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동안의 왕 (마21:1-11)
본문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첫 번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가 없다. 두번째
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을 완전하게 지킬 사람 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세번째
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구원을 믿고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이다. 오늘의 장면은 예수께서 예언대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내 용이다. 사람들은 그를 기대했다. 그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물위로 걷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고대하던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았다.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 왕에 대한 경의를 표 했다.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폈다. 누가 알가. 새 날이 왔는지.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무엇보 다도 이 나라가 독립하고 다윗의 시대처럼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리고 가난과 굴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신나는 날이 올 것이다. 이 들은 자기 욕구가 모두 다 메시아의 출연과 함께 해결되리라 믿었다. 여기 저기에서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사람들 은 소리치고 있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전설의 왕이었던가! 오늘도 같 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린다. 교회의 신자들도 같은 방법으로 부르짖고 있다. "호산나, 구원하소서, 권능을 보이소서." 그러나 왕의 입성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왕은 나귀를 탔다. 그 것도 새끼라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의 인물들은 너무도 초라 했다. 장군도 박사도 없었다. 그 왕의 모습까지도 너무나 왕같지 않았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다. 그리고 이 왕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 지 않았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실망하였다. 그들은 흩어져 돌아갔다.
예수는 단지 몇 시간 동안 왕의 대우를 받았을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얼굴을 돌이 켰다. 실망한 사람들은 그를 고발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이 이루 어지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예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요구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예수의 왕노릇 해프닝은 끝났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자신들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있는 신이다. 기도하고 애원 하고 협박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원한다. 헌신하고 헌금내며 선행하면서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복 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원하는대로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한다. 우리 집사님 한 분이 말했다. 얼마 전에 기도 제목을 노트에 적어 놓았다. 모두 이루어졌는데 단 하나만이 그렇지 못했다. 사실상 이 하 나가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응답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하나님을 신으로 알고 아버지로 안 다면 기도의 응답 여부와 시간은 그분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기도하란 말인가 대답은 이것이다. 기도는 끝까지 해야한다. 단지 무응답은 그 무응답이 현재 이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입장으로는 가장 좋은 응답이라는 것이다. 끝까지 무응답일지, 더 좋은 것으로 응답될지, 아니면 적합한 시간에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기도는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왕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사람들마다 저마다 자기 기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인다면 세상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주기철 목사가 하루는 길을 가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 처마 밑에 섰다. 기다려도 비는 그치지 않자 비가 그 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빗줄기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빗속을 걸으면서 고백했다. 왕이신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비를 내리시는데 나 개인 한 사람이 잠시편하자고 비를 멈추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응답 안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가!
그는 빗줄기를 뒤집어쓰면서 목이 메도록 찬송을 불렀다. 자비로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그는 참으로 복종의 대상이다. 마음 속까지 그를 복종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를 왕으로 모신다. 적어도 "주"라고 그를 부르는 동안은 그렇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는 하나님이시다. 인자가 끝이 없고 선 하며 자기의 자녀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이라고 자신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가 복종하는 것은 이 하나님이다. 그 외에 무엇에 복종하랴. 그에게 복종함으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지배하게 한다. 그의 하나님 되심에 내 삶을 맡기는 것이다. 거기에 질서가 있다. 그는 평강의 왕이다. 평강에게 복종하라. 그는 권능의 왕이다. 권능에게 복종하라. 그는 생명이시다. 생명에게 복종하라.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복종하라. 그렇게 그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삶 전체를 지배하게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사고에 복종해야 한다. 그의 생각으로 내 생각을 대치해야 한다. 내 생각을 따르지 말라. 남의 말을 따르지 마 라. 과학의 자료보다도 그의 말씀을 따르라. 이렇게 해서 그를 경배하 라. 그를 경배하는 것은 그의 사고를 내 사고로 함으로서 가능하다. 그가 나를 향해서 성경에 기술한 것으로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한 의사의 고백을 들어보자. 군 러셀의 1950년대 초년병 시절의 일이었다. 그가 왕진을 갔을 때 70세의 한 제지업자는 침대에서 벼개 를 잔뜩 허리에 받친채로 헐덕이고 있었다. 얼굴과 손가락은 검푸른 빛이었다. 그는 심장 장애와 천식에서 온 폐렴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맥박도 혈압도 낮았다. 그러나 의사는 그를 병원으로 옮길 수 없었다. 환자가 병원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의사로서는 처음 불리운 사람인데 그 이유는 단지 그가 예수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신자건 불신자건 자기가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치료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신자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여하간 환자에게 간호사를 하나 붙여 주었다.
그는 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오늘날 페니실린을 가진 것만해도 충분히 기적이 아닌가 꼭 베드로처럼 앉은뱅이를 호령해서 일으켜야 하는가 내가 신자라해도 그 이상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 단 말인가" 그 순간 마음 속에서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어 생각을 버렸다. 다음날 환자의 혈액검사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혈색소는 정상인의 삼분의 일도 안되었다. 절반이하면 위급한 것이다. 동료 의사들이 그 를 검진해 본 뒤에 말했다. 이제 병원에 가도 그 사람은 분명히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 간호사는 전화를 통해 말했다. 상태 가 몹씨 나빠서 자기가 보기에 한 시간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환자에게 달려간 그는 어느새 기도하고 있었다. "왜 나는 그를 도 울 수 없습니까" 그때 그의 마음 속에 왕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그 를 위해 기도해라."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그는 환자 위에 손을 얹었다.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원하옵나니, 이 사람을 치료해 주시 기 바랍니다. 나는 그가 지금 죽는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환자는 누워서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그는 가족들을 보면서 목쉰 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자 그는 궁금증이 일어나서 그 집에 다시 가 보았다. 별 변화는 없었지만 적어 도 환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두 시간 후에 그는 또 찾아 갔다. 호흡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맥박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는 희망을 가졌다. 저녁 때 환자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전히 몹시 아픈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젠 상당히 생기를 찾은 사람이었다. 의사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몇 달 뒤에 환자는 본래의 제지업으로 돌아갔고 15년을 더 살고 죽었다. 이후에 이 의사는 점점 믿음의 확신을 가졌고 말씀에 복종해서 기도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의사로서는 은퇴했으나 여전히 가장 강력한 치료법을 사람들에게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왕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가 나를 구했다고 하시면 나는 구함받은 것이다. 그가 나를 고 쳤다고 하시니 나는 건강해진 것이다. 내 病歷과 경험을 믿지 말라. 내 家系와 혈통을 믿지 말라. 모든 분야에서 그의 명령을 순종하라. 당장 내게 큰 변화가 안 생긴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왕으로 경배 하라. 그는 겸손해서 어린 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렇 다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를 하루동안만 왕 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원히 통치하는 왕이요 하나님이다.
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을 완전하게 지킬 사람 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세번째
는 하나님이 이루어주신 구원을 믿고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이다. 오늘의 장면은 예수께서 예언대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내 용이다. 사람들은 그를 기대했다. 그는 죽은 자를 일으키고 물위로 걷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고대하던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았다. 사람들은 그를 환영했다. 왕에 대한 경의를 표 했다.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폈다. 누가 알가. 새 날이 왔는지. 사람들은 점점 더 모여들고 온 예루살렘이 소동하였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오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무엇보 다도 이 나라가 독립하고 다윗의 시대처럼 강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리고 가난과 굴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신나는 날이 올 것이다. 이 들은 자기 욕구가 모두 다 메시아의 출연과 함께 해결되리라 믿었다. 여기 저기에서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고 사람들 은 소리치고 있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전설의 왕이었던가! 오늘도 같 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린다. 교회의 신자들도 같은 방법으로 부르짖고 있다. "호산나, 구원하소서, 권능을 보이소서." 그러나 왕의 입성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다. 왕은 나귀를 탔다. 그 것도 새끼라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의 인물들은 너무도 초라 했다. 장군도 박사도 없었다. 그 왕의 모습까지도 너무나 왕같지 않았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다. 그리고 이 왕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 지 않았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실망하였다. 그들은 흩어져 돌아갔다.
예수는 단지 몇 시간 동안 왕의 대우를 받았을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얼굴을 돌이 켰다. 실망한 사람들은 그를 고발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뜻이 이루 어지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예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요구 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예수의 왕노릇 해프닝은 끝났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실망하고 분노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자신들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있는 신이다. 기도하고 애원 하고 협박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원한다. 헌신하고 헌금내며 선행하면서 하나님이 감동하시고 복 주실 것을 기대한다. 그래서 원하는대로 잘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한다. 우리 집사님 한 분이 말했다. 얼마 전에 기도 제목을 노트에 적어 놓았다. 모두 이루어졌는데 단 하나만이 그렇지 못했다. 사실상 이 하 나가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응답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하나님을 신으로 알고 아버지로 안 다면 기도의 응답 여부와 시간은 그분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기도하란 말인가 대답은 이것이다. 기도는 끝까지 해야한다. 단지 무응답은 그 무응답이 현재 이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입장으로는 가장 좋은 응답이라는 것이다. 끝까지 무응답일지, 더 좋은 것으로 응답될지, 아니면 적합한 시간에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른다. 기도는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왕의 뜻대로 이루어진다. 사람들마다 저마다 자기 기도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움직인다면 세상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주기철 목사가 하루는 길을 가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려 처마 밑에 섰다. 기다려도 비는 그치지 않자 비가 그 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빗줄기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는 빗속을 걸으면서 고백했다. 왕이신 하나님이 필요에 의해서 비를 내리시는데 나 개인 한 사람이 잠시편하자고 비를 멈추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응답 안하신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은혜로운 일인가!
그는 빗줄기를 뒤집어쓰면서 목이 메도록 찬송을 불렀다. 자비로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그는 참으로 복종의 대상이다. 마음 속까지 그를 복종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를 왕으로 모신다. 적어도 "주"라고 그를 부르는 동안은 그렇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는 하나님이시다. 인자가 끝이 없고 선 하며 자기의 자녀들을 돌보고 책임지는 이라고 자신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가 복종하는 것은 이 하나님이다. 그 외에 무엇에 복종하랴. 그에게 복종함으로 우리는 그가 우리를 지배하게 한다. 그의 하나님 되심에 내 삶을 맡기는 것이다. 거기에 질서가 있다. 그는 평강의 왕이다. 평강에게 복종하라. 그는 권능의 왕이다. 권능에게 복종하라. 그는 생명이시다. 생명에게 복종하라. 그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복종하라. 그렇게 그가 나의 마음과 생각과 삶 전체를 지배하게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사고에 복종해야 한다. 그의 생각으로 내 생각을 대치해야 한다. 내 생각을 따르지 말라. 남의 말을 따르지 마 라. 과학의 자료보다도 그의 말씀을 따르라. 이렇게 해서 그를 경배하 라. 그를 경배하는 것은 그의 사고를 내 사고로 함으로서 가능하다. 그가 나를 향해서 성경에 기술한 것으로 나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다. 한 의사의 고백을 들어보자. 군 러셀의 1950년대 초년병 시절의 일이었다. 그가 왕진을 갔을 때 70세의 한 제지업자는 침대에서 벼개 를 잔뜩 허리에 받친채로 헐덕이고 있었다. 얼굴과 손가락은 검푸른 빛이었다. 그는 심장 장애와 천식에서 온 폐렴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맥박도 혈압도 낮았다. 그러나 의사는 그를 병원으로 옮길 수 없었다. 환자가 병원을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의사로서는 처음 불리운 사람인데 그 이유는 단지 그가 예수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신자건 불신자건 자기가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치료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신자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여하간 환자에게 간호사를 하나 붙여 주었다.
그는 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오늘날 페니실린을 가진 것만해도 충분히 기적이 아닌가 꼭 베드로처럼 앉은뱅이를 호령해서 일으켜야 하는가 내가 신자라해도 그 이상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 단 말인가" 그 순간 마음 속에서 "병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어 생각을 버렸다. 다음날 환자의 혈액검사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혈색소는 정상인의 삼분의 일도 안되었다. 절반이하면 위급한 것이다. 동료 의사들이 그 를 검진해 본 뒤에 말했다. 이제 병원에 가도 그 사람은 분명히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 간호사는 전화를 통해 말했다. 상태 가 몹씨 나빠서 자기가 보기에 한 시간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이다. 환자에게 달려간 그는 어느새 기도하고 있었다. "왜 나는 그를 도 울 수 없습니까" 그때 그의 마음 속에 왕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그 를 위해 기도해라."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그는 환자 위에 손을 얹었다.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원하옵나니, 이 사람을 치료해 주시 기 바랍니다. 나는 그가 지금 죽는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환자는 누워서 여전히 혼수상태였다. 그는 가족들을 보면서 목쉰 소리로 말했다. "제가 할 일은 다 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자 그는 궁금증이 일어나서 그 집에 다시 가 보았다. 별 변화는 없었지만 적어 도 환자는 아직 살아있었다. 두 시간 후에 그는 또 찾아 갔다. 호흡은 여전히 힘들었지만 맥박은 안정되어 있었다. 그는 희망을 가졌다. 저녁 때 환자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전히 몹시 아픈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젠 상당히 생기를 찾은 사람이었다. 의사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몇 달 뒤에 환자는 본래의 제지업으로 돌아갔고 15년을 더 살고 죽었다. 이후에 이 의사는 점점 믿음의 확신을 가졌고 말씀에 복종해서 기도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의사로서는 은퇴했으나 여전히 가장 강력한 치료법을 사람들에게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왕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가 나를 구했다고 하시면 나는 구함받은 것이다. 그가 나를 고 쳤다고 하시니 나는 건강해진 것이다. 내 病歷과 경험을 믿지 말라. 내 家系와 혈통을 믿지 말라. 모든 분야에서 그의 명령을 순종하라. 당장 내게 큰 변화가 안 생긴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왕으로 경배 하라. 그는 겸손해서 어린 나귀를 타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렇 다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를 하루동안만 왕 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영원히 통치하는 왕이요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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