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 (마16:21-28)
본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나에 대한 시중의 여론은 어떻더냐" 이에 대해 제자들은 "예, 선생님을 세례 요한, 또는 엘리야, 또는 선지자 중의 한분 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예수님은 시중의 여론을 물으셨습니다. 제자들 은 이에 대해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베 드로의 대답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단의 반장입니다. 즉 제자들의 의사를 대변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대답은 제자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베드로의 이 대답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한 제자가 없었다는데 서 찾을 수 있고, 각별한 당부의 말씀을 주실 때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 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16:20) 하시며 제자들에게 주고 계심을 볼 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 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면 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 베드로는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 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라는 준엄한 책망을 받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받아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을 권세를 가진 자가 되리라는 축복 과 사단이 되어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저주스러운 책망 이 어떻 게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둘 중의 하나는 옳지 않은 평가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실수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이 두가지 요소 가 언제나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열쇠를 들고 이 땅에서 하늘 문을 여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의 뜻을 방해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단의 능력이 한 인간 안에는 공존하고 있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연약함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이 런 탄식은 예수를 알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까 아닙니다. 이 탄식은 로마서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 3차 세계전도여행을 거의 마무 리할 무렵에 고린도에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나이나 경험 이나 신앙에 있어서나 완숙의 경지에 들어가 있었던 때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때입니다. 지난 기독교 2천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역사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서술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능가한 경우가 아직 없습니다. 그 만큼 사도 바울의 신앙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깊어진 때 기록된 서신이 바로 로마서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두 개의 상 반된 능력 앞에 무능한 자신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제자들 속에는 분명히 이 땅에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하나님의 일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사 단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한 개체 안에 동시에 공존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고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이 땅에 그 어떤 피조물도 이런 이중적인 능력을 동시에 지닌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습니다. 성인군자에게도 결점이 있고, 인간의 윤리 도덕으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폐륜아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요, 인간 내면의 세계를 지배하는 두가지 세력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재산입니까 신분입니까 건강입니 까 지식입니까 학벌입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러 한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거의 생명을 걸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이 끌어온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변변한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초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분 과 사회적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 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 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 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어느 누구 도 육체를 따라 자랑할 것이 없다"(고전1:27-28) 고 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를 이루고 있던 성도들은 그 신분이나, 재산이나, 문벌이나, 학벌에 변변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새 역사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들로 인하여 멸망받아야 마땅한 인류의 역사가 어둠을 뚫고 희망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지난 해 미국의 라이프 라는 잡지는 '1천년을 만든 1백인'을 선정 발표했 습니다. 지난 1천년 동안 역사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인류에 게 새로운 장을 열게 한 인물 100명을 선정하여 발표한 것입니다. 100명 가운 데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 115위를 살펴보면
1, 전기를 발명한 에디 슨/
2,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3,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 4, 지동설 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5, 근대 미술과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레 오나르도 다 빈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시대에 재산이나 학벌이 나 사회적 지위나 신분으로 자신을 내세울만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결코 아 니었습니다. 라이프지 선정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들은 지난 인류역사 1천년을 만들어간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양면성 가운데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데 쓰임받는 사람이 되게 하였겠습니까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이나 인류역사 1천년을 만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상위 다섯명의 공통점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변화되고, 역사를 만들고 열어가는데 쓰임받는 사람이 됩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벳세다 광야에서는 수만명이 예수님께서 주신 떡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가 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눈먼 자는 눈을 떴고, 문둥병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하며 흥분하며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영광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수님 을 만난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변화가 일 어나지 않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에게서 영광스런 모습이 사라지면 예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벳세다의 군중들, 한 때는 "다윗의 자 손 예수여, 호산나"를 외치며 흥분하며 환영했던 예루살렘의 군중들, 한 때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권력의 최정점에 서리라는 기대를 걸었던 가룟 유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우리 형제를 죄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특별한 부탁을 드렸던 야고보와 요한, 서로 높은 자리 앉겠다고 자리다툼을 벌였던 제자들, 저들은 예수님에게서 영광스런 모습이 사라지자 예수를 팔았 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지르며 데모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를 보고서는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욕을 하며 온갖 희롱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저들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 랬습니까 십자가 없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 라"(16:21) 즉,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최후의 심판주로 오시는 영광의 그리스도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 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없이 만나는 예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님이 못박히시고, 우리 주님의 몸이 찢기시고, 우리 주님이 피를 흘리시고, 우리 주 님이 죽임을 당하신 흉악한 사형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그 십자가 밑 에서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만날 때, 그 험악한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만남을 갖게 되는 것 입니다.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거기에서 은혜를 입고, 거기에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지신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동시에 이 십자가는 우리가 날마다 생활 속에서 지고가야 하는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가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이 땅에서 하늘의 문을 열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복된 사람 이 됩니다. 이 십자가에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과 아집을 못박아 죽이는 사람 만이 하늘의 신령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만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며,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님과 함께 열두지 파를 심판하는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 없이 예수를 만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단"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하늘의 예배 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열심을 내는 것은 자칫 사단을 돕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잊 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의 밑에서 발견하기를
기도하십시다.
. 십자가 밑에서 재해석하고, 우리 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것을 십자가의 빛으로 다시 비추어보십시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성찬을 나눕니다. 이 성찬은 주님이 마신 고난의 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특별히 부탁할 때, 주님은 저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막10:37-38) 바로 오늘 우리가 나누는 이 성찬은 주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 고난의 잔 입니다. 이 잔을 마시는 자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던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난을 당하나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 활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찬을 받는 성도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히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걱정 근심없이 지내오던 일에 걱정거리가 생겼습니까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알고 감사함으로 지십시오. 그리고 그 일 속 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을 열어주실 것을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고난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부활이 보 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직장을 잃고 내일이 걱정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상 하지 않았던 일로 놀라고 두려워 하고 잇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걱정과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모든 일들을 십자가의 빛으로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눈으로 해석 하십시오. 그리하면 거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다시 오 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노래가 들려 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이 성찬이 우리의 눈을 밝히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 성찬을 받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 리고 십자가를 이기고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우리를 찾아주시는 주님을 만 나는 축복을 누리시기 원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곧 이어 베드로는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 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라는 준엄한 책망을 받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받아 하늘의 문을 열고 닫을 권세를 가진 자가 되리라는 축복 과 사단이 되어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자라는 저주스러운 책망 이 어떻 게 거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둘 중의 하나는 옳지 않은 평가를 내리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실수 하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이 두가지 요소 가 언제나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의 열쇠를 들고 이 땅에서 하늘 문을 여는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 의 뜻을 방해하고, 넘어지게 하는 사단의 능력이 한 인간 안에는 공존하고 있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연약함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4-25) 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이 런 탄식은 예수를 알기 전에 있었던 일입니까 아닙니다. 이 탄식은 로마서에 나오는 탄식입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 3차 세계전도여행을 거의 마무 리할 무렵에 고린도에서 기록된 서신입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나이나 경험 이나 신앙에 있어서나 완숙의 경지에 들어가 있었던 때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할 때입니다. 지난 기독교 2천년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역사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서술하고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능가한 경우가 아직 없습니다. 그 만큼 사도 바울의 신앙은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깊어진 때 기록된 서신이 바로 로마서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신 안에 자리잡고 있는 두 개의 상 반된 능력 앞에 무능한 자신을 바라보며 괴로워하며 몸부림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제자들 속에는 분명히 이 땅에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하나님의 일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사 단의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한 개체 안에 동시에 공존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고 바로 나라는 존재입니다. 이 땅에 그 어떤 피조물도 이런 이중적인 능력을 동시에 지닌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이러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습니다. 성인군자에게도 결점이 있고, 인간의 윤리 도덕으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폐륜아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요, 인간 내면의 세계를 지배하는 두가지 세력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재산입니까 신분입니까 건강입니 까 지식입니까 학벌입니까
그런데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러 한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하여 거의 생명을 걸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이 끌어온 사람들은 이러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변변한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초대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분 과 사회적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 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 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 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어느 누구 도 육체를 따라 자랑할 것이 없다"(고전1:27-28) 고 했습니다. 이렇게 초대교회를 이루고 있던 성도들은 그 신분이나, 재산이나, 문벌이나, 학벌에 변변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새 역사를 열어가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들로 인하여 멸망받아야 마땅한 인류의 역사가 어둠을 뚫고 희망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지난 해 미국의 라이프 라는 잡지는 '1천년을 만든 1백인'을 선정 발표했 습니다. 지난 1천년 동안 역사와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인류에 게 새로운 장을 열게 한 인물 100명을 선정하여 발표한 것입니다. 100명 가운 데 가장 영향력을 많이 끼친 사람 115위를 살펴보면
1, 전기를 발명한 에디 슨/
2,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3,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 4, 지동설 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5, 근대 미술과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레 오나르도 다 빈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시대에 재산이나 학벌이 나 사회적 지위나 신분으로 자신을 내세울만한 것을 가진 사람들이 결코 아 니었습니다. 라이프지 선정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들은 지난 인류역사 1천년을 만들어간 사람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양면성 가운데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게 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데 쓰임받는 사람이 되게 하였겠습니까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이나 인류역사 1천년을 만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상위 다섯명의 공통점은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변화되고, 역사를 만들고 열어가는데 쓰임받는 사람이 됩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벳세다 광야에서는 수만명이 예수님께서 주신 떡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가 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났고, 눈먼 자는 눈을 떴고, 문둥병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하며 흥분하며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영광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예수님 을 만난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거기에는 변화가 일 어나지 않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에게서 영광스런 모습이 사라지면 예수님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때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벳세다의 군중들, 한 때는 "다윗의 자 손 예수여, 호산나"를 외치며 흥분하며 환영했던 예루살렘의 군중들, 한 때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권력의 최정점에 서리라는 기대를 걸었던 가룟 유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우리 형제를 죄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특별한 부탁을 드렸던 야고보와 요한, 서로 높은 자리 앉겠다고 자리다툼을 벌였던 제자들, 저들은 예수님에게서 영광스런 모습이 사라지자 예수를 팔았 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지르며 데모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를 보고서는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욕을 하며 온갖 희롱을 다했습니다. 이렇게 저들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 랬습니까 십자가 없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리 라"(16:21) 즉,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최후의 심판주로 오시는 영광의 그리스도는 십자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 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셨습니다.
여러분, 십자가 없이 만나는 예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 주님이 못박히시고, 우리 주님의 몸이 찢기시고, 우리 주님이 피를 흘리시고, 우리 주 님이 죽임을 당하신 흉악한 사형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그 십자가 밑 에서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만날 때, 그 험악한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른 만남을 갖게 되는 것 입니다. 거기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거기에서 은혜를 입고, 거기에서 하늘의 문을 열고 닫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이 십자가는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지신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동시에 이 십자가는 우리가 날마다 생활 속에서 지고가야 하는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가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이 땅에서 하늘의 문을 열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복된 사람 이 됩니다. 이 십자가에 자신의 교만과 이기심과 아집을 못박아 죽이는 사람 만이 하늘의 신령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만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며,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님과 함께 열두지 파를 심판하는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십자가 없이 예수를 만날 때 주의해야 합니다.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단"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배는 하늘의 예배 가 아닙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과 봉사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없이 열심을 내는 것은 자칫 사단을 돕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잊 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을 십자가의 밑에서 발견하기를
기도하십시다.
. 십자가 밑에서 재해석하고, 우리 의 일거수 일투족 모든 것을 십자가의 빛으로 다시 비추어보십시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성찬을 나눕니다. 이 성찬은 주님이 마신 고난의 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특별히 부탁할 때, 주님은 저들에게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막10:37-38) 바로 오늘 우리가 나누는 이 성찬은 주님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신 고난의 잔 입니다. 이 잔을 마시는 자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던 눈이 밝아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난을 당하나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부 활의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찬을 받는 성도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려운 일에 부딪히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걱정 근심없이 지내오던 일에 걱정거리가 생겼습니까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알고 감사함으로 지십시오. 그리고 그 일 속 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을 열어주실 것을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 고난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오는 부활이 보 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직장을 잃고 내일이 걱정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상 하지 않았던 일로 놀라고 두려워 하고 잇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걱정과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모든 일들을 십자가의 빛으로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십자가의 눈으로 해석 하십시오. 그리하면 거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다시 오 시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승리의 노래가 들려 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주시는 이 성찬이 우리의 눈을 밝히는 은혜가 될 것입니다. 이 성찬을 받으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 리고 십자가를 이기고 부활하시어 영광스럽게 우리를 찾아주시는 주님을 만 나는 축복을 누리시기 원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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