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따르려면 (마16:24)
본문
예수님은 어중이 떠중이를 원치 않습니다. 이것이면 이것, 저것이면 저것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선을 그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수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가 불러서 제자로 삼았던 사람들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여기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함이요, 예수님을 믿는자로서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주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특히 이 말씀은 오늘날 예수님을 따른다고 나름대로 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어떤 모습으로 세워져야 할지를 보려고 합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는 말씀은
1.우리가 따라야 할것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볼때의 입장에 볼때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 대상을 ‘좇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좇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행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좇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위해서 일을 열심히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부를 위하여 돈을 열심히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하여 사람을 열심히 좇아갑니다. 왜 이런 것들을 좇아가게 됩니까 이것이 전부인 것 같고, 이것이 최고인 것 같고, 이것이 다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면, 차지하면, 얻으면 행복할 것 같고, 좋을 것 같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좇아갑니다. 이것 얻으려고 좇가다 보니 믿음도 잃어버리고, 주일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대로 살게됩니다(옷 장사를 하는 성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밑지고 파는 것이라고, 원가도 안된다고-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답니다). 분명 거짓인데도 부를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있어야, 얻어야, 가져야 행복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으니까 그런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소유한들 진정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해할까요
누가복음 19장의 나오는 삭개를 오를 볼 때 그렇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그가 세상의 것을 좇으면 족할 것 같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였지만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좇게 되었을 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좇은 이후 그가 소유하고 있던, 그가 애지중지 여겼던, 손가락질 당하면서, 욕을 먹으면서 모았던 것을 나누어주기에 아까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누어 주면서도 행복해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에게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바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 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 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런 그가 주님을 만난 후에 어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고는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좇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생명 내놓고 좇아야 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좇아가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인줄 믿습니다. 왜요 그분을 좇을 때 우리의 가는 길이 바른 길이 될것이요, 그분을 좇을 때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진리가 될것이요, 그분을 좇을 때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또 ‘나를 따르려거든’이라는 말씀은
2.왜 따르는가에 대한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따르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따랐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그 자리를 빨리 떠나셨습니다. 그때 이런 놀라운 일을 체험한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난리가 났습니다. 그것이 마14장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이런 모습들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이 예수님을 좇았던 이유는 딱 한가지였습니다. 그들의 배를 불리게 하실수 있는 분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만족, 자기의 유익, 자기의 이득을 위하여 좇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기적을 행하심은 그분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 산 떡 되시는 자기를 좇기를 원하셔서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 떡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때 예수님께서 참 서글픈 말씀을 하십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이런 모습은 비단 이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니실때마다, 가는곳 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 다녔습니다. 그들중 수 많은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고, 위로를 얻고, 새로운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잡히셔서 더 이상 자기들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이 들 때 그들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아니 오히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왜 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은 예수로 인하여 이득을 얻어보고, 예수로 인하여 내 만족함을 채우고, 예수로 인하여 내 유익을 위해서 좇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로 인하여 유익을 얻고, 만족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좇음은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세상에 줄 수 없는 ‘영생’이라는 것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은바 된 사람들입니다. 이 영생,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무엇이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예수를 좇음은 내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좇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뜻을 이루기를 위하여 좇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주를 위해 살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땅의 것을 위해 살았는데 하늘의 것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을 위하여 살아야 진정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지를 않겠습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좇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내 유익과 만족을 위하여 좇아가고 있는 많은 모습을 봅니다. 그리하여 내게 별 유익이 없다하면 좇지 않고, 그만두어 버리는 그런 경우가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려거든’이라고 하시는 말씀에는 비장한 각오를 엿볼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항상 자기 중심이었고, 자기 위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24절의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절 21절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잡혀서 죽을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를 생각하는냥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열을 바짝 내었습니다. 22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베드로가 그렇게 함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즉 자기 생각을 그렇게 드러낸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잡혀가고 나면 결국 낭패를 당하게 되고, 이득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 중심이 아니라, 교회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 자기 위주가 되면 일을 그러칠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위주, 내 중심, 내 생각, 내 기준이 사라져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말씀을 기대하면 그렇지 못할 때 말씀을 내가 받아 들일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거부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 그 말씀을 이루어 나가야 내 영혼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어떤 말씀이든 그 말씀앞에 부복할 수밖에 없고, 그 말씀안에서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어찌할꼬’가 되어집니다. 왜 우리가 말씀을 받으면서 ‘목사가 나를 친다’라고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고, 감정이 상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될 때 그 어떤 말씀이든 우리들은 말씀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말씀에 붙잡힌 인생이 될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따름에는 내 위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가고자 하는 이가 무슨 말씀을 하든, 무슨 요구를 하든 그분이 원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세워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는 말에는
3.주님을 따름에는 대가가 지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냥 되어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가는데는 상응한 대가가 지불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가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대가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씨를 부려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지 않고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수 없습니다. 고난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죽음없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바라나 믿음의 순종은 원치않고, 하나님의 응답은 바라나 기도는 하지 않고, 믿음의 성숙은 바라나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영혼구원의 역사는 바라나 전도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따름에는 분명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 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 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1.우리가 따라야 할것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내 입장에서 상대방을 볼때의 입장에 볼때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 대상을 ‘좇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좇고 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행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좇는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공을 위해서 일을 열심히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부를 위하여 돈을 열심히 좇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위하여 사람을 열심히 좇아갑니다. 왜 이런 것들을 좇아가게 됩니까 이것이 전부인 것 같고, 이것이 최고인 것 같고, 이것이 다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면, 차지하면, 얻으면 행복할 것 같고, 좋을 것 같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좇아갑니다. 이것 얻으려고 좇가다 보니 믿음도 잃어버리고, 주일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대로 살게됩니다(옷 장사를 하는 성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밑지고 파는 것이라고, 원가도 안된다고-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답니다). 분명 거짓인데도 부를 얻기 위해서는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있어야, 얻어야, 가져야 행복할 것 같고, 성공할 것 같으니까 그런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소유한들 진정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해할까요
누가복음 19장의 나오는 삭개를 오를 볼 때 그렇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그가 세상의 것을 좇으면 족할 것 같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였지만 그를 만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좇게 되었을 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좇은 이후 그가 소유하고 있던, 그가 애지중지 여겼던, 손가락질 당하면서, 욕을 먹으면서 모았던 것을 나누어주기에 아까워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나누어 주면서도 행복해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에게서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바울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기를 (빌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 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빌 3:5)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 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이런 그가 주님을 만난 후에 어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고는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빌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좇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생명 내놓고 좇아야 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좇아가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인줄 믿습니다. 왜요 그분을 좇을 때 우리의 가는 길이 바른 길이 될것이요, 그분을 좇을 때 우리가 행하는 일들이 진리가 될것이요, 그분을 좇을 때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는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또 ‘나를 따르려거든’이라는 말씀은
2.왜 따르는가에 대한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따르고자 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러나 대부분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따랐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그 자리를 빨리 떠나셨습니다. 그때 이런 놀라운 일을 체험한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 난리가 났습니다. 그것이 마14장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는 이런 모습들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 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이 예수님을 좇았던 이유는 딱 한가지였습니다. 그들의 배를 불리게 하실수 있는 분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만족, 자기의 유익, 자기의 이득을 위하여 좇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기적을 행하심은 그분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 산 떡 되시는 자기를 좇기를 원하셔서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 떡에 대해서 설명을 하니까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요 6: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요 6: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때 예수님께서 참 서글픈 말씀을 하십니다. (요 6: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이런 모습은 비단 이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니실때마다, 가는곳 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 다녔습니다. 그들중 수 많은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고, 위로를 얻고, 새로운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이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잡히셔서 더 이상 자기들에게 유익이 없다고 생각이 들 때 그들은 예수님을 버립니다. 아니 오히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질렀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왜 좇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 것은 예수로 인하여 이득을 얻어보고, 예수로 인하여 내 만족함을 채우고, 예수로 인하여 내 유익을 위해서 좇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로 인하여 유익을 얻고, 만족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좇음은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세상에 줄 수 없는 ‘영생’이라는 것을 예수님께로부터 받은바 된 사람들입니다. 이 영생,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이 무엇이있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예수를 좇음은 내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좇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뜻을 이루기를 위하여 좇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주를 위해 살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땅의 것을 위해 살았는데 하늘의 것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을까 이것을 위하여 살아야 진정한 가치가 있는 인생이지를 않겠습니까
그런데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좇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내 유익과 만족을 위하여 좇아가고 있는 많은 모습을 봅니다. 그리하여 내게 별 유익이 없다하면 좇지 않고, 그만두어 버리는 그런 경우가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려거든’이라고 하시는 말씀에는 비장한 각오를 엿볼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항상 자기 중심이었고, 자기 위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24절의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절 21절부터 예수님께서 자기가 잡혀서 죽을 것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를 생각하는냥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열을 바짝 내었습니다. 22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베드로가 그렇게 함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 즉 자기 생각을 그렇게 드러낸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잡혀가고 나면 결국 낭패를 당하게 되고, 이득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 중심이 아니라, 교회 중심이 아니라 내 중심, 자기 위주가 되면 일을 그러칠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위주, 내 중심, 내 생각, 내 기준이 사라져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이 아니라, 주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말씀을 기대하면 그렇지 못할 때 말씀을 내가 받아 들일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해서 거부가 일어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주님께서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아 그 말씀을 이루어 나가야 내 영혼이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어떤 말씀이든 그 말씀앞에 부복할 수밖에 없고, 그 말씀안에서 새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질 때 ‘어찌할꼬’가 되어집니다. 왜 우리가 말씀을 받으면서 ‘목사가 나를 친다’라고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까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고, 감정이 상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될 때 그 어떤 말씀이든 우리들은 말씀앞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말씀에 붙잡힌 인생이 될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따름에는 내 위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따라가고자 하는 이가 무슨 말씀을 하든, 무슨 요구를 하든 그분이 원하는 모습으로 우리가 세워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이라는 말에는
3.주님을 따름에는 대가가 지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냥 되어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가는데는 상응한 대가가 지불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가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대가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든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씨를 부려야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어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지 않고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수 없습니다. 고난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죽음없는 부활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바라나 믿음의 순종은 원치않고, 하나님의 응답은 바라나 기도는 하지 않고, 믿음의 성숙은 바라나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고, 영혼구원의 역사는 바라나 전도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따름에는 분명한 대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 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 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갈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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