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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자의 감격 (마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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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감격의 시대가 아닙니다. 월드컵에서라도 이겼다면 그 나마 감격이 없는 시대 겉 껍데기 반짝 감격이라도 맛볼텐데, 밤을 밝혀서 TV 앞에 앉아서 캐낸 것이라곤 또 불안과 허탈 뿐 입니다. 이렇게 감격이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감격시대'는 오히려 일제치하 눈물 겨운 때입니다. 육이오 동 란으로 풀뿌리를 캐먹고 피난살이 하던 때입니다. 요즈음 경제위기 시대가 되니까 이제 눈물을 찾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 '편지' 이런 영화가 유행을 합니다. 호황기때 같았으면 신파조 청승을 떤다고 휴지통에 버렸을 그런 영화입니다. 복고풍이 유행을 합니다. TV의 광고도 가난하던 60년대 70년 대 장면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정작 어려워지 면 자신을 되 찾습니다. 감사와 눈물을 회복합니다. 풍족하면 오만해 집니다. 성취한 것이 있다 싶으면 자기 의가 쌓이고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 민족이 지금 당하는 어려움은 오히려 진정한 자신을 되찾는 소중한 시 간인지도 모릅니다. 가장 소중한 눈물과 감격을 회복하는 시간 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 성자가 심판대 앞의 맨 뒷자리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 습니다. 모두들 훈장처럼 잘한 것을 달고 나옵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그 성자만은 유별났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 말에 "주여 잘한 일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습니다."라고 말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빚진 자의 심정, 죄인된 심정은 겸비를 낳고, 겸비하고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입고 삽니다. 그래서 감 격과 감사가 넘쳐 납니다. 빚은 채무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빚(오페일레)이 죄라는 용어로도 쓰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오페일레테스)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기서 죄(오페일레테스)는 빚(오페일레)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 옵소서'는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과 참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구절입니다. 주기도문의 이 구절을 뒤집으면 오늘 본문의 인색한 탕감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 하여 준 것 같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닥달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저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빚진자의 심정은 죄인된 심정입니다. 탕감받은 자의 감격이 크다는 것은 죄에서 구원받은 감격이 크다는 것입니다. 죄와 빚, 탕감과 구원은 이렇게 동전의 양면 입니다. 죽을 죄에서 구원받은 감격이 폭포수 처럼 큰 사람은 철저하게 빚진자의 자세로 삽니다.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영어성경 리빙바이블에는 일만 달란트를 천만달러로, 백데나리온을 2천불로 표현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환율로 치면 140억 대 280만원입니다. 얼 추 6000배가 됩니다. 말하자면, 140억 빚 면제 받은 사람이 280만원 돈 받을 것 있는 사람한데 가서 멱살잡이를 했다는 거 지요. 우리가 원래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부 엄청난 빚을 진 자였습니다. 갚을 길 이 없는 빚, 딱 죽을 수밖에 없는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몸값을 지불하고 빼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감격과 은혜가 아 오릅니다. 주님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죽을 사람을 살려 주셨 습니다. 이것 기억하십니까 신나지 않습니까 감사하지 않습 니까 이렇게 엉청난 빚을 지고 있다가 탕감 받고 자유와 생명 을 얻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하며 살 일입니다. 이게 잘 되겠습니까 한번도 잘 참아주 지 못해 얼마나 실패를 합니까 세 번 정도 용서해 주면 인격 이 높은 사람입니다. 일곱 번 용서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주님, 일곱 번 정도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 용서 하라 합니다.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을 실천하는 힘은 무 엇입니까 바로 탕감받은 자의 감격입니다. 용서받은 자의 감격 입니다. 여러분 지금 미워하는 분을 생각해 보세요. 목사님이 사정을 몰라서 그렇지 구제불능이예요 이럴수 있습니다. 분노에 시달 리는 분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감격을 가지고 용서를 해 주세 요. 우리는 분노의 대상인 그 분에게 엄청난 빚을 갚아야하는 대상입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의 기초는 탕감받은 자의 감격입니다. 크리스 챤의 행위의 근거도 탕감받은 자의 감격입니다. 행위로는 구원 을 얻지 못합니다. 구원은 값없이 선물로 받은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롬3:24)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 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너희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엡2:8) 대가는 없습니다. 조건도 없습니다. 자격도 없습니다. 다만 유일한 요구가 있다면, 이 탕감받은 자의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답게"라는 말이 중요 합니다. 무한한 은혜를 입은자 답게, 인색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은자 답게, 사랑을 펑펑 나눠 주면서 살 아야 합니다. 천문학적 용서를 받은 자 답게, 바다 보다 더
넓은 용서를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목숨을 끊을 정도의 무게였 던 큰 짐을 벗은자 답게, 자유롭고 허허로이 살아야 합니다. 천하를 얻은 것 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린 자 답게, 기쁨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신앙인의 윤리의 바탕입니다. 이 "답게"는 실천의 근거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를 용서하자는 내용입니다. 얼핏 들으면 도덕 이나 윤리에 관한 말씀 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중 요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 신앙인의 기본구조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겁니다. 단순히 형제를 용서하라는 도덕적인 주문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윤리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 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 이까 '(21절)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좀 엉뚱합니다. 용서의 윤리를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이와 같으니'라 고 대답합니다. 얼마큼 이웃에게 잘 해 줘야 하는 지, 용서의 횟수와 용서의 강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어느 한도 까지 용서해 야 하는 지 등 모든 것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이 필요해서 베드 로는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뜬금 없이 빚지고 탕감 받은 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천국, 하나님 나라를 동원해서 말이죠. 동문서답 같지만 이게 가장 맞는 대답입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어요.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말하자면, 무 릇 용서를 하려는 자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의 심정을 가져 야, 바른 용서를 할 수 있다 이런 말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 이 형제를 대하는 자세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기초 공사가 잘 되어야 건물이 튼튼하듯이, 이웃 사랑도 '탕감 받은 자의 감격'이라는 기초 공사가 튼튼히 되어야 한다는 말씀 입니다.
그러니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감격에 대해 이 야기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 두 번 용서해주고 짜 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 내가 이 만큼 해 줬으면 너도 뭔 가 있어야지! 벼룩도 낯짝이 있다는 데' 뭐 이렇게 됩니다. 그 러구 용서하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엄청난 빚 을 탕감 받은 자의 감격이 있으면 무한 용서가 가능합니다. 왜 요 바로 내가 그보다 더한 엄청난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흔번씩 일곱 번은 무한히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 질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 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죽을 죄에서 구원받은 자의 감격,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의 감사로 가야 가능한 길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는 잊어 버리고 그 감격과 은혜의 태도를 버리고 사는 오늘의 크리스챤을 향한 도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이야기 하면 자연스레 해답이 나온다는 겁니다. 기독교는 윤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도덕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이 제대로 서면 윤리 보다 더 윤리적이 되고, 도덕 보다 더 도덕적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윤리의 근거가 독특합니다. 바로 구원받은 자의 감격입니다. 구속받은 자의 감사입니다. 탕감 받은자의 기쁨입니다. 이게 크리스챤의 일평생 행동의 근거가 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몸을 기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를 속 량해 주셨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면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값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값이 싸서 값없는 것이 아니 라, 가히 값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기에 값이 없는 것입니다. 값의 잣대로는 잴 수 조차 없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 도다."입니다. 여기에서 감격이 샘 솟습니다. 빚을 탕감 받은자는 어떻게 살아 갑니까 신앙인의 이웃 용서도, 신앙인의 너그러움도, 신앙인의 봉사 도, 신앙인의 자선도, 신앙인의 복음증거 생활도, 신앙인의 헌 신도 전부 탕감받은 자의 자세가 바탕이 되야 합니다. 신앙인의 일거수 일투족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건 탕감 받은 자의 감 격입니다. 예배도, 선교도, 봉사도, 선행도, 헌신도 감사와 눈물 이 있을 뿐입니다. 예배는 빚진 자들의 잔치입니다. 삼풍백화점 구출자들의 모임 처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탕감받을 때의 감격을 회상하고 나누는 자리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예배에는 감격이 있고 감사찬양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어떤분은 전도를 해주는 것으로 압니다.
목사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해 주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 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4) 헌신도 빚 진자의 감격입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 은 여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가룟유다는 이걸 보고 너무 아깝 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산적인 머리이지요. 그러나 이 여인은 탕감받은 자의 감격이 너무 컸습니다. 봉사를 하면서 구제를 하면서 우월감을 갖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봉사하는 대상, 우리가 섬기는 대상, 우리 가 구제하는 대상은 우리의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억만분의 일의 빚을 갚을 뿐입니다. 그것도 작은 일부를! 봉사의 대상들 은 우리에게 있어서 채권자입니다. 우리는 채무자입니다. 민중 을 위해 봉사하는 것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빚진자로서 빚을 갚아가는 아주 작은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일이 요. 송구스러운 일입니다. 우월감이나 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격이 있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않으면 그 섬김의 자리가 어디든지 간에 그는 행복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위대 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런까닭에 탕감받은 자는, 오늘 비유의 주인공 처럼 인색할 수 없습니다. 탕감받은 자는 이웃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 인색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진 것에 대해 인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남을 정죄하는 데는 익숙한지요. 우리는 얼마나 은혜 를 받기는 좋아 하면서 은혜를 베풀기에는 인색한지요.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일입니다. 또 탕감받은 자는 교만, 공로,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잃어 버린 생활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감격을 잃어 버리고 싸늘하고 메마른 가슴을 안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뼈와 뼈가 부 딪히는 소리가 나고 자기 의가 높아져 있습니다. 교만과 자기과 시와 겉치례와 위선에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지적 해서 길모퉁이에서 서서 고고히 기도하는 바리세인과 머리를 무 릎 사이에 밖고 처연한 기도를 드리는 세리를 비교해서 말씀하 셨습니다. 우리는 세리가 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요 거기에서 빚진자의 아픔과 탕감받은 자의 감격이 매일 처 럼 용솟음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소인배들은 자기의 잘한 것 을 내 세웁니다. 그러나 믿음의 거인은 죄인 중의 죄인이라고 겸비의 눈물을 흘립니다. 탕감받은 자는 대가나 평판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감사와 감격이 있을 뿐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이런 고백의 눈물이 있을 뿐입니다.
40년 동안 종교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신앙 의 감격이 없어 답답해하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수녀원에 투신하여 계율과 의무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차가움과 공허는 여전하였습니다. 어느 날 복도를 걸어가 다가 주께서 헤롯의 뜰에서 채찍을 맞으시는 그림을 보았습니다. 수 백번도 더 본 그림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그 순간 만 큼은 전혀 새로운 경이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그 여 인은 자신을 위해 고난받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순간 그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한참 후 여인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새 영혼으로 일어섰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진 심정으로 일어섰습니다. 더 이상 이 여 인은 옛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바다가 여인의 가슴에서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이 바로 성 테레사입니다. 오늘은 사실 감동이 없는 시대입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도 그렇습니다. 감동이 메말라 버렸고 또 사실 감동이 없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심각한 것은 크리스챤 조차도 감동이 사라 져 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감격과 겸비와 눈물과 감사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가 흐르지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찢기신 살이 없습니다. 뼈만 앙상 하게 남아 남을 헤 치고 부딪히고 공격하고 그러다 부러져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 십자가의 찢기신 살도 입혀야 하고, 십자가의 보 혈의 생생한 피도 흘러야 합니다. 그리고 감격의 눈물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에 살아 움직이는 생생한 그리스도 인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을 우리 주님은 피를 흘리며 찾고 계 십니다. 빚진자의 감격이 폭포수 처럼 흐르는 그리스도인 그는 하나님 의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밖혔다고 선 포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주님이 사신다고 말합니다.
내가 자랑하는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 로 자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을 합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감히 말하는 자입니다. 나는 사도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주저없이 말합니다.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함이라고 주장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진정 탕 감받은 자의 감격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 감격과 이 감사와 이 겸비와 이 기쁨을 회복합시다. 이런 축복이 가득 흘러 넘치도록 합시다. (기도문) 주님, 저희들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사실 가슴이 메마르 고 눈물이 마르고, 감격과 감동이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 습니다. 저희가 엄청난 구원의 감격, 구원의 빚을 지고 살아가 지만 이웃형제를 대할 때 봉사할 때 헌신할 때, 오히려 자기를 주장하고 공로를 내세우고 교만과 가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 님 오셔서 메마른 가식에 가득찬 저희의 가슴에 십자가의 보혈 의 피가 흐르게 하여 주옵소서. 다 내어 주신 주님의 찢기신 살 을 덧입게 하옵소서. 탕감받은 자의 감격, 구원받은 자의 감동 을 한 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겸비한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 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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