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풍요로움 (마19:16-22)
본문
지난 주 타임지에 벼락부자가 된 대만 사람에 대한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고등학교 출신인데 처음에는 시계 고치는 구멍 가계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증권을 사 가지고 아주 벼락부자가 되어 9시에서 10시 사이에만 가게에 가서 일을 하고, 남은 시간에는 골프를 치거나 주말이면 바다에 가서 요트를 타며 자신의 젊음을 보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흠모할 만한 그런 생활을 하게 된 거지요. 젊은이들이 생각할 때 "아! 그 사람 참 행운아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돈벌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비록 돈이 많아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지마는 진짜 행복할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참 풍요로운 삶인가 에릭 프롬(E.Fromm)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제적 부가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던 것에서 이제는 실망을 가져 왔다." 경제적 부가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가 이제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결코 경제적인 부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그러면 기술인가 기술 발달로 인간은 참으로 편리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이 기술 때문에 어떤 면에선 더 인간화되고, 그 기계 틈바구니에서 기계처럼 살아 가는 인간을 볼 때 더 비참해지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최첨단의 과학기술도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데 한계가 있구나 생각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오는데,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젊은이는 부자인데 조상으로부터 재산을 물려 받았지요. 또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으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그런 청년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이 과연 있습니까 내가 그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그가 어떤 정신적 고통 거리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사는 것이 너무 재미 있어서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랬는지, 우리는 그 동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던 인간은 부로서만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이어져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때가 있지요. 그러나 사실은 영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코 경제적 풍요나 물질적 풍요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심층에서 우러나오는 갈구함이 있는데, 그 갈구함이 뭐냐 하면 인간 본연의 자세인 영혼의 생명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야생 동물 가운에 영양이라고 하는 양의 한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은 아주 sensitive해서 하나가 뛰면 그 옆에 있는 양들도 모두 뛴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양들이 뛰면 그 옆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양들로 정신없이 뛰어 갑니다. 거기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지 막 뛰어 가니까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막 뛰어 가다가 벼랑 같은 곳을 만나면 모두 몰사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현대인들의 모습이 이 영양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영양처럼 왜 뛰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끝없는 생족 경쟁의 대열에서 그냥 뒤떨어지면 죽을 것 같으니 밤낮 없이 뛰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입시 경쟁이 전쟁이지 그게 어디 경쟁입니까 얼마나 힘들게 여기 들어 오셨습니까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달픈 생활을 하였습니까 앞으로 살아 간다는 것도 어쩌면 지금까지보다도 더 고달픈 인생을 살아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쟁의 톱니바퀴속에서 왜 이렇게 바쁘고 벅차게 뛰어야 하는지, 그 목표가 뭔지, 우리 이것을 한번쯤은 물어봐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 경쟁에 앞섰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명 있거든요. 젊음이란 실상 고뇌의 시기입니다.
여러분은 젊기 때문에 아마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그 고민 자체가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기성인들은 고민할 줄 모릅니다. 한다 해도 걱정은 하지만 고민은 하지 않고 그대로 방향 잡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없고 가능성도 없이 고사해 가고 마는 것이지요. 시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음의 특징은 고민하는 것이고, 이 현실 속에서 고민을 갖는다는 것은 보다 나은 것을 찾기 위한 그런 몸부림이기 때문에 우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없이 생각없이 그저 뛰어 가기만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풍요로움을 추구할 것인가 물질적인, 경제적인 풍요로움인가, 아니면 정신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인가 물론 부자로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거기에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생의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정말 인간은 생각하면서 내적인 것에서 움직여 사는 생물체입니다. 동물이 아니요, 인간이기에 내적이요, 정신적이요, 영적인 풍요로움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일단 이 생존 경쟁을 정지해야 하겠고 조용히 왜 뛰어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아 보는 귀한 시간들을 이 학원에서 찾아 보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소유 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에릭 프롬이 이야기한 것처럼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가졌느냐, 학벌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좋은 차를 가지고 있느냐, 집을 가지고 있느냐, 얻고 얻고 또 얻고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살아 가는 인간,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모습 아닙니까 인간은 얻기 위해 살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간 존재 자체가 귀한 것이지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인가 그것을 깨닫고 정말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서 우리의 목표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주고 더 주어서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이 땅 위에서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서 주님은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풍요로운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아마 교회 다니시는 분은 그 분의 이름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분은 고민이 많았습니다. 왜 의로운 사람들이 고생해야 하는가 왜 불의한 사람들이 강성하게 잘 사는가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그 질문이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격렬한 항변을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왜 의로우신 하나님인데 그렇게 그냥 놔 두는 것입니까 여기에 많은 고민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찾았는데, 이 말의 의미의 깊이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것이었지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이런 시를 읊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시리라." 굉장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다 없어도 나는 즐거워 하리로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리라. 미쳤습니까 왜 없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것입니까 찾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고 그는 그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풍요로움이란 무엇입니까 가시적인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숭실대학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대학원에 갔는데 학생들이 채플 시간을 마치고 밀려 나가면서 하는 말이 '예수 푹 빠졌어.' 그러는 겁니다. 그저 집에서 예수, 학교에서도 예수, 예수, 예수, 성경 공부해야 되느냐 시험쳐야 되느냐 예수에 빠졌다. 물론 그 얘기가 무슨 얘긴고 하니 억지로 채플 나와야 하고, 뭐 해야 하고, 뭐 해야 하는 그것이 싫어서 하는 얘기죠. 여기서도 여러분중에 싫어도 들어 온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억지로 들어 오기도 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여기까지 들어 오셨으니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것 물질 이외의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왔더라도 좋아서 들어 왔더라도 내적인 풍요로움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내적인 풍요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예, 저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 초월자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이예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되야 해요. 사람이 언제 행복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나는 피조물이다. 만들어진 하나의 흙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피조물 의식에서부터 사람은 행복을 찾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교만해져서 내가 할 수 있다는 큰 소리를 치면 칠수록 불안합니다. 생에 주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계셔서 여러분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는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내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주인이 있기 때문에,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평안을 얻을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린지 난 도대체 모르겠다. 그저 한 시간 앉았다가 가 주면 되는 것이다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저도 사실 채플에 들어 갈 때마다 속상하고 그냥 열심히 기도하는 아이들 보면 바보스럽고 정신이 있나 없나 싶고 그랬습니다. 그러는 삶의 의미를 못 찾겠습니다. 왜 사는지를 못 찾겠어요.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은 고민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왜 사냐는 것이죠. 살기 싫은 세상, 보기 싫은 것 너무 많아요. 치사한 세상이예요. 이 세상을 일평생 살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라리 일찍 가 버리는 것이 지혜롭지, 별볼일 없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이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일찌감치 가 버리자. 산다는 것은 지겹고 미련한 것이다.
저는 이북에 살았습니다. 대동강엘 나갔어요. 죽을려고요. 죽질 못하겠어요. 차마 용기가 없어서 죽지를 못하고 돌아 온 것이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죽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 다음에 저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찾았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참 내적이고 정신적이고 없어도 풍요롭게 사는 것이 뭐라는 것을 피난 생활을 통해, 오랜 가난한 생활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 영원한 세계, 그 영원한 삶의 세계를 호흡하면서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그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은퇴하므로써 공적인 것은 다 끝났습니다. 이제 나의 삶이란 남은 삶이란 무엇이겠느냐 그 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계속 추구해 나가서 그것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시한 몇 푼의 돈, 그것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계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운 삶을 지도해 나가는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돈돈하니까 그저 죽이고 싸우고 속이고 이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불안하고 고달프니까! 얼마나 더 악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교육은 자꾸 하고 있는데, 많은 교육은 받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악하고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래요 돈에 미쳐 버린 세상 사람들입니다. 이제 정말 인간은 인간다와야 하는데 인간의 정신적 가치에다가 최고의 목표를 두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잇대어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오늘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젊음을 투자할 생각이 없습니까 젊음을 거기에 바칠 생각은 없습니까. 참으로 이 내적이고 정신적인 세계, 이 물질 세계를 올바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어야 하고, 또 이런 사람들을 키워야 하는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다는 것을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 단계가 피조물 의식을 갖는 것이지요. 내적인 풍요로움을 갖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이 진 십자가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고제의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950년대에, 여러분 나이 적에,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힘이 들고 바쁜지요, 대단히 바쁘고 힘들 때이지요. 너무 너무 힘이 들고 시간은 없어 바쁜데 바로 그 시절에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사귐을 갖으니까 힘이 들어도 마음에는 기쁨이 있었어요.
그런데 기도는 해야겠는데 기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자꾸 졸리기만 하고, 자고 싶은데 잠자는 시간은 4시간, 5시간밖에 안 되니까 자꾸 졸음만 오고 기도하기가 그렇게 힘이 들더라구요. 육체적으로 말이예요. 그러니 한국에 돌아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요. "한국에 돌아 가서 기도하고 싶은 만큼 실컷하고, 찬송도 마음대로 하며 살아야지. 이것 뭐 공부 공부, 뭐 살겠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기도한다고 눈을 감으면 저절로 잠이 오니까 눈을 뜨고 기도하자." 눈을 뜨고 기도하는 법을 그때 배웠어요. 눈 뜨고 도서실에 가면서, 식당으로 가면서, 교실에 들어 가면서, 화장실에 가면서, 이것이 곧 나의 기도하는 시간이다 하고 생각하니 얼마나 좋지요. 그 이후로 눈을 뜨고 다니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시간밖에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기도했는데, 어떻게 마음에 기쁨이 오는지 몰라요. 그때는 나 혼자 히죽히죽 웃습니다. 어떤 때는 한국 말이니까 내가 말해도 옆에 있는 미국 아이들이 들을리가 없지요. 그래서 우리 말로 중얼중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쭝얼쭝얼하고 다녀도 미국 아이들이 알 수 있겠어요 방언을 하는지 뭘 하는지 모르니까 그냥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기도를 하면 얼마나 기쁜지요. 그러나 50년대의 한국 학생이라는 것이 구제품이나 입고 다니는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 없지요. 가난뱅이 한국 학생이, 미국의 풍요로움에 주눅이 들고 도무지 열등 의식에 눌려 일어날 수도 없던 그때에 나는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비록 보잘것 없는 한국의 고학생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풍요로움을 나는 누릴 수가 있었어요. 여러분, 이 바쁘고 복잡한 때에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풍요로운 삶인지 몰라요.
어려운 때나 슬플 때나 그 교제를 통해서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막연하게 저 선반에 놓이신 분이 아니시고, 인격적으로 나와 함께 동행해 주시고 봉사해 주시기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를 옆에 두고 사는 그런 기쁨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고통이나 죽음이 보다 낳은 세계에 들어 가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깊은 진리의 세계에 정신적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귀한 관문이 되는 것이고, 죽음이라는 것은 또 다른 좋은 세계를 향한 하나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고통과 죽음도 초월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최고의 악이요 최고의 공포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고통과 죽음도 이렇게 새로운 관문이 되는 것이 기독교이며, 동시에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상의 복지와 최고의 선도 세상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돈을 좋아하냐 그러면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 연약하고 지상의 것에 연연하고 있는 연약한 인간이게 때문에 아직도 기독교인이 물질에 시험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시험 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셋째로, 풍요로움의 스타일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하려면 네가 소유한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옛날에 이 말씀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했지요. "기독교는 너무 잔인하다. 있는 것 다 팔아서 남주고 거지가 되어 나를 따르라니 이건 너무 잔인한 요구가 아닌가."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믿고 기반을 잡고 사는 것이 바로 돈이었단 말이지요. 그 돈에 기반을 두고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기반을 두고 살아 가라는, 주님에게 삶의 기반을 놓고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섦의 기반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삶의 기반을 바꿔야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학생도 있고, 믿지 않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또 이제 처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단계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갈망하는 단계입니다. 찾아요. 계명을 지키고 연구하고 고민해 보고, 질문하는 그런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는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단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 친구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 생이 바뀌어집니다. 가치관이 바꿔져요.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세번째 단계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영원과 결합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사랑이예요. 하나님 사람, 사람 사랑이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때문에 그 사랑을 내가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런 삶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 나를 포함해서 거의 다 이
둘째 단계에서 은혜 받았다, 내가 회개했다, 내가 중생했다, 하나님 만났다, 그것으로 기쁘고 즐겁고,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지요. 진짜 삶의 스타일이 바뀌어져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을 주도록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내가 섬기려고 왔노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내 생명을 주려고 왔노라." 섬기러 왔고 주러 왔노라 하는 이 예수님의 삶의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섬기려고 왔고 주려고 온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희열을 느꼈습니다. 내가 잘 살아 보려고 하고 남처럼 잘 살아 보려고 할 때 너무 좌절되는 것이 많아서 죽고 싶었어요.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은 섬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다'라고 할 때에 삶의 의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50년대,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난 다음 해입니다. 비행기를 못 타고 배를 타고 미국에 갔습니다. 부산에서 두 주일 동안 태평양 바다를 건너 가는 것이죠. 비행기 탈 형편이 못됐던 것이지요. 그땐 아주 높은 사람이 아니곤 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가면서 저는 "하나님 제가 살던 조국, 한국에 뭔가 조금이라도 플러스가 되도록 나를 도와 주소서. 제가 먼 이국 땅에 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까마득히 보이는 저 조국 땅이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플러스가 될 것이라면 나를 보호하셔서 공부하고 돌려보내 주시고, 플러스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이 바다에 빠져 죽고 돌아 오지 못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 나름대로 제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있는 누구에게든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살아 간다고 하는 그런 의욕이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은 그렇게 지치지 않았어요. 은퇴를 했든지, 시간이 많든지, 적든지 나이와 관계가 없어요. 뭔가가 나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강력한 힘입니다. "나는 섬기러 왔노라. 나는 남에게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남을 도와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그 마음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조금이나마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간증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수도사지요. "나는 청빈과 더불어 결혼했다."라고 하면서 "태양 형님이여, 달 누님이여, 새 형제들이여!"라고 자기의 심성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자기를 위한 모든 개인주의, 이기주의에서 해탈이 될 때 모든 것과 결합이 되면서 자녀와 더불어 대화가 되는 것은 물론 진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성 프란시스코가 살았던 시대는 중세 시대 때이니까 그런 모습들이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성 프란시스코의 모습을 보면서 풍요로운 삶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느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더러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학식이나, 자기가 갖고 있던 부나, 사회적인 위치나 이런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 너무 좋은 것을 발견하니까 그 이외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연애를 하다보면 어떤 면에서 눈이 멀어요. 하나님 사람에 빠지면 가치관이 이렇게 바뀌어져요. 그래서 세상이 좋아하는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우스꽝스런 것과 같이 보이고 그래서 사랑을 따라서 살다보면, 삶은 한없이 넓어지고 아름답고 고귀하고 풍요로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부자, 그리고 젊은이 그는 영혼의 깊이에서 배고픔을 느끼고 주님께 찾아 왔습니다. 영원한 삶의 풍요가 무엇인지를 물어 왔습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디로 방향을 놓고 있습니다 그까짓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세대를 거꾸로 들여다 봐야겠습니다. 여러 젊은 지성인들은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갈 사명이 있습니다. 내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초자연적 능력,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아 참 그 사람을 느낄 때와 그와 더불어 호흡하면서 교제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내적 풍요로움입니다. 이 풍요로운 삶의 스타일이 무엇입니까 너무 너무 사랑이 크기 때문에 난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며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삶의 기쁨이 있고, 여기에 풍요로움이 있는 것이지요. 젊은이들은 이 풍요로운 삶을 계획해야 합니다. 방향잡아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 갈망하며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 갈 때 주님은 그렇게 생을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한번 밖에 없는 생을 이런 내적이고 영원한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던져 보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그 사람이 비록 돈이 많아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지마는 진짜 행복할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참 풍요로운 삶인가 에릭 프롬(E.Fromm)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경제적 부가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던 것에서 이제는 실망을 가져 왔다." 경제적 부가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준 것인가 이제까지 그렇게 믿고 있었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결코 경제적인 부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또 그러면 기술인가 기술 발달로 인간은 참으로 편리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이 기술 때문에 어떤 면에선 더 인간화되고, 그 기계 틈바구니에서 기계처럼 살아 가는 인간을 볼 때 더 비참해지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까 그런 것을 보면서 최첨단의 과학기술도 인간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데 한계가 있구나 생각이 됩니다. 성경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오는데,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젊은이는 부자인데 조상으로부터 재산을 물려 받았지요. 또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으니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그런 청년입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 앞에 나와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삶이 과연 있습니까 내가 그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까 글쎄요, 그가 어떤 정신적 고통 거리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사는 것이 너무 재미 있어서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랬는지, 우리는 그 동기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던 인간은 부로서만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원과 이어져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느끼는 때가 있지요. 그러나 사실은 영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코 경제적 풍요나 물질적 풍요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심층에서 우러나오는 갈구함이 있는데, 그 갈구함이 뭐냐 하면 인간 본연의 자세인 영혼의 생명이 있어야 인간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야생 동물 가운에 영양이라고 하는 양의 한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은 아주 sensitive해서 하나가 뛰면 그 옆에 있는 양들도 모두 뛴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양들이 뛰면 그 옆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양들로 정신없이 뛰어 갑니다. 거기서 떨어지면 죽을 것 같은지 막 뛰어 가니까 그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막 뛰어 가다가 벼랑 같은 곳을 만나면 모두 몰사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어쩌면 현대인들의 모습이 이 영양같은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영양처럼 왜 뛰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끝없는 생족 경쟁의 대열에서 그냥 뒤떨어지면 죽을 것 같으니 밤낮 없이 뛰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입시 경쟁이 전쟁이지 그게 어디 경쟁입니까 얼마나 힘들게 여기 들어 오셨습니까 어린 나이에 얼마나 고달픈 생활을 하였습니까 앞으로 살아 간다는 것도 어쩌면 지금까지보다도 더 고달픈 인생을 살아 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쟁의 톱니바퀴속에서 왜 이렇게 바쁘고 벅차게 뛰어야 하는지, 그 목표가 뭔지, 우리 이것을 한번쯤은 물어봐야 될 것 아니겠어요 그 경쟁에 앞섰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분명 있거든요. 젊음이란 실상 고뇌의 시기입니다.
여러분은 젊기 때문에 아마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그 고민 자체가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기성인들은 고민할 줄 모릅니다. 한다 해도 걱정은 하지만 고민은 하지 않고 그대로 방향 잡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변화가 없고 가능성도 없이 고사해 가고 마는 것이지요. 시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젊음의 특징은 고민하는 것이고, 이 현실 속에서 고민을 갖는다는 것은 보다 나은 것을 찾기 위한 그런 몸부림이기 때문에 우선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없이 생각없이 그저 뛰어 가기만 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풍요로움을 추구할 것인가 물질적인, 경제적인 풍요로움인가, 아니면 정신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인가 물론 부자로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거기에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생의 목표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정말 인간은 생각하면서 내적인 것에서 움직여 사는 생물체입니다. 동물이 아니요, 인간이기에 내적이요, 정신적이요, 영적인 풍요로움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일단 이 생존 경쟁을 정지해야 하겠고 조용히 왜 뛰어야 하는지 의미를 찾는,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아 보는 귀한 시간들을 이 학원에서 찾아 보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소유 구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에릭 프롬이 이야기한 것처럼 얼마나 좋은 직장을 가졌느냐, 학벌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좋은 차를 가지고 있느냐, 집을 가지고 있느냐, 얻고 얻고 또 얻고 얻기 위해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살아 가는 인간, 이것이 바로 현대인들의 모습 아닙니까 인간은 얻기 위해 살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인간 존재 자체가 귀한 것이지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사는 것인가 그것을 깨닫고 정말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데서 우리의 목표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주고 더 주어서 풍성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이 땅 위에서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해주기 위해서 주님은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풍요로운 삶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아마 교회 다니시는 분은 그 분의 이름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분은 고민이 많았습니다. 왜 의로운 사람들이 고생해야 하는가 왜 불의한 사람들이 강성하게 잘 사는가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그 질문이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격렬한 항변을 하나님에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것입니까 왜 의로우신 하나님인데 그렇게 그냥 놔 두는 것입니까 여기에 많은 고민을 하십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찾았는데, 이 말의 의미의 깊이를 내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것이었지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이런 시를 읊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 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을 다니게 하시리라." 굉장한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다 없어도 나는 즐거워 하리로다. 풍요로운 삶을 누리리라. 미쳤습니까 왜 없는데 이렇게 좋아하는 것입니까 찾았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고 그는 그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풍요로움이란 무엇입니까 가시적인 것이 아니고 초자연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숭실대학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대학원에 갔는데 학생들이 채플 시간을 마치고 밀려 나가면서 하는 말이 '예수 푹 빠졌어.' 그러는 겁니다. 그저 집에서 예수, 학교에서도 예수, 예수, 예수, 성경 공부해야 되느냐 시험쳐야 되느냐 예수에 빠졌다. 물론 그 얘기가 무슨 얘긴고 하니 억지로 채플 나와야 하고, 뭐 해야 하고, 뭐 해야 하는 그것이 싫어서 하는 얘기죠. 여기서도 여러분중에 싫어도 들어 온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억지로 들어 오기도 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여기까지 들어 오셨으니까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것 물질 이외의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왔더라도 좋아서 들어 왔더라도 내적인 풍요로움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내적인 풍요로움이 어디서 오는가 예, 저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 초월자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이예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되야 해요. 사람이 언제 행복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나는 피조물이다. 만들어진 하나의 흙이다.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피조물 의식에서부터 사람은 행복을 찾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교만해져서 내가 할 수 있다는 큰 소리를 치면 칠수록 불안합니다. 생에 주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계셔서 여러분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나는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내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내 주인이 있기 때문에,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평안을 얻을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린지 난 도대체 모르겠다. 그저 한 시간 앉았다가 가 주면 되는 것이다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저도 사실 채플에 들어 갈 때마다 속상하고 그냥 열심히 기도하는 아이들 보면 바보스럽고 정신이 있나 없나 싶고 그랬습니다. 그러는 삶의 의미를 못 찾겠습니다. 왜 사는지를 못 찾겠어요. 아마 여러분도 저와 같은 고민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왜 사냐는 것이죠. 살기 싫은 세상, 보기 싫은 것 너무 많아요. 치사한 세상이예요. 이 세상을 일평생 살아 준다는 것이 얼마나 지겨운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라리 일찍 가 버리는 것이 지혜롭지, 별볼일 없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하는 이런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일찌감치 가 버리자. 산다는 것은 지겹고 미련한 것이다.
저는 이북에 살았습니다. 대동강엘 나갔어요. 죽을려고요. 죽질 못하겠어요. 차마 용기가 없어서 죽지를 못하고 돌아 온 것이 역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죽지 못하게 하신 것으로 압니다. 그 다음에 저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찾았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참 내적이고 정신적이고 없어도 풍요롭게 사는 것이 뭐라는 것을 피난 생활을 통해, 오랜 가난한 생활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그 영원한 세계, 그 영원한 삶의 세계를 호흡하면서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그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은퇴하므로써 공적인 것은 다 끝났습니다. 이제 나의 삶이란 남은 삶이란 무엇이겠느냐 그 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계속 추구해 나가서 그것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의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시한 몇 푼의 돈, 그것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세계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운 삶을 지도해 나가는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돈돈하니까 그저 죽이고 싸우고 속이고 이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불안하고 고달프니까! 얼마나 더 악한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교육은 자꾸 하고 있는데, 많은 교육은 받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세상은 점점 악하고 불안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왜 그래요 돈에 미쳐 버린 세상 사람들입니다. 이제 정말 인간은 인간다와야 하는데 인간의 정신적 가치에다가 최고의 목표를 두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잇대어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이 오늘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젊음을 투자할 생각이 없습니까 젊음을 거기에 바칠 생각은 없습니까. 참으로 이 내적이고 정신적인 세계, 이 물질 세계를 올바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어야 하고, 또 이런 사람들을 키워야 하는 사명이 여러분들에게 있다는 것을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 단계가 피조물 의식을 갖는 것이지요. 내적인 풍요로움을 갖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분이 진 십자가를 통해 창조주 하나님과 고제의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950년대에, 여러분 나이 적에,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힘이 들고 바쁜지요, 대단히 바쁘고 힘들 때이지요. 너무 너무 힘이 들고 시간은 없어 바쁜데 바로 그 시절에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사귐을 갖으니까 힘이 들어도 마음에는 기쁨이 있었어요.
그런데 기도는 해야겠는데 기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자꾸 졸리기만 하고, 자고 싶은데 잠자는 시간은 4시간, 5시간밖에 안 되니까 자꾸 졸음만 오고 기도하기가 그렇게 힘이 들더라구요. 육체적으로 말이예요. 그러니 한국에 돌아 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요. "한국에 돌아 가서 기도하고 싶은 만큼 실컷하고, 찬송도 마음대로 하며 살아야지. 이것 뭐 공부 공부, 뭐 살겠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요. "기도한다고 눈을 감으면 저절로 잠이 오니까 눈을 뜨고 기도하자." 눈을 뜨고 기도하는 법을 그때 배웠어요. 눈 뜨고 도서실에 가면서, 식당으로 가면서, 교실에 들어 가면서, 화장실에 가면서, 이것이 곧 나의 기도하는 시간이다 하고 생각하니 얼마나 좋지요. 그 이후로 눈을 뜨고 다니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시간밖에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기도했는데, 어떻게 마음에 기쁨이 오는지 몰라요. 그때는 나 혼자 히죽히죽 웃습니다. 어떤 때는 한국 말이니까 내가 말해도 옆에 있는 미국 아이들이 들을리가 없지요. 그래서 우리 말로 중얼중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쭝얼쭝얼하고 다녀도 미국 아이들이 알 수 있겠어요 방언을 하는지 뭘 하는지 모르니까 그냥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기도를 하면 얼마나 기쁜지요. 그러나 50년대의 한국 학생이라는 것이 구제품이나 입고 다니는 참으로 초라하기 그지 없지요. 가난뱅이 한국 학생이, 미국의 풍요로움에 주눅이 들고 도무지 열등 의식에 눌려 일어날 수도 없던 그때에 나는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지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비록 보잘것 없는 한국의 고학생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풍요로움을 나는 누릴 수가 있었어요. 여러분, 이 바쁘고 복잡한 때에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풍요로운 삶인지 몰라요.
어려운 때나 슬플 때나 그 교제를 통해서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막연하게 저 선반에 놓이신 분이 아니시고, 인격적으로 나와 함께 동행해 주시고 봉사해 주시기 때문에 가장 친한 친구를 옆에 두고 사는 그런 기쁨이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풍요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고통이나 죽음이 보다 낳은 세계에 들어 가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깊은 진리의 세계에 정신적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귀한 관문이 되는 것이고, 죽음이라는 것은 또 다른 좋은 세계를 향한 하나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고통과 죽음도 초월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최고의 악이요 최고의 공포의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고통과 죽음도 이렇게 새로운 관문이 되는 것이 기독교이며, 동시에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상의 복지와 최고의 선도 세상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돈을 좋아하냐 그러면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 연약하고 지상의 것에 연연하고 있는 연약한 인간이게 때문에 아직도 기독교인이 물질에 시험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시험 거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셋째로, 풍요로움의 스타일이 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온전하고자 하려면 네가 소유한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옛날에 이 말씀을 읽으며 이렇게 생각했지요. "기독교는 너무 잔인하다. 있는 것 다 팔아서 남주고 거지가 되어 나를 따르라니 이건 너무 잔인한 요구가 아닌가."하고 생각해 봤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무엇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믿고 기반을 잡고 사는 것이 바로 돈이었단 말이지요. 그 돈에 기반을 두고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 기반을 두고 살아 가라는, 주님에게 삶의 기반을 놓고 살아 가라는 것입니다. 섦의 기반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삶의 기반을 바꿔야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학생도 있고, 믿지 않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고, 또 이제 처음으로 신앙 생활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단계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갈망하는 단계입니다. 찾아요. 계명을 지키고 연구하고 고민해 보고, 질문하는 그런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는 초자연적인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단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와 하나님과 친구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에서 생이 바뀌어집니다. 가치관이 바꿔져요.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세번째 단계가 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영원과 결합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사랑이예요. 하나님 사람, 사람 사랑이예요. 하나님을 사랑하게 때문에 그 사랑을 내가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이런 삶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 나를 포함해서 거의 다 이
둘째 단계에서 은혜 받았다, 내가 회개했다, 내가 중생했다, 하나님 만났다, 그것으로 기쁘고 즐겁고,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만족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지요. 진짜 삶의 스타일이 바뀌어져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을 주도록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 "내가 섬기려고 왔노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내 생명을 주려고 왔노라." 섬기러 왔고 주러 왔노라 하는 이 예수님의 삶의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섬기려고 왔고 주려고 온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희열을 느꼈습니다. 내가 잘 살아 보려고 하고 남처럼 잘 살아 보려고 할 때 너무 좌절되는 것이 많아서 죽고 싶었어요.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은 섬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다'라고 할 때에 삶의 의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50년대, 그러니까 한국전쟁이 난 다음 해입니다. 비행기를 못 타고 배를 타고 미국에 갔습니다. 부산에서 두 주일 동안 태평양 바다를 건너 가는 것이죠. 비행기 탈 형편이 못됐던 것이지요. 그땐 아주 높은 사람이 아니곤 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죠. 가면서 저는 "하나님 제가 살던 조국, 한국에 뭔가 조금이라도 플러스가 되도록 나를 도와 주소서. 제가 먼 이국 땅에 가서 공부한다는 것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까마득히 보이는 저 조국 땅이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플러스가 될 것이라면 나를 보호하셔서 공부하고 돌려보내 주시고, 플러스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이 바다에 빠져 죽고 돌아 오지 못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저 나름대로 제가 죽을 때까지 한국에 있는 누구에게든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살아 간다고 하는 그런 의욕이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은 그렇게 지치지 않았어요. 은퇴를 했든지, 시간이 많든지, 적든지 나이와 관계가 없어요. 뭔가가 나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강력한 힘입니다. "나는 섬기러 왔노라. 나는 남에게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남을 도와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라고 하는 그 마음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조금이나마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간증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는 수도사지요. "나는 청빈과 더불어 결혼했다."라고 하면서 "태양 형님이여, 달 누님이여, 새 형제들이여!"라고 자기의 심성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사랑하고 자기를 위한 모든 개인주의, 이기주의에서 해탈이 될 때 모든 것과 결합이 되면서 자녀와 더불어 대화가 되는 것은 물론 진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성 프란시스코가 살았던 시대는 중세 시대 때이니까 그런 모습들이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성 프란시스코의 모습을 보면서 풍요로운 삶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로구나 느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 뿐더러 내가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래서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던 학식이나, 자기가 갖고 있던 부나, 사회적인 위치나 이런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긴다. 너무 좋은 것을 발견하니까 그 이외의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연애를 하다보면 어떤 면에서 눈이 멀어요. 하나님 사람에 빠지면 가치관이 이렇게 바뀌어져요. 그래서 세상이 좋아하는 것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고, 우스꽝스런 것과 같이 보이고 그래서 사랑을 따라서 살다보면, 삶은 한없이 넓어지고 아름답고 고귀하고 풍요로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부자, 그리고 젊은이 그는 영혼의 깊이에서 배고픔을 느끼고 주님께 찾아 왔습니다. 영원한 삶의 풍요가 무엇인지를 물어 왔습니다.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디로 방향을 놓고 있습니다 그까짓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세대를 거꾸로 들여다 봐야겠습니다. 여러 젊은 지성인들은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갈 사명이 있습니다. 내적이고 영적인 풍요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초자연적 능력,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아 참 그 사람을 느낄 때와 그와 더불어 호흡하면서 교제하면서 살아 가는 것이 내적 풍요로움입니다. 이 풍요로운 삶의 스타일이 무엇입니까 너무 너무 사랑이 크기 때문에 난 아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봉사하고 섬기며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참된 삶의 기쁨이 있고, 여기에 풍요로움이 있는 것이지요. 젊은이들은 이 풍요로운 삶을 계획해야 합니다. 방향잡아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해 갈망하며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해서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 갈 때 주님은 그렇게 생을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한번 밖에 없는 생을 이런 내적이고 영원한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 던져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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