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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쉼 터 (마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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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남향을 좋아했습니다.남향 집이라야 볕이 잘 들고 살기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향(向)보다는 입지 환경을 중시하고 있습니다.그래서 공원을 끼고 있는 집이라든지 호수나 바닷가에 있는 집은 평지에 있는 집보다 몇 곱절 비싸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창문 하나로 호수가 보이는 집과 여러 개의 창문으로 호수가 보이는 집의 값이 다릅니다.같은 호수가에 있는 집이라도 호수가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에 따라 집 값에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자연 경관에 대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정원을 만들고 분수를 만들고 나무를 심는 이유는 생활 공간 속에 휴식 공간을 만들어 보려는 욕구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곁에 있는 미8군 주둔지가 공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촌동은 서울에서 가장 멋지고 값 비싼 동네가 될 것입니다. 서울 대학교 환경 대학원의 김정욱 교수는 “인류를 파멸로 몰아 넣을 핵 무기의 공포가 아니더라도 오존 층의 파괴 때문에 지구는 종말을 맞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지난 10년간 남극 상공에서 절반에 달하는 오존 층이 파괴되었고 칠레 상공에서는 4분의 1이 얇아졌는데,그 이유는 인간들이 버리고 있는 불순 화합물과 각종 대기 오염 물질 그리고 성층권을 비행하는 군사용 초음속 비행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대로 간다면 지구의 기온이 평균 10도 정도가 올라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빙하가 다 녹을 것이고 바다의 수면이 60미터가 높아질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경지와 인간의 거주지가 바다에 잠기에 될 것이며 급격한 기온의 변화로 인하여 무엇이 살아 남을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작년 여름 2박3일 예정으로 가족과 함께 캠핑을 다녀온 어느 교인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처음엔 동해안으로 갔었는데 가 보니 바닷가에 천막을 칠 수가 없더랍니다.
이유는 너무나 사람이 많고 군데군데 오물 더미가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리를 옮겨 설악산 쪽으로 들어가 텐트 칠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답니다.애들이 저기가 좋을 것 같다고 해서 가 보면 오물 냄새가 코를 찌르고 괜찮다 싶은 곳엔 사람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답니다.또한가하다 싶은 곳엘 가 보면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마을로 내려가 민박으로 캠핑 계획을 바꾸었다는 얘기였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윤기가 흐르고 활력이 넘치는 정도의 차이로도 구분됩니다만,그러나 환경 관리의 능력으로도 구분된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합니다. 선진국일수록 자연을 아끼고 보존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갑니다.그래서 선진국일수록 쉴 곳이 많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아름답게 좋게 창조하셨습니다.그 사실을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표현했습니다.그러나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게 됨으로 저주를 받게 되었고 땅 역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는 것은 토질의 변화와 식물 성장의 이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있는 곳은 인간이 쉴 곳이 못 됩니다. 결국 인간은 죄로 인해 영원히 쉴 수 있는 하나님의 품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인 세상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밀턴의 대서사시 실낙원은 쉼 터를 잃어버린 인간의 고뇌를 밝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겐 쉴 곳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쉴 곳을 찾아 쉬어야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음악에도 쉼표가 있습니다.쉼표를 따라 반 박자나 한 박자 혹은 두 박자를 쉬게 됩니다.쉬지 않고 계속 노래를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편을 읽어 나가노라면 사이사이에 “셀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만,일종의 음악 부호로서 시편을 노래하다가 그 대목에서 잠깐 멈추고 앞뒤 음절을 깊이 명상하라는 일종의 쉼표였을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는 날로 정해 주셨습니다.그것은 인간의 삶의 리듬에는 쉼표와 쉼 터가 있어야 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인에겐 쉴 곳이 없습니다. 경제 성장과 향락 산업의 발달로 도처에서 사치성 레저가 붐을 이루고 있고 대형 목욕탕과 음식점이 우후 죽순처럼 생기고 있습니다만,그런 곳은 잠깐 쉴 곳은 될지 모르나 영혼이 영원히 쉴 곳은 못 됩니다. 현대인의 참 쉼터! 그것은 이상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린 본문 속에서 우리가 참으로 쉴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그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주님의 초청을 통해서입니다. 우린 짤막한 본문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현대인의 삶의 정황,예수님의 위대한 초청,그리고 위대한 교환 조건과 참된 쉼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1.현대인의 삶의 정황 현대인은 한 마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그것은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치원 가방을 든 두 여자 아이를 만났습니다. 한 아이가 제 친구더러 “아이,피곤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제가 물었습니다. “뭐가 그리 피곤하니” 그랬더니 “아저씨,유치원 갔다 와서 피아노치러 가고 미술 학원에 가고 주산 학원에 가고 무용학원에 가는데 어떻게 안 피곤해요”라고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응,그래 굉장히 피곤하겠구나”라고 말하는데 그 피곤하다는 어린 소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말았습니다. 짐작하건대 그 아이는 집에서 제 부모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듣고 배운 것 같았습니다.어쨌든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현대인은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고롭다.피곤하다,고독하다,외롭다는 것들은 결국 편히 쉴 곳이 없다는 고백이며 절규인 것입니다. 직장은 노사 때문에,학원은 분규 때문에,정치는 당리 당략 때문에,세계는 사상 대립과 갈등 때문에,그리고 개인은 영혼의 평화를 찾지 못한 아픔 때문에 답답하고 고독합니다.한 마디로 쉴 곳이 없습니다.
2.위대한 초청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두 팔을 벌리고 어린 아들을 향해 어서 오라고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버지의 품,그곳엔 안정이 있고 보호가 있고 사랑이 있고 숨결이 있습니다. 그 품 속엔 돈도 있고 기쁨도 있고 장래도 있습니다. 그리고 평안과 쉼이 있습니다. 베이커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1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2 형식적인 종교,그릇된 종교에 지친 사람들
3 쾌락과 향락 추구에 신물 난 사람들
4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병약한 사람들 5 근심과 걱정에 빠져 있는 사람들 6 죄에 깊이 빠진 사람들 누가 이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포용할 수 있으며 그들을 항하여 “다 내게로 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노동자에게 안식을 줄 수 있으며 이단 종파에 빠진 사람,쾌락에 지친 사람,병들고 약한 사람,걱정과 근심 속에 빠져 있는 사람,죄에 멍든 사람들에게 “내가 쉬게 해주겠다.내게로 오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청은 참으로 위대한 초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3.위대한 교환 조건 29절을 보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습니다.그리고 30절에서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네가 걸러메고 있는 무거운 짐은 나에게로 가져 오너라 그리고 내가 네게 주는 가벼운 짐인 사랑,축복,은혜,감사,기쁨의 짐을 가져 가려무나”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짐이야말로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늘을 날을 수 있는 날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날개도 짐은 짐입니다만 그러나 하늘을 훨훨 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짐은 죄의 짐이며 걱정과 근심과 고통의 짐이기 때문에 점점 더 무거워져서 결국은 침몰해 버리고 마는 짐입니다. 더러운 것 가져다 놓고 깨끗한 것을, 무거운 것 가져다 놓고 가벼운 것을, 무가치한 것 가져다 놓고 가치 있는 것을, 유한한 것 가져다 놓고 영원한 것을, 쓸모없는 것 가져다 놓고 쓸모있는 것을, 죽을 것 가져다 놓고 영원히 사는 것을 가져 가라는 교환 조건이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4.결과를 생각해 봅시다. 28하반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고,29절에서는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내가”라는 말과 “마음이”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그 뜻은 참안식은 주님이 주시고,참안식은 마음에 쉼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아도 마음이 불편하면 거기에 즐거움이 없습니다. 마음의 쉼을 얻는 것이 참쉼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경가 깁슨은 “주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뜻이기보다는 주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 되신다는 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요 우리의 영원한 쉼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어떤 공원이나 놀이터가 우리의 쉼 터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그 넓고 큰 품이 우리의 쉼 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원히 그리고 참된 쉼을 얻으려면 현대인의 쉼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 작가 쿠싱은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리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 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찬송가 478장)고 노래했습니다. 고달픈 인생 길을 걷다가 쉴 곳이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졌을 때 찾아가 쉴 곳이 있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찾아갈 쉼터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넓은 가슴입니다. 지금 쉼터로 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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