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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청년 (마19:16-22)

본문

어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청년은 이제 까지 예수님께 나아왔던 다른 사람과는 확실히 많은 점에서 달랐습니다. 특히 이 청년은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이 청년에 대해서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다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이 부자 청년이 어떤 사람인가 살펴봅니다. 마태복음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그는
첫째로 노인도,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청년이었습니다.
둘째로, 22절을 보면 그는 재물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에는 이 사람이 관원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관원’은 유대회당의 지도자나 산헤드린 회원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세 가지를 다 가진 것 아닙니까 그는 젊음을 가진 미래가 있고 희망있는 청년입니다. 젊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입니까 젊음은 아직 미래가 그에게 있다는 것 때문에, 또 건강하여 무슨 일이라도 계획하고, 실행하며,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좋은 때 아닙니까 아파보지 않으면, 건강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늙어서야 젊음의 소중함도 깨닫습니다. 또 이 청년은 다른 젊은 이들이 아직은 돈은 없을 때인데도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젊음이 있고, 돈이 있다.” 세상이 다 제 것 같은 심정일 것입니다. 뭐 더 부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청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그런 관원이라는 명예와, 지위를 가졌습니다. 솔로몬은 선천적으로 이 세가지를 다 가졌는데 이 청년은 어떻게 이를 가졌는지는 모르나, 이 청년을 세상은 부러워할 것이고, 아무 고민도 없는 부러워할 대상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젊은 자에게 약점은 그 젊은 혈기때문에 도덕적인 약점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여느 사람과는 달랐습니다. 보통 젊은 이에게, 또 부한 자들에게, 또 권력이나, 인기 명예가 있는 자에게 없는 도덕적인 삶이 이 청년에게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계명에 관한 말씀하셨을 때에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자신있게 반문한 것을 보아도 그의 선한 행실은 완벽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철이 들어서 성인이 되어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이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만한 사람이 우리 교회에 있을런지, 우리 가운데 이런 청년이 있다면, 아마 훌륭한 인물, 일군으로 평가할 것입니다.
또 이 청년이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그의 선한 행실이 단지 어떤 외식적인 행위만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대로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나온 것과는 전혀 다른 구도자의 자세로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적인 겸손까지 갖추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으로 호칭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말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는 그가 예수님께 무릎을 굻고 앉아서 물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전심으로 예수님께 존경과 관심을 가졌는데, 또 그가 예수님께 드린 질문 또한 놀랍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은 그 누구도 묻지 않은 핵심되는 질문입니다. 영생을 어떻게 해야 얻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복음의 핵심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문제,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그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청년이요, 부자요, 세상의 지위와 권세를 가졌고, 또 그의 삶도 어려서부터 도덕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가 예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평가도 바른 것을 보면 그의 성품도 바로 되었습니다. 또 그는 인생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았습니다. “이 세상의 이 모든 것으로는 만족을 누릴 수가 없다. 이것들 보다 더 귀한 것, 영생이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 가치 없는 것 아닌가 ” 이래서 그는 구도자가 되었고, 예수님에게 까지 나아온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영생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영생은 어떤 것입니까 이를 구했으며, 과연 이 영생을 얻었습니까
그렇다면 이 영생을 어떻게 얻었습니까 먼저 영생은 어떤 것입니까 영원불멸의 존재인 인생이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입니까 장생불로하기를 원하여 온갖 신약을 개발하고, 유전공학을 연구하지만, 인생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장생이요, 불로입니까 우리 연세 많으신 분들에게 물어 보시면 잘 압니다. 이 세상을 앞으로 200년을 더 살게 해 드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럴 때에 감사하다고 할 사람은 몇 분 없을 것입니다. 진정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분들이라면 많은 세월을 산다고 하는 것을 징그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이 마냥 무한히 산다고 하는 그 자체 뿐이라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영생의 개념을 늙지않고 영원히 사는 무한한 생명시간의 연장으로만 생각하시면 착각입니다. 그러면 영생은 어떤 것입니까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품에 영원히 안긴 삶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21:33) 우리가 언제부터 영생합니까 우리가 믿는 즉시로 영생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죽어서 얻는 영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고 누리고 계심을 믿어야합니다. 이 영생하는 자에게는 죽음이 없는 것입니다. 죽음을 초월한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은 죽어서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서 이 세상에 살지만, 믿는 자는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으로 사는 이 영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죽음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생을 일평생 두렵게 하는 이 육신의 죽음이 영생을 얻은 자에게는 어떻게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육신이 암에 걸려 죽는다고 해도 영생을 가진 사람은 이 죽음이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실패나 부도나서 망하는 것 조차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근본적으로 나를 절망케 못하는 것은 영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고 그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가지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유가 있습니다. 평안함이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패하게 할 자가 세상에 없고, 이 사람을 망하게 할 자는 전혀 없습니다. (요10: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 이 영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이 영생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영생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 영생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부자가 이렇게 모든 것을 다 구비하고도 영생을 구하기 까지 했지만, 영생이 무엇인지, 어떻게 얻는지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구원관을 바로 깨닫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는 영생을 어떻게 얻는 줄 알았습니까 자신이 선행을 하므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이제까지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는 이제껏 자신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다 차지하였던 것 같이 이제는 보다 더 영원하고, 신령한 것에 대하여도 욕심이 나서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이분이 인생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마19: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예수님은 아주 재미있게, 또 놀라운 방법으로 이 청년에게 접근하십니다. 자신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랑하고픈 이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야, 믿어야 한다, 영생은 내가 은혜로 너희에게 주는 것이야” 하지 않으시고, 그 청년이 가진 자랑하는 선한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지켜라”고 하셨습니다.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그러자 이 청년은 이제 됐다. 자신있는 면을 예수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자랑도 하고 싶고, 자기가 추구했던 선한 행실에 대하여 말씀하시니다행스럽다고도 여기면서 어떤 계명을 지킬 것인가를 묻습니다. 이런 도덕적이고, 선행에 흠없는 사람들을 전도하려면 아주 애를 먹습니다. 자신이 죄인인줄 아는 사람, 약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 것을 아는 사람은 그래도 이 복음이 잘 들려지는데 이런 사람은 바늘하나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에 대한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마19: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마19: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이제 청년은 완전히 마음을 놓았습니다. 안심합니다. (마19: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모든 것은 내가 지키되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선한 행위를 했으니, 나에게는 영생이 있겠지요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19: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의 내면을 보고 계십니다. 이 청년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부자입니다. 그가 부자이면서 선한 일을 했다고 하지만, 그에게서 이 물질에 대한 애착심, 이것은 그의 최고의 약점이었습니다. 물질을 포기하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조건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을 선한 행위라면 하나님의 율법의 온전한 수준은 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이웃을 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너는 이 모든 것은 다 지켰다고 장담하고, 네 하는 선한 일로 구원, 영생을 이루는 것으로 여기고 이제까지 힘써 왔고, 이 선한 일을 네가 자랑하고 싶어 했고, 또 그 선한일로 영생을 얻는다는 내게 말을 듣고 싶어했다. 그러나 네가 어려서부터 철저히 지켰다는 그 계명지키는 행위의 그 기준은 네가 정한 것, 인간의 수준 아닌가 그것은 온전히 다 지키면 참으로 영생을 이룰 계명이지만, 범죄하고 타락한 인생이 어떻게 그 율법을 다 지키므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요구를 다 지켜 봐라 네 가진 전부를 형제를 위해 다 드려라 이것도 다 못지키지 않느냐 내가 네게 말한 것은 아직 하나님께 대한 계명도 아니다. 사람에 대한 계명도 이렇게 다 지키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영생을 이룰 것으로 여기느냐 참으로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율법의 기능을 살펴보게 됩니다. 울법은 그 자체가 악하여 우리가 율법으로 영생을 못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만일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 율법을 다 지킴으로 영생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네가 율법을 지키면 살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살게 할 그 율법이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도무지 이 하나님의 법의 수준을 지각도 못하게 되었고, 더욱 완전히 순종하여 살수 없는 심각한 부패에 이르른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를 받아 영원한 사망에 이르른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하여 이 죄의 값을 다 지불하시고, 또 우리가 수종하지 못한 그 율법의 엄한 요구를 다 순종하셔서 우리에게 의를 입히시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영생은 선한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가 부자 청년의 진실을 배워야합니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세상의 것으로 안되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모든 것 보다 더 귀한 문제가 있다. 이것을 내가 다 얻었지만, 참 만족과 평강은 없다. 인생의 생이 영생이라고 한다면 내가 무엇을 추구해야할 것인가 하는 철학하는 자세가 그래도 주님에게로 나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물질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하므로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이 복되려면 근심하더라도 돌아가지 않았어야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음”을 발견해야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까지는 내 가진 장점으로 나는 누구보다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이 없는 도덕적인 의로움과 선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오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내 속에는 이런 욕심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 내가 지금까지 나의 선으로, 나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중심까지 보시는 주님앞에 나의 숨은 죄악과 외식의 행위를 회개합니다. 구원은 나의 선한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주시여. 나의 죄도 용서해 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나도 삭개오같이 나의 소유를 다 팔아 이제 주님이 요구하시는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겠습니다.” 하여야 했습니다. 이 청년 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구비했고, 그는 예수님께 나아왔고, 그가 물었던 것이 영생이었는데, 바로 영생을 주실 구주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의 어떤 부요나, 지식이나, 육신의 강건함이나, 명예나 인기나, 또한 선한 행실로 자랑하십니까 그것을 신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더 하기 위해서 주님께 나아오지는 않습니까 영생은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인 줄 알고, 주님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에 영생이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나약하고 부족한 자신임을 깨닫게합니다.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인생으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의 일차 기능입니다. 이 뿐이면 인간은 좌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다 지켜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를 수 없는 사실을 깨닫는 자로 하여금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갈망하여 만나게 합니다. 이를 몽학선생이라고 합니다. 이래서 율법은 그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이 율법은 구원을 얻은 자, 영생을 얻은 자로 하여금, 그 율법을 다시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로 하여금 인생의 행위를 정죄하여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영생을 얻은 자에게 이 청년에게 하신 말씀대로 살아야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가진 것을 가지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 이것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행위로서 온전히 지킬 수 없어 정죄에 이르게 되었던 이 율법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법이 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상이 있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와서 주님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생의 삶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에는 이 율법의 온전한 행위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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