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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쓰시겠다 (마21:1-11)

본문

예수님께서 갈릴리, 특별히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하여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3년의 공생애를 마치면서 세번에 걸친 그의 예언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에 많은 무리들이 그를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한 두사람이 아니라, 아주 큰 무리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모든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은 한 마디로 말하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중요한 의미인데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는 인류의 죄를 지고 대신하여 죽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가시는 고난의 길입니다. 또한 가지는 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관식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왕이 사는 도시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와 죽음과 저주를 짊어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곧 이 세상의 주인이요, 왕이신 분이 오셨지만, 이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기는 커녕 오히려 고난을 가하고 십자가에 죽이기 까지 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즉위할 때는 온 나라가 떠들썩한 잔치를 베풉니다. 왕이 아니라 대통령이 취임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결혼식만해도 떠들고 축하하고 잔치하고 하는데,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를 영접하는 이가 없습니다. 누가 대관식을 열어주거나 잔치를 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늘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떠들석하지만, 실은 이 떠드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관식을 하신 것입니다. 이 때까지 예수님은 당신이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데 대하여 드러내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드러내실 때가 되었기 때문에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인류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신 것이 본문의 대관식 장면입니다. 어떤 사람은 위임목사로 취임하는 것도 떠들썩하게 남에게 환영을 받으려 하고, 잔치를 벌이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대관식을 준비하신 것을 보면 너무 겸손하여 초라하기 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두 제자에게 입성을 위한 준비를 시키는데, 맞은 편 마을에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볼 터이니 그 두마리를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왕이라도 마차를 타든지 말을 타든지 했을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카 프레이드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왕이다. 너희의 구원자라고 선포하시면서 준비시키신 것은 나귀와 나귀새끼입니다. 어째보면 너무 하신 것 같이도 보이고, 너무 초라해서 눈물이 나올지경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주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진리를 알리고 있습니다. 이 나귀를 타신 것은 우리 주님의 겸손하심을 나타냅니다. 나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이 나귀는 한번도 타 보지 않은 나귀입니다. 순수하고 순결한 새끼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겸손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자기를 알아주고, 대우하면 기분 좋아하지만, 자기가 봐도 받아야할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에 섭섭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원수로 삼기도 합니다.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오늘 이생각 때문에 우리에게 지나친 소비행위가 나와서 나라를 이렇게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래서 자기 정도에 지나친 자가용을 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적어도 자기가 살고 있는 집보다는 더 큰 집에 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정도의 월급은 받아야한다고 합니다. 나는 이정도의 지위는 되어야한다. 이 생각이 있는한 우리에게 천국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끼리 더 나은 대우를 받아봐야 뭐합니까 그 대우나 인정이 얼마나 갑니까 그러나 이것이 영원한 것인줄로 알고 이 대우와 인정을 받으려합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다. 어느 직장에 다닌다. 나는 어느 아파트에 살아요. 나는 어떤 직챙이다. 심지어 자기에게도 없는 집안 누구의 빽을 믿고서 자기를 알아줄 것을 요구하는 못난 사람까지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떠합니까 주님이 나귀를 타셨습니다. 주님이 말을 타실 수 없는 분이십니까 말 뿐이겠습니까 왜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가난해 지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겸손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요, 만 주의 주 되심을 믿으십니까 이 주님께서 당연히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의 군왕들도 마차를 타고 군대에 옹휘를 받고 입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셨습니다. 주님의 겸손을 보여 줍니다. 진정 영적인 사람은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대우 받으려하고 사람들의 인정이 없어서 섭섭한 마음이 들 때에 나귀 타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천해지시고, 가난해지신 모습을 생각합시다. 주님이 나귀 타셨는데, 목사가 좋은 차 타야합니까 경운기를 타도 감사할 뿐이지요. 목사만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세상 것이 부족해서 안타까울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을 때에 차나, 집을 바꾸어서 자기를 과시하려고는 맙시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가난해지면 복있습니다. 나귀 타신 주님의 모습은 겸손의 모습일 뿐 아니라, 평화의 왕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평화로 세상을 점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나폴레옴은 말하기를 내가 세계를 점령했거늘 오늘 나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예수는 갈릴리를 떠나지도 않았음에도 오늘 그를 위해 죽으려하는 자들이 수백만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칼로서 세계를 점령하려 했으나 다 못했는데, 예수는 사랑으로 세계를 다 점령했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왕들은 칼과 창으로 무기로 땅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주님께서 사랑으로, 평강으로 온유로 세계를 점령했습니다.
하늘나라는 겸손과 평강의 나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여기에세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진리는 예수님은 전지하신 분이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동네 맞은 편에 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람산에서 내려오시면서 나귀가 있는 집을 알고 계십니까 주님의 전지를 가르치지 않습니까 또 주님께서 나귀와 그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신 명령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남의 것을 끌어오라고 시키십니까 만일에 주님께서 남의 것을 끌어오라고 시켰다면 이는 도적질을 시킨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에게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만일에 예수님이 나귀의 주인이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주인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주인이 당신의 것을 당신의 뜻하는 데에 쓰겠다고 하는 때에 어떤 누가 거부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누가 보고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하라 했습니다. 이 말은 잘못 사용하면 큰 폐단이 됩니다. 많은 이단들이 이 말을 사용해서 축재를 합니다. 우리는 먼저 그 일이 과연 주님의 뜻인지를 바로 알아야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그곳에 사용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주님의 것인줄로 알고 나는 청지기로서 드려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주께로 부터 온 것임을 믿습니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믿으십니까 주께서 쓰시려할 때에 충성된 청지기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그렇고, 직장인들도 그렇지만. 공부하는 학생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나의 모든 시간, 재능 다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어야합니다. 나를 위해서 내 영광, 내 명예, 출세를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이 공부하는 것이나, 재능에 대해서도 청지기인줄 알고,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고자하는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주님게서 주신 우리의 가진 돈, 재능, 시간을 주님께서 쓰시려고 할 때에 쓰임 받는다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쓰시려할 때에 드리지 않는 사람은 속셈을 해보니 손해를 안본 것 같아서 좋아하지만, 실은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이 영광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복됩니다. 이 나귀의 주인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을 태우고 간 나귀도 어떻습니까 주님을 태운 덕분에 영광을 같이 받고, 예루살렘에 같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나귀 같은 자 아닙니까 청와대는 아무나 못들어갑니다. 총리라도 함부로 못 들어갑니다. 영부인이든지 자녀라면 몰라도 누구든지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야하는데, 한사람은 자유입니다. 프리패스입니다. 누구입니까 승용차 기사님입니다. 이 사람은 청와대를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왔다합니다.
어떤 때는 경례를 받기도하는데 실은 대통령에게 하는 경례이지만, 자신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아닙니까 아무 볼 품없는 나귀가 예수님 덕분에 영광을 얻고, 제자들과 무리들이 깔아 놓은 겉옷을 밟고지나가게 됩니다. 또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아무런 볼품 없는 자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등에 업으니, 우리가 예루살렘, 곧 천국도 들어가게 되었고, 영광도 함께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겸손을 이 말씀에서 배웁시다. 예수님의 온유와 평화를 배워야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이심을 붙잡읍시다. 주님의 것인 줄 아는 사람은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을 기다립니다.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것인줄 아는 사람, 제가 가진 소유도 제것이요, 제 몸도 목숨도 제것인줄 알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주께 쓰임 받는 이 은혜가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모으는 것도, 주께서 쓰실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진 것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것이 내것입니까 아닙니다. 욥은 이 소유관에 대해서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그 환난에서도 자기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신 일에 대하여도 감사했습니다. 쓰임받은 주인도 복되고, 그 때에 놓임 받아 쓰임을 받은 나귀도 영광과 존귀를 함께 받았습니다. 그 때 그 나귀 주인이 이 나귀는 어디까지나 내것입니다. 하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그 나귀주인이 안 뺏겼으니 복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아직 열리지 않은 오늘 우리의 지식을 생각해도 그는 복되다고 평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또 얼마나 영광되고, 존귀하겠습니까 나귀도 그 영광을 받았다면, 주인은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를 보면서 주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할 때에 우리가 주저맙시다. 이것이 복인 것으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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