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영접한 무리들 (마21:1-11)
본문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1주일간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은 기뻐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지우기도 하고 길에 펴기도 하였으며 수 많은 군중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앞 뒤로 호위를 하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서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왕이여 하늘에서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라고 예수님을 환영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의 뜻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의 말에 “만세” 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또 종려나무는 키가 약20여m나 되는데 관상수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구약 아가서 7:7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키와 유방을 가르켜 종려나무 같다고 표현 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종려나무가 많아서 종려도시라고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미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실 때에 관한 기사입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시곤 하였으나 이 날은 많은 사람이 모이는 유월절 절기 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오실 때에 수천명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면서 예수님을 환영 하던 그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들도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이 시간 우리들의 마음에 영접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마10:40-41)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해 버린 세리와 창기들과 억눌린 사람 가난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식사도 같이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배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도둑놈을 영접하여 도둑놈과 같이 어울려 논다면 그 사람은 분명 도둑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배와 같이 어울려 놀게 되면 십중팔구는 분명 불량배가 될 것입니다. 사기꾼을 영접하면 사기꾼이 됩니다. 간첩을 영접하면 간첩이 됩니다. 놀음꾼을 영접하면 놀음꾼이 됩니다. 사탄 마귀를 영접하면 마귀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요1:11-12)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한 주간을 예루살렘에서 지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때에는 벌써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고 책잡으려는 무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으나 그래도 뜨겁게 환영하는 무리가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들어오실 때에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든 많은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무리들 중에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주님을 배척하는 자가 되지 않고 중심으로 뜨겁게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1. 나귀를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전쟁에서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말을 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당시는 나귀가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귀를 탄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전 BC 520년에 예언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벳바게 맞은편 마을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마을 어구에 매인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내려가 보니정말 나귀가 매여 있습니다. 그 매인 나귀를 풀자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 라고하자 이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 듯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이 말에 선뜻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나귀의 주인은 주님을 아직 모릅니다.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의 필요에 한 인간이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소유권 문제나 다른 문제는 개의치 않고 바로 나귀를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바침으로 그의 신앙은 위대한 신앙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한 말씀중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부딛칩니다. 마5:13 절의 산상수훈의 말씀중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이 쓰시겠다는 것과 쓸데가 없어 밖에 버리운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영광된 일이요 버림을 당하는 길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물건을 쓰다가 못쓰게 되어서 버린다는 것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 아무 쓸 곳이 없어서 버림을 받는 것처럼 큰 수치와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이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그의 가치나 존재를 인정해 주지 못할 만큼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묵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환영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위해 나귀를 드린 헌신을 보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오늘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내 마음에, 내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입성하십니다. 주님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것을 쓰시고자 하시고, 받고자 하는 주님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며 주님을 환영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겉옷을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만들어 예수님이 편히 앉으실 수 있도록 한 사람도 있고 겉옷을 길에 편 사람도 있습니다. 왜 겉옷을 벗어서 이와 같이 하였습니까
(1)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존경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외국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는 공항에 붉은 카핏을 깔아서 영접을 합니다. 바로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자가 말타고 올 때에 허리 굽혀서 절하는 것은 진정한 존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겉옷을 펴는 것은 진정한 존경입니다. 억지로 동원된 무리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 권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겉옷을 벗어서 주님을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2)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정중한 예의를 표한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이와 같은 예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하다기 보다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 온갖 예의를 다하여야 합니다.
(3) 또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최상의 것을 드리는 표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항상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도 최상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한 예의로서 최상의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중에 두번째 무리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 예수의 발아래 깔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나를 두르고 있는 것을 벗어서 예수의 발아래 내려 놓고 예수를 영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두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교만, 나의 이기심, 나의 자존심, 나의 지식, 나의 명예, 나의 상식, 나의 습관으로 나를 두르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인 예수가 지금 이시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내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찾아오십니다. 겉옷을 벗어 주의 발아래 깔고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고 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숭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종려나무는 잘 시들거나 마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왕이 행차를 할 때에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나 그 가지를 길에 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종려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주님을 환영하는데 쓰일 나무는 시들거나 마른 것은 안됩니다. 생명의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도 새롭고 싱싱해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과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믿음도 푸른 종려나무와 같이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92: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예' 봄이 되면은 각종 과실 나무에 접목을 합니다.
그런데 접목을 할 때 산나무끼리 접목을 하여야 그 나무가 살게 됩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죽은 가지가 되면은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손에는 항상 생명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 할 준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이를 환영하는 무리들은 승리와 생명의 상징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승리와 생명은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승리의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함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승리와 생명입니다. 만왕의 왕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바로 믿음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늘 푸르른 믿음, 살아있는 믿음, 생동감있는 믿음, 능력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호산나' 를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편 118:2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형통케 하옵소서" 라는 뜻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리를 질러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억압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을 하시자 '바로 이때다' 생각을 한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짖을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 환란에서, 이 고통에서, 이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구원의 요청이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외면하시지 않고 우리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예수를 향하여 무리들은 예수를 ‘구원의 주’라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목청을 돋우어서, 힘있게 찬송을 하였습니다. 목청이 터지도록, 힘껏 주님을 찬양하여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지금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구주되신 예수를 힘껏 찬양하며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는 예수를 영접했던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 평황의 왕이 십자가의 형벌을 이기시고 오늘 만왕의 왕으로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찾아 오십니다. 그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으로 나를 두르고 있는 자존심과 명예, 교만, 지식, 습관을 주의 발아래 드리며 생동하는 믿음을 구원의 주님을 힘껏 찬송함으로 그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만왕의 왕인 예수를 환영하는 영접하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나귀를 드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는 전쟁에서는 말을 타고 전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말을 타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셨습니다. 당시는 나귀가 중요한 교통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귀를 탄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전 BC 520년에 예언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기 위하여 제자들을 벳바게 맞은편 마을 베다니로 보내시면서 마을 어구에 매인 나귀가 있을 것이니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마을로 내려가 보니정말 나귀가 매여 있습니다. 그 매인 나귀를 풀자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가져가려느냐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쓰실 것입니다." 라고하자 이 나귀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선 듯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는 이 말에 선뜻 내어준 것을 보면 그는 믿음이 좋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나귀의 주인은 주님을 아직 모릅니다. 고이 길러서 한 번도 타보지도 않고 부려보지도 않고 짐을 실어보지도 않은 나귀를 주님께 제공해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 할 수 있는 큰 교훈은 주님의 필요에 한 인간이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귀 주인은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 한마디에 자기의 소유권 문제나 다른 문제는 개의치 않고 바로 나귀를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바치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요구에 응하여 자신의 아들을 바침으로 그의 신앙은 위대한 신앙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 3절에 보면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한 말씀중에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부딛칩니다. 마5:13 절의 산상수훈의 말씀중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주님이 쓰시겠다는 것과 쓸데가 없어 밖에 버리운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대조를 이루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쓰임을 받는 것은 영광된 일이요 버림을 당하는 길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어떤 물건을 쓰다가 못쓰게 되어서 버린다는 것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람이 아무 쓸 곳이 없어서 버림을 받는 것처럼 큰 수치와 고통은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에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다면 참으로 이 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그의 가치나 존재를 인정해 주지 못할 만큼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드렸습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묵숨까지도 주셨는데 우리들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얼마나 드리고 있습니까 이 나귀를 드린 사람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있습니까 환영을 하는 사람에게는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위해 나귀를 드린 헌신을 보시며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오늘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내 마음에, 내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입성하십니다. 주님을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것을 쓰시고자 하시고, 받고자 하는 주님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며 주님을 환영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겉옷을 드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옷을 벗어서 나귀에 안장을 만들어 예수님이 편히 앉으실 수 있도록 한 사람도 있고 겉옷을 길에 편 사람도 있습니다. 왜 겉옷을 벗어서 이와 같이 하였습니까
(1)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존경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지금도 외국의 국왕이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올 때에는 공항에 붉은 카핏을 깔아서 영접을 합니다. 바로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한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복자가 말타고 올 때에 허리 굽혀서 절하는 것은 진정한 존경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께 겉옷을 펴는 것은 진정한 존경입니다. 억지로 동원된 무리도 아니고 강요에 의해서 온 것도 아닙니다. 누가 권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 겉옷을 벗어서 주님을 환영하였던 것입니다.
(2)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정중한 예의를 표한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이와 같은 예의는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하다기 보다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께 온갖 예의를 다하여야 합니다.
(3) 또 겉옷을 길에 편 것은 최상의 것을 드리는 표현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항상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신앙도 최상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주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정중한 예의로서 최상의 것을 드리는 마음으로 주님앞에 겉옷을 펴서 주님을 영접하여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환영하는 무리중에 두번째 무리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 예수의 발아래 깔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나를 두르고 있는 것을 벗어서 예수의 발아래 내려 놓고 예수를 영접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두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교만, 나의 이기심, 나의 자존심, 나의 지식, 나의 명예, 나의 상식, 나의 습관으로 나를 두르고 있습니다. 만왕의 왕인 예수가 지금 이시간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내 마음과 가정과 교회에 찾아오십니다. 겉옷을 벗어 주의 발아래 깔고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호산나를 부르고 또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숭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이 종려나무는 잘 시들거나 마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당시 군왕이 행차를 할 때에 사용하던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주님을 환영하는 것이나 그 가지를 길에 펴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종려나무는 사철 푸른 나무입니다. 주님을 환영하는데 쓰일 나무는 시들거나 마른 것은 안됩니다. 생명의 주님을 찬양하는 마음도 새롭고 싱싱해야 합니다. 생명은 생명과 바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믿음도 푸른 종려나무와 같이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92:12)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예' 봄이 되면은 각종 과실 나무에 접목을 합니다.
그런데 접목을 할 때 산나무끼리 접목을 하여야 그 나무가 살게 됩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죽은 가지가 되면은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손에는 항상 생명있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 할 준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이를 환영하는 무리들은 승리와 생명의 상징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승리와 생명은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승리의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가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함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승리와 생명입니다. 만왕의 왕 예수를 영접하는 자는 바로 믿음으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늘 푸르른 믿음, 살아있는 믿음, 생동감있는 믿음, 능력있는 믿음으로 주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 '호산나' 를 외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시편 118:2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옵소서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형통케 하옵소서" 라는 뜻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리를 질러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억압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입성을 하시자 '바로 이때다' 생각을 한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들도 주님을 향하여 '호산나!' 라고 부르짖을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 환란에서, 이 고통에서, 이 질병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주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구원의 요청이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외면하시지 않고 우리 성도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예수를 향하여 무리들은 예수를 ‘구원의 주’라고 찬송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목청을 돋우어서, 힘있게 찬송을 하였습니다. 목청이 터지도록, 힘껏 주님을 찬양하여 예수를 맞이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지금 오늘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구주되신 예수를 힘껏 찬양하며 맞이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는 예수를 영접했던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 평황의 왕이 십자가의 형벌을 이기시고 오늘 만왕의 왕으로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찾아 오십니다. 그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드리는 헌신으로 나를 두르고 있는 자존심과 명예, 교만, 지식, 습관을 주의 발아래 드리며 생동하는 믿음을 구원의 주님을 힘껏 찬송함으로 그 주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만왕의 왕인 예수를 환영하는 영접하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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