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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군을 부르시는 하나님 (마20:1-16)

본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근본적 이유는 이 모든 성경의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입니다.(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은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의 내용들을 보면 사실 민망한 장면들도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일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합, 다말, 밧세바.) 이렇듯 예수께서 그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관계된 모든 것들이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문학,역사,사람이야기,동물이야기.등 많은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신신학자들이 창조설화라고 말하는 천지창조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고 동화책에 나오는 것같은 요나서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것들이 소중한 이유는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구약 모든 성경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보아야할 중심은 못보고 쓸데없는 것만 본다면 제아무리 수천번 읽었다손 치더라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양화점 주인은 구두만 볼 것이요 양복점 주인은 옷만 볼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사람의 어디를 봅니까 역시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옷이나 헤어스타일이나 몸매는 사람의 얼굴을 본 다음에 볼 문제지 뭐니뭐니해도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처럼 언제나 중심을 보고 그 중심에 의해서 지엽적인 면이 관찰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볼 때 무엇부터 보아야 합니까 당연히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 어디를 보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천지창조, 제사제도,성막,이삭을 바친 사건.등 모든 사건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삭을 바친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사람을 제물로 바쳤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가장 밝게 빛나는 곳은 역시 복음서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한다면 복음서는 예수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부터 보지않고 지엽적인것 부터 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단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복음서는 제쳐두고 계시록, 다니엘, 에스겔.등만 다룹니다. 예수 가라사대는 아예 쳐다도 안보고 숫자나 이상한 지명에만 관심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다른책은 천천히 읽어도 됩니다. 복음서를 가장 먼저 읽으십시오. 로마서가 아무리 정교해도 복음서 해설책에 불과하며 구약이 아무리 방대해도 복음서에 대한 역사성을 증명하는 책일 뿐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를 증거하는 책이며 서신서들은 복음서를 응용한 변증서일 뿐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경은 복음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중에 더욱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4복음서가 하나같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부분은 “예수 가라사대”라는 부분입니다. 성경 66권은 하나도 뺄 수 없는 하나님의 귀한 말씀입니다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더욱 중요한 말씀은 “예수 가라사대”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본문은 19:28부터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인데 19:28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9:28-20:16까지는 예수님의 직언의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 아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주보에는 생략하겠습니다만 본 비유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석연치 못한 몇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아무리 주인이 후하기로서니 끝나기 한 시간전에 부른 종을 겨우 한시간만 일시키고 어떻게 하루 품삯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며,
둘째, 그렇게 후한 주인이라면 12시간 일한 종에게는 왜 한데나리온 밖에 안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분배의 법칙에 어긋나는 엄청난 불공평이 아닙니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면서 분문에서 몇가지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먼저 본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이 시작하기 바로 전절인 마19:30과 본 비유의 결론과도 같은 마지막 구절 20:16을 보면 “처음 된자는 나중되고 나중 된자는 처음된다”는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19:30-20:16 사이에 있는 열다섯절에 해당하는 이 비유는 결국 앞과 뒤에 있는 진리를 예증하기 위한 비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방인에 대한 구원문제와 유대인들의 자세를 언급하신 것입니다만 우리는 특별히 성경학교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일군의 측면에서 주인되신 하나님께서 일군된 우리를 어떻게 부르시는가를 상고해 보고 다음 시간에는 일군의 입장에서 어떤 자세로 일해야 하는가를 두시간에 걸쳐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일군은 먼저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로 선언하고 있습니다.(15절) 그럼 하나님이 어떠한 면에서 주권자이십니가
첫째, 하나님은 절대 소유자이십니다. 창조하셨기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것입니다. 그리고 피로 값주고 사셨기에 역시 하나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고 개발했다고 해서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만 그러나 모든 영토, 지적소유, 기술, 아이디어등 삼라만상이 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내것같이 보일뿐 사실은 전부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놓으신 것들 뿐입니다. 그러니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시체의 수의는 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절대 섭리자이십니다. 창조하시고 섭리하실뿐 아니라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아니하시고 섭리해 나가십니다. 한나라의 대통령도 정치를 하려면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느 누구의 동의나 간섭이 필요없이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역사하시고 섭리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자녀와 종만 있을 뿐이지 참모는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절대 분배자이십니다. 창조 섭리 소유하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쁘신 뜻대로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 분배에 있어서 노동법이 제정한 원칙에 의해, 노조의 눈치를 보시고 나누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분배하십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을 원하시는 만큼 분배하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더 가졌다고 교만할 것도 없으며 조금 덜 가졌다고 불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배분되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절대 회수자이십니다. 나누어 주실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거두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잡아도 하나님께서 다시 내놔라하시면 내놔야합니다. 생명도 지식도 자녀도 부부도 재산도.다 내놓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소꼽놀이를 하면서 ‘너는 엄마해라 나는 아빠한다’ 하며 풀을 뜯어 반찬만들고 모래로 밥을 만듭니다. 그러나 해가져서 엄마나 ‘얘야 들어오너라’ 하고 부르시면 모든 것을 다 툴툴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하나님이 인생의 석양에 우리를 부르시면 인생소꼽놀이 하던 우리는 모두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욥은 이 진리를 알았기에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잃어버렸어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은 절대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의 법정에는 검사도 변호사도 필요없습니다. 1-3심 제도도 필요없고 상고도 항소도, 지방법원도 대법원도 필요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의 법대로 역사와 사람을 심판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는 오판이나 번복이 있을 수가 없고 실수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일군을 찾고 부르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시장에 나가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사람들을 일군으로 고용하는데 한번만 한것이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려 다섯번이나 나가서 일군을 고용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위해 일 할 일군을 찾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신데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없지않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일은 일군을 통해서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전도할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평신도로서 전문 사역자를 찾고 계시며 교회에서 봉사할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물질,시간,재능,지위.등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 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은 일군을 부르시되 일때문에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 려고 부르신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을 읽다보면 어떠한 느낌을 받습니까 포도원에 일 할 거리가 너무나 많아서 일손이 딸려서 장터에 나가 사람을 찾았습니까 아닙니다. 일군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놀고 있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루 품삯을 주고 싶어하는 간절한 말음에서 일꾼을 부르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구걸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너무나 많아 내가 아니면 안되겠기에 나를 일군으로 부르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군이란 말입니까 원래 우리가 받을 것은 심판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일을 주신것은 은혜를 주시려고 기회를 주신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앞에서 일 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은 대단히 대단히 큰 은혜요 감사의 조건입니다. 본문의 교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산 모 교회 장로님은 집이 서울인데도 불구하고 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1년에 단 한번의 결석도 없이 매주 토요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간다고 합니다. 또한 병원에서 수술날자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장로님은 주일날 기도순서임을 알고 촌각을 다투는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월요일로 연기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을 위해 쓸 기회가 생기거든 망설이지 말고 즉각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나에게 주시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은 일이 아닌 일군을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군의 능력을 보심이 아니요 자세를 보십니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사회에서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승진시키고 못하는 사람은 감원시키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세에 있습니다. 자세가 얼마나 진실하냐, 감사한 마음이냐, 기쁨으로 봉사하느냐, 정성을 다하느냐,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느냐, 이것을 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과나 능력을 보지 아니하시고 자세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때문에 부르셨다면 일찍온 사람을 더 주었던지 늦게 온 사람을 덜 주던지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능력있는 일군으로 보시지 아니하십니다. 만삭되지 못한자요 무익한 종이지만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은혜를 주시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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