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마11:2-6)
본문
대강절(待降節)은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우리 삶에 변화 를 가져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따라서 대강절은 회개의 때요, 자신을 성결케 하는 기간입니다. 동시에 대강절은 부푼 기대 와 설렘을 주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는 마치 세례 요한이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던 때에 해당됩니다. 세례 요한은 남다른 기대를 가지고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아 기대 세례 요한은 그의 뒤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 습니다. 그래서 요단 강으로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외쳤 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 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 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 ' 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님과 불로 세레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 에 키를 들었으니,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 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이 외침은 독설에 가까운 심판의 선언입니다. 요한은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서 이런 세상은 속히 멸망하고 새 세계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 입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 아주 岵생각을 갖고 자란 것 같 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사회를 등지고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야인(野人)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광야 생활은 바로 이 부패한 사회에 대한 반발이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요한의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볼 때 그의 멧세지가 비판적이요 독설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예비하는 메시아에 게 거는 기대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 썩어 빠진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입니다. 세례 요한의 실망
그런데 그가 기대한 메시아인 예수가 나타나셨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 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예언하였던 대심판의 재난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세력이 물러가기는커녕, 그 세력에 의해 지금 자기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모든 불의한 세력들을 때려부수고, 의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 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옛날 그 대로 흘러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였을까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하여 듣는 소식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저 변방(邊方)인 갈릴리 지역에서 바리새인들을 피해 다니며 병든 자들이나 고쳐 주고, 몇 가지 기적을 행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에 반도 못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역사 오늘 우리도 요한과 같은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예수 그리스도 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오시면 이 불공평하고 불의한 세상이 당장 바뀌고,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오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쳐 주셔서 우리를 건 강하게 하실 것이라고도 기대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오시면 우리를 푸 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 안정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기대가 만족하게 응답되어 본 적은 그렇게 흔치 않 습니다. 대개는 그런 기대를 가졌다가 요한처럼 실망을 맛보기 일수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세상에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과거와 똑같이 오늘날도 여전히 고난과 범죄와 사랑과 미움이 계속되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한 번이라도 전쟁이 덜 일어났으며, 하나 의 감옥이라도 불필요하게 되었으며, 또는 하나의 국가라도 진정으로 정의 로운 나라가 되었는가 달라지기는커녕 어떻게 보면 더 악해지고 더 불행 한 세계가 되지 않았는가 화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어떻 게 해서 전쟁은 더 일어나고, 모든 세계는 분쟁에 휘말리고 있는가 이렇 게 볼 때 과연 예수는 우리가 기대한 메시아인가 하는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기대 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의 기대 를 갖고 기다릴 때는 오히려 절망을 맛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으로 그가 역사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속에 그 의 뜻대로 역사 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철저 한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 부정을 통해서 나의 기대와 욕망을 완 전히 비우고 빈 마음이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한 후 세례 요한은 감옥 속에서 깊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로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의 이 질문은 한가하게 노변(蘆邊)에 앉아 토론하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절박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일생을 바쳐 증거한 메시아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 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에게 있어서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질문 이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주어지는 답변 여하에 따라서 요한은 보람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생애가 완전히 헛된 것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요한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이 질문을 예수님께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자기가 일생을 바쳐 증거한 메시아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한 시점에서 그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증거하고 기대했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예수가 진짜 메시아가 아니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자기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내 려지는 결론 앞에서 그는 자기의 생애 전체가 무너지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절망 가운데서 완전히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 대신에 빈 마음으로 예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제자들을 보내 어 질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증거한 그 메시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로 하여금 메시아임을 믿게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보여 주시려는 메시아상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것을 따지려고 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는 그가 어떤 답을 주시든 받아 드리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밤을 보내고 이제 동터 오는 새벽 차분하고 빈 마음으로 새것 을 받아 드릴 준비를 갖추고 이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과거 자기의 모 든 것을 무너뜨리고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 을 던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서는 이제까지 우리가 간직해 온 자존심과 고집이 깨어지는 고뇌의 밤을 거치지 아니하고는 어렵습니다. 눈 물로 침상을 띄울만큼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누구 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대강절이 참회(懺悔)의 기간이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강절은 결코 어린이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흥분되고 가슴 뛰는 그런 절기가 아닙니다. 보라색이 상징하는 것처럼 가슴을 찢으 며 자신을 지탱해 온 자존심을 깨는 기간입니다. 진정 겸손한 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빈 구유와 같이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의 대답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거기에 직접적인 답 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감옥 속에서 제자들을 보내어서까 지 질문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절망과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요한이 알기를 원했던 것은 예수가 보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 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혁 명적인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심판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저주와 보복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치유(治癒)와 생명과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는 확실히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놀라운 변혁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이 세계를 하루아침에 평화롭게 만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세 계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의(義)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선을 이루도록 힘쓰게 만듭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사회와 세계 속에 많은 문제와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치유와 생명의 역사들이 진행되며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혁명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두 차례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것은 더욱 깊은 악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가난 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입니다. 그 일은 하루아침에 이 사회를 낙 원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깨닫게 하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누구든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 편리한대로 예수를 이해할 때 예수로 인하 여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고 인내로 복음의 사역에 동참할 때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옥에서 꺼내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마도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후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고, 새로 태어난 감 격을 안고 죽음을 마지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감옥에서 자유케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혼을 과거의 망령에서 풀어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강절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이 아닙니다. 문제들을 앞세우며 그 문제 해결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오히려 우리는 절망만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수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에 집착하기보 다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마음을 비우며, 주님께서 오셔서 역사 하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 있 어야 할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는 요한의 질문은 바로 자신의 잘못된 아집 (我執)을 깨고 이제 새롭게 주님 역사 하시기를 기다리는 겸허한 자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기도에 응답하시며,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진정 겸손함으로 돌아가며 통회 자복하면서 자신을 비워 주님을 영접하고 그가 들려주시는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헌신 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 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 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 ' 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님과 불로 세레를 주실 것이다. 그는 손 에 키를 들었으니,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모 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이 외침은 독설에 가까운 심판의 선언입니다. 요한은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서 이런 세상은 속히 멸망하고 새 세계가 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을 것 입니다. 그는,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해서 아주 岵생각을 갖고 자란 것 같 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 사회를 등지고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야인(野人)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광야 생활은 바로 이 부패한 사회에 대한 반발이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요한의 성장 배경을 바탕으로 볼 때 그의 멧세지가 비판적이요 독설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예비하는 메시아에 게 거는 기대는 각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 썩어 빠진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이루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입니다. 세례 요한의 실망
그런데 그가 기대한 메시아인 예수가 나타나셨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일 어나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예언하였던 대심판의 재난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 세례 요한은 헤롯 왕에 의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불의의 세력이 물러가기는커녕, 그 세력에 의해 지금 자기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자기가 기대했던 대로 모든 불의한 세력들을 때려부수고, 의의 세력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기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 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옛날 그 대로 흘러갔습니다. 이때 요한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하였을까요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하여 듣는 소식은, 나사렛 예수가 예루살렘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저 변방(邊方)인 갈릴리 지역에서 바리새인들을 피해 다니며 병든 자들이나 고쳐 주고, 몇 가지 기적을 행할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에 반도 못 미치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다른 하나님의 역사 오늘 우리도 요한과 같은 경험을 모두 가진 사람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예수 그리스도 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오시면 이 불공평하고 불의한 세상이 당장 바뀌고, 독재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모두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오시면 모든 병을 다 고쳐 주셔서 우리를 건 강하게 하실 것이라고도 기대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가 오시면 우리를 푸 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 안정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기대가 만족하게 응답되어 본 적은 그렇게 흔치 않 습니다. 대개는 그런 기대를 가졌다가 요한처럼 실망을 맛보기 일수입니다. 기독교 2천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세상에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과거와 똑같이 오늘날도 여전히 고난과 범죄와 사랑과 미움이 계속되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한 번이라도 전쟁이 덜 일어났으며, 하나 의 감옥이라도 불필요하게 되었으며, 또는 하나의 국가라도 진정으로 정의 로운 나라가 되었는가 달라지기는커녕 어떻게 보면 더 악해지고 더 불행 한 세계가 되지 않았는가 화해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어떻 게 해서 전쟁은 더 일어나고, 모든 세계는 분쟁에 휘말리고 있는가 이렇 게 볼 때 과연 예수는 우리가 기대한 메시아인가 하는 의문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기대 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름대로의 기대 를 갖고 기다릴 때는 오히려 절망을 맛볼 뿐입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으로 그가 역사 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이 우리가 취할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할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속에 그 의 뜻대로 역사 하시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다림은 철저 한 자기 부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 부정을 통해서 나의 기대와 욕망을 완 전히 비우고 빈 마음이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한 후 세례 요한은 감옥 속에서 깊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로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의 이 질문은 한가하게 노변(蘆邊)에 앉아 토론하면서 던진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절박한 질문이었습니다. "내가 일생을 바쳐 증거한 메시아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 을 기다려야 합니까" 요한에게 있어서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심각한 질문 이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주어지는 답변 여하에 따라서 요한은 보람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생애가 완전히 헛된 것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요한은 절망을 체험하면서 이 질문을 예수님께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자기가 일생을 바쳐 증거한 메시아는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한 시점에서 그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증거하고 기대했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예수가 진짜 메시아가 아니든지 둘 중에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요한은 자기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다는 쪽으로 결론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내 려지는 결론 앞에서 그는 자기의 생애 전체가 무너지는 절망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절망 가운데서 완전히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는 대신에 빈 마음으로 예수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제자들을 보내 어 질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 내가 증거한 그 메시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로 하여금 메시아임을 믿게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보여 주시려는 메시아상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것을 따지려고 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제는 그가 어떤 답을 주시든 받아 드리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밤을 보내고 이제 동터 오는 새벽 차분하고 빈 마음으로 새것 을 받아 드릴 준비를 갖추고 이 질문을 하였을 것입니다. 과거 자기의 모 든 것을 무너뜨리고 이제부터 새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 을 던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서는 이제까지 우리가 간직해 온 자존심과 고집이 깨어지는 고뇌의 밤을 거치지 아니하고는 어렵습니다. 눈 물로 침상을 띄울만큼 자기가 깨어지는 아픔을 통과하지 아니하고는 누구 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받아 드리기 어렵습니다. 대강절이 참회(懺悔)의 기간이 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강절은 결코 어린이가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것처럼 흥분되고 가슴 뛰는 그런 절기가 아닙니다. 보라색이 상징하는 것처럼 가슴을 찢으 며 자신을 지탱해 온 자존심을 깨는 기간입니다. 진정 겸손한 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빈 구유와 같이 준비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예수의 대답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거기에 직접적인 답 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감옥 속에서 제자들을 보내어서까 지 질문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절망과 그 간절함이 무엇인지를 아셨습니다. 요한이 알기를 원했던 것은 예수가 보여 주시려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 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혁 명적인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심판도 없고, 파괴도 없으며, 저주와 보복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치유(治癒)와 생명과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세계는 확실히 세례 요한이 기대했던 것처럼 한꺼번에 놀라운 변혁을 일으키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가 이 세계를 하루아침에 평화롭게 만들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세 계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사랑의 복음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기쁨을 줍니다.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의(義)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선을 이루도록 힘쓰게 만듭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사회와 세계 속에 많은 문제와 고민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치유와 생명의 역사들이 진행되며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혁명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우리는 두 차례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그것은 더욱 깊은 악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상처받은 자들을 치유하고 가난 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들입니다. 그 일은 하루아침에 이 사회를 낙 원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것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깨닫게 하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누구든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 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우리 편리한대로 예수를 이해할 때 예수로 인하 여 우리가 걸려 넘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비우고 인내로 복음의 사역에 동참할 때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옥에서 꺼내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아마도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후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고, 새로 태어난 감 격을 안고 죽음을 마지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감옥에서 자유케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의 영혼을 과거의 망령에서 풀어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강절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를 기다리는 계절이 아닙니다. 문제들을 앞세우며 그 문제 해결만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오히려 우리는 절망만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수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문제에 집착하기보 다는 자신의 마음을 비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도록 마음을 비우며, 주님께서 오셔서 역사 하시도록 자신을 주님께 맡길 수 있 어야 할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라는 요한의 질문은 바로 자신의 잘못된 아집 (我執)을 깨고 이제 새롭게 주님 역사 하시기를 기다리는 겸허한 자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기도에 응답하시며, 치유와 생명의 역사를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진정 겸손함으로 돌아가며 통회 자복하면서 자신을 비워 주님을 영접하고 그가 들려주시는 복음을 듣고 기쁨으로 헌신 하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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