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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름 휴가 (마11:28-30)

본문

휴가 철이다. 일에 쫓겨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여 름 휴가 생각만 해도 반갑고 설레임이 인다. 이맘때가 되면 어떤 사람은 산으로 어떤 사람은 바다로 무더위를 씻고 세상의 분주하고 잡다한데서 해방되어 가족 들과 함께 가장 인간적인 행복감을 얻기 위한 시간을 가지려고 분주히 움직인다. 원래 바캉스라는 것이 서구 문화의 유산인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 문 화가 서서히 밀려 들어와 우리의 생활속에 정착되었다. 원래 바캉스나 휴가는 단순한 놀이나 소풍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일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짜여진 시간이나 직책에서 떠나 자기 자 신을 재음미해 보아 새로운 힘을 얻는 재창조 (Recreation) 의 시간이다. 원래 휴식이란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 축적을 위한 시간이다. 우리나라 가 세계에서 최고로 일을 많이 하는 나라중 하나라고 한다. 이제 우리는 노동의 스트레스를 뒤로하고 휴식의 산과 바다로 일상의 사슬을 끊고 노동으로 부터 해 방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피곤해 한다. 이유없는 피로에 지쳐서 소극적이고 위 축된 삶을 살고 있다.그리고 특히 올해는 경제위기 여파로 휴가를 가는 것도 눈치를 보아야 하고 휴가도 고향집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동안 꽉 쫘여 진 스케쥴로 운신할 수 있는 시간이 어렵다가 나 자신을 돌아보는 휴식의 자유 를 느끼게 될 것이다. 자연속에서 살맛나는 휴식의 자유를 맛보게 될 것이다. 이 여름 휴가에 짙푸른 여름 녹음의 한복판에 서서 무성한 세월속에서 조갑증을 느끼며 살던 우리의 아둔함을 자책해 보자. 가뿐 숨을 몰아 쉬며 하루를 잡으려 고 노력해 보았지만 어떤 만족의 열매도 얻지 못했던 빈약한 삶을 살며 노동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를 발견해 보자.
1. 휴가의 필요성(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이다) 봄부터 여름이 되도록 휴식을 차압 당한채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고 물질과 재 화를 얻기 위하여 노동의 노예가 되어 살던 우리가 며칠이라도 자연속에서 스트 레스를 해소시키며 더욱 일을 잘하기 위한 에너지의 충족을 위하여 즉 생활의 활력소를 마련하기 위한 휴가를 보내야 한다. 이번 여름 휴가에는 활력소를 얻기 위한 시간과 육체적인 건강과 몸의 휴식뿐 아니라 우리 정신의 휴식도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영육이 함께 평안함을 누리는 방 법을 택하자. 게으른 것도 문제지만 쉴 줄 모르고 일만하는 일의 노예도 문제다. 고대 바빌로 니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가 오늘날 아무런 뜻없이 사용하는 월화수 목금토라는 일주일의 이름들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점성학 에서 온 이름이다. 고 대 바빌로니아인들은 일주일 내내 하루도 안쉬고 일곱 개의 혹성을 향해 경배하 고 일만 했다. 일요일은 태양신을 위해 일하고 경배하며, 월요일은 달의 신을 위해, 화요일은 화성, 수요일은 수성, 목요일은 목성, 금요일은 금성, 토요일은 토성을 위해 일하고 경배했다. 즉, 어느 하루도 그 어떤 대상에게 의지하지 않으 면 살 수 없는 불확실하고 정처없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도 없이 일의 노예가 되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엿새 일하고 이레 되는 날에는 안식하라고 하셨다. 안식'사바트'는 멈춘다, 쉰다, 특히 고대 근동에서 출토된 토기에 보면 사바트를 "마음을 달래는 날"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원래 "사바트"라고 하는 안식일은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는 7일이 아니라 보름이 되는 15일로 정하였다.
그런데 15일이 되는 날에 좋은 날이 아니라 악신들이 인간을 괴롭히는 불길한 액운의 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이 날은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하루를 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이레가 되는 안식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를 통해 만나 주시는 날이요, 우리 영을 소생케 하시고, 지친 마음들을 위로해 주시는 은총의 날인 것이다. 요즘 과다한 입시 경쟁으로 주일 날까지 자녀들을 공부에 매달리게 하고 교회를 안 보내는 부모들이 계시는데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주일날 주의 전에 나와서 봉사하고, 엿새 힘써 하면 떨어 지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의 건전한 휴식을 인정해 주셨다. 그 대표적인 제도 가 안식일 제도이고, 이 제도가 확대디어 7년이 되는 해에는 안식년을 선포해서 토지와 노예까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제도를 교회에서 많이 시행하고 지금은 대학 교수들이나 큰 회사에서 일의 능률을 위해 도입하고 있다. 또한 7년 을 7번 곱하면 49년이 되는데, 그 다음 50년째 해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희년' 이라고 정하여, 이때는 모든 매인 것들을 해방시키는 해로 삼았다. '스나트 요 벨'이라고 한다. 휴가란 피서지에 가서 배불리 먹고 마시며 무질서한 향락을 즐 기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휴식을 지시하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오 기에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이때 지친 제자들을 보신 주님께서 "너희는 따로 한 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고 말씀 하셨다. 너무나 피곤한 세상이고 보니 우리는 적절히 휴식을 취하며 사는 지혜도 있어야 만 한다. 예수님처럼 바쁘게 살았던 분도 없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곤하고 피곤하실 때 휴식을 취하셨다. 진정한 휴식을 누려야 한다.
2. 참된 휴식은 원래 인간은 엿새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어야 하도록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피조 물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에 흑암과 혼돈속에서 처음 빛을 창조하시면서 동시에 시 간의 흐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진리와 질서를 밝히게 하시며 생명체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리고는 사람을 만들어 모든 생명체와 만물들의 존재 의미와 관계 를 맺게 하시는 " 이름 " 을 짖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에게 청지기의 의무를 부 여 하셨다. 그리고는 창조의 마지막날에 안식하시며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시면서 축복하시고 우주창조의 일대 드라마를 끝맺으셨다. 이같은 창세기의 기록을 볼때 안식하며 놀이를 즐기는 것은 현대 기계문명이 발견해 낸것이 아니고 원초적으 로 창조의 질서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안식하며 놀이 하는 여가생활의 근 원은 창조주의 각별한 의지, 곧 종교적 차원에 속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안식은 죄를 모르고 살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너무도 아름답 고 좋아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더불어 즐기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자연도 모두 이 안식일 축제에 초대받아 편히 쉬고 즐긴날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인간은 에덴동산 을 상실하게 되었고 노동해야 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 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하시며 휴식을 주시겠다고 하셨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는 휴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앨리야는 영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갈멜산 위에서 그가 하나님께 바친 순결을 기억하지요. 수많은 아합의 졸개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던 일은 그 의 생명을 내건 피땀어린 영적인 애씀이요, 거대한 노동이었다. 850:1의 막중 한 대결이다.
그런데, 결국 승리하였다.
그러면, 이 정도의 승리를 한 영적 능력 이 있으니까 찬송을 하고 간증을 하고 지치지 않았어야 했는데, 이 불멸의 기적 을 체험한 엘리야는 곧바로 지쳐서 쓰러졌다. 사자같은 용맹을 가졌던 엘리야가 낙망과 실의와 회의 속에서 처절하게 지쳐 버렸고 로뎀나무 그늘 밑에 피곤한 육신을 던져버렸다. 소망이 없이 죽음 직전에 놓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당 분간 쉬게 하시고 육체의 잠을 주신다. 그리고 지친 육신을 위해 하나님은 잘 익 힌 떡과 물 한병을 든채 그에게 오십니다. "일어나 먹으라" 로뎀나무 아래는 그가 쉬 수 있는 조용한 처소였다. 부러진 신앙의 날개를 수선받는 고요한 격납 고와 같은 곳이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따뜻한 처방을 받아들이고 성경에 보니 "그가 식물을 의지하여 힘을 얻어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향했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휴식을 주시는 목적은 우리의 영과 육이 더 강건해져서 우리 가 가야 할 목적지를 더 잘 달리도록 도우시는 기회이다. 건전한 휴식은 하나님 의 창조 행위의 일부분이고, 건전한 휴식을 부정하는 건 하나님의 섭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통사고가 세계 1위이다. 환경오염도 세계적으로 심하다는 불명예도 1위가 많은데 부끄러운 것은 40대 남자들의 사망률이 세계 1위라는 것이다. 이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휴식을 모른채 과다한 경쟁 위주의 사회가 빚은 불행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고린도의 왕이었다. 죽은 후 지옥에 떨어져서 계속 노동한다. 높은 산에 바위를 올려 놓으면 아래로 굴러가고 또 다시 올려 놓 으면 또 내려오고 계속 그일만 반복한다. 이것은 건강한 노동이 아니다. 불면과 불휴의 영원한 저주인 것이다. 가장 큰 저주는 휴식이 없는 노동이다. 아무리 노래가 아름다워도 쉼표가 없는 노래는 없는 것이다. 악보 가운데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은 쉼표라고 생각한다. 마땅히 쉬어야 할 지점에서 쉬지 않으면 그 음악은 말 그대로 '음의악'인 음악이 된다. 신앙인들의 진정한 휴식은 육체의 향락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식일 을 거룩히 지키며, 예배하며 휴식을 얻고, 봉사하며 휴식을 얻으며 또한 육체의 쉼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진정한 휴식은 안식일 안에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안식일을 통한 휴식만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진정한 휴식이요, 안식일을 떠나 서는 진정한 휴식이 없는 것이다. `주일 성수'하는 것이다. 이러한 휴식이야 말로 영적인 휴식이요, 하나님께로 부터 지음을 받은 피조물다운 휴식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70세까지 산다면
3,699만
2,000분의 똑딱거리는 시간에 매달려 사는 셈이다. 그 중
1,200만 분 정도는 잠을 자며,
1,300만 분은 일에, 300만 분 은 먹는 데에, 150만 분은 면도나 머리치장 같은 일과 편지 쓰는 일에, 650만 분은 여가 선용에 소요한다. 이 수치들이 어느 정도 정확한 조사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놀라운 것은 여가에 보내는 시간이 일을 하는 시간의 절반이나 차지한다는 사실이다. 낭비하기에는 너무나 아깝고 귀중한 시간이다. 어떤 일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여가를 보내느냐도 따라서도 그 사람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 일에만 묻혀 제대로 쉴 줄도 모르는 사람,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세상적인 쾌락에 젖어 허무함에 빠져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많 은 부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여가의 참의미를 깨닫고 그 시간들을 좀더 의미있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여가에는 많 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그 안에는 단조로운 인생을 좀더 풍요롭게 따스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들, 소중한 경험들이 있다. 삶에 지치고 힘들 때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활력소도, 포기하고 싶고 좌절될 때 용기를 얻고 다 시 도전하게 만드는 열정도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 갈 수 있는 멋진 만남도 준비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그것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 도, 매일매일의 삶속에서 그리고 특별히 계획된 여가 시간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보물들을 찾아 떠나 보자. 그런 여가를 보내다 보면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 어진 일과 사람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3. 마음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예배와 기도) 사람이 육체의 휴식을 취해야 됨이 마땅한 것이지만 육체만 쉰다고 휴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공휴일이 되어 피곤하다고 하루종일 잠만 자 보라. 이것처럼 허 무한 것도 없다. 11시쯤에 일어나서 밥 먹고 어영부영하다 보면 213시, 라면 하나 끓여먹고 TV 한 프로 보고나면 516시가 된다. 모처럼 맞이한 휴일이지만 남는건 허무하다는 것 뿐이다. 이건 그래도 좀 괜찮다. 어떤 이들은 짬만 나면 술 마시는 사람이 있다. 스트레스를 푼답시고 방탕한 행실을 일삼고, 술 마시고 취하면서 세상의 모든 근심과 염려를 다 잊어버리고, 쌓여진 감정과 스트레스를 풀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술에서 깨어나면 역시 남는 건 괴로움과 번민 뿐이다. 여러분! 술 마시고 취하여 의식이 없어지면 쉬는 것입니까 잠시나마 세상일을 취중에 잊어버리면 스트레스가 모두 사라지는 것입니까 깨 어났을 때 노도처럼 밀려오는 공허함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까 휴식이란, 육체의 쉼만이 아니요 마음에 휴식이 있어야만이 진정한 휴식이 되는 것이다. 마 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마음에 쉼을 얻는 진정한 휴식이란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나의 모 든 멍에를 내어 맡기고, 주님을 의지하고 부르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휴식이라는 말씀이다. 눅 21:3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낮이면 온땀을 흘리시면서 열심히 일하셨다. 그리고 밤이면 피곤한 몸을 이끄시고 감람산에 오르셔서 쉬셨다. 하나님과의 끝없는 영적 대화를 나누시며 명상에 잠기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 오는 말씀으로 위로를 삼으시며 쉼을 얻으셨다. 왜 예수님께서는 피곤한 몸을 이끄시고 잠을 주무시지 않고 감람산에 올라가 명상에 잠기셨을까요 그것은 육체의 쉼만이 참다운 휴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잠으로 휴식을 취하시기도 하셨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평온함이야말로 마음에 참다운 쉼을 가져다 주시기에 밤 잠을 설치시 면서 명상에 잠기신 것이다. 어느 성도가 즐거운 여행을 하던 중에 어떤 중년부인을 만났다. 다복한 부인은 그와 대화 후 남편과의 이혼을 앞두고 너무나 괴로워 홀로 여행을 했다. 물론 그 녀는 돈이 많은 부인이었다. 이혼을 앞에 두고, 좋은 여행을 했다. 돈이 많아 비 싼 음식과 고급 옷을 입고 여행했으나 이것은 휴식 아니다. 마음에 평화가 있느냐 없느냐 마음에 위로가 있느냐 없느냐 여기에 참다 운 휴식이 있을 수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방탕함으로 휴식 을 찾고자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영육간에 쉼을 얻으며, 세상 사람들은 술취함으로 마음의 쉼을 얻고자 하지만 우리는 내인생의 모든 멍에를 주님께 내어 맡김으로써 마음에 쉼을 얻고, 세상 사람들은 염려함으 로 괴로운 나날들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의 희망을 발견하 여 날마다 쉼을 얻으며 인생을 유유히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휴식이란 준비하는 것이요, 도약을 꿈꾸는 것이다. 옛날, 두 하인이 도끼로 장작을 패기 시작했다. 김 대감 집 하인은 육덕이 황소만한 장사였고, 이 대감 집 하인은 몸은 외소하지 만 꾀가 있는 하인 "누가 더 많은 장작을 패느냐" 시합을 시켰다. 쉬지 않고 열심히 김 대감집 하인과는 달리 이 대감집 하인은 잠시 사라졌다가 게으름을 피 우는 것같이 보였다. 이를 김대감 하인은 이 대감집 하인을 비웃으었으나 그가 장작을 팬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여보게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이 사람아! 나는 게으름을 피운 것이 아니고 그 시간에 도끼의 날을 갈고 있었네" 그렇다. 성도들의 휴식이란 도끼의 날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주일날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며, 나만의 한적한 시간 속에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명상의 시간을 갖으며, 말씀에 대한 깊은 감동과 확신을 갖는 것은 영적으로 재무장하는 것이요, 무시무시한 영적인 무기를 다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무 장이 있을 때에만 험난한 세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성도 여러분! 한푼의 돈을 더 모으기 위하여 주일 성수를 잊어버린 채 산다면 언제 영적으 로 무장을 하겠으며 도끼의 날은 언제 갈 것입니까 세상 속에서 쾌락과 즐거움 을 찾는다면 언제 주님과 대화하며 마음의 위로를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 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고 하셨다. 이 말씀은 진정한 휴식 은 예수님에게만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육이 다 지쳐 있는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휴식은 비그리스도인의 휴식과는 다르다. 예수님이 하시는 휴식으로의 초대의 말씀은 하나님을 잃어 버리고 죄악에 신음하는 사람들, 그릇된 생각에 빠져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피곤한 상태 에 있는 사람들을 부르신 것이다. 정신과 영의 휴식이 없이는 진정한 육체적인 휴식이 있을 수 없다. 신앙적으로 갈등하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휴가를 가져도 내면적이고 근원적인 휴식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다. 사람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휴식은 예수님의 온유하시고 겸손하심을 배웠을 때 오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마음의 쉼을 얻는 것이다. 마음의 쉼이 없이는 육 체의 쉼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 사람들에게 안식(쉼) 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을 기리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셨다. 거룩은 죄악된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이 계신 데로 옮기는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다가 몸져 누워 사경에 이르렀다. 그 목사 님은쉬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몰랐다라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도 휴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물놀이, 낚시, 여행, 음악회 및 영화 감상, 가벼운 운동, 부담없는 독서, 친구 들과의 모임, 산책….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휴가를 갖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선택할 것이다. 휴가의 종류는 불신자들의 것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나, 기독교의 신앙과 가치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 에서 가져야 한다. 불신자들의 휴식이 곧잘 월요병을 발생시키는데 그것은 무분 별하게 휴가를 보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휴식에 있어서도 절제하며 즐 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가(Leisure)란 말은마음대로 하는 시간,원하는 대로 처분하는 시간, 자유시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여가 시간을 포함한 모든 시간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하라는 소명을 주신 동시에 편안히 안식하 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일과 마찬가지로 쉬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인 것이다. 성경은 게으름을 죄로 간주하지만 여가시간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으므로 우리도 여가를 죄로 여겨서는 안된다. 성경의 문맥 속에서 여가를 볼 필요가 있다. 중 요한 것은 휴식이나 긴장완화의 원칙이, 일에 관한 계명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는 재미 중심의 여가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도처에 권태를 낳고 있다. 시편 23편은 비유적으로 하나님인 목자가 양들을 푸르고 그늘진 휴식처에서 휴식 을 하도록 인도하고, 양들이 활기 있게 생활할 수 있도록 회복시키는 모습을 보 여 준다. 여가는 일과 의무만 있는 세상에서 그와 같은 휴식처다. 그것은 한 사람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힘과 완전함을 회복시킨다. 여가의 목적은 한 사람을 재창조하는 데 있다. 즉 한 인간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하고 유익한 쉼을 계획해야 한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더 피곤하고 지치게 만드는 그런 휴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휴식이 아니다. 여가다 운 여가를 보내는 것도 청지기의 책임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에게는 일할 의무 와 쉴 권리가 동시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여가를 보낼 것인가 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기독교는 휴식을 주는 종교다. 휴식 없는 노동. 쉼이 없는 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지치며 쓰러지기 쉽다. 우리 주님 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이야기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진정한 휴 식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 오늘은 정말 쉬고 싶어. 숨돌릴 겨를 없이 바삐 돌아가는 생활과 일에 지친 사람들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속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며 마음도 몸도 편안 하게 휴식을 취하고 싶은 마음-현대인 중에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나면 제대로 휴식을 취하는 사람은 극히 드 물다. 대부분이 텔레비전 앞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때우거나, 종일 잠에 빠져 있 거나 무리하게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혹은 교외로 나가려다 막히는 차 틈사이에 서 더 피곤하게 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연휴기간이 끝나면 이렇게 또 푸념하게 된다. 휴, 쉬는게 더 피곤해. 차라리 일하는게 낫지. 제대로 쉴려면 돈들고 시간들 고 에너지 소모되고, 차라리 그냥 일하는게 더 편해. 이런일이 생기는 건 우리가 여가에 대해서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가에 대한 개념과 원리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면 무료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돈을 들여서 무리하게 어딘가를 다녀오는 것도 휴가를 잘보내는 방법이 아 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여가에 대해서 유난히 많은 갈등을 겪는다. 교회 안에만 머물수 없기 때문에 쾌락과 소비지향적인 현대의 놀이문화와 경건한 삶의 양식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휴가를 낭비와 쾌락으로 사용하지 말고 생산과 창조적으로활용하도록 해 야겠다. 휴가를 휴식과 재창조를 위한 충전의 시기로 삼자. 안식이나 놀이나 축제나 여행등은 각박한 생존경쟁 속에서 이그러지고 상처난 창조질서와 인간성을 치유하고 회복하여 온전하게 함으로 거룩하게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진정한 안식의 의미 창세기 2 장 1 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엿새날까지 하시던 창조를 다 마치시고 " 참 좋았다 " 고 하시면서 이레날에 이르러 쉬시며 이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고 복을 주셨다. 일곱째날의 하나님의 쉬심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할일이 없어서 그냥 쉬셨겠는가 아니면 그처럼 엄청난 천지창조의 대역사를 마치시면서 기진 맥진하여 쉬셨는가 하나님의 안식하심은 창조물에 대한 기진맥진이나 무관심으로 돌아갔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 게 가장 필요한 평화를 창조하셨다고 보고싶다. 쉬시는 행위를 통하여 우주만물 의 생존과 번영과 참좋음을 위해 가장 중요한 평화를 주셨다.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휴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과 함께 하는 휴식을 가져 야 한다. 휴일을 영어로 홀리데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거룩한 날이라는 뜻이다. 즉 휴가는 성일과 같은 날이다.
그러므로 휴가는 꼭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한다. 구약에 노아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노아'라는 말은 '휴식, 안식하다'는 뜻이다. 노아는 참으로 평온한 삶을 살았다. 격정의 삶은 아니었으나 게으리지 않았 고 마음의평안을 가진 의로운 사람이어서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준행했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꿋꿋하게 방주를 만들면서 순종했다. '노아'란 이름, 그가 휴식하고 안식했다는 이름을 왜 얻었습니까 창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과 동행이란 '히트 할레크' 라는 말은 노아가 늘 영혼의 안식을 누린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노아는 역사 안에서 두 세상을 살았다. 홍수 이전과 홍수 이후의 두 세상을 살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다. 주님과 함게 휴식하며 동행해야 한다. 주님께서 피로에 지쳐있는 제자들에게 휴식을 취하라 하셨을 때 '가서 쉬라' 하지 않고 '와서 쉬라'고 하신다. 본문 31절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 우리 휴식에 최고의 동반자이신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참다운 휴식이 될 수 없다. 우리들의 휴가에 그리스도를 제외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리고 어디에서 휴가를 보낼 것인가도 문제이다. 갈데가 많으면서도 우리 성도들이 막상 갈만한 곳은 적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휴가를 보내는데 적합한 장 소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쉬어라' 하시면서 '따로 한적한 곳에 쉬라'고 하셨다. 예수님도 언제나 한적하고 조용한 환경을 찾으셨다. 막 1:35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 14:23 "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혼자 산에 올라가시다" 요 7:58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다" 왜 한적한 곳을 찾으십니까 성전과 회당에 문이 잠겨서 입니까 아니면 함께 기도할 사람이 없어서 혼자 갔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틈도 없이 바빴고 많은 사람들 틈에 있었다. 바쁘게 사람 틈에서 살다보니 사람의 생각이 머리에 가득찼고, 세상을 살다보니 이 세상에 우리 마음이 빼앗겨 하나님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 소란한 세속을 잠시 떠나 한적한 곳에서 영과 몸을 쉬 며 하나님을 더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이 최상의 휴가 이다. 오늘 우리에게 도 하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조용한 곳, 아름다운 자연환경, 기도할 수 있는 한적한 곳이 필요한다. '한적한 곳에 와서 쉬라'는 말은 결코 돈을 많이 쓰고 기 분 내라는 말이 아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 원어로는 `충분히 휴가를 취한다. 새로운 원기를 회복 하다'는 의미이다. 휴가를 끝내고 나서는 새로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생산 적인 휴가가 되도록 해야 한다. 휴가비 너무 많이 써서 재정적인 어려움이 와서는 안된다. 너무 많이 써서 일에 짜증이 나서도 안된다. 주일을 무리하게 노니까 월요병이 생긴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휴가동안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고 성경을 한 번다 읽고 내려와서 영도 육신도 새로워져서 더욱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었 다고 한다. 내일 일을 더 잘하기 위한 휴식이 되어야 한다. 어떤 권사님은 휴가 때는 늘 전 도지 많이 가지고 가서 놀고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전도하다가 돌아온다고 한다. 믿음의 사람들끼리 휴가를 가서 날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해야 경건생활을 유 지할 수 있다. 만일 안 믿는 사람들과 섞이게 되면 휴가가 타락되기 쉽다. 잘 쌓 아놓은 신앙생활이 허물어지기가 쉽다. 그래서 "한적한 곳에 가서" 원어로는 외롭고 적막한 광야를 말한다. 주님은 한적 한 곳에 가서 제자들끼리만 쉬기를 원하셨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원대하신 인류의 구속을 앞에 두시고서도 쉬시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주 일성수에 큰 관심을 갖으며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힘쓰고 말씀의 소망 속에서 확신하며 주님 안에서 얻어지는 인생의 쉼을 마음껏 누리십니다. 성도들에게는 휴가를 기도원으로 가서 지내는 것이 바람직 할 것 같다. 건전한 기도원에서 가족끼리 또는 성도끼리 모여서 지낼 때 유익한 점은 ▲ 영적으로 충만해 질 수 있다. ▲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만들 수 있다. ▲ 평 소에 부족했던 기도를 충분히 할 수 있다. ▲ 경비가 절약된다 ▲ 하나님 기뻐하 시기에 복을 주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을 만끽하면서 기도와 은혜의 시 간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휴식하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에서 마음의 쉼을 얻으시는 예수님, 이러하신 주님의 모습을 배워야 하겠다.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께 기도 드리며 성령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마음의 위로, 이것이야말로 성도들이 취해야 할 참다운 휴식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용한 골방에서 주님과 대화하며 마음에 쉼을 주시는 주님과 끝없는 기도의 대화가 있어야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1:24에 보면 "폈던 날개를 접고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나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보려고 몸부림치면 프드덕거리는 날개 소리 때문에 미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한적한 곳에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폈던 내 날개를 접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시간이다. 조용한 침묵을 유지하면서 주님과 시간을 갖고 세 미한 주의 음성을 듣는 것도 중요한 영성훈련이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자라나는 수목처럼 우리의 신앙도 성장하고 영적인 성숙의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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