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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현실 (마17:1-20)

본문

1. 오늘 본문을 유명한 화가 라파엘의 그림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변화산상에서 기도하시다가 얼굴이 변화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그림 상단에 위치해 있고, 그 아래 잠에서 막 깨어난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있으며, 그림 하단 산 아래에는 귀신 들린 아이와 그 아버지, 그리고 군중들과 제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3단계로 구분하여 본문의 광경을 그린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산 밑에서는 고통과 절망이 꿈틀대며 신음하고 있고 혼란과 위기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산상에 서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다가 깨어나서는 황흘하고 눈부신 주의 광 채를 보고 마냥 좋아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그 광채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세 제자 가 잊고 있는 산 아래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죄 속에 빠져 헤메이는 그들을 위해 몸소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모세, 엘리야와 함께 계획하고 계 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심중을 모르는 세 제자는 그저 광채에 눈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산상의 기쁨과 변화, 즐거움이 좋을 뿐 아니라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주께서 세 제자를 산상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나 세 제자를 산상으로 데려가셨던 그 주님이, 그들이 그곳에 있기를 원함에도 불구하고 다 시 산 밑으로 데리고 가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산상의 그 빛난 광채 속에서 주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내뱉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는 말이 혹 오늘날의 교회가 하고 있는 말이 아닌지, 혹 여러분이 늘 하는 말은 아닌지 제자들의 어리석음 은 라파엘 시대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사단과 싸우거나 불 신자에게 멸시받기 보다는 교회 안에서만 찬송하며 성도와 교제를 나누며 숨어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산 아래로 내려오신 주님의 심정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당신들을 산상으로 부르셔서 영광과 즐거움, 변화를 보여 주셨다 면, 이제 그 주와 함께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심정으로 죄 속에 있는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간질에 걸려 물불을 가 리지 아니하고 발광하며 고통당하는 사람과 그런 아들을 둔 부모의 참담한 현 실, 그리고 이들을 고쳐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제자들의 낭패스런 모습,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낙심과 연민에 가득한 군중들의 모습, 이 모든 현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산 아래로 내려가서 암담한 현실 속에 고통당하며 절망하고 있는 이들을 끌어안고 빛과 생명과 소망이 되신 예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산 밑으로 내려 가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대 에 생명줄을 던져야 합니다. 기독교는 산 위에서 신비나 이상만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현실을 구원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죄 많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은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포로된 자, 억눌린 자 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은 현실 과 동 떨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을 뜨거운 사랑으로 끌어 안는 것입니다.
2. 며칠전 한국 경제의 실패를 책임지고 물러선 강경식 부총리에 대한 어느 신문 기자의 평입니다. '시장경제에 실패한 시장경제론자. 이상 좇다 현실에 발 목잡힌 이상주의자'. 그가 신봉했던 시장경제 이론은 우리 경제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이상적인 이론이었지만 우리의 경제 현실이 그 이상을 따르기에는 역부 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추구한 이론과 정책들은 금융개혁추진, 금융실명제 보완, 벤처기업육성, 지방경제 활성화, 긴축예산의 편성 등 경제 체질을 바꾸기 위한 시도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얼룩진 우리 경제현 실에 그 이상론이 뿌리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이상과 현실의 부조 화 속에 그는 현실 경제의 실패를 책임지고 대선을 한달 남겨놓은 시점에서 중 도하차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문민정부는 개혁에도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경제도 부도내고 말았습니다. 어느 일간지 만화에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 초기에 '임기중 한 푼 도 안 받겠다.'고 공표하자 백성들은 '글쎄.'하면서 두고 보자는 태도였습니다. 그후 임기 3개월을 남겨 둔 김영삼 대통령의 모습은 경제위기(국제통화기금)에 깡통차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한 푼만 도와줍쇼'라고 구걸하는 거지 모습으 로 그려놓았습니다. 칼국수 먹더니 이제 수제비도 못 먹고 깡통 찬 거지가 다 되었습니다. OECD가입, 선진국 운운 하며 교만을 떨며 기고만장하더니 급기야는 소처럼 풀 뜯어먹는 신세가 되어버린 느브갓네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 구촌의 세계화 물결을 타고 조만간 선진국 대열에 앞장 설 것처럼 떠들어 댓지 만 모두가 다 허구였습니다. 최근 번역 출간된 '세계화의 덫'(독일 슈피겔지 기자 마르틴.슈만 공저)이 세계 29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으며 독일에서만 30만부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저자는 지구촌의 세계화 물결 속에서 오는 미래상을 "20대 80의 사회"라고 정의합니다. 21세기는 지구촌 전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구 20%만 있어도 세계 경제를 유지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회에서 배척된 80%의 사람 들은 20%가 던져주는 약간의 오락물과 먹거리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갈이라 고 그들은 진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상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저자가 분 석한 '세계화 지구촌'의 모습은 곳곳에서 벌써부터 그 전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독일의 실업자는 6백만명을 상회했습니다. 이는 48년 서독 건국이 래 가장 많은 실업자수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안에 제조업에서만 1백 5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화는 합리 화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를 급격하게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새로운 자 리를 만들어낸다는 세계화 지상론자들 외침은 설득력을 잃은지 오래됐다는 주 장입니다. 또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로 양분시키고 있 다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은 심각한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고 13억명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세계적 갑부 358명의 재산을 전부 합치면 25억명의 재산과 맞먹습니다. 주(州) 자체만으로 세계 7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미국 캘리포니아는 감옥 유지를 위해 쏟아붓는 돈이 주 전체 교육예산을 압도합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선정한 미국 400대 부자 랭킹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산가(빌리어네어)는 지난해 135명에서 올해 170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1위-빌 게이츠, 2위-워런 버핏, 3위-플 앨런, 4위-로래리 엘리슨, 5위-고든 무어, 6위-스티븐 볼머, 7위-존 클러지, 8위-로니 퍼럴먼, 9위-짐 월튼, 10위-헬렌 월튼, 24위-루퍼트 머독, 26위-커코리언, 28위-테드 터너, 33 위-로스 페로) 포브스가 부자 그룹을 선정하기 시작한 지난 82년에는 13명만이 이 '빌리어네어' 클럽에 속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지난 94년부터 올해까지 4 년 연속 1위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인물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자이자 회 장인 빌 게이츠(41). 빌 게이츠의 재산은 올해 무려 두 배 이상 증가, 398억달 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같은 재산규모는 그가 올 한 해 동안 일 주일에 4억달러 꼴로 벌어 들였음을 의미합니다. 400대 부자에 오른 화제의 인물로는 또 최근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 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투자가 조지 소로스(27위), 90년대 들어 미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한 텍사스의 거부 로스(33위) 등이 있습니다. 400대 부자들은 백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는 가운데 흑인으로는 여성 방송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유일하게 349위에 기록됐다. 반면 아시아 와 남미 계통의 재산가는 400위 안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400대 부자 중에서 27, 33위가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고 한다면, 이미 "20대 80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빌 게이츠 한 사람의 재산만으로도 한국 경제를 살렸다 죽였다 할 수 있는 지구촌 현실 앞에 아연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13억명의 지구 촌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일주일에 무려 4억달러를 벌어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13,14세에 몸을 팔아 연명해가는 아이들, 거리에 버려져 구걸하며 겨우 겨우 살아가는 아이들이 무려 1억명이 된다고 합니다. 선진 강대국들이 끌고가는 세계화는 "20대 80의 사회"라는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려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려가는 허구에 불과합니다. 세계화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살인적인 생존경쟁 속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허 구일뿐입니다.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양분하는 인 류의 덫일 뿐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들고,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만들며,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들며, 다수의 패배자들을 승리자로 만 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3.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이 시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질책하며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 시고 있습니다. 신앙은 산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산 아래로 내려와 복음(예수 그리스도)을 통해 골짜기는 메우고 높은 산은 깎아내려 평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20대 80의 사회" 골짜기와 산을 평지화 하는 것이 신앙이요 세계 복음화입니다. 해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형된 모습의 예수님께서 모세,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장면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황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크나 큰 존경과 신망을 받는 인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그들의 위대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예수를 증거하는 그들의 역할에 맞추어져 있는 것 입니다. 모세의 율법보다도, 엘리야의 능력보다도 십자가의 예수만이 산 아래의 현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산 위에 계속 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엉겁결에 예수를 모세와 엘리야에 버금가는 인물로 파악하였을 뿐 모든 구약의 율법과 예언의 성취이신(5:17, 18; 눅 24:44) 주님의 유일무이한 신분에 대한 무지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그러한 제안은 온갖 질고에 시달리는 무리들이 기다리는 산 아래의 목마른 부 르짖음을 도외시한 도피적 태도를 반영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를 향해 내딛는 주님의 거룩한 고난의 걸음을 막아 서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눈은 저 변 화산상의 영광은 물론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보게 하 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 소망에로 향하게 합니다(요일 3:1-3). 하지만 눈을 산 아래 곧, 세상에로 돌려보면, 이 땅에는 온갖 죄악과 질병, 부조리와 모순이 판을 치고 있으며 고통의 절규가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의 사명이 저 억눌리고 빛을 잃은 무리들 속에 들어가 그들로 더불어 함께 살며 그들로 저 산 위의 영광에로 눈을 돌리게 하는 일임은 자명해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초점은 무엇보다 믿음의 문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변화산의 경험은 분명 신비로운 일입니다. 기독교는 분명 신비와 기적의 종 교입니다 그러기에 신비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신비의 경험이 없이는 메마 른 뼈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칫 산 위에 있는 사람은 산밑의 이성과 지성을 죄 악시하기 쉽습니다. 산밑에 있는 사람은 산 위의 신비를 광신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이성을 무시한 신비는 공중에 떠있는 것이요 신비를 무시한 이성은 앞이 탁 막힌 소경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믿음 생활에는 학자의 혀와 선지자 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변화산의 경험은 우리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갈 수 있게 하고 매일의 복음 전도 및 봉사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힘을 주 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자들은 산 위에서 산 위로 떠다닙니다. 이 산 저 산을 떠들지만 현실은 비참합니다 현실을 무시하면 기독교는 뜬구름처럼 되고 맙니다. 또한 현실에 집착하면 꿈이 없는 막힌 자가 됩니다. 기독교는 이상과 현실을 좁히는 종교요, 이상을 현실화하는 종교입니다. 신앙이란 지각이나 이성을 잃은 흥분이 아닙니다.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깨어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에 흥분하여 예수 의 참다운 모습을 놓쳤습니다. 예수가 지향하는 참다운 신앙에서 벗어났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장막 셋을 집시다.여기가 좋사오니"는 예수가 가르친 신 앙이 아닙니다.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 다시말해 율법과 예언과 새로운 계명을 내가 독점하고 세속사회와 격리된 천국을 만드는 것이 교회가 아닙니다. "여기 가 좋사오니"는 반기독교 사상이며 신앙과 현실이 조화되지 못한 잘못된 신앙 입니다. 베드로의 "여기가 좋사오니."라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세 사람의 모 습은 구름 속에 가리우고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흥분하지 말고 똑똑하게 정신차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경청하며 그에 순종하라는 충고였습니다. 신앙이란 산 위에 장막치고 예수를 독점하여 "여기가 좋사오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하여 예수를 따라 오히려 산에서 내려와 세속사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속사회에 들어갈지라도 세속에 물들지 아니 하고 오히려 죄악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영육간에 구원시키라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영광스런 모습의 예수님의 시선은 산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그 영광 중에 고통받은 이들을 위해 십자가 의 고난을 가슴에 품고 계셨던 것입니다. 변화산 이전의 제자들의 심정은 아직 까지도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멸시천대를 당하시고 죄인과 같은 대 접을 받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되리라고 하는 예수님의 집념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그들 앞에는 암담한 수모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변화산의 전 분위기는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 같이 빛났 고 그의 옷은 빛과 같이 번쩍이고 찬란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입니 까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 영광 중에 나 타나서 하신 말씀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 명 영광 중에 계셨습니다. 하늘 높은 보좌에 계신 영광의 주이십니다. 그가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죄는 없으셨지요. 그의 진정한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영광의 자리를 버리고 고난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오셨더니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 도 없습니다. 영광이 없는 고난은 무익한 것이요 고난이 없는 영광은 기독교적 이지 않습니다. 영광의 주 예수는 오늘도 고난의 현장에 방문하십니다. 소외된 이들 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고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더 이상 영광 중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고난의 현장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부활을 기대하지 맙시다. 그리고 영광이 없는 고난과 희생을 강요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도 산 위와 산밑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산 위의 신비 와 이상과 영광은 단순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싶게 합니다. 그러나 산밑은 매우 복잡하고 큰 고통의 외침이 있습니다. 간질병자의 좌절되는 노력, 뿜어 오르는 거품, 시든 육신이 울부짖습니다. 이 땅에 필요한 것은 모세의 율법도 엘리야의 능력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인류가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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