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할 때 도움을 주시는 주님 (마14:22-33)
본문
지금부터 여러해 전, 미국의 아폴로 13호가 달나라를 향해서 발사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지구로부터 약 2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아폴로 13호에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비행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소통이 그만 깨져 버린 것입니다. 우주선은 더 이상 비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본부인 휴스턴을 향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지휘 본부에서는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방향을 잡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희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때, 가장 절망스러운 때 전 미국 국민은 고장난 캡슐을 몰고 오는 우주인들을 위해서 오전 9시를 기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과학적 산물인 우주선이 고장났을 때에 사람을 믿고 의지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 국민이 합심하여 기도를 한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얼마 후에 고장난 아폴로 13호는 태평양에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미 해군 함정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구에 귀환해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해군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Thank God. Praise the Lord!)"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주간 타임지 표지에 그들의 기도하는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우리의 사람의 표준이 되는 성경말씀의 주제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복이라는 말입니다. 복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 22절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 계시록 22장 14절에 마지막으로 나오게 되는데 성경에 무려 635회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1장 반에ㅔ 하나씩 나온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말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391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 그리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시고 계시는가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홍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밥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물위를 걷는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잘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4장 1절 말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 당시 유대 분봉왕인 헤롯 안티바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장면은 얼마 전 세례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목베임을 당한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불을 뽑는 것과 같은 음성으로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 왕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합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이 일로 인해서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교활한 여자 헤로디아에 의해서 목베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이 죽임을 당하는 가장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두울 때, 위기의 상황 때 역설적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참된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에 의하면,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향하신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리가 아니라 빈들이었습니다. 황량한 바람소리와 억새풀과 잡초만이 무성한 빈들, 보통 사람들은 다 외면하는 광야길로 우리 주님은 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 사역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있는 자 보다는 없는 자를 보셨습니다. 웃는 자보다 우는 자, 마음이 상한 자를 바라보셨습니다. 배부른 자보다는 배고픈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벧세다 광양에서 사상 초유의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빈들에서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적을 행하신 이후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겸손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베푸신 후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다른 곳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군중들도 재빨리 해산시키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시기 위해서 홀로 산으로 가십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진정한 인생의 멋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인기 얻는 것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실천하시면서, 항상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운데 사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정수를 보여주는 산상수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잘 보일려고 애쓰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익명적으로 헌신, 봉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그대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리들을 다 보내시고, 자신은 홀로 뭍에 계시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경릉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오늘 본문 말씀과 병행을 이루는 마가복음 6장 47절 이하의 말씀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이 오늘 본문의 광경을 아주 생생하게 잘 그려놓고 있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젖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면서 보니까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서 큰 풍랑을 맞고 있었습니다. 바다 가운데서 이제 돌아올 수도 없었고, 더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전퇴양난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었다지만 거세게 부는 풍랑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우리 주님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괴롭게 노젓는 광경을 바라보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종요히 기도만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멈추시고, 오늘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행하신 기적은 오직 한가지 제자들을 뜨겁게 사랑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것도 시급하게 해결하시기 위해서 비상수단으로 바다 위를 걸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평상시에 우리 주님은 바다 위로 걸어 다니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다 길을 가실 때는 정상적으로 배를 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시간입니다. 위기상황입니다. 밤 4경, 그러니까 우리들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입니다. 배도 없고, 사공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지금 엄청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주님은 고난중에 있는 제자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물위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적의 참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적은 우리들에게 구경거리를 주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적의 동기는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기적을 잉태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기적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제자들을 안전하게 구원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점쟁이 노릇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 합격하겠소. 이 사업을 하면 잘 되겠소. 그리고 돈벌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치료하고 돈받는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로 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초하지 않은 사역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행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본문 28절 이하의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기적을 요구하는 기본자세가 우리 주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베드로는 영웅심리로,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올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호기심과 허영심으로 그는 바다 위를 걷고자 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이것은 아주 불신앙적인 말이요, 주님을 시험한 말입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우리 주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베드로는 우리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까지도 우리 주님은 받아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바다 위로 걸어오라 명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도 우리 주님과 같이 바다 위를 걷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마나 의기 양양 했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몇 발자국 못 걷고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능력이 아니면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더 크게 실족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큰 은사를 받은 사람, 고도의 윤리서이 요구됩니다. 말과 행실이 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헤아리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은사이지,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것,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하나님의 영과을 가리는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사탄의 도구로 전락되는 것을 결코 그 어떤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호하게 배격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내게 절하라. 훗날 성령님이 충만한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낫게 하고서 베드로는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32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의 기적의 마무리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참된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적 가운데 가장 우리의 마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 2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오늘 기적의 중심 메시지는 바로 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어떠한 절망적 상황이라 할지라도 내가 있으니까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그런데 주님의 이 사랑스러운 음성은 오늘 우리들을 행해서도 큰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저는 오늘도 주님의 이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주일에 사랑하는 귀한 장로님을 잃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복음교회를 사랑하셨던 차장로님! 교회 곳곳에 그 분의 헌신과 봉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분의 피와 땀과 눈물이 오늘의 복음교회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염려합니다. 그 분이 들어가시면 복음교회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목포의 많은 교계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관심 있게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마십시오. 안심하십시오. 우리의 미래는 오직 우리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우리 하나님은 이삭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예비하셨습니다. 다윗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솔로몬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자신을 대신할 사도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와 정성으로 오늘까지 이어온 복음교회는 앞으로도 우리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책임져 주질 것입니다. "다리가 없는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구두에 대한 불평이 없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로버트 E.브루스가 하루는 번잡한 거리에서 힘차면서도 달콤한 노랫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휠체어를 타고 주위를 돌아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부르스는 노래하는 사람에게 다리가 없는 것을 알고서 그의 태도를 칭찬하고 당신의 이런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의 태도를 칭찬하고 당신의 이런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애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남겨진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기쁘고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위태한 때, 고통스러울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을 우리 주님은 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지구로부터 약 2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아폴로 13호에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비행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산소통이 그만 깨져 버린 것입니다. 우주선은 더 이상 비행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본부인 휴스턴을 향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지휘 본부에서는 북극성을 바라보면서 방향을 잡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희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때, 가장 절망스러운 때 전 미국 국민은 고장난 캡슐을 몰고 오는 우주인들을 위해서 오전 9시를 기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과학적 산물인 우주선이 고장났을 때에 사람을 믿고 의지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 국민이 합심하여 기도를 한 것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얼마 후에 고장난 아폴로 13호는 태평양에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미 해군 함정에 의해 구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구에 귀환해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해군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Thank God. Praise the Lord!)"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주간 타임지 표지에 그들의 기도하는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 우리의 사람의 표준이 되는 성경말씀의 주제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그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복이라는 말입니다. 복이라는 말은 창세기 1장 22절에서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 계시록 22장 14절에 마지막으로 나오게 되는데 성경에 무려 635회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 1장 반에ㅔ 하나씩 나온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말은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391회나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 그리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최선을 다하시고 계시는가 말입니다. 그러기에 시편기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홍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밥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물위를 걷는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잘보여준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태복음 14장 1절 말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 당시 유대 분봉왕인 헤롯 안티바스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죽은 세례요한이 살아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장면은 얼마 전 세례요한이 헤롯에 의해서 목베임을 당한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불을 뽑는 것과 같은 음성으로 동생의 아내를 취한 헤롯 왕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합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이 일로 인해서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교활한 여자 헤로디아에 의해서 목베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공생애는 세례요한이 죽임을 당하는 가장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두울 때, 위기의 상황 때 역설적으로 시작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참된 존재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에 의하면, 세례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향하신 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리가 아니라 빈들이었습니다. 황량한 바람소리와 억새풀과 잡초만이 무성한 빈들, 보통 사람들은 다 외면하는 광야길로 우리 주님은 가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관심이 어디 있는가 사역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있는 자 보다는 없는 자를 보셨습니다. 웃는 자보다 우는 자, 마음이 상한 자를 바라보셨습니다. 배부른 자보다는 배고픈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벧세다 광양에서 사상 초유의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빈들에서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적을 행하신 이후 우리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겸손하십니까 우리 주님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베푸신 후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다른 곳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군중들도 재빨리 해산시키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하시기 위해서 홀로 산으로 가십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진정한 인생의 멋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에게 인기 얻는 것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실천하시면서, 항상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운데 사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정수를 보여주는 산상수훈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잘 보일려고 애쓰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만을 생각하면서 익명적으로 헌신, 봉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자신이 가르치신 그대로 사셨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무리들을 다 보내시고, 자신은 홀로 뭍에 계시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에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경릉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오늘 본문 말씀과 병행을 이루는 마가복음 6장 47절 이하의 말씀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이 오늘 본문의 광경을 아주 생생하게 잘 그려놓고 있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젖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우리 주님께서 기도하시면서 보니까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서 큰 풍랑을 맞고 있었습니다. 바다 가운데서 이제 돌아올 수도 없었고, 더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전퇴양난입니다. 물론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었다지만 거세게 부는 풍랑 앞에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만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순간 우리 주님의 눈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으셨습니다. 제자들이 괴롭게 노젓는 광경을 바라보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종요히 기도만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멈추시고, 오늘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 행하신 기적은 오직 한가지 제자들을 뜨겁게 사랑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지금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그것도 시급하게 해결하시기 위해서 비상수단으로 바다 위를 걸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사실, 평상시에 우리 주님은 바다 위로 걸어 다니시지 않으셨습니다. 바다 길을 가실 때는 정상적으로 배를 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비상시간입니다. 위기상황입니다. 밤 4경, 그러니까 우리들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는 시간입니다. 배도 없고, 사공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지금 엄청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주님은 고난중에 있는 제자들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물위로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적의 참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기적은 우리들에게 구경거리를 주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적의 동기는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기적을 잉태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기적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에게 관심이 있었고, 제자들을 안전하게 구원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소위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하는 일이라고는 점쟁이 노릇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 합격하겠소. 이 사업을 하면 잘 되겠소. 그리고 돈벌이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것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치료하고 돈받는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로 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초하지 않은 사역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엄청난 기적을 행한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본문 28절 이하의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오. 기적을 요구하는 기본자세가 우리 주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베드로는 영웅심리로, 자기의 힘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고자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바다 위를 걸어올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호기심과 허영심으로 그는 바다 위를 걷고자 했습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이것은 아주 불신앙적인 말이요, 주님을 시험한 말입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우리 주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 아닙니까 베드로는 우리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기적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까지도 우리 주님은 받아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바다 위로 걸어오라 명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도 우리 주님과 같이 바다 위를 걷게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마나 의기 양양 했겠습니까 그러자 그는 몇 발자국 못 걷고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습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능력이 아니면 오히려 그 능력 때문에 더 크게 실족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큰 은사를 받은 사람, 고도의 윤리서이 요구됩니다. 말과 행실이 덕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헤아리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은사이지,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것,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 하나님의 영과을 가리는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사탄의 도구로 전락되는 것을 결코 그 어떤 기적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단호하게 배격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 내려라. 내게 절하라. 훗날 성령님이 충만한 베드로의 모습은 어떠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낫게 하고서 베드로는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32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의 기적의 마무리는 항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끝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의 참된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기적 가운데 가장 우리의 마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문 2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오늘 기적의 중심 메시지는 바로 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이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너희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더라도,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어떠한 절망적 상황이라 할지라도 내가 있으니까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그런데 주님의 이 사랑스러운 음성은 오늘 우리들을 행해서도 큰 소리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저는 오늘도 주님의 이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항상 평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주일에 사랑하는 귀한 장로님을 잃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복음교회를 사랑하셨던 차장로님! 교회 곳곳에 그 분의 헌신과 봉사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분의 피와 땀과 눈물이 오늘의 복음교회를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염려합니다. 그 분이 들어가시면 복음교회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목포의 많은 교계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관심 있게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마십시오. 안심하십시오. 우리의 미래는 오직 우리 주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던 우리 하나님은 이삭을 예비하셨습니다. 모세를 부르셨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예비하셨습니다. 다윗을 부르셨던 하나님은 솔로몬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자신을 대신할 사도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기도와 정성으로 오늘까지 이어온 복음교회는 앞으로도 우리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인도하시며, 책임져 주질 것입니다. "다리가 없는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구두에 대한 불평이 없어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던 로버트 E.브루스가 하루는 번잡한 거리에서 힘차면서도 달콤한 노랫소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휠체어를 타고 주위를 돌아 다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부르스는 노래하는 사람에게 다리가 없는 것을 알고서 그의 태도를 칭찬하고 당신의 이런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다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의 태도를 칭찬하고 당신의 이런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장애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남겨진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을 때 다시 기쁘고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어려울 때, 위태한 때, 고통스러울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을 우리 주님은 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의 현장에 찾아 오셔서 위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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