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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옮기는 믿음 (마17: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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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18일 피습 사망한 국제종교문제연구소장 탁명환씨는 사이비종교 감별사 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별명이 나타내 주듯 평생을 신흥종교 연구에 힘써 온 사람이다.그는 60년대부터 신흥종교의 이단과 비리를 폭로하였다. 그동안 60여 차례의 크고 작은 테러를 당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고소를 당했다 탁 명환씨는 그는 지난 91년 오대양 암매장자 수사건 때 오대양사건과 세모와의 관계를 파헤친 장본인이다. 37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한 탁씨는 전북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영남신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을 나온 뒤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그는 장신대 2학년 재학중 친구의 어머니가 사이비종교에 빠져 가정을 버리고 집단생활 끝에 술집 등을 전전하다 끝내 자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사이비 종교와의 싸움에 들어섰다고 말해왔다. 그는 그후 한국의 사이비종교를 추적하며 그 폐해를 폭로하고 한국신흥종교의 실상 기독교 이단비판 세칭 구원파의 정체 등25권의 저서를 내 사이비종교 전문가 로 인정받아 왔다.그러나 탁씨가 이단 으로 지목했던 교파가 기성교단으로부터 정통 으로 인정받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차례 사과문을 발표한 전력도 있어 그의 이단 단죄활동에 우려를 나타내는 시각도 있다. 18일 밤 퇴근 길에 바로 집 앞에서 테러를 저지른 자는 곧 검거되었다. 가해자는 당시 사회문제가 된 영생교와 관련된 자가 아니라 뜻밖에도 탁씨가 집요하게 이단성을 폭로한 대성교회와 관련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사건은 아직 구체적인 배후가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직접 살인을 저지른 임씨의 단독 범행으로 결론 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임씨는 탁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무슨 원한관계를 가진 것은 아니다. 단지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탁씨를 죽여야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 뿐이다. 탁씨도 역시 자기의 신앙을 위하여 언제든지 죽을 각오를 가진 사람이었다.
죽이기로 한 사람은 그의 뜻대로 탁씨를 죽였고 죽기를 각오한 사람도 예상대로 죽었다. 쇠파이프와 칼을 휘둘러 죽인 사람은 자기의 할 일을 다 했으니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죽은 사람도 그 날을 예상해서 미리 자기 몸의 장기들을 다른 사람에게 기증할 준비를 해 놓고 죽게 될 날을 예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죽이고자 한 사람도 철저히 준비를 해서 자기의 뜻을 이뤘고 죽은 사람도 준비해 놓은대로 자기의 시신 중 일부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이 두 사람 모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택한 길이었다. 그들 둘 다 기독교라는 신앙을 가졌다. 그들이 가진 신앙이 잘못된 것인가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잘못된 것인가 어찌되었던 이 두 사람의 결과는 아주 다르게 나타났다. 신앙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면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예수 오 날 위해 죽은 예수 예수 사랑 닮기 원하네-예수 사랑 닮기 원하네 로마서 4:25에 기록된 대로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 줌이 되었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하여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적어도 사도들의 전하여 준 신앙의 내용을 믿는다. 신앙은 하나다. 신앙의 내용은 하나 뿐이다.
그런데 이 신앙의 내용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다르다. 같은 기독교, 같은 장로교 안에서도 신앙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는 차라리 총칼없는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사참배를 놓고 격돌할 때나, 성경의 무오설을 가지고 다투던 기장과 에장의 싸움이나 통합 합동의 싸움들이 모두 다 신앙의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나 사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들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잘못된 것이지 신앙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이러한 이야기가 소개되었었다.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일본 이렇게 네 나라 가정의 부인들이 여객선 휴게실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배를 버리고 탈출하라.'는 비상경보가 울렸다. (어떤 반응이 있었는지 상상해 보라 !) 일 본:'바깥 양반과 의논해 봐야 하겠어요.'라며 일어섰다. 중 국:'어서 가서 가족들을 찾아야지'하면서 나갔다. 프랑스:'여기서 기다리노라면 우리 그이가 올거에요.' 미 국:모두 미쳤어요 어서 위원회를 조직해서 회장을 뽑고 구조계획을 짜야할 것 아니에요!'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한가지 사안을 두고 그 문제를 해석하는 입장을 이렇게 다르다.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뿐 아니라 민족성이나 문화적인 차이들이 크게 영향을 준 것이다.
1.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소년으로 자신이 원치않는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제력을 잃은 소년으로 스스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이다. 한번 발작이 시작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체면도 위신도 없어지고 만다. 또 이러한 사실이 자주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한두번의 고통이야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상습적이고 반복적인 일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마가 9 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마가는 벙어리 귀신이 들린 소년이라고 하였다. 마태는 간질로 심히 고생을 하는 자라고 하였다. 두개의 복음서는 똑 같이 그가 귀신이 들려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데나 거꾸러져서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고 창백한 얼굴로 불에도 물에도 뛰어들어 간다는 것이다. 제가 오래 전에 간질병이 있는 한 청년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멀쩡하다. 함께 봉사활동도 하고 열심으로 기도도 하고 다른 친구들과도 교제를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갑자기 쓰러진다는 데 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순간 쓰러지는데 얼마나 난감한지 모른다. 처음에는 다소 놀랬으나 한쪽에 밀어 놓고 잠시 쉬게하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부시시 깨어 일어난다. 이 청년이 문제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생소한 곳이면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알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다행히 장미회 같은 의료후원단체에서 부담없이 약을 보내오기 때문에 의약품으로 몸을 지탱하며 살고 있다. 본문의 소년도 자기 자신의 문제를 자신도 알고 부모도 안다. 그러나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를 발견하였고 또 알고 있지만 스스로는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정말 문제인 것이다.
2. 문제의 해결은 믿음의 유무이다. 소년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었다.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말하였다. '당신의 제자들이 고쳐 주기를 바랐으나 고치지 못하였다.'는 말까지도 하였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였다. 이 말씀은 누구를 지칭하여 꾸짖은 말씀인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아이의 아버지를 향한 꾸짖음인가 아니면 제자들을 향한 꾸짖음인가 17절에서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꾸짖었으나 20절 말씀에서 그의 제자들을 향한 꾸짖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우리는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하고 질문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셨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가능성을 향한 도전이다. 요셉의 경우를 보자. 형들은 그를 애급에 팔았다. 행복한 아들이 졸지에 이방인의 노예가 된 것이다. 한 여인의 중상모략으로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요셉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형들이 이렇게 저렇게 간사함을 나타냈지만 요셉은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미국 아이오와주 수 카운티에 프랑크반다 마틴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잘 알려진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가 18 살 때에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대장간에 놀러 갔다가 시뻘건 쇳덩어리가 그의 왼손에 닿아 순식간에 네 손가락을 잃어 버렸다. 엄지 하나만 남은 상태에서 바이올린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명성이 일순간에 허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마틴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는 용기를 가지고 재기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손을 바꾸어 바이올린을 켜리라.' 결심한 것이다. 마틴은 기도하며 열심으로 연습을 하였다. 엄지 하나만 남은 왼손으로 활을 잡고 오른 손으로 바이올린 켜는 법을 익힌 것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연습에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결과 마침내 그는 교향악단의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실망하지 않았다. 주님의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였으나 그는 예수님을 붙들었다. 자식의 아픔은 결코 그만의 아픔이 아니다. 아버지도 함께 아퍼하고 있는 것이다. 소년 요셉이나 소년 마틴의 일이 결코 그들 만의 일은 아니다. 오늘 여기 함께 자리를 같이한 저와 여러분의 일이다. 포기하고 물러 서겠는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일어 설 것인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으면 산이라도 옮기고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다. 우리 믿음의 크기가 어떠한가 믿음의 깊이는 또 어떤 것인가
3. 믿음은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은 과거를 보지 않는다. 과거를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은 이미 시대에 뒤진 사람이다. 과거를 잊을 수야 없겠지만 그러나 과거에 붙들려 있어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우리가 과거에는 세리요 창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그의 시민이 되었다. 바울은 오직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선언하였다.(빌 3:20) 우리는 본시 하늘의 시민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음으로 정죄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죄와 사망의 몸에서 해방된 존재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과거를 국문하려 하심이 아니다. 영원한 미래를 향하여 목적을 가지신 것이다. 죄악과 흑암의 권세가 가득한 것이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새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예비해 놓으셨다. 히브리 11장에 나타난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참 좋은 믿음의 증인들이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곳을 알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믿음으로 사라는 이삭을 낳았다. 믿음으로 이삭을 제물로 드렸다. 믿음으로 야곱은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가 복을 입었다.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즐거워 하였다.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 믿음으로 요단을 건넜고 여리고를 점령하였다. 기생 라합이나 시아버지를 속인 다말, 이방 여인 룻이나 간음한 여인들이 하나같이 자랑할만한 것없는 여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생을 바꾼 사람들이다. 네로의 박해가 극에 도달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을 사자밥 되게 하는 것은 예사였다. 어른들이야 그런대로 인내하며 믿음으로 극복해 나간다 해도 품 안에 아이들이야 얼마나 두려움에 쌓여 있었겠는가 한번은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들에 둘러 쌓인 모녀가 이러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겁에 질려 '엄마 나 무서워'하며 울고 있는 아이에게 던진 어머니의 말이다. '얘야 !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참으면 곧 밝아질 것이다. ' 우리의 가진 믿음은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과 같다. 아버지는 예수님이라면 능히 고치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의 앞에 나아 온 것이다. 그렇다. 믿음이란 '나는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하신다.'는 판단에서 믿음의 능력이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였다. 내가 그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사람이나 자신을 이미 죽음에 내어 던진 사람의 하나님 신앙은 동일하지만 신앙의 방법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하나는 남에게 해를 주고자 하는 신앙이고 하나는 일평생을 남의 유익을 위하여 애를 쓴 신앙이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그리스도는 넉넉하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어도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심리학자인 칼 메닝거 박사는 '정신질환자의 잠재의식 속에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싫어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고 말하였다. 입으로는 치료를 말하나 속으로는 치료를 원치않는 심리인 것이다. 이것을 악술 용어로'저항'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어 고치셨다. 귀신은 점잖게 대할 존재가 아니다. 귀신은 꾸짖어야 한다. 꾸짖은 결과 소년은 깨끗해졌다. 아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선 것이다. 우리 주님의 꾸짖음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이 꾸짖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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