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십자가의 죽음(2) (마16:21-28)
본문
카우진 부인(Mrs. Cousin)의 찬송가에는 이런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채찍을 드사, 오! 그리스도께 내려 치셨네. 내가 받아야 할 그 매인데 하나님은 당신을 치셨네. 당신의 눈물, 당신의 피, 흘러내리고, 당신의 상처가 나를 고치네. 여호와께서 칼을 뽑으사, 오! 그리스도께 내리치셨네. 당신의 피가 번쩍이던 칼날을 무디게 하셨고, 당신의 마음이 그 칼을 안은 것은, 모두 나를 위한, 내 평안을 위한 것이었으니, 이제 그 칼이여 내게는 안녕. 정말 감동적인 십자가의 장엄함을 그리고 있는 찬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우리에게 가해질 하나님의 공의로운 형벌과 진노를 십자가로 대신했다는 고백적인 노래입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십자가의 죽음’ 이란 말씀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마태복음 16장 21절 중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본문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I. 예정된 죽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2절에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가는 길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이미 작정된 길을 가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 베드로의 성령님 설교 중에서 말하기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 18절에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구속경륜 가운데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1장 여러 곳에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1:3),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이 되게 했다(1:5).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였다(1:6). ‘그리스도 안에서.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1:7)고 하는 말씀들을 연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속인데, 이것은 창세전에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예언된 죽음이었습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므로 인류 타락과 함께,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사실상 구약 전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입체적으로 예언한것 입니다. 여러시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 구약 계시(예언)는 모두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중심은 예수 십자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막, 법궤, 여러가지 제물과 제사, 절기가 예외 없이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예시하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를 예언함에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Ⅲ. 미리 알고 계셨던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태복음 16장 21절에도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공개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막8:31-32, 9:32, 10:32, 눅9:22). 그는 변화산의 영광 중에서도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마17:22-23). 그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10:35-4
5). 결코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것을 아닙니다. 그는 나의 받을 세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지하고 예견하고, 살았습니다. 그만큼 고통이었습니다.
Ⅳ. 자진해서 취하신 자의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번티슬랜드(Buntisland) 킹호른(Kinghorn)에 이르는 길가에 스코틀랜드의 알랙산더 3세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거기 기념비 비문은 이렇습니다. 1286년, 3월 19일 이 근처에서 우발적인 사고로 죽임을 당한 스코틀랜드 겔트족의 마지막 왕이었던 유명한 알렉산더 3세를 위하여 그의 600주기를 맞이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는 내용입니다. 그는 우발적인 사고를 당하여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우발적인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진하여 취하신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잡으로 온 대제사장의 병졸에게 베드로 검을 빼어 대결하려 할 때 그 제자의 검을 다시 꽂으라고 하시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이나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26:51-53, 요18:6-11)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고 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 지겠느냐(마26:5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 내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눅13:33). 그래서 그는 내가 이때를 위하여 왔나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것입니다(마26:38-42).
Ⅴ.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속물이란 말은 노예를 해방시키거나, 포로를 석방하기 위해서 지불하는 몸 값을 뜻합니다. 일명 ‘속전’이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를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속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를 가리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사53:6). Ⅵ. 하나님의 최고 사랑을 나타낸 죽음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구원을 위해 자기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어 대신 벌을 받게 하는 이 진리는 구원 종교인 기독교밖에 어디에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최고요, 최종의 확증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확신입니다. Ⅶ. 성공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엄청난 ‘개가(凱歌)’를 남겼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그리스도! 저주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갈3:13)! 벌거숭이 몸으로 처절하게 돌아가신 그리스도! 그는 그 마지막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은 ‘생의 개가(凱歌)’입니다. 그것은 모든 율법 성취의 개가 입니다. 그는 율법의 요구인 사망을 지불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예언 성취의 개가입니다. 그는 예언대로 나시고 예언대로 사시고, 예언대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예언을 성취한 죽음입니다. 그것은 속죄 성취의 개가입니다. 바로 인류의 대적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로 돌아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자신도 그의 성공적인 죽음을 예언하기를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신에게는 자신을 버릴 권세(죽음)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부활)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10:18). 예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실로 영원한 성공을 노래하는 승리의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조국 프랑스를 위해 충성의 말을 남기 한 병사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전쟁 중에 팔에 심한 상처를 입은 프랑스의 한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를 치료하던 의사들은 그를 살리기 위하여 불가불 그의 한 팔을 잘라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의식을 되찾고, 소생의 기운이 되돌아 온 병사에게 그를 치료한 의사들이 함께 와서 정중하게 말하기를 , “우리는 오늘 당신에게 아주 고통스럽고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의 한 팔을 불가불(不可不) 잘라야만 했던 사연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젊은 병사는 “아닙니다. 나는 내 팔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팔은 조국 프랑스를 위해 바쳤을 뿐입니다. 내 조국 프랑스가 있을 동안 내 팔은 영원히 조국이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의사들은 물론이고,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든 프랑스 군대와 국민들은 이 병사로 인해서 조국을 향한 충성심이 한층 더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는 한 팔이 아닌 온 몸을, 프랑스가 아닌, 전세기적이요, 세계적인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입니다. 많은 고난을 받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크신 구속 경륜 가운데 예정된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전 구약 성경이 예언한 예언의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께서 미리 알고 계셨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진하여 친히 나무에 달린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최종, 최고의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 보다 나은 성공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고 표현하였습니다(요12:23). 예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없어지거나, 끝나 버렸거나, 사라져 버리거나, 잊혀 버릴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생생하고 확실한 이유는 그의 죽음이 오늘에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얻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의 영광보다 예수 십자가의 가시 면류관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 십자가를 전하는데 전 인생의 승부를 겁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전 인생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할렐루야!
I. 예정된 죽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2절에 예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가는 길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인자는 이미 작정된 길을 가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 베드로의 성령님 설교 중에서 말하기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3장 18절에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구속경륜 가운데 이미 예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 1장 여러 곳에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1:3),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이 되게 했다(1:5).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였다(1:6). ‘그리스도 안에서.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1:7)고 하는 말씀들을 연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속인데, 이것은 창세전에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신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Ⅱ. 예언된 죽음이었습니다. 이미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므로 인류 타락과 함께,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께서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사실상 구약 전부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입체적으로 예언한것 입니다. 여러시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난 구약 계시(예언)는 모두 예수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된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서, 역사서, 성문서, 예언서의 중심은 예수 십자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막, 법궤, 여러가지 제물과 제사, 절기가 예외 없이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예시하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중에도 특별히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를 예언함에 그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Ⅲ. 미리 알고 계셨던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태복음 16장 21절에도 예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공개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반복되었습니다(막8:31-32, 9:32, 10:32, 눅9:22). 그는 변화산의 영광 중에서도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마17:22-23). 그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막10:35-4
5). 결코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도 모르게,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것을 아닙니다. 그는 나의 받을 세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예지하고 예견하고, 살았습니다. 그만큼 고통이었습니다.
Ⅳ. 자진해서 취하신 자의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번티슬랜드(Buntisland) 킹호른(Kinghorn)에 이르는 길가에 스코틀랜드의 알랙산더 3세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거기 기념비 비문은 이렇습니다. 1286년, 3월 19일 이 근처에서 우발적인 사고로 죽임을 당한 스코틀랜드 겔트족의 마지막 왕이었던 유명한 알렉산더 3세를 위하여 그의 600주기를 맞이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는 내용입니다. 그는 우발적인 사고를 당하여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우발적인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진하여 취하신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0장 17-18절에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요,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잡으로 온 대제사장의 병졸에게 베드로 검을 빼어 대결하려 할 때 그 제자의 검을 다시 꽂으라고 하시면서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이나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마26:51-53, 요18:6-11)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18:11)고 하였습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 지겠느냐(마26:5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 내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눅13:33). 그래서 그는 내가 이때를 위하여 왔나이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것입니다(마26:38-42).
Ⅴ.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속물이란 말은 노예를 해방시키거나, 포로를 석방하기 위해서 지불하는 몸 값을 뜻합니다. 일명 ‘속전’이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를 죄의 결과인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속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를 가리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거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고 하였습니다(사53:6). Ⅵ. 하나님의 최고 사랑을 나타낸 죽음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 구원을 위해 자기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어 대신 벌을 받게 하는 이 진리는 구원 종교인 기독교밖에 어디에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최고요, 최종의 확증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의 확신입니다. Ⅶ. 성공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엄청난 ‘개가(凱歌)’를 남겼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린 그리스도! 저주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갈3:13)! 벌거숭이 몸으로 처절하게 돌아가신 그리스도! 그는 그 마지막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은 ‘생의 개가(凱歌)’입니다. 그것은 모든 율법 성취의 개가 입니다. 그는 율법의 요구인 사망을 지불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예언 성취의 개가입니다. 그는 예언대로 나시고 예언대로 사시고, 예언대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예언을 성취한 죽음입니다. 그것은 속죄 성취의 개가입니다. 바로 인류의 대적인 죽음 문제를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로 돌아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 자신도 그의 성공적인 죽음을 예언하기를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신에게는 자신을 버릴 권세(죽음)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부활)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10:18). 예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실로 영원한 성공을 노래하는 승리의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조국 프랑스를 위해 충성의 말을 남기 한 병사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전쟁 중에 팔에 심한 상처를 입은 프랑스의 한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를 치료하던 의사들은 그를 살리기 위하여 불가불 그의 한 팔을 잘라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의식을 되찾고, 소생의 기운이 되돌아 온 병사에게 그를 치료한 의사들이 함께 와서 정중하게 말하기를 , “우리는 오늘 당신에게 아주 고통스럽고 슬픈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의 한 팔을 불가불(不可不) 잘라야만 했던 사연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 때 그 젊은 병사는 “아닙니다. 나는 내 팔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팔은 조국 프랑스를 위해 바쳤을 뿐입니다. 내 조국 프랑스가 있을 동안 내 팔은 영원히 조국이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의사들은 물론이고, 나중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든 프랑스 군대와 국민들은 이 병사로 인해서 조국을 향한 충성심이 한층 더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는 한 팔이 아닌 온 몸을, 프랑스가 아닌, 전세기적이요, 세계적인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입니다. 많은 고난을 받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크신 구속 경륜 가운데 예정된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전 구약 성경이 예언한 예언의 주제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께서 미리 알고 계셨던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진하여 친히 나무에 달린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최종, 최고의 사랑의 폭발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는 것 보다 나은 성공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켜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고 표현하였습니다(요12:23). 예수 십자가의 죽음! 그것은 없어지거나, 끝나 버렸거나, 사라져 버리거나, 잊혀 버릴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생생하고 확실한 이유는 그의 죽음이 오늘에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얻었다는 이 엄청난 사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의 영광보다 예수 십자가의 가시 면류관을 사랑하고, 자랑하고, 사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 십자가를 전하는데 전 인생의 승부를 겁니다. 바로 그 십자가를 전 인생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할렐루야!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