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마18:15-20)
본문
1. 고슴도치, 작지만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짐승이 고슴도치입니다. 온 몸이 가시로 덮여 있기에 누구도 쉽게 고슴도치를 해칠 수 없습니다. 자기 를 보호하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 고슴도치는 가시를 갖고 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슴도치끼리는 어떻게 사랑을 할까요 그 가시로 덮인 몸을 갖 고 어떻게 사랑할까요 동물학자의 말에 의하면 고슴도치는 서로 자기의 가 시로 상대방을 찌르고, 또 찔리며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는 점점 이런 고슴도치형 인간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 을 만나기만 하면, 상처받은 사람들뿐입니다. 왜 이리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은지, 현대 목회 중에도 '치유 목회'가 대단히 인기가 있고, 상담학 중에 도 '치유 상담'이 매우 비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면, 상처 준 사람도 그 수만큼 많아야 할텐데 상처를 주 었다는 사람은 없고, 온통 받은 사람들뿐입니다. 도대체 가해자는 없고 피 해자만 있는 이상한 모습입니다.
2. 오늘 우리가 살필 말씀은 이런 주제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18장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것들인데, 1절에 서 14절까지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다른 이들을 실족케 하는 원인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내가 도리어 남에게 실족 을 당할 경우라면 이에 대해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에는 '너에게'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 든'이란 뜻입니다. 즉 네 형제나, 교우나, 식구가 너에게 상처를 주고, 아 프게 하거든 이란 뜻입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님은 해결할 수 있는 3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첫번 단계,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 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직접 찾아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끙끙 앓지도 말고, 동네방네 나팔 불지도 말고, 직접 찾아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오해하며 사는 지 모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오 해한 것을 그대로 안고 무덤까지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러한 것은 대부분 정말 오해입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단번에 해결될 수 있 고, 치유 될 수 있는 것인데, 만나기 싫다고 혼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전(前) 교회에서,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밤새 함께 기도하고, 은혜 충만, 성령님 충만하여 새벽녘에 모두 들 둘러앉아 돌아가면서 혹시 서로 상처 받은 것이 있으면 용서해 주는 시 간이 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집사님이 내게 오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 습니다. "저는 실은 목사님께 큰 상처를 받은 것이 있어요" 깜짝 놀라서 무 슨 상처냐고 했더니, 내가 그 교회에 부임해 오고 몇 달 안되어 시장에서 나를 보았답니다. 반가워서 기쁘게 인사를 했는데, 내가 그 인사를 받지 않 았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시장 길에서 채소 좌판을 하는 분이었는데, 목사님이 지나가자, 반가운 나 머지 인사를 했는데, 목사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순간, '내가 좌판이나 한다고 나를 무시하는 건가' 하는 서운함이 생기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나는 전혀 기억에도 없는데, 정말 내가 고개를 돌렸는지 기억도 없는데, 그 분은 무시 당했다는 상처를 안고 몇 년을 지내오신 것입니다. 그 때 그 저 한마디 '목사님!'하고 불러만 주었어도, 아니 교회에 와서 지나가는 말 로라도 '지난번에 목사님을 시장에서 뵈었는데, 못 본체 하시대요' 하고 농 담조로 말해도 내가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을 텐 데, 그 집사님은 그냥 상처를 안고 그대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러합니다. 누구에게 무시를 당했다, 멸시 당했다, . 하며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실지 만나서 이야기 해 보면 상대방은 그런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 지,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운함, 상처가 있으면 속으로만 끙끙거리 지 말고, 직접 말을 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로,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證參)케 하라"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직접 만나서 말을 해도 듣지 않 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한 두 사람은 물론 증인으로입니다. 간섭하고, 참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진위 여부 를 위해서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듯이 법정에서의 효력 있는 증 거 채택을 위해 증인 두 세 사람을 두라는 뜻과 일맥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말씀은 갈등이 생겼을 때 누군가의 도움, 조력자가 필요함을, 화목케 하는 자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말에 대해 증참케 하라는 것은, 그 내용을 확인하는 증인이 있음을 앎으로써 쌍방이 서로 말을 신중하고, 진실하게 하게 되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들 때문에 웬만하면 화해하고, 화목하게 되는 것을 바라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싸움을 붙이는 이웃이 있는 이는 불행한 이입니다. 어느 마음 좋은 집 사님이 계시는데, 그의 부인은 영 다른 분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농담을 하면, 남편 집사님은 허허 웃고 마는데, 부인 집사님은 집에 와서 신경질을 냅니다. "당신은 바보야. 그건 그 사람이 당신을 무시해서 그러는거야.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늘 마음 좋은 남편 집사님을 충동질하였습니다. 피곤 한 부인이었습니다. 이런 이와 함께 산다면 얼마나 불행인가요! 그러나 화평케 하는 이웃을 둔 이는 행복한 이입니다. 서로의 갈등, 불 신, 오해를 해소해 주는 평화의 사도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축복도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교회에서 갈등을 일으 키는 자가 아닌, 갈등을 부추기는 자가 아닌, 갈등을 잠재우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십시오. 세 번째 단계,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아무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는 그것을 신중히 검토하고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이라도 교회의 말은 듣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교인간의 갈등의 최고 결정은 어디서 합니까 법원 헌법 재판소 아닙니다. 교회! 고전6장에 보면 교인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 법정으로 들 고 나가는 것에 대해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 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교인, 성도간의 갈등, 문제는 교회에서 해결해야 하고, 교인은 교회의 권면에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3. 18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 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 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교회, 하나님의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는 엄숙한 권한이 주어 져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 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는 하늘의 역사로 통하는 창구, 터널 입니다. 교회가 이루는 일은 하늘에서도 그대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교회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 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진실로 다시 말씀하신다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왜 하필 두 사람인가요 그것이 교회의 기본 수입니다. 수 백 명, 수 천명이 되어야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 두 사람으로도 족 합니다. 이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힘은 명목적으로 합한 천명 보다 마음으로 합한 이들 이 더 힘이 있습니다. 그냥 왕십리에 사는 이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어 우리 동네에 교회가 있네' 하며 그저 교회니까 해서 수 천명이 모인 것보다는 분명한 목적, 분명한 마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이자해서 모인 두 세 명이 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 천명이 모여 북적대며, 서로 다투고 마음이 갈라진 것보다는, 초라하지만 두 세 명이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서 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합해진 교회가 기도를 한다면 뭐든 못 이룰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20절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 중에 있느니라!"하셔서, 적은 인원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는 분명 주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 아무 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그것을 무시 못하고 무서운 것은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기도하고 결정하며, 권면하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어떤 이는 작은 교회를 보면 우습게 여기고, 개척 교회 목사라면 종 다루듯이 대하는 이들이 있는데, 겁 없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계시는 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공동체입니다.
4. 이런 교회가 권면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세속적 지위와 권위를 갖고 교회에 순복하지 않으려는 자는 도대체 어떤 이입니까 하나님의 법도가 두렵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런 이를 구원받은 자로 여길 것 없다는 뜻입니다. 교인으로 여길 것도 없습니다! 주로 깡패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여 큰 교회를 이룬 목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설교가 주로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납니다. 거친 사람들을 대 하기 위해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하도 유별나 게 목회를 해서, 그가 속한 교단에서 재판국이 열려, 그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자중하고 회개하기를! 그랬더니, 그 목사는 그 교단 총회 장소에서 벌 떡 일어나 나가며 그랬답니다. "교단이 여기만 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까짓 교단 내가 하나 만들지!" 워낙 교회가 커졌기에 안하무인격이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 뒤, 여의도 어느 교회에 가서 철야 집 회 때 설교하려고 강단에 올라가 있다가 그대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어 몇 달 동안 병원신세를 지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세상에서 제일 큰, 무서 운 교회입니다. 그 두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기에, 무엇이든지 이 룰 수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왕십리 중앙 교회, 이런 마음 맞는 이들 몇 이서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합심하여 제대로 기도한다 면 못 이룰 것이 뭡니까 제 각각 계산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 함께 앉아 있다 하더라도 속이 다르기에, 말은 일치되었다 하면서도 마음이 합해질 수 없고, 그러기에 어쩌면 작은 일 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작은 일 하나 하는 데도 마음이 합쳐지지 못하고 말만 많다면, 큰 일은 생각지도 못할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는데, 예배 후에 바깥 집사님이 저녁을 대 접하겠다고 나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식구들 모두 나가기로 해서, 준비하는 데, 유치원 다니는 어린 아들을 부인 집사님이 급히 옷을 입히는데, 윗도리, 바지, 양말 순서로 입혔습니다.
그런데 양말을 신기는 데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걸 바라보던 남편 집사님이 한 마디 합니다. "아니, 양말부터 신기 고 옷을 입히지 그게 뭐야!" 그러자, 부인 집사님, "아무려면 어때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옷만 입으면 됐지!" 이에 남편 집사님, "뭐 입히 려면 제대로 바르게 입혀야지 애가 배우지!" 부인 집사님, "아이고, 별것 다 갖고 시비야. 아니 옷은 위에서부터 입어야지 왜 밑에서부터 입어요" 남편 집사님, "아니 옷은 밑에서부터 입어야지 왜 위에서부터야" . 가만 보니 아이 옷 입는 것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밥 먹으러 가자 더니 자 기들끼리 부부 싸움!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저 아이는 틀림없이 마마 보이, 파파 보이가 되어 큰 일을 못할 것이다!' 사소한 옷 입는 것부터 말이 많은데, 어떻게 큰 일을 그 아이가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곳에서 목회하며 믿기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믿습니다. 나는 성전 문을 열고 들어서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에 들어 섬을 믿습니다. 성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하나님의 품안으로 저벅 저벅 걸어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이 성전 에서 마음만 합하여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려고 한다면 이룰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합하여 매면 매일 것이요 풀면 풀릴 것입니다. 그럼에 도 도무지 매려고 하지도 않고 풀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절차만 따지고 있 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더욱 초라한 모습만 후세에게 물려주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정말 믿는다면, 무엇 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진정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가 주인인 교회다운 모습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절차가 바르고, 예의바른 교회도 좋고, 점잖고 매너 좋 은 교회도 좋지만, 그것 보다도 더 좋은 것은 마음을 합하여 성도들이 기도 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그런 능력 있는 교회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주님이 함께 거하시는, 그래서 무엇이든지 기도로 매고, 기도로 풀고, 기도로 이루는 참 교회의 교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슴도치끼리는 어떻게 사랑을 할까요 그 가시로 덮인 몸을 갖 고 어떻게 사랑할까요 동물학자의 말에 의하면 고슴도치는 서로 자기의 가 시로 상대방을 찌르고, 또 찔리며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현대 사회는 점점 이런 고슴도치형 인간이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사람 을 만나기만 하면, 상처받은 사람들뿐입니다. 왜 이리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은지, 현대 목회 중에도 '치유 목회'가 대단히 인기가 있고, 상담학 중에 도 '치유 상담'이 매우 비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상처받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면, 상처 준 사람도 그 수만큼 많아야 할텐데 상처를 주 었다는 사람은 없고, 온통 받은 사람들뿐입니다. 도대체 가해자는 없고 피 해자만 있는 이상한 모습입니다.
2. 오늘 우리가 살필 말씀은 이런 주제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18장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것들인데, 1절에 서 14절까지 예수님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다른 이들을 실족케 하는 원인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하나요 내가 도리어 남에게 실족 을 당할 경우라면 이에 대해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15절,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에는 '너에게'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범하거 든'이란 뜻입니다. 즉 네 형제나, 교우나, 식구가 너에게 상처를 주고, 아 프게 하거든 이란 뜻입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님은 해결할 수 있는 3 단계를 말씀하십니다. 첫번 단계,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 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직접 찾아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끙끙 앓지도 말고, 동네방네 나팔 불지도 말고, 직접 찾아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오해하며 사는 지 모릅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오 해한 것을 그대로 안고 무덤까지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러한 것은 대부분 정말 오해입니다. 만나서 대화하면 단번에 해결될 수 있 고, 치유 될 수 있는 것인데, 만나기 싫다고 혼자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전(前) 교회에서,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함께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밤새 함께 기도하고, 은혜 충만, 성령님 충만하여 새벽녘에 모두 들 둘러앉아 돌아가면서 혹시 서로 상처 받은 것이 있으면 용서해 주는 시 간이 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집사님이 내게 오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 습니다. "저는 실은 목사님께 큰 상처를 받은 것이 있어요" 깜짝 놀라서 무 슨 상처냐고 했더니, 내가 그 교회에 부임해 오고 몇 달 안되어 시장에서 나를 보았답니다. 반가워서 기쁘게 인사를 했는데, 내가 그 인사를 받지 않 았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시장 길에서 채소 좌판을 하는 분이었는데, 목사님이 지나가자, 반가운 나 머지 인사를 했는데, 목사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더랍니다. 순간, '내가 좌판이나 한다고 나를 무시하는 건가' 하는 서운함이 생기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나는 전혀 기억에도 없는데, 정말 내가 고개를 돌렸는지 기억도 없는데, 그 분은 무시 당했다는 상처를 안고 몇 년을 지내오신 것입니다. 그 때 그 저 한마디 '목사님!'하고 불러만 주었어도, 아니 교회에 와서 지나가는 말 로라도 '지난번에 목사님을 시장에서 뵈었는데, 못 본체 하시대요' 하고 농 담조로 말해도 내가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을 텐 데, 그 집사님은 그냥 상처를 안고 그대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그러합니다. 누구에게 무시를 당했다, 멸시 당했다, . 하며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데, 실지 만나서 이야기 해 보면 상대방은 그런 뜻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 지,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운함, 상처가 있으면 속으로만 끙끙거리 지 말고, 직접 말을 해야 합니다.
둘째 단계로, 16절,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證參)케 하라"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직접 만나서 말을 해도 듣지 않 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한 두 사람은 물론 증인으로입니다. 간섭하고, 참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진위 여부 를 위해서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있듯이 법정에서의 효력 있는 증 거 채택을 위해 증인 두 세 사람을 두라는 뜻과 일맥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말씀은 갈등이 생겼을 때 누군가의 도움, 조력자가 필요함을, 화목케 하는 자가 필요함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말에 대해 증참케 하라는 것은, 그 내용을 확인하는 증인이 있음을 앎으로써 쌍방이 서로 말을 신중하고, 진실하게 하게 되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이들 때문에 웬만하면 화해하고, 화목하게 되는 것을 바라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싸움을 붙이는 이웃이 있는 이는 불행한 이입니다. 어느 마음 좋은 집 사님이 계시는데, 그의 부인은 영 다른 분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농담을 하면, 남편 집사님은 허허 웃고 마는데, 부인 집사님은 집에 와서 신경질을 냅니다. "당신은 바보야. 그건 그 사람이 당신을 무시해서 그러는거야.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늘 마음 좋은 남편 집사님을 충동질하였습니다. 피곤 한 부인이었습니다. 이런 이와 함께 산다면 얼마나 불행인가요! 그러나 화평케 하는 이웃을 둔 이는 행복한 이입니다. 서로의 갈등, 불 신, 오해를 해소해 주는 평화의 사도가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축복도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 교회에서 갈등을 일으 키는 자가 아닌, 갈등을 부추기는 자가 아닌, 갈등을 잠재우는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십시오. 세 번째 단계, 17절,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아무 말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는 그것을 신중히 검토하고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이라도 교회의 말은 듣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교인간의 갈등의 최고 결정은 어디서 합니까 법원 헌법 재판소 아닙니다. 교회! 고전6장에 보면 교인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세상 법정으로 들 고 나가는 것에 대해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 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교인, 성도간의 갈등, 문제는 교회에서 해결해야 하고, 교인은 교회의 권면에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요
3. 18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 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 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교회, 하나님의 전이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는 엄숙한 권한이 주어 져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 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교회는 하늘의 역사로 통하는 창구, 터널 입니다. 교회가 이루는 일은 하늘에서도 그대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교회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풀면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 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진실로 다시 말씀하신다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왜 하필 두 사람인가요 그것이 교회의 기본 수입니다. 수 백 명, 수 천명이 되어야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 두 사람으로도 족 합니다. 이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힘은 명목적으로 합한 천명 보다 마음으로 합한 이들 이 더 힘이 있습니다. 그냥 왕십리에 사는 이들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어 우리 동네에 교회가 있네' 하며 그저 교회니까 해서 수 천명이 모인 것보다는 분명한 목적, 분명한 마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이자해서 모인 두 세 명이 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수 천명이 모여 북적대며, 서로 다투고 마음이 갈라진 것보다는, 초라하지만 두 세 명이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서 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합해진 교회가 기도를 한다면 뭐든 못 이룰 것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20절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 중에 있느니라!"하셔서, 적은 인원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는 분명 주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 아무 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그것을 무시 못하고 무서운 것은 주님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가 기도하고 결정하며, 권면하는 것이 어찌 대수롭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어떤 이는 작은 교회를 보면 우습게 여기고, 개척 교회 목사라면 종 다루듯이 대하는 이들이 있는데, 겁 없는 행위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계시는 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공동체입니다.
4. 이런 교회가 권면하고, 결정하고, 집행하는 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세속적 지위와 권위를 갖고 교회에 순복하지 않으려는 자는 도대체 어떤 이입니까 하나님의 법도가 두렵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그런 이를 구원받은 자로 여길 것 없다는 뜻입니다. 교인으로 여길 것도 없습니다! 주로 깡패들을 대상으로 전도하여 큰 교회를 이룬 목사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설교가 주로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납니다. 거친 사람들을 대 하기 위해 할 수 없을는지 모르지만, 그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하도 유별나 게 목회를 해서, 그가 속한 교단에서 재판국이 열려, 그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자중하고 회개하기를! 그랬더니, 그 목사는 그 교단 총회 장소에서 벌 떡 일어나 나가며 그랬답니다. "교단이 여기만 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 까짓 교단 내가 하나 만들지!" 워낙 교회가 커졌기에 안하무인격이었습니다.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 뒤, 여의도 어느 교회에 가서 철야 집 회 때 설교하려고 강단에 올라가 있다가 그대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어 몇 달 동안 병원신세를 지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세상에서 제일 큰, 무서 운 교회입니다. 그 두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기에, 무엇이든지 이 룰 수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왕십리 중앙 교회, 이런 마음 맞는 이들 몇 이서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합심하여 제대로 기도한다 면 못 이룰 것이 뭡니까 제 각각 계산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 함께 앉아 있다 하더라도 속이 다르기에, 말은 일치되었다 하면서도 마음이 합해질 수 없고, 그러기에 어쩌면 작은 일 조차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작은 일 하나 하는 데도 마음이 합쳐지지 못하고 말만 많다면, 큰 일은 생각지도 못할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 댁에 심방을 갔는데, 예배 후에 바깥 집사님이 저녁을 대 접하겠다고 나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식구들 모두 나가기로 해서, 준비하는 데, 유치원 다니는 어린 아들을 부인 집사님이 급히 옷을 입히는데, 윗도리, 바지, 양말 순서로 입혔습니다.
그런데 양말을 신기는 데 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걸 바라보던 남편 집사님이 한 마디 합니다. "아니, 양말부터 신기 고 옷을 입히지 그게 뭐야!" 그러자, 부인 집사님, "아무려면 어때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옷만 입으면 됐지!" 이에 남편 집사님, "뭐 입히 려면 제대로 바르게 입혀야지 애가 배우지!" 부인 집사님, "아이고, 별것 다 갖고 시비야. 아니 옷은 위에서부터 입어야지 왜 밑에서부터 입어요" 남편 집사님, "아니 옷은 밑에서부터 입어야지 왜 위에서부터야" . 가만 보니 아이 옷 입는 것 때문에 다투고 있었습니다. 밥 먹으러 가자 더니 자 기들끼리 부부 싸움! 그 모습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저 아이는 틀림없이 마마 보이, 파파 보이가 되어 큰 일을 못할 것이다!' 사소한 옷 입는 것부터 말이 많은데, 어떻게 큰 일을 그 아이가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곳에서 목회하며 믿기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믿습니다. 나는 성전 문을 열고 들어서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에 들어 섬을 믿습니다. 성전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하나님의 품안으로 저벅 저벅 걸어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이 성전 에서 마음만 합하여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려고 한다면 이룰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합하여 매면 매일 것이요 풀면 풀릴 것입니다. 그럼에 도 도무지 매려고 하지도 않고 풀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절차만 따지고 있 다면,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더욱 초라한 모습만 후세에게 물려주고 말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고 정말 믿는다면, 무엇 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하고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게 진정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가 주인인 교회다운 모습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절차가 바르고, 예의바른 교회도 좋고, 점잖고 매너 좋 은 교회도 좋지만, 그것 보다도 더 좋은 것은 마음을 합하여 성도들이 기도 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그런 능력 있는 교회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주님이 함께 거하시는, 그래서 무엇이든지 기도로 매고, 기도로 풀고, 기도로 이루는 참 교회의 교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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