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마15:21-28)
본문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 지방의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마14:34) 말씀을 하실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세인과 서 기관들이 주님께 나아와 장로들의 유전으로 항의를 하는 일이 있은 후 에, 이방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셔서 복음을 전하시는 내용 이다. 복음은 유대인에게서 먼저 시작이 되어, 그들의 배척으로 이방인에게 넘어간다. 곧 복음은 받아들이는 자에게 복음이 되는 것이지, 배척하는 자에게는 오히려 심판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 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다. 바로 십자가의 도 곧 복음의 양면성을 말해 주고 있다.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 믿지 않고 배척하는 자에게는 걸려 넘어져 멸망 속에 빠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롬9:33). 주님의 두로와 시돈 지방 전도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파송을 받아 갈 릴리 게네사렛까지 쫓아온 바리세인과 서기관들, 곧 유대인의 배척으로 복음이 이방 땅으로 전파되어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은 언제나 유대인에게 먼저 증거 되어졌고, 유대인의 배척으로 복음이 이방으로 향하는 모습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똑같다. 사도 바울 역시 어디를 가던지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았고, 그들이 배척할 때 이방으로 향했다(행13:46). 주님의 두로와 시돈 지방 전도의 첫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이다. 한 가나안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 달라는 호소를 듣고, 주님이 고쳐 주시는 내용이다. 그 가나안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 이라고 했다(막7:26). 주님을 찾은 이방인 중에서 그들의 "믿음이 크도다"고 칭찬해 주신 두 사람이 있다. 오늘 본문의 가나안 여자와 백부장이다. 백부장은(마 8:5-13) 귀족층의 신분이요, 정복자의 위치에서 병든 신하를 위해 주를 찾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 여인은 서민층이요, 딸이 귀신들린 어려 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다. 복음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이가 없 이 모든 사람에게 문제의 해결을 주는 "구원의 능력"이다.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으로 오신 이를, 자기 땅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하였으나(요1:11) 오히려 이방 땅 사람인 가나안 여자가 알아보고, 주 를 찾아 만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달라 고 호소하고 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 도.하고 부르짖는 가나안 여인의 모습을 살펴 보고져 한다.
1.주님 앞에서 자신을 버렸다. 본문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다. 이 가나안 여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을 알고 있다. 그들이 이방 사람인 자신들을 개, 돼지 취급을 하 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하여서는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온갖 질병을 고치 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한다는 놀라운 소문. 바로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⑴.주 다윗의 자손이여 본문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 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 나이다"라고 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 말은 바로 메시아의 칭호이다(마12:23). 유대 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못했다. 단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마 13:55) 보았을 뿐이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눅24:16) 있는 것이다. 이 가나안 여자가 "메시아"를 알았겠는가. 메시아가 무엇인지도, 누 구인지도. 몰랐으리라. 다만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막7:25). 귀신들린 딸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찾아왔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일에 "예수를 알아야" 하는 조 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예수를 알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우리 가 한 평생 예수를 배워도 예수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⑵.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본문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했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 버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침묵을 깨시 고 하신 대답이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왔노라고 하신다. 다른 데로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신다. 바로 유대인의 선민 의식 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깊은 뜻은 그것이 아니다.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아서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집의 잃 어버린 양만을 위해 오셨다면 오늘 본문 말씀의 기록도, 이방의 구원도, 아니 우리 모두의 구원도 없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상태를 살펴 보고 계시는 것이다. 단순한 소원인가 그저 소문을 듣고 온 것인가 주 앞에서 얼마나 자신 을 버릴 수 있는가 살펴 보고 계신 것이다. 마태복음 16: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 라"고 했다. 참으로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주님 앞에 얼마나 자신을 버리느 냐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진정 자신의 주가 된다면. 그 주 앞에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느냐 바라보고 계 신 것이다.
⑶.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마태복음 15: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 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뒤에 멀리서 소리지르던 가나안 여자가 이제는 예수의 발 아래 엎드 려 절하며 간구하고 있다(막7:25). 자신을 버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 주님 보시기에는 부족한 모습이다. 아직도 주님은 더 자신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래서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져 줄 수 없다고 하신다. 결국 나올 것은 다 나왔다. 이방인인 자신들을 향하여 개, 돼지 취급하고 멸시하는 유대인들. 끝내는 자신을 개로 취급을 하고, 떡 하나 주는 것이 아 니라 던져 주는 것도 못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이다.
⑷.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본문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다. 자신을 향하여 개 취급을 하며, 주는 것이 아니라 던져 줄 수도 없다고 하시는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 "주여 옳소이다"로 응답을 하고 있다. 바로 자신은 개에 지나지 않는 다고 하는 고백이다. 그러나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 러기를 먹지 않느냐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참으로 귀신들린 딸자식을 위한 최선을 다하는 눈물겨운 모습을 지켜보 게 된다. 개 취급을 하는 주님에게 자존심을 다 버리고 개가 되어 주 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나누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의 해결자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있다. 기꺼이 개가 되어 부스러기라도. 원하고 있다. 바로 주님이 우리 성도들을 향하여 바라고 계시는 신앙 태도이다. 나 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이기고, 자 기의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신다.
2.자녀의 떡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 마가복음 7: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 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 은 것이 열 두 바구니가 되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는 주님이시다. 자녀에게 줄 떡이 모자라서 못 주겠노라고 하시겠는가. 자녀의 떡이 너무도 귀중해서 나 같은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시겠 지. 그 귀한 것 주시려 마시고, 먹고 남는 부스러기. 열 두 광주리 넘 게 거두시는 그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달라 고 이 가나안 여자는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6: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그렇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다. 주님 주시는 떡이 바로 "생명의 떡"이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요, 사람이 먹고 영생할 떡이다. 바로 이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주님의 살이라고 하셨다 (요6:51).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 같은 자신에게 감히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좀 달라는 것이다. 바로 백부장이 주님을 향하여 하는 고백이다. 마태복음 8:8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 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 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다만 말씀으로만 하옵 소서! 이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귀하신 주 님을 알아보는 믿음. 바로 주님의 칭찬 받는 믿음이다. 본문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 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주님이 들려주시는 칭찬이다. 선민 유대 인들도 듣지 못한 칭찬이요, 열 두 제자들도 듣지 못한 칭찬이다. 오히 려 그들은 "믿음이 없는 세대"로, "믿음이 적은 자야"로 불리웠다(마 8: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실 믿음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적은 자여"하고 꾸 짖으실 믿음일까요 우리 이 시간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3.최선을 다하는 간절함이 있다. 본문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다. 그 부스러기 하나를 얻기 위해 멀리서 부르짖다가 주님 발 아래 엎드 려 절하며 호소하였다. 더욱이 개 취급을 받고 있지만 딸자식을 위하여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달라고 구하고 있다. 이 가나안 여인의 가슴 속에는 참으로 간절함이 있다. 멀리서 부르짖 을때 돌려보내 버리라는 제자들의 냉대가 심하였고, 무관심한 듯 계속 되는 주님의 침묵. 웬만한 사람이면 벌써 뒤돌아 갔을 것이다. 주님의 침묵. 그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믿음의 시련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마음과는 달리. 무응답의 침묵은 기도할 힘마저 잃게 하는 시련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인간의 믿음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나 다 같은 믿음의 향상을 주지는 않는다. 쉬-낙심하는 자에게는 오히 려 믿음의 후퇴를 가져다 줄 뿐이다. 잠언 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 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다. 사람은 그 마음에 사모하는 바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그 간절함을 가지고 열심히 찾으면 만나게 된다고 한다. 바로 이 가나안 여인처럼 최선을 다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 응답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 마가복음 7: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 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오해의 감정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말씀이다. 못 준다면 그만이지 개라니.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고, 거세게 항의할 수 있는 말씀이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그러나 이 가나안 여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귀신들린 딸자식을 고 치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모든 멸시, 천대, 수욕을 참을 수 있었다. 아니,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주인의 개로서 자족 하였고, 자녀의 떡 한 덩어리가 아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 기라도. 만족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슴에도 주님을 향한 이토록 간절함 이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 앞에 우리들 자신의 자존 심을 송두리째 내어놓을 수 있을까. 주님을 위해 멸시 천대 십자가 를 내가 질 수 있을까. 나의 주님, 나사렛 예수, 그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아는 것으로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 믿어야 한다. 예수를 알아야.가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믿는다는 것은 곧 나를 내어 맡긴다는 말이다. 곧 주님 앞에 나를 내 어놓는 것이다. 내어놓고 나면 내 것은 없는 것이다. 주님 주시는 떡이, 그 생명의 떡이 너무 귀중하기에 나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그 부스러기라도 가질 수 있다면. 나를 버리고 개로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 가나안 여인의 마음이다. 이 가나안 여인의 간절함을 우리 성도들도 갖추어야 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에 이 가나안 여인 의 간절함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 봅시다. 너도나도 우리 모두 이런 간 절함을 주님을 바라는 가슴 속에 가지고 살아갑시다.
1.주님 앞에서 자신을 버렸다. 본문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다. 이 가나안 여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을 알고 있다. 그들이 이방 사람인 자신들을 개, 돼지 취급을 하 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하여서는 주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온갖 질병을 고치 고, 귀신을 쫓아내며,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한다는 놀라운 소문. 바로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⑴.주 다윗의 자손이여 본문 22절에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 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 나이다"라고 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 말은 바로 메시아의 칭호이다(마12:23). 유대 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보지 못했다. 단지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마 13:55) 보았을 뿐이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눅24:16) 있는 것이다. 이 가나안 여자가 "메시아"를 알았겠는가. 메시아가 무엇인지도, 누 구인지도. 몰랐으리라. 다만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막7:25). 귀신들린 딸을 고치려는 일념으로 찾아왔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는 일에 "예수를 알아야" 하는 조 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예수를 알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우리 가 한 평생 예수를 배워도 예수를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⑵.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본문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했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 버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침묵을 깨시 고 하신 대답이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왔노라고 하신다. 다른 데로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신다. 바로 유대인의 선민 의식 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깊은 뜻은 그것이 아니다.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않아서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집의 잃 어버린 양만을 위해 오셨다면 오늘 본문 말씀의 기록도, 이방의 구원도, 아니 우리 모두의 구원도 없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가나안 여인의 믿음의 상태를 살펴 보고 계시는 것이다. 단순한 소원인가 그저 소문을 듣고 온 것인가 주 앞에서 얼마나 자신 을 버릴 수 있는가 살펴 보고 계신 것이다. 마태복음 16:24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 라"고 했다. 참으로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주님 앞에 얼마나 자신을 버리느 냐를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진정 자신의 주가 된다면. 그 주 앞에 얼마나 자신을 부인하고 버리느냐 바라보고 계 신 것이다.
⑶.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짐이 마태복음 15:26절에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 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뒤에 멀리서 소리지르던 가나안 여자가 이제는 예수의 발 아래 엎드 려 절하며 간구하고 있다(막7:25). 자신을 버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 주님 보시기에는 부족한 모습이다. 아직도 주님은 더 자신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그래서 자녀의 떡을 개에게 던져 줄 수 없다고 하신다. 결국 나올 것은 다 나왔다. 이방인인 자신들을 향하여 개, 돼지 취급하고 멸시하는 유대인들. 끝내는 자신을 개로 취급을 하고, 떡 하나 주는 것이 아 니라 던져 주는 것도 못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이다.
⑷.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본문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주님 앞에 내려놓았다. 자신을 향하여 개 취급을 하며, 주는 것이 아니라 던져 줄 수도 없다고 하시는 주님 앞에 자신을 완전히 버렸다. "주여 옳소이다"로 응답을 하고 있다. 바로 자신은 개에 지나지 않는 다고 하는 고백이다. 그러나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 러기를 먹지 않느냐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참으로 귀신들린 딸자식을 위한 최선을 다하는 눈물겨운 모습을 지켜보 게 된다. 개 취급을 하는 주님에게 자존심을 다 버리고 개가 되어 주 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나누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의 해결자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버리고 있다. 기꺼이 개가 되어 부스러기라도. 원하고 있다. 바로 주님이 우리 성도들을 향하여 바라고 계시는 신앙 태도이다. 나 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이기고, 자 기의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하신다.
2.자녀의 떡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 마가복음 7: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 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모 은 것이 열 두 바구니가 되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는 주님이시다. 자녀에게 줄 떡이 모자라서 못 주겠노라고 하시겠는가. 자녀의 떡이 너무도 귀중해서 나 같은 개들에게 줄 수 없다고 하시겠 지. 그 귀한 것 주시려 마시고, 먹고 남는 부스러기. 열 두 광주리 넘 게 거두시는 그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달라 고 이 가나안 여자는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6: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그렇다. 주님이 주시는 떡은 그만큼 귀중한 것이다. 주님 주시는 떡이 바로 "생명의 떡"이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요, 사람이 먹고 영생할 떡이다. 바로 이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주님의 살이라고 하셨다 (요6:51).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 같은 자신에게 감히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좀 달라는 것이다. 바로 백부장이 주님을 향하여 하는 고백이다. 마태복음 8:8절에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 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 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다만 말씀으로만 하옵 소서! 이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자신의 비천함을 알고, 귀하신 주 님을 알아보는 믿음. 바로 주님의 칭찬 받는 믿음이다. 본문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 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주님이 들려주시는 칭찬이다. 선민 유대 인들도 듣지 못한 칭찬이요, 열 두 제자들도 듣지 못한 칭찬이다. 오히 려 그들은 "믿음이 없는 세대"로, "믿음이 적은 자야"로 불리웠다(마 8: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실 믿음일까요 아니면 "믿음이 적은 자여"하고 꾸 짖으실 믿음일까요 우리 이 시간 한 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3.최선을 다하는 간절함이 있다. 본문 27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했다. 그 부스러기 하나를 얻기 위해 멀리서 부르짖다가 주님 발 아래 엎드 려 절하며 호소하였다. 더욱이 개 취급을 받고 있지만 딸자식을 위하여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달라고 구하고 있다. 이 가나안 여인의 가슴 속에는 참으로 간절함이 있다. 멀리서 부르짖 을때 돌려보내 버리라는 제자들의 냉대가 심하였고, 무관심한 듯 계속 되는 주님의 침묵. 웬만한 사람이면 벌써 뒤돌아 갔을 것이다. 주님의 침묵. 그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믿음의 시련이다. 절박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마음과는 달리. 무응답의 침묵은 기도할 힘마저 잃게 하는 시련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인간의 믿음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나 다 같은 믿음의 향상을 주지는 않는다. 쉬-낙심하는 자에게는 오히 려 믿음의 후퇴를 가져다 줄 뿐이다. 잠언 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 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다. 사람은 그 마음에 사모하는 바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그 간절함을 가지고 열심히 찾으면 만나게 된다고 한다. 바로 이 가나안 여인처럼 최선을 다하는 간절함이 있을 때 응답의 주님을 만나게 된다. 마가복음 7: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 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오해의 감정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말씀이다. 못 준다면 그만이지 개라니. 얼마든지 불평할 수 있고, 거세게 항의할 수 있는 말씀이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그러나 이 가나안 여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귀신들린 딸자식을 고 치려는 간절함이 있었기에 모든 멸시, 천대, 수욕을 참을 수 있었다. 아니, 부스러기라도 얻을 수 있다면. 오히려 주인의 개로서 자족 하였고, 자녀의 떡 한 덩어리가 아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 기라도. 만족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슴에도 주님을 향한 이토록 간절함 이 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 앞에 우리들 자신의 자존 심을 송두리째 내어놓을 수 있을까. 주님을 위해 멸시 천대 십자가 를 내가 질 수 있을까. 나의 주님, 나사렛 예수, 그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아는 것으로 구원을 얻지는 못한다. 믿어야 한다. 예수를 알아야.가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 믿는다는 것은 곧 나를 내어 맡긴다는 말이다. 곧 주님 앞에 나를 내 어놓는 것이다. 내어놓고 나면 내 것은 없는 것이다. 주님 주시는 떡이, 그 생명의 떡이 너무 귀중하기에 나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그 부스러기라도 가질 수 있다면. 나를 버리고 개로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 가나안 여인의 마음이다. 이 가나안 여인의 간절함을 우리 성도들도 갖추어야 하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는 나의 눈길에 이 가나안 여인 의 간절함이 담겨 있는지를 살펴 봅시다. 너도나도 우리 모두 이런 간 절함을 주님을 바라는 가슴 속에 가지고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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