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경험하라 (마16:24)
본문
4월달은 기독교에서는 가장 뜻깊은 날이다. 예수님의 고난 주간이 있고, 부활절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고난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다 제일 먼저 십자가가 생각 날 것이다. 십자가의 피가 없었다면 구원이 있을 수 없고 십자가의 희생이 아니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데도 이 시대 십자가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믿음의 선진들 또 역사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온 높은 신앙인 들의 삶을 보면서 어떻게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질그릇 같이 연약했던 그들이. 하나뿐인 생명을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그렇게 바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궁금해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영적으로 깊이 체험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단지 체험에서 끝나지 않고 그 십자가를 굳게 붙잡고 살았기 때문에 질그릇 같은 연약한 육체였지만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살수 있었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그 사랑을 알 수 있다. 십자가의 사랑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찌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겠습니까 어떻게 만나보지도 못한 예수를 위하여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해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십자가의 색깔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이 시간 십자가를 다시 경험하자!. 십자가 사형 법은 원래 페르시아인들이 행하던 사형법이었다. 그러나 이 법이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이집트, 카르타고, 로마에게까지 전해졌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극악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십자가 사형제도가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에 지배 민족이었던 로마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안했다. 사도바울이 로마 시민권 자이기 때문에 참수형을 당했고 베드로는 시민권이 없어서 십자가 형틀에서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 "말뚝, 수직 받침대" 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무게는 약120-150kg 가량 되는 무거운 것이었다. 양손과 발에 못박은 못은 기차 철로에 박는 못과 비슷한 못으로 약 15cm 되는 못이 살을 뚫고 박혔다. 왜 십자가형이 잔인한 사형인가 하면 못 박힌 손과 발에서 피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고열과 함께 땀을 흘릴 때 몸에서는 피와 수분이 같이 빠져나간다 그때 찾아오는 고통은 머리가 터져 나가는 고통이 온다. 온 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손과 발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내의 통증은 살인적인 고통이다. 우리 예수님이 왜 이런 참혹한 십자가형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누구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지셨는가 성경을 증거 합니다. (사53:5-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성도 여러분 !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고 능력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믿으십니까 사람을 죽이는 십자가 도구가 사람을 살려내는 도구로 바뀌고 말았다. 3세기 초 터틀리아노스는 사람의 걸음걸음마다, 집을 나가거나 들어올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신을 신을 때나, 저녁식사 할 때나, 누울 때나, 어떠한 행동을 취할 때에 이마에 작은 십자가를 그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카톨릭에서 성호를 긋는 유래가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주술적인 신비주의로 변화되어 귀신을 추방한다는 의미로 발전되었다. 결국 중세 교회 타락의 요소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아니된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그의 삶이 변화되었다. 예수께서도 3년반 동안 따르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 자신의 십자가 없이 예수를 따르면 무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만 한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 모두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다섯 가지로 살펴보자 !
첫째:용서한다는 뜻이 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첫 말씀은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시지 아니하시고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셨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또한 자기 백성들의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너희도 나와 똑같이 용서하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 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메시야를 보내주셨건만 아무 죄도 없는 메시야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죽인 자들이다.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주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십자가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용서의 반대는 복수이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복수하라는 곳은 없다. 심판하는 권세가 우리에게는 없다. 하나님만이 심판 주이고 재판장이시다. 우리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없고 미워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고 경건한 예배를 수없이 드리고 찬송을 드린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이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모두 용서 하시길 바란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생의 삶중에 나에게 큰 피해를 준 사람을 생각할 때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게 우리의 본성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모두 용서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용서가 있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될 것이다.
둘 째:희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의 희생은 죽기까지 희생하셨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기 때문에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희생의 한계는 죽기까지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를 죽여버리지 못하고서는 희생이 뒤따를 수 없고 자기를 죽이는 희생이 없는 한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말할 수 없이 희생한다. 그러나 이 희생은 희생의 모형은 될지언정 십자가 희생은 아니다 진정한 희생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희생이다. 구약에 모든 제사는 희생의 제물이 없으면 받지 아니했다. 희생의 제물 없이는 번제단에 들어갈 수 없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 우리 또한 희생이 되지 아니하면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드려지는 이 예배 우리가 희생이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이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할 것이다. 참된 희생이란 무엇입니까 희생할 수 없을 때 희생하는게 참된 희생이다.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까 내게 주신 십자가를 뿌리치지 말고 온전히 희생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희생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려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하셨다.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희생하셨다. 누구 때문에 희생해야 하는가 나 때문에 희생하면 안된다. 예수님 때문에, 말씀 때문에 희생해야 된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하자! 시간을 주자! 유익을 주자 ! 그럴 때 주님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셋째:인내한다는 의미가 있다. (마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끝까지 인내 하셨다. 쓸개탄 포도주는 마취제 역할을 했다.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해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려고 했으나 주님은 마시지 아니했다. 끝까지 고통을 참으신 인내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인내하심으로 이겨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증거 한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께서 가시면류관 쓰고 옷도 벗김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했지만 인내하며 창피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 우편보좌에 올라가시고 온 인류가 거기에 다 올라갈 그 기쁨을 아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 십자가를 질 때 우리도 주님이 가신 그 우편 보좌에 가며 죄 사함 받고 영생을 누리는 즐거움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인내하기를 축원합니다 (롬8:17-17)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네 번째:사랑한다는 의미가 있다. (마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저 말 못하는 짐승들도 한다 "하나님 내 남편을 사랑했습니다내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다시 말해서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 이웃은 바로 자기민족, 이스라엘 동포뿐이었다. 자기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은 개 취급을 했다. 바리새인들이 사랑하는 개념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었다.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만 사랑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했는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21:15-17) 을 보면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질문을 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대답한다. 주님이 또 묻는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3번 물어보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질문하실 때 사용하신 사랑이라는 단어의 원문은 "아가페" 였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만큼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 질문하였는데 베드로는 "필로스" 즉 육체적인 사랑 인간적인 사랑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고백 한 것이다. 예수님이 두 번째도 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또 "아가페"로 물어 보았다. "내가 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처럼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 이런 말이었다.
그런데 또 베드로는 필로스 즉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답했다. 베드로는 3년 반 동안이나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닫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답답해진 주님께서 세 번째의 질문에서는 아가페를 안쓰고 필로스를 써서 물었다. "네가 나를 인간적으로 사랑하느냐 " 이제는 마지막 예수님과의 대화인데 그래도 베드로는 여전히 필로스 사랑밖에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베드로가 언제 아가페의 사랑으로 바뀌어 졌는가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고 아가페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고 자신을 희생하기 시작했다. 그 아가페 사랑을 깨달은 베드로는 자신을 위해 살수가 없었다. 베드로가 처형당할 때에도 십자가에 묶여 장작더미에 올려서 화형식을 집행하기 직전에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어찌 이대로 질 수가 있느냐며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하여 그 모습대로 죽는 것도 감당키 어려워 거꾸로 순교를 했다. 오늘 이 시대 사랑! 사랑! 사랑타령 하지만 이 사랑이 필로스적인 사랑에 머물려 있다. 아가페 적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을 아무리 한들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갈라지고 성도가 시험 들고 기독교는 좋지만 예수쟁이는 싫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에게 아가페 적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감당하는 것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 조건적인 사랑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쁘니까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우리를 사랑했나요 성경은 증거 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더러운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 화' 인도의 성자 선다싱은 추운 겨울날 길을 가다가 어떤 거지가 선다싱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거지는 너무 추했고 추워서 몸이 얼어있는 상태였다. 선다싱은 그만 돌아서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거지를 외면해 버렸다. 선다싱은 걸어가면서 마음에 갈등을 느꼈다. "이 추운 밤 나의 몸 하나도 지탱하기 힘이든데 저 거지를 도와야 할 것인지" 결국 선다싱은 거지에게 돌아와서 거지를 업고 걷기 시작했다 힘이 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고 걸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까 거지를 외면하고 가던 사람들이 너무 추워서 모두 얼어죽었다. 선다싱은 거지를 업고 걸었기 때문에 추위를 이기고 살아날 수가 있었다. 선다싱의 아가페적 사랑이 선다싱을 살리고 거지까지도 살렸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주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이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의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한다. 다섯 번째:정과 욕심을 못박는 의미이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모든 정을 끓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를 알기전에 가졌던 육적인 정을 못박아 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를 예수와 중매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의 신부다. 우리의 참 신랑이신 예수를 알기 전에 의지했던 세상의 신랑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못 박아 버리라는 것이다. (막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자 ! 인륜을 저버리라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자!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를 밥도 주지말고 외면하라는 어리석은 해석을 하지 말자 ! 이 말의 뜻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육적인 것에 매이지 말고 끌려 다니지 말고 그런 육적인 정을 못박아 그것들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받지 말라는 것이다. "휴거와 예비처" 라는 책에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끓어야 할 7가지 정을 말하고 있다.
1. 애정을 끓어야 한다 아내나 남편의 애정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다. 부부간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보다는 크지 못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부부사이의 사랑이 주어진 것이다.
2. 부모의 정을 끓어야 한다. 대부분 전도를 하다보면 시어머니가 불교이기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온다고 한다 만약에 시어머니보다 자신이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부모의 정 때문에 자기의 영생과는 바꿀 수 없다. 천하보다도 귀한 자신의 영생과는 바꿔서는 안된다.
3. 욕정을 끓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눈을 뜨면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들이 우글거린다.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4. 물정을 끓어야 한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돈이면 최고인 황금만능주의 속에 살고 있다. 만물을 주께로 온 것이다. 아름다운 신부는 신랑이 가지고 있는 재산보다는 신랑 자신을 더 사랑한다. 주 예수 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끓어야 한다.
5. 사사로운 핑계를 끓어야 한다. "주일날 왜 안 나오셨습니까 "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예배 드리는 일을 맨 나중에 두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다. 주일, 수요일, 금요일, 새벽예배, 모든 예배 시간은 하나님을 위해 맨 먼저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 시간을 건드리면 안된다 우리가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은 떼어놓았기에 하루도 쉬지 않고 먹고 자고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우선 순위에 두기를 바란다 6. 인정을 끓으라는 것이다 사람의 정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면 인정 때문에 자신이 멸망의 구덩이에 빠져든다 사사로운 인정에 빠지면 안된다. 그렇다고 이웃을 무시하고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데 인정 때문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웃집에 잔치가 있는데 그 잔치를 돌보아 주느라고 교회 예배나 성경공부를 빠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7. 우정을 끓으라는 것이다. 주님보다도 친구의 우정을 더욱 중요시하여 불순종하면 그 친구와 함께 올무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영원한 친구는 오직 예수 한분 이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집 한 채 같는게 소망이다 그러나 집을 갖게 되면 더 큰집을 갖고 싶어진다. 넓은 집을 소유하면 그 다음엔 집 두채 차도 작은 차 타다가 조금 더 큰 차 우리의 인간의 욕심은 소유하면 할수록 더 소유하고 싶어지는 못된 본성이 있다. 이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일에도 돈만 찾다가 결국 다 망해 버리고 만다. 작더라도 가지고 있는 바를 감사하기를 축원합니다.
보잘 것 없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더 부어주실 것이다. 에덴동산의 타락은 욕심 때문이었다. 마지막 때 666 표를 받게 되는 것도 욕심 때문에 받게된다. 기독교는 가난한 곳에서 꽃을 피우다가 부유한 곳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부유할 때 욕심을 버릴 줄 알고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온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자이다. (막4: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욕심은 말씀을 막아서 결실치 못하게 한다. 지금 말씀을 들어도 우리 안에 욕심이 있다면 말씀의 결실을 얻지 못한다.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욕심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불변의 법칙이며 공식이다. 욕심 때문에 죄를 낳고 죄 때문에 결국은 지옥행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십자가의 소리가 작아지고 있고 십자가의 색깔이 퇴색되어져 가고 있다. 십자가의 설교는 싫어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고 십자가의 사건을 모르고 예수를 알 수 없고 위해 죽을 수 없다.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한다면 천국을 거부한자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모형이다. 성경은 증언한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 너무나 힘이 든 일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지쳐서 쓰러지셨다. 더욱이 우리는 단 한 시간도 감당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만을 바라보고 살 때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실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이 바라보신 하나님의 우편 보좌를 우리도 바라보며 우리게 주신 십자가를 원망 말고 감사하게 여기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십자가가 뜨거움을 날마다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을 영적으로 깊이 체험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단지 체험에서 끝나지 않고 그 십자가를 굳게 붙잡고 살았기 때문에 질그릇 같은 연약한 육체였지만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살수 있었다.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할 수 없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그 사랑을 알 수 있다. 십자가의 사랑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찌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겠습니까 어떻게 만나보지도 못한 예수를 위하여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 고난주간에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의 사랑을 뜨겁게 경험해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십자가의 색깔이 퇴색되어 가고 있다. 이 시간 십자가를 다시 경험하자!. 십자가 사형 법은 원래 페르시아인들이 행하던 사형법이었다. 그러나 이 법이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 이집트, 카르타고, 로마에게까지 전해졌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극악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십자가 사형제도가 너무나 잔인하기 때문에 지배 민족이었던 로마인들에게는 적용하지 안했다. 사도바울이 로마 시민권 자이기 때문에 참수형을 당했고 베드로는 시민권이 없어서 십자가 형틀에서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 "말뚝, 수직 받침대" 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무게는 약120-150kg 가량 되는 무거운 것이었다. 양손과 발에 못박은 못은 기차 철로에 박는 못과 비슷한 못으로 약 15cm 되는 못이 살을 뚫고 박혔다. 왜 십자가형이 잔인한 사형인가 하면 못 박힌 손과 발에서 피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고열과 함께 땀을 흘릴 때 몸에서는 피와 수분이 같이 빠져나간다 그때 찾아오는 고통은 머리가 터져 나가는 고통이 온다. 온 몸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는 손과 발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출혈로 인한 체내의 통증은 살인적인 고통이다. 우리 예수님이 왜 이런 참혹한 십자가형을 받으셔야만 했는가 누구 때문에 이런 십자가를 지셨는가 성경을 증거 합니다. (사53:5-7)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성도 여러분 !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고 능력이라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믿으십니까 사람을 죽이는 십자가 도구가 사람을 살려내는 도구로 바뀌고 말았다. 3세기 초 터틀리아노스는 사람의 걸음걸음마다, 집을 나가거나 들어올 때나, 옷을 입을 때나 신을 신을 때나, 저녁식사 할 때나, 누울 때나, 어떠한 행동을 취할 때에 이마에 작은 십자가를 그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이 카톨릭에서 성호를 긋는 유래가 되었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으나 이것이 주술적인 신비주의로 변화되어 귀신을 추방한다는 의미로 발전되었다. 결국 중세 교회 타락의 요소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들은 십자가의 비밀을 알지 못하면 아니된다. (고전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은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그의 삶이 변화되었다. 예수께서도 3년반 동안 따르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 자신의 십자가 없이 예수를 따르면 무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예수를 믿고 예수를 따르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만 한다. 이 고난 주간에 우리 모두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다섯 가지로 살펴보자 !
첫째:용서한다는 뜻이 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첫 말씀은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시지 아니하시고 저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셨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하여 달라고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또한 자기 백성들의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너희도 나와 똑같이 용서하라는 의미이다. 진정한 용서는 용서 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자들이다. 메시야를 보내주셨건만 아무 죄도 없는 메시야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죽인 자들이다.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주님은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십자가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용서의 반대는 복수이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도 복수하라는 곳은 없다. 심판하는 권세가 우리에게는 없다. 하나님만이 심판 주이고 재판장이시다. 우리에게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없고 미워하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고난주간에 금식을 하고 경건한 예배를 수없이 드리고 찬송을 드린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는 짓이다. 그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면 이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모두 용서 하시길 바란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생의 삶중에 나에게 큰 피해를 준 사람을 생각할 때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게 우리의 본성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같은 죄인을 용서하신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모두 용서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용서가 있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될 것이다.
둘 째:희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의 희생은 죽기까지 희생하셨다. 한 알의 밀알은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기 때문에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희생의 한계는 죽기까지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기를 죽여버리지 못하고서는 희생이 뒤따를 수 없고 자기를 죽이는 희생이 없는 한 주님을 따를 수 없다.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말할 수 없이 희생한다. 그러나 이 희생은 희생의 모형은 될지언정 십자가 희생은 아니다 진정한 희생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희생이다. 구약에 모든 제사는 희생의 제물이 없으면 받지 아니했다. 희생의 제물 없이는 번제단에 들어갈 수 없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다. 우리 또한 희생이 되지 아니하면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드려지는 이 예배 우리가 희생이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이 예배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아니할 것이다. 참된 희생이란 무엇입니까 희생할 수 없을 때 희생하는게 참된 희생이다.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까 내게 주신 십자가를 뿌리치지 말고 온전히 희생하는 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은 희생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려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하셨다. 주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희생하셨다. 누구 때문에 희생해야 하는가 나 때문에 희생하면 안된다. 예수님 때문에, 말씀 때문에 희생해야 된다. 나를 미워하는 자가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하자! 시간을 주자! 유익을 주자 ! 그럴 때 주님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셋째:인내한다는 의미가 있다. (마27: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끝까지 인내 하셨다. 쓸개탄 포도주는 마취제 역할을 했다.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해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려고 했으나 주님은 마시지 아니했다. 끝까지 고통을 참으신 인내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예수님이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인내하심으로 이겨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이다 성경은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증거 한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주님께서 가시면류관 쓰고 옷도 벗김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했지만 인내하며 창피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 우편보좌에 올라가시고 온 인류가 거기에 다 올라갈 그 기쁨을 아셨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인내하는 것은 무슨 이유냐 십자가를 질 때 우리도 주님이 가신 그 우편 보좌에 가며 죄 사함 받고 영생을 누리는 즐거움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 고통을 인내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인내하기를 축원합니다 (롬8:17-17)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네 번째:사랑한다는 의미가 있다. (마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다.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저 말 못하는 짐승들도 한다 "하나님 내 남편을 사랑했습니다내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마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다시 말해서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성경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 대상, 이웃은 바로 자기민족, 이스라엘 동포뿐이었다. 자기 민족이 아닌 이방 민족은 개 취급을 했다. 바리새인들이 사랑하는 개념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었다.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만 사랑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했는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요21:15-17) 을 보면 사랑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중요한 말씀이 나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 질문을 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그러자 베드로가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대답한다. 주님이 또 묻는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내 양을 먹이라" 주님이 3번 물어보았다. 여기서 예수님이 질문하실 때 사용하신 사랑이라는 단어의 원문은 "아가페" 였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만큼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 질문하였는데 베드로는 "필로스" 즉 육체적인 사랑 인간적인 사랑으로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고백 한 것이다. 예수님이 두 번째도 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또 "아가페"로 물어 보았다. "내가 너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것처럼 네가 나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 이런 말이었다.
그런데 또 베드로는 필로스 즉 인간적인 사랑으로 대답했다. 베드로는 3년 반 동안이나 주님을 따라 다녔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닫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답답해진 주님께서 세 번째의 질문에서는 아가페를 안쓰고 필로스를 써서 물었다. "네가 나를 인간적으로 사랑하느냐 " 이제는 마지막 예수님과의 대화인데 그래도 베드로는 여전히 필로스 사랑밖에는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베드로가 언제 아가페의 사랑으로 바뀌어 졌는가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고 아가페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비로소 깨닫고 자신을 희생하기 시작했다. 그 아가페 사랑을 깨달은 베드로는 자신을 위해 살수가 없었다. 베드로가 처형당할 때에도 십자가에 묶여 장작더미에 올려서 화형식을 집행하기 직전에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어찌 이대로 질 수가 있느냐며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하여 그 모습대로 죽는 것도 감당키 어려워 거꾸로 순교를 했다. 오늘 이 시대 사랑! 사랑! 사랑타령 하지만 이 사랑이 필로스적인 사랑에 머물려 있다. 아가페 적인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이러한 인간적인 사랑을 아무리 한들 아무 소용없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갈라지고 성도가 시험 들고 기독교는 좋지만 예수쟁이는 싫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우리에게 아가페 적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런 아가페적인 사랑을 감당하는 것이다. 아가페적 사랑은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 조건적인 사랑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라는 것이다. 내가 이쁘니까 사랑하라는 것이다 너를 행복하게 해주니까 사랑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우리를 사랑했나요 성경은 증거 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더러운 죄인으로 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 '예 화' 인도의 성자 선다싱은 추운 겨울날 길을 가다가 어떤 거지가 선다싱에게 도와 달라고 했다. 거지는 너무 추했고 추워서 몸이 얼어있는 상태였다. 선다싱은 그만 돌아서 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거지를 외면해 버렸다. 선다싱은 걸어가면서 마음에 갈등을 느꼈다. "이 추운 밤 나의 몸 하나도 지탱하기 힘이든데 저 거지를 도와야 할 것인지" 결국 선다싱은 거지에게 돌아와서 거지를 업고 걷기 시작했다 힘이 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고 걸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까 거지를 외면하고 가던 사람들이 너무 추워서 모두 얼어죽었다. 선다싱은 거지를 업고 걸었기 때문에 추위를 이기고 살아날 수가 있었다. 선다싱의 아가페적 사랑이 선다싱을 살리고 거지까지도 살렸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에게 아가페 사랑을 주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이 아가페 사랑을 하라는 의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야 한다. 다섯 번째:정과 욕심을 못박는 의미이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모든 정을 끓어 버리는 것이다 예수를 알기전에 가졌던 육적인 정을 못박아 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를 예수와 중매했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의 신부다. 우리의 참 신랑이신 예수를 알기 전에 의지했던 세상의 신랑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못 박아 버리라는 것이다. (막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말자 ! 인륜을 저버리라는 것으로 착각하지 말자!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를 밥도 주지말고 외면하라는 어리석은 해석을 하지 말자 ! 이 말의 뜻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육적인 것에 매이지 말고 끌려 다니지 말고 그런 육적인 정을 못박아 그것들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받지 말라는 것이다. "휴거와 예비처" 라는 책에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끓어야 할 7가지 정을 말하고 있다.
1. 애정을 끓어야 한다 아내나 남편의 애정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다. 부부간의 사랑이 주님의 사랑보다는 크지 못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부부사이의 사랑이 주어진 것이다.
2. 부모의 정을 끓어야 한다. 대부분 전도를 하다보면 시어머니가 불교이기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온다고 한다 만약에 시어머니보다 자신이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부모의 정 때문에 자기의 영생과는 바꿀 수 없다. 천하보다도 귀한 자신의 영생과는 바꿔서는 안된다.
3. 욕정을 끓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들이다 눈을 뜨면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것들이 우글거린다. 하나님 말씀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다.
4. 물정을 끓어야 한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돈이면 최고인 황금만능주의 속에 살고 있다. 만물을 주께로 온 것이다. 아름다운 신부는 신랑이 가지고 있는 재산보다는 신랑 자신을 더 사랑한다. 주 예수 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끓어야 한다.
5. 사사로운 핑계를 끓어야 한다. "주일날 왜 안 나오셨습니까 "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예배 드리는 일을 맨 나중에 두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온다. 주일, 수요일, 금요일, 새벽예배, 모든 예배 시간은 하나님을 위해 맨 먼저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 무슨 일이 생겨도 이 시간을 건드리면 안된다 우리가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은 떼어놓았기에 하루도 쉬지 않고 먹고 자고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을 우선 순위에 두기를 바란다 6. 인정을 끓으라는 것이다 사람의 정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면 인정 때문에 자신이 멸망의 구덩이에 빠져든다 사사로운 인정에 빠지면 안된다. 그렇다고 이웃을 무시하고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데 인정 때문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웃집에 잔치가 있는데 그 잔치를 돌보아 주느라고 교회 예배나 성경공부를 빠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7. 우정을 끓으라는 것이다. 주님보다도 친구의 우정을 더욱 중요시하여 불순종하면 그 친구와 함께 올무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영원한 친구는 오직 예수 한분 이시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한다 집이 없는 사람은 집 한 채 같는게 소망이다 그러나 집을 갖게 되면 더 큰집을 갖고 싶어진다. 넓은 집을 소유하면 그 다음엔 집 두채 차도 작은 차 타다가 조금 더 큰 차 우리의 인간의 욕심은 소유하면 할수록 더 소유하고 싶어지는 못된 본성이 있다. 이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한다 우리가 이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일에도 돈만 찾다가 결국 다 망해 버리고 만다. 작더라도 가지고 있는 바를 감사하기를 축원합니다.
보잘 것 없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더 부어주실 것이다. 에덴동산의 타락은 욕심 때문이었다. 마지막 때 666 표를 받게 되는 것도 욕심 때문에 받게된다. 기독교는 가난한 곳에서 꽃을 피우다가 부유한 곳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란다. 부유할 때 욕심을 버릴 줄 알고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온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자이다. (막4:19)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 욕심은 말씀을 막아서 결실치 못하게 한다. 지금 말씀을 들어도 우리 안에 욕심이 있다면 말씀의 결실을 얻지 못한다.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욕심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 불변의 법칙이며 공식이다. 욕심 때문에 죄를 낳고 죄 때문에 결국은 지옥행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십자가의 소리가 작아지고 있고 십자가의 색깔이 퇴색되어져 가고 있다. 십자가의 설교는 싫어하고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십자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고 십자가의 사건을 모르고 예수를 알 수 없고 위해 죽을 수 없다.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고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십자가를 지기를 거부한다면 천국을 거부한자가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모형이다. 성경은 증언한다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십자가를 지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 너무나 힘이 든 일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지쳐서 쓰러지셨다. 더욱이 우리는 단 한 시간도 감당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만을 바라보고 살 때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실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이 바라보신 하나님의 우편 보좌를 우리도 바라보며 우리게 주신 십자가를 원망 말고 감사하게 여기고 승리하기를 축원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십자가가 뜨거움을 날마다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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