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가는 삶 (마14:13)
본문
저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도망치듯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로 작정하고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헤롯의 박해를 두려울 리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곁에 계셔야 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계셔야 복음을 전할 보다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으로부터 도망칠 이유가 없었고, 사람들 곁을 피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사람들 곁을 떠나 홀로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을 홀로 계셨습니다. 또 12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홀로 산에서 하루 밤을 보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5천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앞서 보내시고, 무리를 떠나 산에 올라가셨고 그 산에서 혼자 밤을 새셨습니다. 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의 고요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예들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홀로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규칙적인 습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습관은 공생애 3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계시기가 힘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작은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살펴보면 204개의 마을이 있었고, 인구는 2000년 전이 그 당시에 15000명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놀라운 이적으로, 능력 있는 말씀으로 이 지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누구나 그 이적을 보고 싶어했고, 그 말씀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홀로 있고 싶어도 홀로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한번은 개그맨 이홍렬씨를 만났습니다. 열심히 교회 출석하기에 몇 가지 논의해야 할 것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어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창이 길게 늘어진 모자를 쓰고 왔더라구요. 부탁을 거절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를 조용히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기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중에 강단은 보지 않고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는 것입니다. "이홍렬이다. 이홍렬이다" 눈감고 기도하다보면 영락없이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기도 힘들고 더더욱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홀로 있기가 어렵게 된 예수님은 틈만 나면 사람들 곁을 떠나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산이 됐든, 광야가 됐든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으셨습니다.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있으라고 권하셨습니다. 막6:31에 보면 12제자가 복음 전파와 병 고치는 사역을 하고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한적한 곳에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있으라고 명하십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을 뒤로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명하십니다.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단하고 잠시 홀로 있어보라고 명하십니다. 왜 홀로 있어야 하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홀로 계시려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참 분주한 삶을 사셨습니다. 많은 이적을 베푸셨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고, 많은 사건에 휘말리셨습니다. 그래서 늘 지치고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오늘 현대인의 삶은 한마디로 바쁘고 분주한 삶이라 규정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좀 오래된 통계입니다만 90년대 초 국제 노동기구(ILO)가 조사한 60개국의 노동 시간을 대비(對比)해 놓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가장 일 많이 하는 나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평균 주 50시간 노동을 하고 있답니다. 참고로 영국, 프랑스, 스위스와 같은 유럽 국가들은 40-43시간 일을 한답니다. 미국, 일본, 뉴질랜드와 같은 환태평양 국가들은 38-39시간, 심지어 덴마크와 같은 북구 복지국가들은 32시간 안팎의 노동을 한답니다. 모두가 지쳐있습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인들대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들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쉴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럽니다. "나는 실직 당했기 때문에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매일 쉬는데 뭐 또 쉴 필요가 있습니까" 요즘처럼 경제위기시대에 실직자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자리를 빼앗긴 억울함, 경제적인 고통, 미래에 대한 불안. 할 일이 없다고 쉬는 것입니까 더 힘들고, 더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쉬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마디로 '내적 홀로 있기'입니다. 생각이, 마음이, 정신이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가정 일, 직장 일,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인간 관계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근심, 걱정, 불안, 염려로부터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내적 홀로 있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저 혼자 있다고 다 내적 홀로 있기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서도 뭔가 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적 홀로 있기가 아닙니다. 또한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서도 마음이 바쁘고 늘 쫓깁니다. 내일 누구를 만나야 하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고, 남들보다 먼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고. 100미터 출발선에 서 있는 운동선수들처럼 늘 긴장하고 살아갑니다. 내적 홀로 있기란 그 무엇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여유로운 마음, 편안한 마음, 한가한 마음을 갖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바로 내적 홀로 있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엔가 쫓겨 사는 사람들은 경건을 맛보거나 누릴 수가 없습니다. 경건은 진정한 쉼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둘째, 조용함을 누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참 많은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철없는 소리, 군중들의 구원해 달라는 아우성 소리,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소리. 예수님 주변에는 늘 시끄러운 소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끄러운 소음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데 여간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왜곡시킵니다. 차분하게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소음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한 밤중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면 낯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립니다. 귀뚜라미 소리도 들립니다. 아랫마을 개 짓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낮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들입니다. 주변의 소음이 이런 소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한 밤중에 하늘을 쳐다보면 달빛이 곱고 별빛이 영롱합니다. 이름 모를 별들이 하늘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낮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태양 빛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적한 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 주변의 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이 이야기,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 친구와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중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소음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몇 년 됐습니다만 청년 대학생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간 일이 있습니다. 주제를 "경건의 훈련"이라 내 걸었습니다. 여러 가지 경건의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강제 규정을 정했습니다. 하나는 누구도 시계를 차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진행하는 저만 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공식적으로 허락 받은 시간외에는 그 누구와도 말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날은 모두가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늘 시간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따라 생활하다가 시간을 모르니까 갑갑해서 어절 줄 몰라했습니다. 입이 간지러워 자기도 모르게 말하다가 벌을 받곤 했습니다.
셋째 날쯤 되니까 달라졌습니다. 이 규율에 익숙해 졌습니다. 진행자가 식사시간이라고 하면 밥을 먹고, 취침시간이라면 잠을 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게 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말을 하지 않으니까 수련회 전체가 고요했습니다. 기도도 묵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주로 QT를 많이 했는데 그 내용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폐회 예배를 드리면서 소감을 적어내도록 했습니다. 한결같이 침묵의 능력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세밀하게 들었던 적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바로 침묵의 소산입니다. 고요함 속에 우리의 경건이 싹이 틉니다. 시끄러운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늘 말많은 곳에 사는 사람 결코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맛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고요함이 만들어 내는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셋째,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중요한 시기 때마다 어김없이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의 만남 사건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실 때 늘 홀로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 데이트할 때 곁에 끼어 드는 것처럼 얄미운 것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끼어 들어서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빼앗는다면 이것은 주책입니다. 두 사람이 단 둘이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겠다고 끼어 들면 이 또한 주책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데이트하면서 나누는 대화는 두 사람만의 대화여야 합니다. 연인이 데이트하면서 남북 통일문제로 토론하지는 않습니다. 21세기 세계평화 문제로 열변을 토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만 알아야 하는 이야기, 두 사람과 관계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하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남들이 알아서는 않될 은밀한 죄까지도 다 남김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내 문제, 내 상황, 내 형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기도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과의 단둘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진정한 기도가 만들어 내는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어떻게 홀로 있을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내적 홀로 있기를 이룰 수 있습니까
첫째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심약한 사람들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합니다. 새로 전학 온 아이들은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며 웁니다.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간 가정 주부는 무료함을 달라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사람들은 홀로 있기가 두려워 친구에게 전화하고, 어떤 일을 만들어냅니다. 소음 속으로, 어떤 사건 속으로 자기를 몰아 넣습니다. 우리가 홀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둘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참 평안과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둘째로, 하루 일과 중에 홀로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에,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도중에, 5분이든 10분이든 짬을 내서 홀로 있기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잠시 라디오를 끄고, 텔레비전을 끄고, 책이나 신문을 내려놓고 홀로 있기를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특별한 홀로 있기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교회에 오는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혼자 등산을 간다든지, 여행을 한다든지 홀로 있기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혼자 기도원에 며칠 다녀오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일년에 몇 차례 특별한 홀로 있기 기회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우리는 혼자입니다. 이 땅에 올 때 혼자 왔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날 때 혼자 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은 홀로 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홀로 있기는 홀로 가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특권이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이 홀로 있기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아름답게 다듬어집니다. 우리의 경건이 더욱 숙성되어갑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곁에 계셔야 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계셔야 복음을 전할 보다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으로부터 도망칠 이유가 없었고, 사람들 곁을 피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사람들 곁을 떠나 홀로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을 홀로 계셨습니다. 또 12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홀로 산에서 하루 밤을 보내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5천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앞서 보내시고, 무리를 떠나 산에 올라가셨고 그 산에서 혼자 밤을 새셨습니다. 한 문둥병자를 고치신 후에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의 고요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예들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홀로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규칙적인 습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습관은 공생애 3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계시기가 힘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는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작은 지방이었습니다. 당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살펴보면 204개의 마을이 있었고, 인구는 2000년 전이 그 당시에 15000명이 넘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놀라운 이적으로, 능력 있는 말씀으로 이 지방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누구나 그 이적을 보고 싶어했고, 그 말씀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홀로 있고 싶어도 홀로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한번은 개그맨 이홍렬씨를 만났습니다. 열심히 교회 출석하기에 몇 가지 논의해야 할 것도 있고, 부탁할 것도 있어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창이 길게 늘어진 모자를 쓰고 왔더라구요. 부탁을 거절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를 조용히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기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옆에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중에 강단은 보지 않고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는 것입니다. "이홍렬이다. 이홍렬이다" 눈감고 기도하다보면 영락없이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기도 힘들고 더더욱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홀로 있기가 어렵게 된 예수님은 틈만 나면 사람들 곁을 떠나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산이 됐든, 광야가 됐든 사람들이 없는 곳을 찾으셨습니다.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있으라고 권하셨습니다. 막6:31에 보면 12제자가 복음 전파와 병 고치는 사역을 하고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너희는 한적한 곳에 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있으라고 명하십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을 뒤로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라고 명하십니다. 그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중단하고 잠시 홀로 있어보라고 명하십니다. 왜 홀로 있어야 하는가 그러면 예수님께서 홀로 계시려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참 분주한 삶을 사셨습니다. 많은 이적을 베푸셨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고, 많은 사건에 휘말리셨습니다. 그래서 늘 지치고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오늘 현대인의 삶은 한마디로 바쁘고 분주한 삶이라 규정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 사람들은 격무에 시달리고 있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좀 오래된 통계입니다만 90년대 초 국제 노동기구(ILO)가 조사한 60개국의 노동 시간을 대비(對比)해 놓은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가장 일 많이 하는 나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평균 주 50시간 노동을 하고 있답니다. 참고로 영국, 프랑스, 스위스와 같은 유럽 국가들은 40-43시간 일을 한답니다. 미국, 일본, 뉴질랜드와 같은 환태평양 국가들은 38-39시간, 심지어 덴마크와 같은 북구 복지국가들은 32시간 안팎의 노동을 한답니다. 모두가 지쳐있습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인들대로, 가정주부는 가정주부들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격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쉴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럽니다. "나는 실직 당했기 때문에 할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매일 쉬는데 뭐 또 쉴 필요가 있습니까" 요즘처럼 경제위기시대에 실직자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일자리를 빼앗긴 억울함, 경제적인 고통, 미래에 대한 불안. 할 일이 없다고 쉬는 것입니까 더 힘들고, 더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쉬어야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의미에서 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한마디로 '내적 홀로 있기'입니다. 생각이, 마음이, 정신이 자유로운 상태를 말합니다. 가정 일, 직장 일,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모든 인간 관계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합니다. 근심, 걱정, 불안, 염려로부터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내적 홀로 있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저 혼자 있다고 다 내적 홀로 있기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서도 뭔가 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무엇인가 골똘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내적 홀로 있기가 아닙니다. 또한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서도 마음이 바쁘고 늘 쫓깁니다. 내일 누구를 만나야 하고,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고, 남들보다 먼저 무엇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고. 100미터 출발선에 서 있는 운동선수들처럼 늘 긴장하고 살아갑니다. 내적 홀로 있기란 그 무엇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벗어나 있는 상태입니다. 여유로운 마음, 편안한 마음, 한가한 마음을 갖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바로 내적 홀로 있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무엇엔가 쫓겨 사는 사람들은 경건을 맛보거나 누릴 수가 없습니다. 경건은 진정한 쉼을 아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둘째, 조용함을 누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참 많은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철없는 소리, 군중들의 구원해 달라는 아우성 소리,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소리. 예수님 주변에는 늘 시끄러운 소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끄러운 소음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데 여간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가로막습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왜곡시킵니다. 차분하게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소음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셨습니다. 그래서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한 밤중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면 낯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저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립니다. 귀뚜라미 소리도 들립니다. 아랫마을 개 짓는 소리도 들려옵니다. 낮에는 전혀 들리지 않던 소리들입니다. 주변의 소음이 이런 소리를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한 밤중에 하늘을 쳐다보면 달빛이 곱고 별빛이 영롱합니다. 이름 모를 별들이 하늘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낮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태양 빛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적한 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 주변의 소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아이들이 이야기,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 친구와 직장 동료들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도 중단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소음으로부터도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몇 년 됐습니다만 청년 대학생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간 일이 있습니다. 주제를 "경건의 훈련"이라 내 걸었습니다. 여러 가지 경건의 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강제 규정을 정했습니다. 하나는 누구도 시계를 차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진행하는 저만 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공식적으로 허락 받은 시간외에는 그 누구와도 말해서는 않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날은 모두가 견디기 어려워했습니다. 늘 시간을 염두에 두고 시간을 따라 생활하다가 시간을 모르니까 갑갑해서 어절 줄 몰라했습니다. 입이 간지러워 자기도 모르게 말하다가 벌을 받곤 했습니다.
셋째 날쯤 되니까 달라졌습니다. 이 규율에 익숙해 졌습니다. 진행자가 식사시간이라고 하면 밥을 먹고, 취침시간이라면 잠을 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게 됐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말을 하지 않으니까 수련회 전체가 고요했습니다. 기도도 묵상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주로 QT를 많이 했는데 그 내용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폐회 예배를 드리면서 소감을 적어내도록 했습니다. 한결같이 침묵의 능력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적이 없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세밀하게 들었던 적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바로 침묵의 소산입니다. 고요함 속에 우리의 경건이 싹이 틉니다. 시끄러운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늘 말많은 곳에 사는 사람 결코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맛보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고요함이 만들어 내는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셋째, 기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중요한 시기 때마다 어김없이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셨던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의 만남 사건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실 때 늘 홀로 하나님 앞에 서셨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 데이트할 때 곁에 끼어 드는 것처럼 얄미운 것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진지하게 대화하고 있는데 끼어 들어서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빼앗는다면 이것은 주책입니다. 두 사람이 단 둘이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겠다고 끼어 들면 이 또한 주책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데이트하면서 나누는 대화는 두 사람만의 대화여야 합니다. 연인이 데이트하면서 남북 통일문제로 토론하지는 않습니다. 21세기 세계평화 문제로 열변을 토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만 알아야 하는 이야기, 두 사람과 관계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하나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하나님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남들이 알아서는 않될 은밀한 죄까지도 다 남김없이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내 문제, 내 상황, 내 형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기도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과의 단둘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진정한 기도가 만들어 내는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어떻게 홀로 있을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내적 홀로 있기를 이룰 수 있습니까
첫째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심약한 사람들은 홀로 있기를 두려워합니다. 새로 전학 온 아이들은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며 웁니다.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간 가정 주부는 무료함을 달라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사람들은 홀로 있기가 두려워 친구에게 전화하고, 어떤 일을 만들어냅니다. 소음 속으로, 어떤 사건 속으로 자기를 몰아 넣습니다. 우리가 홀로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둘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여시기를 바랍니다. 결코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참 평안과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둘째로, 하루 일과 중에 홀로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침에 잠자리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에,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 도중에, 5분이든 10분이든 짬을 내서 홀로 있기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잠시 라디오를 끄고, 텔레비전을 끄고, 책이나 신문을 내려놓고 홀로 있기를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특별한 홀로 있기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교회에 오는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혼자 등산을 간다든지, 여행을 한다든지 홀로 있기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또한 혼자 기도원에 며칠 다녀오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일년에 몇 차례 특별한 홀로 있기 기회를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우리는 혼자입니다. 이 땅에 올 때 혼자 왔습니다. 그리고 이 땅을 떠날 때 혼자 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은 홀로 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홀로 있기는 홀로 가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특권이요, 가장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이 홀로 있기 안에서 우리의 신앙이 아름답게 다듬어집니다. 우리의 경건이 더욱 숙성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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