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 (마20:17-19)
본문
오늘 말씀의 초점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알고 계셨고,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셨습니다.
첫째로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땅에서 해야할 가장 귀한 사역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많은 가난한 자를 찾아 위로하시고, 병든 자를 찾아 낫게하는 일도 하셨습니다. 또 귀한 교훈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으로 우리의 구주와 주가 되시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을 따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벌써 잊어버렸지만, 먼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16:21에서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 때에 비로소 가르쳤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리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한번은 갈릴리에서 이적과 기적을 베푸시면서 성령님에 충만하여 말씀을 잔하실 때입니다. 이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입니다. (마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마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이때에 제자들이 듣고서 아멘 할렐루야 하지 않고 근심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잘 아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에서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바다가 잠잠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들러쌓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랐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든 시선과 인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중에 가장 중심되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일입니다. 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고난을 받아야하며 왜 죽으심을 받아야합니까 제자들은 근심할 만했습니다. 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이적과 그 교훈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미치광이든지, 아니면 사기군에 불과하다고 평가되었을 것이고, 당신의 생애도 우리에게서 잊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의 대속의 근거를 만들어 주셨고, 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이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해당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귀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느냐가 우리의 신앙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의 공생애 사역에서 이 사역이 중심이요, 이 사역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몇번이고 이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는 어떠해야합니까 교회는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윤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를 가르치고, 믿어 구원얻게 하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교회가 세상 같지 않다고 불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잘못 알아서 그렇습니다. 구약의 성막이 무엇하는 곳입니까 겉모습의 하얀 세마포 포장 때문에 밖에서 볼때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막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짐승을 죽이고 피를 뿌리고 각을 뜨고 짐승을 태우는 곳이 성막입니다. 교회는 그저 인간끼리 모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죄문제, 사망과 심판의 문제를 다룹니다. 뿐만아니라, 대속의 은혜를 말하며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곳입니다. 그래서 살인소요, 구인소라고 했습니다. 죽어져야할 것은 죽이는 곳이 교회요, 살려야할 것은 살리는 것이 교회입니다. 구원의 장소요, 죽여야할 옛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교회를 평가할 때에 신자들도 그 교회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그 교회가 좋고 나쁘고를 말합니다. 물론 교회에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 중요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얻은 자인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였느냐, 아니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없고, 그저 세상의 어떤 단체를 따라서 분위기가 좋고 나쁘고를 가지고 교회가 좋다 나쁘다 하지만, 교회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는 곳이어야합니다. 인간끼리 사귐이 있고 교제가 아주 좋아서 사랑이 철철 넘친다고 좋은 교회입니까 인본주의 교회는 정말 인간적인 냄새가 풍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따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봉사도 가르치고 또 구제도 가르치면서 가끔 이 구속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이제 부터는 이 구속 사역 중심으로 제자들을 이끄셨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아는 일에 힘을 쓰고,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자랑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잘 살기 위해, 행복하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죽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갈릴리의 사역이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때인데도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죄인들을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왜 세상에 태어났으며, 무엇하러 지금 여기 와 있으며, 왜 결혼하고, 애들은 키우는지 생각하면서 사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 키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혼이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까 자녀들을 공부 잘 시키고 출세시키고 물러나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까 사업을하는 것이 사업의 목표입니까 우리가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교육하고, 사업도, 취직도 할 수 있고 해야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는 아니어야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목표를 향하여 가는데에 있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잃어버린 채 현실에 안주하여 살다가 보면 삶을 하나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내 팔자야, 이렇게 시집 온 것도 팔자고,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도 팔자고. 체념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신은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좀 철학적으로 생각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의 허무다.”이렇게 근본적인 허무와 무의미,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을 하나의 본능이다. 우연이다. 허무다 하면서 살다가 갑니다.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삶을 하나의 운명으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허무입니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본능처럼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실한 목표와 방향을 잡고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십니까 예수님게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엇을 위해 오셨으며, 무엇을 지금 해야하며, 무엇을 위해 걸어가야하는지를 확실하게 아셨고, 그 목표를 향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를 드린다고해도 여전히 자기 중심 아닙니까 자기에게, 자기 가정에게 기껏 기도해도 그정도에서 그칩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도 그렇습니다. 자기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의 교회라는 인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웃교회를 생각지 않고, 어려운 교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합니까 (롬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으로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주의 것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애야합니까 믿음으로 행해야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운동에 힘을 써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을 해야합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당신께서 원하시고 원하심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갈릴릴에서 사역하셨는데,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가 되어서 올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어떤 사람의 요청에 의한 것도 아니요,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당할 것인지를 모르시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지혜가 없어서 피하지 못해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요, 또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 아닙니다. 단지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대로, 또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우리를 대속하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당신이 원하고 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걸음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또 (눅18:31)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나, 하나님의 일을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하십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단마음으로 하셔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원하여 낮아지시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세상 일도 자원하므로 기쁨으로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은 재미도 없고 지혜도 안 나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 일의 귀중성을 깨달아서 감사함을 가지는 사람은 자원하므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데에는 은혜가 없고 쉽게 피곤하고 낙심되고, 시험들고, 사고가 나고,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의 고난이 올 때에도 주님을 생각합시다. 주님께서는 다 아시면서도, 능히 피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셨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하신 예수님을 닮아야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셨습니다. 인기가 있고 평안한 곳은 갈릴리입니다. 예루살렘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일과 평안을 누릴 생각하지 않고 떠나야할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갈릴리를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을 올라가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이 십자가의 길을 주님은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 죽음 이전에 고난이 있습니다. 능욕과 채찍질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쒸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았습니다. 말로써 얼마나 모욕을 했습니까 이분이 사53의 고난 받는 메시야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핍박하는 시대가 아니라도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도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 죽음은 그저 죽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살것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삶도 주를 위하여 살 뿐 아니라 우리생명 조차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드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이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모든 영광은 고난 다음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조차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들이 삶의 목표를 바로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오늘 삶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맞추어야합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신 것이 오늘 같이 약빠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볼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걸음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주님 같이 잘 사신 분이 없습니다.
죽음을 주님 같이 귀하게 사용하신 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대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오신 주님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들은 주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의 정신을 배워 이 제자의 걸음을 걸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신자들의 삶이 너무 안일하고,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의 그 헌신적이고 충성된 신앙의 걸음과 우리를 비교할 때에 어떻습니까 아무리 자기를 위한 목표로 중심하여 살아도 세상은 잠간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해서 고난을 받아도 잠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하여 산자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은 자의 그 영광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오늘에 고난 없이 영광이 있겠습니까 오늘에 죽어지는 것이 없이 부활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원하심으로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원수요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시고, 능욕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를 영광으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 어떻게 죽어야할지를 확정짓고 살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치고 절제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가 산제물이 될 각오가 되어있어야합니다. 고난과 죽음과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우리의 삶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일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 까지 우리는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하는데, 아직 이 길도 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자기의 삶을 이 시간 결정합시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확실해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오늘에 우리가 이룰 것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구원 중심이어야합니다. 자원하여 우리에게 당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첫째로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땅에서 해야할 가장 귀한 사역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많은 가난한 자를 찾아 위로하시고, 병든 자를 찾아 낫게하는 일도 하셨습니다. 또 귀한 교훈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것으로 우리의 구주와 주가 되시지는 못합니다. 주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을 따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벌써 잊어버렸지만, 먼저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에 16:21에서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이 때에 비로소 가르쳤습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말리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또한번은 갈릴리에서 이적과 기적을 베푸시면서 성령님에 충만하여 말씀을 잔하실 때입니다. 이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입니다. (마17: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마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더라 이때에 제자들이 듣고서 아멘 할렐루야 하지 않고 근심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잘 아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갈릴리에서의 사역에서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바다가 잠잠하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들러쌓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다시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역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랐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 목적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든 시선과 인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오늘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중에 가장 중심되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실 일입니다. 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고난을 받아야하며 왜 죽으심을 받아야합니까 제자들은 근심할 만했습니다. 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없다면 예수님의 이적과 그 교훈의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미치광이든지, 아니면 사기군에 불과하다고 평가되었을 것이고, 당신의 생애도 우리에게서 잊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의 대속의 근거를 만들어 주셨고, 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였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산상보훈의 말씀이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믿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해당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귀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믿느냐가 우리의 신앙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께서의 공생애 사역에서 이 사역이 중심이요, 이 사역이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몇번이고 이 고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는 어떠해야합니까 교회는 사회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윤리를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를 가르치고, 믿어 구원얻게 하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교회가 세상 같지 않다고 불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잘못 알아서 그렇습니다. 구약의 성막이 무엇하는 곳입니까 겉모습의 하얀 세마포 포장 때문에 밖에서 볼때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막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짐승을 죽이고 피를 뿌리고 각을 뜨고 짐승을 태우는 곳이 성막입니다. 교회는 그저 인간끼리 모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이 아닙니다.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루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죄문제, 사망과 심판의 문제를 다룹니다. 뿐만아니라, 대속의 은혜를 말하며 사람을 생명으로 이끄는 곳입니다. 그래서 살인소요, 구인소라고 했습니다. 죽어져야할 것은 죽이는 곳이 교회요, 살려야할 것은 살리는 것이 교회입니다. 구원의 장소요, 죽여야할 옛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교회를 평가할 때에 신자들도 그 교회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그 교회가 좋고 나쁘고를 말합니다. 물론 교회에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 중요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구원을 얻은 자인가, 아닌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였느냐, 아니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없고, 그저 세상의 어떤 단체를 따라서 분위기가 좋고 나쁘고를 가지고 교회가 좋다 나쁘다 하지만, 교회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는 곳이어야합니다. 인간끼리 사귐이 있고 교제가 아주 좋아서 사랑이 철철 넘친다고 좋은 교회입니까 인본주의 교회는 정말 인간적인 냄새가 풍길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따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봉사도 가르치고 또 구제도 가르치면서 가끔 이 구속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이제 부터는 이 구속 사역 중심으로 제자들을 이끄셨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되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아는 일에 힘을 쓰고,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자랑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잘 살기 위해, 행복하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죽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갈릴리의 사역이 인기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때인데도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한 번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죄인들을 위한 영원한 속죄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왜 세상에 태어났으며, 무엇하러 지금 여기 와 있으며, 왜 결혼하고, 애들은 키우는지 생각하면서 사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아이들 키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혼이 우리의 삶의 목표입니까 자녀들을 공부 잘 시키고 출세시키고 물러나는 것이 삶의 목표입니까 사업을하는 것이 사업의 목표입니까 우리가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교육하고, 사업도, 취직도 할 수 있고 해야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는 아니어야합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목표를 향하여 가는데에 있는 한 과정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삶의 의미와 목표를 잃어버린 채 현실에 안주하여 살다가 보면 삶을 하나의 운명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게 내 팔자야, 이렇게 시집 온 것도 팔자고,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도 팔자고. 체념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자신은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좀 철학적으로 생각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의 허무다.”이렇게 근본적인 허무와 무의미,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인생을 하나의 본능이다. 우연이다. 허무다 하면서 살다가 갑니다.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삶을 하나의 운명으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허무입니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본능처럼 살아갑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확실한 목표와 방향을 잡고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십니까 예수님게서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무엇을 위해 오셨으며, 무엇을 지금 해야하며, 무엇을 위해 걸어가야하는지를 확실하게 아셨고, 그 목표를 향해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를 드린다고해도 여전히 자기 중심 아닙니까 자기에게, 자기 가정에게 기껏 기도해도 그정도에서 그칩니다. 교회를 위한 기도도 그렇습니다. 자기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님의 교회라는 인식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웃교회를 생각지 않고, 어려운 교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합니까 (롬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으로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주의 것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애야합니까 믿음으로 행해야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운동에 힘을 써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을 해야합니다. (빌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당신께서 원하시고 원하심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갈릴릴에서 사역하셨는데,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가 되어서 올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어떤 사람의 요청에 의한 것도 아니요, 누가 강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당할 것인지를 모르시고 가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지혜가 없어서 피하지 못해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요, 또 능력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 아닙니다. 단지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대로, 또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우리를 대속하시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당신이 원하고 원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걸음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또 (눅18:31)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나, 하나님의 일을 어떤 자세로 어떤 마음으로 하십니까 자원하는 마음으로 단마음으로 하셔야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원하여 낮아지시고,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세상 일도 자원하므로 기쁨으로 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마지못해 하는 일은 재미도 없고 지혜도 안 나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일도 그렇습니다. 이 일의 귀중성을 깨달아서 감사함을 가지는 사람은 자원하므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는 데에는 은혜가 없고 쉽게 피곤하고 낙심되고, 시험들고, 사고가 나고,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들이 우리 몫에 태인 십자가의 고난이 올 때에도 주님을 생각합시다. 주님께서는 다 아시면서도, 능히 피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이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셨습니다.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향하신 예수님을 닮아야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떠나셨습니다. 인기가 있고 평안한 곳은 갈릴리입니다. 예루살렘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일과 평안을 누릴 생각하지 않고 떠나야할 때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갈릴리를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을 올라가면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이 십자가의 길을 주님은 걸어가셨습니다. 십자가 죽음 이전에 고난이 있습니다. 능욕과 채찍질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쒸웠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았습니다. 말로써 얼마나 모욕을 했습니까 이분이 사53의 고난 받는 메시야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핍박하는 시대가 아니라도 오늘날과 같은 현실에서도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 죽음은 그저 죽는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살것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삶도 주를 위하여 살 뿐 아니라 우리생명 조차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드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이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모든 영광은 고난 다음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 다음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난조차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들이 삶의 목표를 바로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오늘 삶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맞추어야합니다. 주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가신 것이 오늘 같이 약빠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볼때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걸음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주님 같이 잘 사신 분이 없습니다.
죽음을 주님 같이 귀하게 사용하신 분이 없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대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오신 주님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들은 주님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의 정신을 배워 이 제자의 걸음을 걸어가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신자들의 삶이 너무 안일하고, 너무 자기 중심적이지 않습니까 주님의 제자들의 그 헌신적이고 충성된 신앙의 걸음과 우리를 비교할 때에 어떻습니까 아무리 자기를 위한 목표로 중심하여 살아도 세상은 잠간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산다고 해서 고난을 받아도 잠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기만을 위하여 산자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은 자의 그 영광이 어떻게 같겠습니까 오늘에 고난 없이 영광이 있겠습니까 오늘에 죽어지는 것이 없이 부활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원하심으로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원수요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시고, 능욕과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그리스도를 영광으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 어떻게 죽어야할지를 확정짓고 살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치고 절제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가 산제물이 될 각오가 되어있어야합니다. 고난과 죽음과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는 우리의 삶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일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 까지 우리는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하는데, 아직 이 길도 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길을 걸어가겠습니까 자기의 삶을 이 시간 결정합시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확실해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합니다. 오늘에 우리가 이룰 것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구원 중심이어야합니다. 자원하여 우리에게 당한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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