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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이혼에 대하여1 (마19:1-12)

본문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지순례를 하면서 예수님의 걸어가신 길을 밟아보면서 그분이 하신 일을 흠모하며, 그 때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육신적으로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에게 대하여 부러워도합니다. 선생 중에 우리 주님 같으신 분이 또 계시겠습니까 의원 중에 우리 주님 같으신 분이 계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복된 은혜의 때에도 복 없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바로, 많이 배웠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 또, 건강하고, 부요한 삶을 살므로 아쉬운 것이 없었던 정권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양심만 쓰면 잘 깨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양심을 쓰지 않으므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만한 것이 보이지만, 그 양심을 누르고, 오히려 예수님을 부인하고, 시험하고, 정죄한 결과를 맺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같이 다녔던 제자들이나, 그 무리들이 부럽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히11:40)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가 아니면 저들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말세의 우리가 더 복된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저희들 보다 더 많은 증거를 받은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이라도 그들은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 예수님에 대해서나, 예수님의 구속역사에 대하여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주일학생이라도 이 십자가의 도리를 확실히 압니다. 또 이 십자가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로서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우리가 가지고 있고, 또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거의 다 이루어진 시점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외식하는 자들이 구약의 많은 순교한 선지자들의 무덤을 수축하면서 우리들이 그 때에 있었으면, 이런 일을 없었을 것이라 하지만, 그러면서 그 선지자들이 고대하고 예언하던 주님께서 때가 차서 실제로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들도 그들 조상이나 꼭 같이 예수님을 배척한 그 모순된 행위를 주님께서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이 이 본문에 나타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 것이 참으로 은혜요, 복인데, 그 목적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다는 말씀을 보면서는 이들에게 대하여 우리들이 따가운 시선으로 판단하고 정죄를 하면서 오늘에 우리 신앙생활은 이들과 같지는 않습니까 교회에 출석하여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항상 비판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보고, 교회를 비판하고, 이 교회에 어떤 잘못이 있지 않나에 관심을 많이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지적을 받을 만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고쳐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설적이고, 적극적인 면에는 힘쓰지 않는 사람이 꼭 교회의 안된 면, 잘못된 면을 잘 잡아냅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하는 시각의 은사가 있는 그 사람은 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분변을 바로 해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깨닫은 말씀에 대하여 실행하지는 않고, 꼭 선포되는 말씀에 흠집이나 내려고 하는 생각을 하고,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데는 힘쓰지 않고, 비판하는 데에 힘쓰는 사람있습니다 이 사람은 여기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참 복이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설교 잘하나 못하나 구경하려고 이 자리에 나오신 분 없으시기 바랍니다. 설교에 어떤 윤택함을 찾거나, 들을 만한 상식을 얻으려고 오신 분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전하는 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애써야하고, 듣는 여러분들도 이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는가를 살펴서 이 말씀에게 겸손히 무릎을 꿇고 순종하려고 하는 자세로 들어야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해야합니다. 이래야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됩니다. 교회가 바로 서 나갑니다. 오늘에는 이 강단에 이렇게 부족한 종을 세워서 이 종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이 때에 여러분들이 과연 이 말씀들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까 이 말씀이 알아지고 깨달음이 있습니까 실행할 능력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져서 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는 안되는 말씀으로 강하게 들려집니까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같이 설교 잘하시는 분이 계실지라도 그 설교를 듣고도, 그 능력을 눈으로 보고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대하여 의심하는 일이 많아지고, 예수님의 말씀을 시험하게 되는 복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복이 없는 자입니다. 이렇게 원통할 수 있습니까 이런 가슴을 치고 우리 일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일사후퇴 때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배를 놓쳤을 때에 그들이 그 항구에서 얼마나 땅을 치며, 울었습니까 그러나 그 때 운 것 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이 그 때에 잠시 집에서 물건 좀 더 챙기다가 배를 탈 그 기회를 놓친 것이 근 50년 가까이 공산치하에서 자유 없이 죽도록 고생하고, 지금 굶주려 죽는 지경까지 되었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바로 알 때에 그 때에 그 배를 탄 사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이고, 배를 놓친 사람들은 원통하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 찾아오신 주님을 만날 만한 기회에 만나지 못한 것은 이 보다 더 억울한 일인줄 믿습니까 이 원통함은 영원함으로 계속될 곳인데, 가면 갈수록 더 후회되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 기회, 그 찬스를 놓치면 영원을 놓치는 것인데 이 바리새인들이 저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 나아왔음에도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나왔다니 이런 어리석고, 복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를 깨닫는 우리들은 세상이 주님을 배척할 때에 그들에게 대하여 괘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습니까 이렇기 때문에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을 만날 만한 때에 만나야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 구원을 얻고, 주님의 은혜로 모든 병든 것들이 나음과 오히려 풍성하여지는 은혜를 입으시길 축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그 제자들 보다 우리들에게 더 확실한 예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나, 그 때에 종교지도자들이 복되지 못한 것은 이들이 차라리 배우지 못했다면, 예수님께 겸손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차라리 2절에 예수님께 나아온 무리들 같이 몸에 질병이라도 들었으면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라도 주님께 겸손히 나아와서 구원의 은혜까지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건강하므로, 또 본다고 하므로, 그들이 자유한다고 하므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면 받아 가지는 것이지만 이것은 결코 자신을 복되게 하는 것은 아닌 것을 믿어야합니다. 오히려 병든 자가, 가난한 자가, 죄인이라고 세상에서 손가락질 받는 자에게 이 구원의 은혜가 임할 뿐 아니라, 우리 신앙의 생활도 이러하다면 어떻게 가난을 화라고만, 불행이라고만 말하는 세상의 일방적인 지식, 속이는 마귀 지식으로 우리가 불행하다 평가하겠습니까 가진 것을 가지고, 교만하지 맙시다. 없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복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성경에도 믿는 자 중에 가난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믿음 좋은 사람 가운데도 가진 자, 세상에 높은 권세를 가진 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겠습니까 그들은 겸손했습니다. 세상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세상에서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것이지, 교회 안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는 너무도 작은 것이고, 이것을 의지하면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세상에 부한 자들도 신앙생활을 바로 했습니다. 세상에 없는 자, 세상에 천한 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는데 이들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감사하며 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얻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구원을 자랑했습니다. 가난한 것이 자랑이 아니지만, 가난이 복 그 자체는 아니지만, 못나고 가난한 자인 자신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어찌 그가 낙심하며, 낙망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없는 것이 많을지라도 그것은 가치가 있되, 영원과 비교하면 아주 적은 것이고, 영원한 것을 얻은 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얼마나 부자이며, 얼마나 강건한 자이며, 얼마나 높고 귀한 자인가를 생각할 때에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 삼은 사실로 인하여, 천국을 기업으로 받은 것을 확신하므로 세상은 취해 봐야 하룻 밤을 지난 것 같이 그 수명이 짧고, 허무한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것은 영원하고 영원한 것인 것을 알 때에 그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약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여러분이 예수 안에 계십니까 너무나 큰 것을 소유한 이 깨달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아직 예수밖에 계십니까 세상에 아무리 큰 것도 예수밖에 것은 가치가 적습니다.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 가치는 영원과 비교할 때에 너무 적습니다. 교만하지 말고 빨리 예수님을 영접하여 지극히 큰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결혼의 중요성과 이혼의 위법성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했는데 이 말씀에 앞서 이 복없는 주님 앞에 까지 왔으나,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을 시험하려했던 이 어리석고, 불쌍한 바리새인들에 대한 깨달음을 주셔서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서론적으로 살펴볼 것은, 이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시험하기 위하여 논리한 것은 종교적인 주제이지만,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먼저 생각하고, 인간의 해석과 전통을 우선하여 평가한 지식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마19: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 때에도 오늘 우리와 같이 이혼하는 가정이 많았습니다. 바리새파 가운데 이혼에 대한 관점으로 세가지 파가 있습니다. 하나는 샴마이 파로서 이들은 간음한 이외에는 이혼할 수 없다는 주장이고, 또 하나는 힐렐파라고 남자 중심의 이혼 편의주의를 주장했던 자들로서 이혼에 대하여 가능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엣세네 파는 아예 독신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만일에 이혼이 가능하다하면 샴마이 파가 나설 것이요, 이혼이 부당하다면 힐렐파가 나서서 이혼에 대하여 허용한 것 같은 모세의 말을 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어떠합니까 (마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말씀하시기를-창 2:24절의 기록한 말씀을 가지고 답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들도 이같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종종 부딪칩니다. 이때에 어떻게 이 문제들을 해걸합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낙태문제, 이혼문제, 환경문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제 우리들 주변에 너무나 많은 문제들이 우리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합니다. 손만근이가 대학교에서 인공수정에 대하여. 이 복제인간에 대하여 조사하라고 하는 과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어떤 세상의 학자들의 말도 참고로 할 수 있습니다. 경험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때에 어떻게 판단합니까 주일에 공부하는 문제, 조상제사의 문제, 어떤 교단은 이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전도도 안되니까, 이를 절충해서 추도식을 드립니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이 제사 문제 때문에 목숨을 내어 놓은 일들도 있는데 이제는 이 일에 앞장서서 지내도록도 합니다. 이런 저런 때에 우리는 갈팡질팡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에게는 절대윤리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합의하면, 그것이 보편적인 윤리입니다. 그 때의 형편에 따라서 상대적인 윤리의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배꼽 티를 입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주 논쟁이 많았지만, 유행을 만드는 사람들 생각은 아주 교활합니다. 지금은 반대가 있어도 자꾸 보면 그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생각들이 무뎌지고 이전에 그러했듯이 이것도 결국은 눈에 익어서 유행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낙태문제, 처음에는 살인과 같이 생각하다가 주위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것을 보면서 비판없이 또 상황이 이렇게 어려우니까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뱃속에 든 아이를 지워버립니다. 그리고는 합리화시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하고, 또 형편에 어쩔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이혼문제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리 저리 이용하다가 안되면 갈아치우는 가전제품 같이, 고무신 같이 결혼의 신성함도, 가정의 소중함도 잊고서 갈라서는 세상입니다. 아니, 아예 이제는 살아보고 결혼하자는 것입니다. 계약결혼까지 나옵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는 것이 보편적이니까, 목회자들도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서울이나 부산의 버스기사들이 임금투쟁하다가 안되면 쓰는 방법이 우리가 법을 지켜서 정법운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민에게 협박이 됩니다. 만일 시내버스들이 법을 다 지키면, 온 서울이나, 부산 대도시의 시내는 교통마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이 교통법이 잘못되지 않느냐 이러니 이법을 지킬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 때에 대하여 어떻게 우리는 판단해야합니까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보셨습니다. 그 선택의 기준을 세상이 어떻게 보느냐 오늘의 상황이 어떠한가 여기에 맞추지 말라. 전통이나, 조석으로 변하는 세상의 어떤 기준에 맞추어서도 안된다. 너희는 다르다. 세상은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기준해서 평가하라는 것입니다. 양심에 거리끼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적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는 평가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양심을 무디게 만들어서 살인의 죄를 짓고도 자기 합리화를 하지만, 너희는 이 말씀대로 평가하고 이 말씀에 따라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의 전통이나 율법이나, 관습에 따라 가지 않고, 언제나 성경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시험하는 마귀를 이길 때에도 “기록하였으되” 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마귀를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마귀의 교활한 전법, 이 상대주의의 사상의 조류를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교회 안에 까지 들아와서 기승을 부리는 이 사상,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이면, 진리라고 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면 하나님의 뜻에는 묻지도 않고, 그것이 진리인 것 같이 결정하는 이런 인본주의를 상대주의라고 하는데, 이 타락의 때에 우리들은 어떻게 이 사상을 이기겠습니까 창세기에서 기록한 말씀이나, 계시록에 기록한 말씀이나, 하나님의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변한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지 못하셔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슴하시되, (마19:8)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본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내신 결혼의 절대적 신성함이나, 이혼의 불가에 대해서 뿐 아니라, 우리는 모든 상황을 판단할 때에 이 말씀으로 잣대를 삼아야합니다. 성경은 캐논이라는 단어로 말합니다. 이 캐논은 우리 신앙의 잣대라는 뜻입니다. 기독자의 신앙행위의 잣대, 기준은 성경입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가는 이 때에 우리들은 더욱 성경의 귀중성을 깨달아야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야합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들이 말씀의 귀중성을 알고서 이 말씀을 지킬 때에, 이 진리를 보수할 때에 실은 이 말씀이 이 타락되고, 위험한 세대에서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들의 날마다의 현실에서 지나가시는 주님,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은혜를 받을 때를 놓치지 맙시다. 이미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까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제자들 시대보다 더 복되고, 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살아가는 때입니다. 기회를 잃지 맙시다. 또 오늘 우리가 만난 이 현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하면 그것이 선으로 알고 따라갑니다. 이 상대주의의 때에 우리가 절대믿음을 가지지 않으면, 우리 신앙생활은 실패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틀렸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옳다고 하면 이는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옳다고 지지해도 하나님께서 지지해 주시지 않으면 틀린 것입니다. 내 기분이나, 감정이나, 또는 내 당한 상황이나, 형편을 초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거룩하게 하셔서 귀하게 여기시므로 결혼은 신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혼을 하지 말라 하시니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은 우리가 범죄하므로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낙태를 금하시니 우리는 살인의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또 각자에게 주신 은밀한 감동인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서만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해서 행동해야합니다. 마귀가 우리 신앙을 무너뜨리려고 이 말씀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으로 돌아가야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생명이요, 구원이요, 우리의 힘이요. 빛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지켜 살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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