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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옮기는 믿음 (마17:14-20)

본문

태산은 중국 산동성 태안이라는 조그만 도시에 면해 있습니다. 태산은 천오백 미터가 좀 넘는 산입니다. 옥황상제가 산다고 해 서 옥황정이라는 주봉 아래 제법 많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지리산 만큼 높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 습니다. 그러나 대평원이 한반도 만큼 펼쳐진 산동 중원평원에 홀로 우뚝 아 있는 산들이니 중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세계에 서 가장 큰 산이라고 이름했는지도 모릅니다. 옛말에 '태산명동 서일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산이 요동치고 무너져 내릴 것 같더니 결국은 쥐새끼 한 마리라는 말이지요. 요란한 뒤 끝에 별게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도 마찬 가지입니다. 뭐 천지를 진동할 것 같은 믿음이더 니 실제 상황에서는 나무 가지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맥없는 믿음이더라구요. 말하자면 '울리는 괭가리'입니다. 요란만하지 실 제 상황에서는 무기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말씀 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 면 태산을 들어 황해 바다에 빠트릴 수도 있다고요. 이것이 믿음의 원칙이요, 믿음의 위력인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을 믿음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크리스챤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가장 희박한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가장 많이 사용할 것 같은 그리스도인 들도 실제 상황에서는 믿음이 없는 자와 다를바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묻어 두고서 지내서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나 할까요 믿음의 불발탄이라고나 할까요 수많은 그리스챤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 으나 경건의 능력은 잘 행사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수많은 크리 스챤들이 흔들리는 믿음, 신뢰하지 않는 믿음, 의심하는 믿음, 능력없는 믿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결과는 "주의 제자들에게 데 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6절) 이렇게 됩니다. 무 기력한 크리스챤의 모습이지요.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 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7절) 우리 주님이 책망하실지 모 릅니다. 요즈음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 일 수록 더욱 믿음의 능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 살아계실 당시 보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시고 제자들 홀 로 박해가 몰아치는 상황에 설 때에야, 드디어 본격적으로 믿음 의 능력이 행사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어진 이후에야 앉은 뱅 이가 일어나고 죽은자가 살고 방언이 터지고 하루에 삼천명이나 회개 시키는 믿음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어찌보면 참으로 다 행스런 결과였습니다. 만약 거꾸로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큰 자석에 붙은 작은 자석 처럼 능력을 막 행사하다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는 효능 떨어진 자석처럼 맥없이 무너졌다면, 아마 복음은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은 이 믿음의 능력이 예수님이 떠나고 박해가 몰아 치는 상황에 서 발휘되었으니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당 해서 거꾸러져야 하는 때 오히려 성령님 받은 제자들은 본격적으 로 믿음의 능력을 행사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이제 상황이 더 어려워지는 시기입니다. 이제는 정말 믿음의 능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늘 누리고 사용하면서 살아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태산을 옮 길 상황도 있고, 강 물줄기를 멈춰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폭 락하는 경제도 일으켜야 하고 반세기 동안 잘려져 있던 민족의 허리도 일으켜야 합니다. 옴짝 달싹 할 수 없는 우리 개인의 상 황도 뽑아 저 바다에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것 하나 믿음 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자 그러면 믿음의 능력에 대해 그 본질을 보여주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간질로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가진 아버지 가 제자들에게로 왔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산에 올라 가시도 안 계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렇게 수 제자 세 사람도 예수님을 따라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홉 제자들에게라도 간청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아홉 제자들이 모 두 동원 되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흉내를 내보기는 했지만 경건의 모양만 있었고 경건의 능력을 나오지 못했지 요. 난감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자 이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반은 애걸조로 반은 항의조로 항의조로 말을 합니다. '선생님 제발 좀 제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하루 종 일 힘만 썼지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 아홉 제자들은 이 간질 병자를 고치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던 모양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면서, 내가 얼마나 너희 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이 만한 믿음의 능력도 행사를 못하느냐고 제자들을 꾸짖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손수 그 아들을 말끔 히 고쳐 주셨지요. 이러자 제자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들이 다 가고 한가한 때 제자들이 모두 몰려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안 되고 선생님은 됩니까 비결을 가르쳐 주 십시요." 제자들이 무안한 얼굴로 대들듯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은 좁쌀 반알 만도 못한 겨자씨 같은 믿음의 크기만 있어도 태 산을 뽑아 버릴 수 있는 능력이 나온다고 대답 합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진정한 믿음을 가지게 된 마가 다락방 사건 이전과 이후의 제자들의 믿음의 능력의 변화를 한번 보세 요. 한번은 예수님께서 칠십인 제자를 파송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칠십인 제자들이 기쁨에 들떠 와서 신나게 보고를 합니다. "예수님 저희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니까 귀신들도 항복하고 겨 납디다" 사실 이 사건 외에는 제자들이 크게 능력을 행하 고 다녔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 생전에는 변변한 기 적을 크게 못 행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도 그럴것이 예수님 생전 에는 제자들이 아직도 그릇된 믿음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서로 높아지려했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해 십자가 행을 만류하고, 십자가에 처형된 스승을 보고 실망하고 두려워 해 다 도망가는 그런 믿음의 수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만도 못한 믿음들이 었지요. 그러나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님을 충만히 받은 후로는 180도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을 올라가다가 앉은 뱅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이것이 최초로 행한 제자들의 기적 사건입니다. 그후 베드로는 애니아라는 중풍병자도 고치고, 욥바에 서는 죽은 다비다를 살리기 까지합니다. 감옥에 갇혀서는 옥문 이 터져서 걸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열쇠는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냥 형식적이고 의례적 으로 믿는 믿음이 아닌 진정한 믿음이 관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적다는 말은 믿음이 아주 없다는 말로도(아피스토스) 번 역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겨자씨 만한 믿음도 안되는 것이지 요. 겨자씨 아시지요 바늘로 콕 찍어 놓은 것 같은 그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 정도도 안 되면 아주 없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믿음의 식구들을 보면 기적을 밟고 사는 것 같습니다. 일상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탄원 하고 부르짖습니다. 확신하고 열망하고 투쟁합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응답해 주시는 걸 목격하게 됩니다. 참 감사할 일입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 하고는 꼭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당신의 아들 딸들의 믿음의 분량이 자랄 때 까지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해 본 분들은 체험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확신이 오고 기도하는 중에 믿음이 굳어 지고 기도하는 중에 담대해 지고 기도하는 중에 평화가 오고,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꼭 뒤따르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기적의 조건은 믿음 겨자씨와 산은 사실 너무나 큰 대비가 됩니다. 티끌 모아 태산 이라고 했던가요 겨자씨 모아 태산이라는 것은 뭐 가능 할 수 도 있지요.
그런데 그 겨자씨를 모아 태산을 아루는 것이 아니 라, 겨자씨 한 알로 숫제 태산을 옮겨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그렇지요 불가 능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면 기적이 아니지요. 고액과외의 조건은 2천만원 8천만원 돈입니다. 기적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대접입니까 향응입니까 취직입니까 기적의 조건은 단순합니다. 믿음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믿고, 창조주를 창조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 믿음이 기적을 신속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 실 때 굳이 믿음을 조건으로 내 세우지는 않았지만, 할수만 있 으면 믿음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확인 되면 그렇게 기뻐하실 수가 없었었습니다. 기적을 베푸는 손놀림은 빨라 지 고 피곤도 잊으셨습니다. 성경의 수 많은 기적 사건의 주 대화는 믿음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수로보니게 여인을 한 번 보세요.(마15:28)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개들도 주인의 상 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고백 후에 예수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했습니다. 흉악한 귀신들린 딸을 고침받았습니다.
다음은 열두해 혈루병 여인에게도 그러했습니다.(마9:22) '여자 가 예수의 뒤로와서 그 겉옷을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 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함이라'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딸 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열두해를 알던 혈루병 을 고침받았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칠 때는 그의 믿음을 극찬하셨습니다. 백부 장은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찾았는데 멀리서 명령만 하여도 나을 것이라고 하면서 강한 믿음을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 라"고 하면서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물론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 습니다. 심지어 두 소경에게는 믿음 대로 되라고 까지 했습니다.(마 9:29)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 예수님이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소경은 확고한 음성으로 '그렇습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 대로 대라"고 하시면서 두 소경의 눈 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모두 믿음입니다. 주제는 기적이 아니 라 믿음입니다. 태풍의 눈, 세포의 핵 믿음은 태풍의 눈입니다. 태풍은 그 눈만 소멸되지 않고 있으 면 반경 수백 킬로미터를 엄청난 세력의 영향권 안에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위력의 태풍도 눈이 없으면 아무것 도 아닙니다. 그냥 비만 내리는 저기압이 되고 맙니다. 마찬 가 지입니다. 몇 킬로도 안되는 태풍의 눈이 수백 킬로의 엄청난 영향권을 좌우하는 핵이 되는 것처럼,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겨자씨 만큼 작은 믿음이지만, 이 믿음의 핵만 있으면 태풍 처 럼 엄청난 세력을 발휘합니다. 요즈음 한국에서도 복제소를 만들게 되었다고 크게 보도 되고 있습니다. 생물을 복제할 때는 체세포로 복제를 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어른소의 자궁세포나 난세포에서 유전자를 기억하고 있는 핵을 떼내어, 다른 소의 난자에 이 핵을 집어 넣어 세포를 융합 시키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똑 같은 생물이 탄생을 합니다. 핵심은 유전자를 기억한 세포핵입니다. 이 세포핵만 있 으면 거짓말 처럼 똑 같은 생명을 성공적으로 다시 창조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복제할 때의 유전자의 구 조를 기억한 세포핵 처럼, 믿음도 그런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작은 것이지 만 큰 것을 움직이는 생명의 핵입니다. 모든 사물을 움직이는 운동핵도 됩니다.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핵이요, 우리의 인간 관계를 변화시키는 핵이 됩니다.
우리 삶의 사건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요,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는 핵이 됩니다. 우리의 문제 를 해결하는 핵이요, 우리의 미래를 키우는 싹이 됩니다. 문 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 존재 중심에는 항상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이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패역한 시대에 속해 있던 제자들은 무기력 하고 배반하고, 이기심에 들떠있고 대접받으려 하고 그리고 주 님을 부인하는 오합지졸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으로 거듭 난 확고한 부활 믿음의 제자들은 어디를 가도 회개의 파워를 일 으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담대해 집니다. 앉은 뱅이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며 옥문을 터지게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모든 능력의 파장 중심 에는 부활 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핵으로 자리 잡고 잇었습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는 산같은 믿음이 있는가 아니 겨자씨만한 믿음 이라도 있는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매일 태산 을 옮기는 믿음의 능력을 누리면서 살 때입니다. 매일의 기적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태산이 안 움직인다고 불평만 하고 삽니다. 그러나 이제 부터는 먼저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일으킬 것입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독특한 생활 양식입니다. 파워 크리스챤과 무기력 크리스챤의 분수령은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을 얼마나 사용하느냐, 믿음을 얼마나 끝까지 밀고 나가 느냐의 차이입니다.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더욱 믿음의 능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산 같은 믿음 산을 옮길 만한 믿음, 변화된 제자들이 사용한 믿음, 그 믿음의 능력으로 살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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