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대로 되는 믿음 (마15:21-28)
본문
'수로보니게'란 수리아에 속한 베니게란 뜻입니다. 이 민족은 일찍이 유대인 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북쪽으로 쫓겨났던 가나안 민족의 자손입니다. 이들은 갈릴리 북편 두로와 시돈 지방에 살았습니다.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거주한 곳 으로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곳입니다. 예수께서 이 먼 곳까지 가 셔서 어느 사람의 집에 은거하신 경우입니다(막 7:24). 바로 그때 한 이방 여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소원 성취의 축복을 받은 은총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I. 그녀의 소원은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찾아오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 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녀는 예수에게 잃어버린 딸을 찾아 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녀는 귀신 에게 딸을 빼앗긴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의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다 고 하였 습니다. 여기 '흉악히'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 딸 의 병세가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버린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딸이 사탄의 침노를 받아 정신적 상태가 혼란에 빠진 것 뿐아니라, 그 로 인한 육체적 기능의 활동까지 손상되어 버린 불구자의 상태에 이른 것을 가 리킵니다. 예수 생전에 그에게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 들이 나아왔습니다(마 4:24).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상황은, 그녀는 그녀의 딸이 만난 질병에 대하여 인간적인 한계상황을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라 고 하는 모성의 한계를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딸이 만난 불행스러운 질병에 대하여 인간적인 치료의 불가능을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와 딸 사이에 자리잡은 귀신(사탄)을 제어할 아무런 힘이나 대책이 없 었습니다. 귀신은 딸과 어머니 사이에 모든 만남, 의사 소통, 사랑, 축복, 기쁨 을 송두리째 단절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다고 하면 절망, 불 안, 공포, 낙심, 허무, 슬픔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도로 찾아오는 일이었습니다.
Ⅱ. 그녀의 큰 믿음은 소원 성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본문 15장 28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 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큰 소원은 결국 그녀가 받은 큰 믿음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어떤 믿음 이 큰 믿음이었습니까
1. 예수께 나아오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라고 하 였습니다.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는 예수를 향한 그녀의 신앙이 행동화하고 있음을 보 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는 목마른 자들을 물이신 자신에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나아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빛이신 자신에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나아와 듣고, 배우고,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2. 메시야적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 중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 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고백한 주 다윗의 자손 이란 메시야에 대한 칭호입니다(마 1:1, 9:27). 그녀가 어떻게 예수께서 메시야가 된 것을 알게 되었을까 그때는 이미 예수의 초자연적 사역이 온 천하에 두루 퍼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마 그녀는 예수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분이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메 시야임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다윗'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1 사랑의 주 를 의미합니다.
2 승리의 주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하였 습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예수에 대한 바른 메시야관 이른바 바른 기독관적인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3. 절망할 줄 모르는 기도의 신앙입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신앙, 곧 애원하는 신앙입니다. 본문 15장 22절에 다시 말하기를 소리질러 가로되… 라고 하였습니다. 23 절 중에도 …소리를 지르오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녀는 흉악히 귀신들린 딸과 자기를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이 말은
1 방장 죽어가는 자식의 죽음 앞에 서 있는 부모가 의사에게 애걸하는 마지막 하 소연을 뜻합니다.
2 포로의 적지에서 아군을 향한 구조의 마지막 부르짖음을 뜻합니다.
3 사형언도 직전에 사형수가 재판장에게 마지막 올리는 소원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후적 몸부림입니다. 지금은 그녀가 인류의 구세주 메시야이신 예수께 결사적인 소원을 토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했다 고 하였습니다. 너무 나도 어처구니없는 침묵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 뒤를 따르며 같은 소리를 반복했습니다. 그때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께 청하기 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라고 하였습니다(마 15:23). 예수님의 제자들도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입을 여시고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고 간접적으로 그녀의 부르짖음에 거절을 표했습니다(마 15:24). 메시야를 향한 그 녀의 결사적인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 그리고 그 제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망할 줄 몰랐습니다.
4. 절하는 믿음, 곧 예배하는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15장 25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물러갈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예수께 와서'라고 하였습니다. '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절했다'는 말은 사실상 엎드려 절하는 경배, 예배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르기를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도우소서'는 '화급한 구조를 나타내는 외침'을 뜻합니다. 이 이상 더 지체하거나 외면하면 자기 딸은 영원히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의 길목을 가로막고 엎드려 절하면서 강청하고 말았습니다.
5. 지극한 겸손으로 나타난 믿음입니다. 굽히거나 물러설 줄 모르는 그녀에게 예수의 대답은 너무 혹독하였습니다. 본문 15장 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개들'이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물론 쿠나리아라고 하는 관상용 개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닌 '개'라고 말함은 천대와 멸시의 극에 달한 표현입니다. '개들에게 던 진다'고 하는 표현은 쓰레기로 버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대답을 보십시오.
1 주여 옳소이다 (마 15:27)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보심과 판단과 말씀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개와 같은 존재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아니 개보다 더 못한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극에 달한 그녀의 겸손입니다.
2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 15:27)라고 하였습니다. 주인과 주인의 자녀들이 먹다 버린 부스러기라도 나와 나의 딸의 것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해야 나아갈 수 없는 그녀의 극에 달 한 절대 기도, 절대 예배, 절대 겸손이 예수의 길을 막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예수의 본심이 나타나고 맙니다. 예수의 메시야적 본성이 드러나고 맙니다. 이에 예수께서 "여자야!"라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여자야!" 하는 말 앞에 "오" 하는 예수의 감탄사가 있어서 예수의 놀라심 과 감탄의 기쁨이 숨어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녀를 향한 예수의 칭찬입니다. 그녀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만족을 나 타낸 말씀입니다. 사실상 예수는 그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소원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녀를 더 큰 믿음으로 성화시키기 위하여 시험하 신 것입니다. 그녀의 큰 소원에 큰 믿음을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 를 향한 예수의 만족, 예수의 기쁨이 폭발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큰 믿음은 예수에게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께 자주자주 나오는 믿음 이 큰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께 부르짖은 기도입니다. 절망할 줄 모르고 부르 짖은 기도입니다. 낙심을 모르고 예수에게 부르짖는 믿음입니다. 예수는 그녀에 게 이런 자극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셨던 예수의 본심 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방인에게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의 본심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절하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예배하는 믿음으로 그녀를 성화 시켰습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아는 자는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피조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개에게 던져지는 부스러기라도 사모하게 하는 지극한 겸손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큰 믿음'으로 성화시키셨습니다.
Ⅲ. 소원대로 되어 버린 축복입니다. 본문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 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네 소원대로' 하는 말은 '네가 원하는 것만큼'이란 뜻입니다. 주 님의 축복은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집니다. 그 수용의 그릇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시로 그녀의 딸은 깨끗하여지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아직 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녀의 딸에게 있던 흉악한 귀신은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그 딸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명하여 나가도록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딸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았습니다.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도로 찾았습니다.
1 예수에게 나아와
2 부르짖고(기도)
3 절하고 (예배)
4 겸손한 애걸로 말미암아 주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녀의 소원이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돈이 아니고, 명예가 아니고, 오직 자식, 자기 딸이었습니다. 소중한 인간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잃어버린 이산가족을 찾아 주는 장면이 항상 인상적 이었습니다. 서로 만난 가족들의 평생 소원이 자기 혈육을 찾아 만나는 것이었 다고 하는 눈물겨운 사연을 볼 때마다 제 마음도 함께 뜨거워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원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 사실을 설명하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눅 19:10).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불신앙의 골육 형제나 이웃은 우리가 도로 찾아내어 야 할 그리스도인의 소원의 대상들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 도 우리가 강권하여 찾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소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진실한 소원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 확 인될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다."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 엄청난 이유 때문에, 아무쪼록 나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내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전도의 소원입니다. 바로 그 소원을 가 진 자에게는 그 소원의 성취를 위하여 큰 믿음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찾기 원하는 자에게, 그 소원 성취에 따르는 큰 믿음과 큰 축복들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I. 그녀의 소원은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찾아오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 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녀는 예수에게 잃어버린 딸을 찾아 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녀는 귀신 에게 딸을 빼앗긴 어머니였습니다. 그녀의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다 고 하였 습니다. 여기 '흉악히'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그 딸 의 병세가 거의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 버린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딸이 사탄의 침노를 받아 정신적 상태가 혼란에 빠진 것 뿐아니라, 그 로 인한 육체적 기능의 활동까지 손상되어 버린 불구자의 상태에 이른 것을 가 리킵니다. 예수 생전에 그에게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 들이 나아왔습니다(마 4:24). 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상황은, 그녀는 그녀의 딸이 만난 질병에 대하여 인간적인 한계상황을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딸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라 고 하는 모성의 한계를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딸이 만난 불행스러운 질병에 대하여 인간적인 치료의 불가능을 직감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와 딸 사이에 자리잡은 귀신(사탄)을 제어할 아무런 힘이나 대책이 없 었습니다. 귀신은 딸과 어머니 사이에 모든 만남, 의사 소통, 사랑, 축복, 기쁨 을 송두리째 단절시켜 놓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다고 하면 절망, 불 안, 공포, 낙심, 허무, 슬픔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도로 찾아오는 일이었습니다.
Ⅱ. 그녀의 큰 믿음은 소원 성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본문 15장 28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녀에게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 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녀의 큰 소원은 결국 그녀가 받은 큰 믿음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어떤 믿음 이 큰 믿음이었습니까
1. 예수께 나아오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라고 하 였습니다.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이는 예수를 향한 그녀의 신앙이 행동화하고 있음을 보 여 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는 목마른 자들을 물이신 자신에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나아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빛이신 자신에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내게 나아와 듣고, 배우고,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2. 메시야적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2절 중에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 고 하였습니다. 그녀가 고백한 주 다윗의 자손 이란 메시야에 대한 칭호입니다(마 1:1, 9:27). 그녀가 어떻게 예수께서 메시야가 된 것을 알게 되었을까 그때는 이미 예수의 초자연적 사역이 온 천하에 두루 퍼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마 그녀는 예수의 초자연적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분이 바로 유대인들이 대망하는 메 시야임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다윗'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1 사랑의 주 를 의미합니다.
2 승리의 주를 의미합니다. 예수는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하였 습니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예수에 대한 바른 메시야관 이른바 바른 기독관적인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3. 절망할 줄 모르는 기도의 신앙입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신앙, 곧 애원하는 신앙입니다. 본문 15장 22절에 다시 말하기를 소리질러 가로되… 라고 하였습니다. 23 절 중에도 …소리를 지르오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녀는 흉악히 귀신들린 딸과 자기를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이 말은
1 방장 죽어가는 자식의 죽음 앞에 서 있는 부모가 의사에게 애걸하는 마지막 하 소연을 뜻합니다.
2 포로의 적지에서 아군을 향한 구조의 마지막 부르짖음을 뜻합니다.
3 사형언도 직전에 사형수가 재판장에게 마지막 올리는 소원을 의미 합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후적 몸부림입니다. 지금은 그녀가 인류의 구세주 메시야이신 예수께 결사적인 소원을 토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23절에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했다 고 하였습니다. 너무 나도 어처구니없는 침묵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그 뒤를 따르며 같은 소리를 반복했습니다. 그때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께 청하기 를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라고 하였습니다(마 15:23). 예수님의 제자들도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입을 여시고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고 간접적으로 그녀의 부르짖음에 거절을 표했습니다(마 15:24). 메시야를 향한 그 녀의 결사적인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 그리고 그 제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망할 줄 몰랐습니다.
4. 절하는 믿음, 곧 예배하는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15장 25절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물러갈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여자가 예수께 와서'라고 하였습니다. '절했다'고 하였습니다. 이 '절했다'는 말은 사실상 엎드려 절하는 경배, 예배를 뜻합니다. 그리고 이르기를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도우소서'는 '화급한 구조를 나타내는 외침'을 뜻합니다. 이 이상 더 지체하거나 외면하면 자기 딸은 영원히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의 길목을 가로막고 엎드려 절하면서 강청하고 말았습니다.
5. 지극한 겸손으로 나타난 믿음입니다. 굽히거나 물러설 줄 모르는 그녀에게 예수의 대답은 너무 혹독하였습니다. 본문 15장 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개들'이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물론 쿠나리아라고 하는 관상용 개를 가리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아닌 '개'라고 말함은 천대와 멸시의 극에 달한 표현입니다. '개들에게 던 진다'고 하는 표현은 쓰레기로 버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대답을 보십시오.
1 주여 옳소이다 (마 15:27)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보심과 판단과 말씀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은 개와 같은 존재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아니 개보다 더 못한 존재라고 여겼습니다. 이는 극에 달한 그녀의 겸손입니다.
2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 15:27)라고 하였습니다. 주인과 주인의 자녀들이 먹다 버린 부스러기라도 나와 나의 딸의 것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아가려고 해야 나아갈 수 없는 그녀의 극에 달 한 절대 기도, 절대 예배, 절대 겸손이 예수의 길을 막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예수의 본심이 나타나고 맙니다. 예수의 메시야적 본성이 드러나고 맙니다. 이에 예수께서 "여자야!"라고 그녀를 부르셨습니다. "여자야!" 하는 말 앞에 "오" 하는 예수의 감탄사가 있어서 예수의 놀라심 과 감탄의 기쁨이 숨어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그녀를 향한 예수의 칭찬입니다. 그녀의 믿음에 대한 예수의 만족을 나 타낸 말씀입니다. 사실상 예수는 그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소원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녀를 더 큰 믿음으로 성화시키기 위하여 시험하 신 것입니다. 그녀의 큰 소원에 큰 믿음을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그녀 를 향한 예수의 만족, 예수의 기쁨이 폭발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큰 믿음은 예수에게 '나아온 것'입니다. 예수께 자주자주 나오는 믿음 이 큰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께 부르짖은 기도입니다. 절망할 줄 모르고 부르 짖은 기도입니다. 낙심을 모르고 예수에게 부르짖는 믿음입니다. 예수는 그녀에 게 이런 자극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셨던 예수의 본심 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이방인에게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의 본심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절하는 믿음을 주었습니다. 예배하는 믿음으로 그녀를 성화 시켰습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아는 자는 큰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인생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피조물로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개에게 던져지는 부스러기라도 사모하게 하는 지극한 겸손의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큰 믿음'으로 성화시키셨습니다.
Ⅲ. 소원대로 되어 버린 축복입니다. 본문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 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고 하였습니다. '네 소원대로' 하는 말은 '네가 원하는 것만큼'이란 뜻입니다. 주 님의 축복은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집니다. 그 수용의 그릇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시로 그녀의 딸은 깨끗하여지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아직 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녀의 딸에게 있던 흉악한 귀신은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그 딸을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명하여 나가도록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녀는 딸을 찾았습니다. 잃어버린 딸을 찾았습니다. 귀신에게 빼앗겨 버린 딸을 도로 찾았습니다.
1 예수에게 나아와
2 부르짖고(기도)
3 절하고 (예배)
4 겸손한 애걸로 말미암아 주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녀의 소원이 성취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돈이 아니고, 명예가 아니고, 오직 자식, 자기 딸이었습니다. 소중한 인간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잃어버린 이산가족을 찾아 주는 장면이 항상 인상적 이었습니다. 서로 만난 가족들의 평생 소원이 자기 혈육을 찾아 만나는 것이었 다고 하는 눈물겨운 사연을 볼 때마다 제 마음도 함께 뜨거워졌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의 참된 소원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이 이 사실을 설명하기를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고 하였습니다(눅 19:10).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불신앙의 골육 형제나 이웃은 우리가 도로 찾아내어 야 할 그리스도인의 소원의 대상들입니다. 잘못된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 도 우리가 강권하여 찾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이런 소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진실한 소원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 나아졌다는 것이 확 인될 때까지 살고 싶은 것이다."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 엄청난 이유 때문에, 아무쪼록 나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찾아내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전도의 소원입니다. 바로 그 소원을 가 진 자에게는 그 소원의 성취를 위하여 큰 믿음의 은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찾기 원하는 자에게, 그 소원 성취에 따르는 큰 믿음과 큰 축복들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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