예요.
그런데 이것을 정당한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거든요.
그게 망조입니다. 자 빌린돈은 재산이 아닙니다. 빚진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남의 돈 가지고 큰 소리치고 빚이 산더미 같은데 선심까지 써가면서 휘청거린다면 이게 정신병자지요. 전혀 비합리적인 것을 마치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착각을 했더란 말이요. 그러면 망해 싸지. 남의 돈 가지고 자기돈으로 생각하는 사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 아닙니까 또한 계속성장이란 자연현상도 아니고 자연법칙도 아닙니다. 사업이란 잘될때도 있고 안될때도 있고, 뭐 건강할 때도 있고 병들때도 있는거지요. 항상 잘되고 항상 건강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요.
그런데 계속 성장해야만 하는줄로 착각을 했어요.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착각했더라 말이요. 그래서 우리가 해마다 있었던 사건 연례적인 사건이죠. 급료인상 사업이 안되면 급료가 내려갈 수도 있고 올라갈 수도 있는거지. 잘되면 월급이 올라가고 안되면 못받고, 또 안되면 해고 되고 뭐 그런거지. 사업이야 되던 말던 내 월급은 계속 올라가야만 된다. 이거는 착각이죠. 계속 성장은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마땅히 그래야만 되는줄로 생각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왔어요. 이게 바로 잘못된 것이예요. 또한 고진감래는 운명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교문화의 배경을 받아서 그저 고통 당하는거 잘 참고 있으면 뭐이다 될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참아보세요. 되는거 없어요. 근본적으로 자세를 바꿔야 다시 새로운 원인을 제공해야 결과가 오는거지 그냥 고진감래 그것만 믿고 있다고 되는 겁니까 그저 이런 세계관에 의해서 싸이클적인 윤회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간 좋은 때가 온다. 쨍하고 해뜰날이 온다. 쓸데없는 소리. 그게 바로 비합리적인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한거예요. 아니에요. 내가 돌아가서 강제든 좌우간 자발적이든 개혁을 해야 개혁된 결과가 오는거지 거저 오는건 아니에요. 땀을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없고 정직함이 없이 결코 산업이 될 수도 없는거예요. 엉터리는 엉터리죠. 그저 거품은 깨져야 되는거 아닙니까 있을일이 있을 뿐이예요.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런 말씀 하십니다. 자 한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한달란트를 되돌리고 와서 하는 말입니다. 주인은 심지 않은데에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에서 모으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내가 두려워 하여 땅에 감추었다가 가지고 왔습니다. 헤치지 않은데에서 모으고 심지 않은데에서 거두는 이게 바로 게으른 자의 변명입니다. 악한 종의 변명이올시다. 심지 않은데에서 거두는 일 없어요. 헤치지 않고 모두 모으는 일이 없어요. 우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다시 합리적 신앙 다른말로 말하면 과학적 신앙을 가져야 겠습니다. 심지 않은데에서 거두길 바라고 아무 노력없이 좋은 결과만 오기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이같은 망상은 바로 쉽게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될 때가 있으리라. 자 먼저 된 자가 당연히 또 먼저 될 줄로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먼저된 자는 항상 먼저될 줄로 그것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요. 여기에 불행이 있는 것이올시다. 자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 하고 참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 이걸 생각해 보십시다. 부자, 이 부자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천국이라는 말을 행복이라는 말로 잠깐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부자는 행복한거 아닙니까 우린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만 생각합니다. 또 부자가 또 부가 부를 낳고 있거든요. 돈 있는 사람이 돈을 벌어요. 그러니까 먼저된 자는 경제적으로 먼저 된 자는 계속 먼저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죠. 예수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사람은 더더욱 이 문제를 종교적 차원에서 특별하게 생각을 했어요. 아무리 어쩌면 우리 마음속에도 그런게 있습니다. 부자는 행복한 사람, 부자는 또 의인,
왜냐하면 의의 결과로 부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가난하면 또 죄인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를 보면 불쌍히 여기지를 않고 얼마나 죄가 많으면 저렇게 천벌을 받았나 그리곤 멸시했단 말이예요. 부자는 존경을 받고, 또 부러워 하고 가난한 자 병든자를 멸시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아주 깊은 잘못된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거에요. 그래서 부자는 선한 기회도 많고 선을 행할 수도 있고 가난한 자는 뭐 먹고 살려니까 못된짓 하고 도둑질도 해야 하고 뭐 부득불 죄와 타협하고 살아가니까 뭐 가난한 사람이라는 건 뭐 의고 선이고 뭐 하나님 나라고 복음이고. 생각할 것 없다. 우리는 그와는 관계가 없다. 그런고로 먼저 된 자는 항상 먼저 되고 나중된 우리같은 천한 사람들은 뭐 되는대로 살다가 지옥으로 가야지 하는 뭐 그런생각이란 말이요. 또 그럴줄로 알고 있어요. 이걸 당연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그게 아니요. 여기서 역전 말합니다. 아주 뒤집어서 말합니다. 오히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 어려겠다고 말합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
여기 재미있는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앞에 놓고 오늘이라도 한 번 수수께끼를 해 보세요. 코끼리가 냉장고 속에 들어가겠냐 못 들어가겠냐고 물어 보세요. 어른들은 하나같이 아 그럼 못 들어가지 이 큰 코끼리가 거기에 어떻게 들어가나. 이렇게 말합니다만은 얘들은 생각이 달라요. 큰, 커다란 냉장고면 되잖아. 냉장고가 크면 되는거지. 큰 냉장고를 만들면 되는거지. 또하나 있습니다. 요술을 부려가지고 요술을 부려서 코끼리를 조그맣게 만들면 되잖아. 걔들은 만화책을 많이 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간다. 무슨 소리입니까 약대를 줄이고 줄여서 바늘귀로 들어갈 만큼 조그맣게 만들면 되잖아요. 그러자니 얼마나 어렵겠어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만큼 작아질려면 되게 힘들겠어요. 지금 부자가 작아지고 작아져서 마지막에 바늘귀로 쑥 들어갈만큼 쪼그마해 질려면 뼈아픈 뼈를 깍는 아픔이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사람은 못하지만 사람은 하신다 하셨어요. 지금 바늘구멍으로 들어가야 할 처지거든요 지금. 거기까지 내려가야 되는기요. 고정관념을 포기해야 됩니다. 당시 예수님 당시에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제사장 바리새교인 법사 뭐 이런 사람들인데 동시에 이 사람들은 부자예요. 대제사장 다 부자예요. 종교적으로도 높은 존경을 받고 또 부자요, 정치적으로도 권세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모든 면에서 먼저 된 자가 바로 이 사람들이요. 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물론 이 금생에서도 부자로 귀족으로 종교적 존경을 받다가 죽어서 천당까지 영생까지 그냥 이어지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아니요. 먼저된 자로써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써 먼저된 자가 많으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먼저 되었다면 먼저되는 이유가 있고 나중되었다면 나중된 이유가 있는 것이예요. 이제 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느냐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에 따라서 역전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참 지나친 말씀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당시에 고고하고 당당한 대제사장 바리새교인들을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장 천하게 여기는 세기와 창기를 들어 말씀하시기를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간다 그랬어요. 저는 생각해 봐요. 예수님 참 대단한 분이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살아 남기를 바랄 수 없지. 안그래요. 아 창기와 세리가 바리새교인과 제사장보 다 먼저 하늘나라 간다니 이렇게 하고 살아남기를 바랄수가 없는거 아니요. 정말로 대단한 말씀이요. 왜그랬을 것 같습니까 사실로 그렇거든요. 여러분 가난한 사람이 겸손하기는 쉬운거예요. 진실하기도 쉬워요. 오늘 이 교회 나오는 것도요 부자가 어렵지 가난한 사람은 쉬워요. 진실하기도 그렇고 신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뭐 오늘도 바이어가 와서 골프치러 가자나 그러니까 또 따라가야 되고 또 회사가 어떠니까 따라가야 되고 복잡합니다요 이거. 이 부자가 신앙생활 바로하기가 참 어렵구요 이제 깨끗한 마음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기가 그렇게 힘이 들어요. 또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하는걸 보아도 그저 평범한 사람이 제일 좋지 뭐 유명한 사람 지식있는 사람 그래요. 요새는 그저 모여 앉으면 가끔 인사할때도 내가 과거에 장관입니다. 과거에 뭐. 그런말할 때 그말 안했으면 참 좋겠다. 저것 때문에 서로가 피차 고생이 되고, 아 그러니 어쩌란 말이요. 이거 참 어렵거든요. 이것 때문에 어려워요.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아주 낮아지고 낮아져서 십자가에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바로 거기까지 내려가야 부활을 능력을 깨달을 수도 있고 체험할 수도 있는 것이란 말이요. 철저한 자기 부정을 얘기합니다.
재산이건 명예건 자기 직위건 이것을 깨끗이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비로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고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예요.
그런데 먼저된 사람들, 이 먼저 되었다는 이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은 나중되게 되고 이 가난하고 병들고 이 창기요 신분 낮은 이 사람들이 활짝 열고 예수를 영접하고 쉽게 영접한 결과 이들이 먼저 되었더란 말이예요. 그래서 역전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합리적 대가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 얼마나 철저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있는것에 더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됐으니 또 먼저. 그렇지를 않아요. 이건 차원이 달라요. 지식이 있다고 해서 신앙도 함께 있는게 아니요. 돈이 있다고 해서 의도 함께 있는게 아니란 말이야.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토론토대학에 있었던 일입니다. 생화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이제 석사학위를 마치고 나가게 될 때쯤 졸업할때쯤 되서 교수님이 그 가운데 제일 머리가 좋은 청년 두사람을 딱 불러놓고 너희들 그동안에 실험실에 갇혀 가지고 몇 년동안 고생 많이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겠지 그러나 내가 하는 연구가 지금 중요하니까 너희들 중에 하나만 좀 남아서 나를 좀 도와주렴. 그랬습니다. 아 의리상 아니라고 할수도 없고 해서 둘중에 하나만 남아야 하니까 그래서 동전을 던져가지고 이렇게 정해가지고 한 사람은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졸업하고 나가게 되니까 이 실험실에 갇혀 있다가 가니까 너무 좋아가지고 가서 돈도 벌고 의사가 되서 돈도 벌고 장가도 가고 즐거운 생활 하겠다고 뛰쳐 나갔습니다. 아주 좋아요. 한 청년은 할 수 없이 남아서 또 연구실에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몇 년후에 밖에 나간 청년이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은 자기 대신 실험실에 남아 있던 촬스헐버트베스트라고 하는 자기 친구가 인슐린을 발명해가지고 노벨평화상을 탄다는 거요. 노벨상을 타게된다는 기사를 읽게 될 때 가슴을 쳤습니다. 내가 남을걸 내가 남았다면 저건 내껀데. 여러분 값을 지불하지 않고 공짜를 바라는 마음은 그건 미신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믿음을 위하여 영생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해야 됩니다. 그래서 유명한 본헤퍼는 값을 지불하지 않고 안 일한 가운데에서 예수 믿기를 바라는 사람에 대하여 값싼 은혜라는 말을 썼습니다.
자 순교해야 할 시간에 순교하지 않고 고난당해야 할 시간에도망가고 불의와 타협하고 사는 이따위 사람들을 놓고 값싼 은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요 싸구려 은혜는 언제나 싼거구요 옛생활, 잘못된 과거 이즈러진 현실을 깨끗이 부정하는 그러한 값을 지불하고 높은 은혜를 사모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게 될 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피카소의 작품가운데 황소몰이라고 하는 걸작이 있다고 합니다. 그 값은 얼마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무궁한 무궁무진한 높은 값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소재는 그가 쓰레기 처리장에서 주워온 다 낡아빠진 자전거 그것을 소재로 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내버린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자전거지만은 피카소의 눈에 피카소의 손에 들리워질 때 엄청난 값의 작품이 되었더란 말입니다. 나 자신이건 현실이건 주의 손에 들리워질 때 주의 손에 바르게만 쓰여지면 엄청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되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오늘 성경말씀을 자세히 읽으면은 내형제나 내자매나 내 목숨까지도 나를 위하여 버리게 되면 금세에서도 여러배를 받고. 마가복음 10장 30절에 보면 100배나 받고 버린다고 버려지는게 아니예요. 버릴 때 오히려 100배나 받고 겸하여 영생을 얻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가장 낮출 때 높이시고 가장 겸손한 자에게 영광을 더하시고 철저하게 마음을 비울 때 하나님께서 큰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맨 나중된 사람 맨 나중에 처져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맨 먼저 된 자로 높이시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8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