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마1:18-25)
본문
마태는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실 그 분의 창조, 곧 신기원을 이루는 탄생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는 말로서,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그것과 관련된 사건들을 소개합니다. 그 관련된 사건들은 주로 요셉과 마리아에 관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탄생 기사에서는 요셉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고통과 주저, 마리아을 위한 깊은 생각, 요셉에게 신적 메시지의 전달, 이 메시지에 대한 그의 순종등이 탄생의 기적 자체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요셉의 관점에 서서 이야기를 기술합니다. 반면 누가는 주로 마리아의 처녀다운 놀라움과 온유한 순종, 성령님으로 인한 잉태라는 천사의 말을 듣자마자 마리아가 공감을 얻기 위해 엘리사벳을 급히 찾아간 일, 엘리사벳의 인사에 자극을 받아 마리아가 환회의 찬양을 부른 일등에 대해 기술합니다. 이 두 복음서의 기사는 서로를 아름답게 보충해 주고 있으며, 경건한 이 두 인물에 대해 생생한 두 개의 그림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두 인물 요셉과 마리아는 각각 상이한 형태로 격심한 시련을 당하며, 서로 다른 모습의 순종을 통해 풍요로운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들은 이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요셉은 자신의 짐을 졌고, 마리아 역시 자신의 짐을 졌습니다.
1.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임신 마리아에게는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님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18절). 요셉의 결혼은 세 절차, 즉 약혼, 정혼, 결혼의 순서로 이루워집니다. 약혼은 흔히 어릴 때 당사자들이 맞선을 보는 일 없이 양가의 부모에 의해서나 혹은 직업적인 중매에 의해 성립되었습니다(W. Barclay). 그리고 정혼은 약혼한 남녀가 혹은 신랑과 신부가 증인들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함으로서 성립됩니다.
일단 정혼을 하면, 결혼과 동등한 법적 효력을 가지며, 두 남녀는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 집니다. 본문에 보면 이 정혼 순간부터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19절),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로 일컬어진 것입니다(20절). 이 관계는 이혼이 아니고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페지할 수 없습니다. 파혼을 하려면 두 증인 앞에서 정식 파혼증서나 이혼증서를 주어야 합니다. 이혼장은 비공개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혼자가 정절을 범하면 간음으로 취급되며, 죽음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신22:23, 3
4). 법적으로 정혼을 하고 남편과 아내가 동거하는 결혼을 할 때까지, 즉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 오기까지 일정기간을 두었습니다. 그 기간은 일년입니다. 마리아는 정혼 단계, 곧 요셉과 마리아가 동거를 시작하기 전에 임신한 것이 나타났습니다:“성령님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리아는 아직 사내를 알지 못한 처녀였기 때문에 곧 그의 임신이 성령님의 역사로 되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자기에게 예고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았습니다(눅1:26-35).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방도에 대한 천사의 설명, 즉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님의 임재로 되는 일이라는 것을 듣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희생적 복종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마리아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오직 역사에 한번만 있을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그 약속과 특권을 자기의 것이라는 대도 굳게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약속이 성취됨을 따라 의심과 고난, 심지어 죽음이 올지라도 물러서거나 피하지 아니하고 주의 뜻대로 복종할 것을 각오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으로부터 오는 오해, 세인으로부터는 조롱을 받을 것을 각오하였으며, 유대에서는 약혼자도 기혼자도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으니 흑시 있을지도 모르는 이 두려운 형벌까지도 받을 각오를 하고 일체를 하나님께 맡겨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각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웁시다.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품은 사람은 친구와 친척, 또는 이웃으로부터 오는 오해와, 그리고 세인으로부터 오는 조롱과 멸시와 박해,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복중에 잉태되었을 때 모든 고난을 각오하였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언약을 가장 굳게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참을성있게 순종할 것이며, 큰 영예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도 알 것 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흔히 기쁨의 면류관이요 슬픔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안일과 이기적 기쁨을 주기 위하여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야 성취할 큰 과업을 위하여 택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특권을 가진 신자들은 어떠한 오해와 조롱과 박해, 그리고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오직 이 각오와 용기로 믿는 자만이 큰 영예와 복을 받습니다.
2. 요셉의 고민과 천사의 고지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를 알고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의 고지를 받았습니다(19-20절).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 상태임을 알았을 때 그 이유를 알지 못한 나머지 마리아가 자기에게 불충절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하고 달콤한 사랑과 그리움을 나누어야 했을 바로 그 시기에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갑작스레 발견함으로써 받았던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마치 번개불처럼 눈알을 캄캄하게 만들고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부정(不貞)은 언제나 가증스러운 범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형벌로 애굽에서는 간부의 코를, 페르시아에서는 코와 귀를, 유대에서는 돌로 처 죽였습니다(레20:10; 겔16:38, 42; 요8:5). 약혼이나 정혼한 사람의 경우에도 이 형벌을 가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신22:23, 2
4). 요셉이 마리아를 간음죄로 고발할 경우에 마리아는 이 무서운 형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순하고 친철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열렬히 사랑하였습니다. 법에 따라 고발할 것인가 사랑으로 용납할 것인가 그는 괴로워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연인이자 남편으로서, 자신에게 있어서 아직도 그 처럼 소중한 마리아에게 어떻게 공개적 수치를 안겨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요셉 자신의 인격과 명예에도 누가 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요셉은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일, 곧 그녀를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은밀히 파혼하는 것이 비통스러운 일이었으나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법과 사랑이란 심히 괴로운 곤경에서 바른 선택을 하고자 얼마나 고민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이 일을” 고뇌 중에서 곰곰이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낮 동안의 이러한 번민이 잠자는 시간에까지 이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기다리는 영혼에게는 늘 주어지기 마련인 하나님의 지시가 꿈에 천사를 통해 그에게도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깊이 생각하고 선한 근심을 하는 자를 지도하신 것입니다. '꿈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하여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출현이 빈번하였다는 사실이 주목할만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이 놀라운 기적에서 일련의 부차적인 기적들이 마치 일단의 수행 천사들처럼 그 기적을 둘러싸고 있다고 믿을진대, 이 시기에 신적 현현과 메시지 전달 사건이 풍부하게 나타난다는데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3. 천사의 고지의 목적과 내용 꿈에 천사가 나타나 고지한 주요 목적은 요셉의 망설임을 제거하고 그의 진로를 지적해 주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의 천사가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님으로 된 것이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에 대한 의심과 자신의 의무에 대한 망설임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요셉에게 전달되 었던 이 두 가지 내용은 아주 적절한 내용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이 것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이 위대한 신비가 가장 간단 명료한 말로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이가 한 여인으로 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확실히 필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한” 자들(히2:14)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역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여야 하였습니다.
(2)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내리 전달되는 본성적인 오점이 그에게는 전혀 없어야한다는 것도, 역시 그에 못지 않게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요구 조건이 예수님의 초자연적 탄생을 통해 충족되었습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이 초자연적 탄생은 그의 독특한 직무상의 자질을 형성하는데는 물론 그의 죄없는 인격을 설명하는데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점과 흠이 없는 인간임을 인정합니다. 세상은 옥에도 검은 티가 있듯이 지극히 고귀한 인물들에게도 흠이 있는 법인데,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는 그러한 결점이 없었는가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입증할만한 신비는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같은 유(類)이나 그 이상의 기적입니다(요3:5-7). 인간은 죄로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 인간에게 성령님으로 중생의 새 생명이 심겨졌을 때 그 영혼 속에 영적인 생활을 스스로 가져올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중생의 씨를 뿌리고 중생의 기적을 이루어 나가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역시 타락한 인간 마리아에게 성령님으로 그리스도가 잉태되었을 때 마리아 자신 그 기적을 이루어 나가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한 초기부터 성별하여 죄의 오염을 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신비를 이해하는 자에는 복되도다! “아들을 낳으리니”. 천사는 ‘네게 한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의 위치에서 그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요셉은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된 것입니다. “이름은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회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란 이름은 문자적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도움이시다)’를 의미 합니다. 예수 또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당시 많은 유대인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입니다. 바울의 측근자들 가운데도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불후의 전쟁 영웅 여호수아를 상기시켜 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외국의 통치를 받던 이 시대에 이스라엘이 자유를 위해 다시 싸우기를 바라던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이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의중에는 보다 깊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이름이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은 여호수아가 이루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부터 구원이었습니다. 이 아이도 역시 한 사람의 지도자, 정복자, 왕이 될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 불린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가운데 여기에서 “자기 백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의가 깊습니다. 이 아이에게도 역시 어떤 신민, 즉 백성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룰 구원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칼로써 로마로부터 쟁취해 내는 구왼이 아니라, 내적, 도덕적, 영적인 구원, 따라서 도덕적, 영적 무기에 의해 실현될 구원이었습니다.
4. 이 사건과 예언의 성취 마태는 “이 모든 일”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23절). 임마누엘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사7:14). 구약성경에서 “처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언제나 그 단어 본래의 순수한 뜻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글 속에 있는 이 예언이 본래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예언이 발전되고 있는 후속 문맥을 볼 때, 그리고 특히 이사야 9:6에서 그 아이에게 주어지는 4가지 이름과 그 아이에 대해 예언된 영광스런 통치를 고려해 볼 때, 이사야가 그를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사9:6을 읽으시요).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강렬한 예언이 이사야의 시대에는 빈약하고 불충분하게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위대한 메시야 소망은 필연적으로 먼 미래의 시대를 지향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서에 진술된 그 배역을 담당할 이는 장래에 나타나야만 했었습니다. 마태는 그 배역을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성취하셨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히브리 단어에 처녀성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 이 아니라 선지자가 신적 영감의 황금 빛 연무 속에서 본 인물과 복음서에 묘사된 인물 사이에 일치점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상호 일치는 완벽합니다. 예언 속의 아이에게 주어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아하스 같은 사람이 보좌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서 이스라엘이 자기 존재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는 그런 확신울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아하스 왕 시대와 관련하여 그 이름은 지금 시리아와 사마리아로부터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위기가 “이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없어진다는 약속과 더불어 아직 잉태되지 않은 아이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와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 사이에서 자비와 구원을 위해 임재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이 이름은 최소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최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특별한 아이의 출생과 명명(名命)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일반적인 언명일 수도 있고, 혹은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이 아이에게서 밝혀진다는 것을 나태내주는 신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아이로 여겨도 좋을 이사야 9:6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이 후자의 해석을 정당화해 줍니다. 이 아이는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이십니다(TDNT). 이 이름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 이런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진정한 차원에서 볼 때 이 이름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해당되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칭호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과 함께, 인간들 중에 거주하신다는 것을 선포하며, 예수라는 역사적 이름의 토대를 밝혀준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과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는,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이름(임마누엘)은 깊고 견고한 토대이며, 또 하나의 이름(예수)은 그 위에 세워진 피난 요새입니다. 그는 임마누엘이기 때문에 예수입니다.
5. 요셉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탄생 요셉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상과 자신의 인생은 너무나도 달라보였습니다. 약흔녀의 순결에 대한 의심과 번민, 망설임은 밤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의 아이가 수치의 씨앗일 것이라는 두려움 대신, 그는 ‘거룩한 아이’ 라는 신적 확신이 다가왔습니다. 이 갑작스런 급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련된 모든 일들이 분명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될 것인가는 분명하였습니다. 요셉은 즐거운 마음으로 신속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었으며, 영원히 파멸될 것 같았던 딸콤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한 구절에서 천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였고, 또한 구절에서 기자는 그 탄생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 모두에서 마리아의 역할과 요셉의 역할이 나란히 병행하고 있습니다.-“'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녀가' 낳으매 '그가'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1, 25).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참조:A. MACLAREN). 요셉과 마리아에 대하여 좀더 생각하여 봅시다.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는 말에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 같이 큰 시련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파멸될 것만 같으며, 그렇게도 열렬히 사랑하는 자와 완전히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결백하였으나 요셉은 그녀의 결백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마리아는 분명히 양심적으로 결백한 이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었습니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행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백한 자를 반드시 보호하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치욕을 당할 위험에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잔인하고 성급하고난폭한 사람과 관계(정혼)되었더라면, 치욕적인 죽임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유순하고 친절한 사람과 관계되게 하셨으며, 적당할 때 요셉은 그녀의 임신의 진상과 결백을 통고받았으며, 그녀를 충실하고 사랑하는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허물이 없는 양심을 간직해야 할 것이며,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명예를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공격을 받거나 환경이 우리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변호해 주실 것이며, 파멸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요셉의 사랑과 신중한 처리를 보며, 교훈을 얻습니다. 이러한 난문제를 당하여 우리는,-
첫째로,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로, 불쌍히 여겨 서로 용납하고(엡4:32), 온유한 마음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셋째로, 끝까지 사랑하여 함부로 비판,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넷째로, 그 충격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다섯째로, 주의 말씀에 신속히 복종해야 합니다. 요셉은 마라아의 외관상 부정에 대하여 이렇게 대처함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는 요셉과 마리아의 지혜와 헌신적 봉사로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어떠한 봉사로 사시겠습니까 '성탄을 맞이하면서 다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탄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
1.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의 임신 마리아에게는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님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18절). 요셉의 결혼은 세 절차, 즉 약혼, 정혼, 결혼의 순서로 이루워집니다. 약혼은 흔히 어릴 때 당사자들이 맞선을 보는 일 없이 양가의 부모에 의해서나 혹은 직업적인 중매에 의해 성립되었습니다(W. Barclay). 그리고 정혼은 약혼한 남녀가 혹은 신랑과 신부가 증인들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함으로서 성립됩니다.
일단 정혼을 하면, 결혼과 동등한 법적 효력을 가지며, 두 남녀는 남편과 아내로 일컬어 집니다. 본문에 보면 이 정혼 순간부터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19절), 마리아는 요셉의 아내로 일컬어진 것입니다(20절). 이 관계는 이혼이 아니고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페지할 수 없습니다. 파혼을 하려면 두 증인 앞에서 정식 파혼증서나 이혼증서를 주어야 합니다. 이혼장은 비공개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혼자가 정절을 범하면 간음으로 취급되며, 죽음의 형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신22:23, 3
4). 법적으로 정혼을 하고 남편과 아내가 동거하는 결혼을 할 때까지, 즉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 오기까지 일정기간을 두었습니다. 그 기간은 일년입니다. 마리아는 정혼 단계, 곧 요셉과 마리아가 동거를 시작하기 전에 임신한 것이 나타났습니다:“성령님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리아는 아직 사내를 알지 못한 처녀였기 때문에 곧 그의 임신이 성령님의 역사로 되어진 것임을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자기에게 예고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았습니다(눅1:26-35). 누가복음에 보면,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방도에 대한 천사의 설명, 즉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님의 임재로 되는 일이라는 것을 듣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희생적 복종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마리아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오직 역사에 한번만 있을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인 까닭에 그 약속과 특권을 자기의 것이라는 대도 굳게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약속이 성취됨을 따라 의심과 고난, 심지어 죽음이 올지라도 물러서거나 피하지 아니하고 주의 뜻대로 복종할 것을 각오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으로부터 오는 오해, 세인으로부터는 조롱을 받을 것을 각오하였으며, 유대에서는 약혼자도 기혼자도 간음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으니 흑시 있을지도 모르는 이 두려운 형벌까지도 받을 각오를 하고 일체를 하나님께 맡겨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각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배웁시다.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품은 사람은 친구와 친척, 또는 이웃으로부터 오는 오해와, 그리고 세인으로부터 오는 조롱과 멸시와 박해,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복중에 잉태되었을 때 모든 고난을 각오하였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언약을 가장 굳게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섭리를 참을성있게 순종할 것이며, 큰 영예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것도 알 것 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흔히 기쁨의 면류관이요 슬픔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안일과 이기적 기쁨을 주기 위하여 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해야 성취할 큰 과업을 위하여 택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특권을 가진 신자들은 어떠한 오해와 조롱과 박해, 그리고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오직 이 각오와 용기로 믿는 자만이 큰 영예와 복을 받습니다.
2. 요셉의 고민과 천사의 고지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를 알고 고민하고 있을 때 천사의 고지를 받았습니다(19-20절).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 상태임을 알았을 때 그 이유를 알지 못한 나머지 마리아가 자기에게 불충절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정혼하고 달콤한 사랑과 그리움을 나누어야 했을 바로 그 시기에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갑작스레 발견함으로써 받았던 충격이 어떠했겠습니까 마치 번개불처럼 눈알을 캄캄하게 만들고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부정(不貞)은 언제나 가증스러운 범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 형벌로 애굽에서는 간부의 코를, 페르시아에서는 코와 귀를, 유대에서는 돌로 처 죽였습니다(레20:10; 겔16:38, 42; 요8:5). 약혼이나 정혼한 사람의 경우에도 이 형벌을 가하도록 규정되었습니다(신22:23, 2
4). 요셉이 마리아를 간음죄로 고발할 경우에 마리아는 이 무서운 형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순하고 친철한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요셉은 마리아를 열렬히 사랑하였습니다. 법에 따라 고발할 것인가 사랑으로 용납할 것인가 그는 괴로워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연인이자 남편으로서, 자신에게 있어서 아직도 그 처럼 소중한 마리아에게 어떻게 공개적 수치를 안겨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요셉 자신의 인격과 명예에도 누가 되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요셉은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일, 곧 그녀를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은밀히 파혼하는 것이 비통스러운 일이었으나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법과 사랑이란 심히 괴로운 곤경에서 바른 선택을 하고자 얼마나 고민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이 일을” 고뇌 중에서 곰곰이 생각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낮 동안의 이러한 번민이 잠자는 시간에까지 이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기다리는 영혼에게는 늘 주어지기 마련인 하나님의 지시가 꿈에 천사를 통해 그에게도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깊이 생각하고 선한 근심을 하는 자를 지도하신 것입니다. '꿈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전후하여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천사들의 출현이 빈번하였다는 사실이 주목할만 합니다. 어쨌든 우리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이 놀라운 기적에서 일련의 부차적인 기적들이 마치 일단의 수행 천사들처럼 그 기적을 둘러싸고 있다고 믿을진대, 이 시기에 신적 현현과 메시지 전달 사건이 풍부하게 나타난다는데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놀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3. 천사의 고지의 목적과 내용 꿈에 천사가 나타나 고지한 주요 목적은 요셉의 망설임을 제거하고 그의 진로를 지적해 주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의 천사가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님으로 된 것이라”고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천사는 “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심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에 대한 의심과 자신의 의무에 대한 망설임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요셉에게 전달되 었던 이 두 가지 내용은 아주 적절한 내용으로서,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참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이 것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이 위대한 신비가 가장 간단 명료한 말로 선포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실 이가 한 여인으로 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확실히 필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한” 자들(히2:14)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도 역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여야 하였습니다.
(2)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내리 전달되는 본성적인 오점이 그에게는 전혀 없어야한다는 것도, 역시 그에 못지 않게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요구 조건이 예수님의 초자연적 탄생을 통해 충족되었습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이 초자연적 탄생은 그의 독특한 직무상의 자질을 형성하는데는 물론 그의 죄없는 인격을 설명하는데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점과 흠이 없는 인간임을 인정합니다. 세상은 옥에도 검은 티가 있듯이 지극히 고귀한 인물들에게도 흠이 있는 법인데, 어떻게 하여 그리스도에게는 그러한 결점이 없었는가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입증할만한 신비는 인간이 거듭나는 것과 같은 유(類)이나 그 이상의 기적입니다(요3:5-7). 인간은 죄로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 인간에게 성령님으로 중생의 새 생명이 심겨졌을 때 그 영혼 속에 영적인 생활을 스스로 가져올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중생의 씨를 뿌리고 중생의 기적을 이루어 나가서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역시 타락한 인간 마리아에게 성령님으로 그리스도가 잉태되었을 때 마리아 자신 그 기적을 이루어 나가지 못합니다.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마리아의 복중에 잉태한 초기부터 성별하여 죄의 오염을 면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신비를 이해하는 자에는 복되도다! “아들을 낳으리니”. 천사는 ‘네게 한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의 위치에서 그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즉 요셉은 그 아이의 보호자가 된 것입니다. “이름은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회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란 이름은 문자적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도움이시다)’를 의미 합니다. 예수 또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당시 많은 유대인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이름입니다. 바울의 측근자들 가운데도 예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불후의 전쟁 영웅 여호수아를 상기시켜 주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외국의 통치를 받던 이 시대에 이스라엘이 자유를 위해 다시 싸우기를 바라던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이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의중에는 보다 깊은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이름이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은 여호수아가 이루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것은 죄로 부터 구원이었습니다. 이 아이도 역시 한 사람의 지도자, 정복자, 왕이 될 인물이었습니다. 요셉이 “다윗의 자손”이라 불린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가운데 여기에서 “자기 백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의가 깊습니다. 이 아이에게도 역시 어떤 신민, 즉 백성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룰 구원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칼로써 로마로부터 쟁취해 내는 구왼이 아니라, 내적, 도덕적, 영적인 구원, 따라서 도덕적, 영적 무기에 의해 실현될 구원이었습니다.
4. 이 사건과 예언의 성취 마태는 “이 모든 일”을 설명하기 위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였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23절). 임마누엘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이 예언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한 것입니다(사7:14). 구약성경에서 “처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언제나 그 단어 본래의 순수한 뜻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글 속에 있는 이 예언이 본래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예언이 발전되고 있는 후속 문맥을 볼 때, 그리고 특히 이사야 9:6에서 그 아이에게 주어지는 4가지 이름과 그 아이에 대해 예언된 영광스런 통치를 고려해 볼 때, 이사야가 그를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사9:6을 읽으시요). 그리고 그 아이에 대한 강렬한 예언이 이사야의 시대에는 빈약하고 불충분하게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위대한 메시야 소망은 필연적으로 먼 미래의 시대를 지향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서에 진술된 그 배역을 담당할 이는 장래에 나타나야만 했었습니다. 마태는 그 배역을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성취하셨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이 예언의 성취는 히브리 단어에 처녀성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 이 아니라 선지자가 신적 영감의 황금 빛 연무 속에서 본 인물과 복음서에 묘사된 인물 사이에 일치점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상호 일치는 완벽합니다. 예언 속의 아이에게 주어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아하스 같은 사람이 보좌에 앉아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에서 이스라엘이 자기 존재의 비밀을 발견하게 된다는 그런 확신울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와 아하스 왕 시대와 관련하여 그 이름은 지금 시리아와 사마리아로부터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위기가 “이 아이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없어진다는 약속과 더불어 아직 잉태되지 않은 아이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와 이 이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 사이에서 자비와 구원을 위해 임재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이 이름은 최소의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최대의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특별한 아이의 출생과 명명(名命)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일반적인 언명일 수도 있고, 혹은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이 아이에게서 밝혀진다는 것을 나태내주는 신의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아이로 여겨도 좋을 이사야 9:6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이 이 후자의 해석을 정당화해 줍니다. 이 아이는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이십니다(TDNT). 이 이름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 이런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진정한 차원에서 볼 때 이 이름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해당되는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칭호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과 함께, 인간들 중에 거주하신다는 것을 선포하며, 예수라는 역사적 이름의 토대를 밝혀준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과 같은 인간이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사시는,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이름(임마누엘)은 깊고 견고한 토대이며, 또 하나의 이름(예수)은 그 위에 세워진 피난 요새입니다. 그는 임마누엘이기 때문에 예수입니다.
5. 요셉의 순종과 그리스도의 탄생 요셉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상과 자신의 인생은 너무나도 달라보였습니다. 약흔녀의 순결에 대한 의심과 번민, 망설임은 밤과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의 아이가 수치의 씨앗일 것이라는 두려움 대신, 그는 ‘거룩한 아이’ 라는 신적 확신이 다가왔습니다. 이 갑작스런 급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관련된 모든 일들이 분명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될 것인가는 분명하였습니다. 요셉은 즐거운 마음으로 신속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무거운 짐을 제거해 주었으며, 영원히 파멸될 것 같았던 딸콤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한 구절에서 천사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였고, 또한 구절에서 기자는 그 탄생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 모두에서 마리아의 역할과 요셉의 역할이 나란히 병행하고 있습니다.-“'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녀가' 낳으매 '그가'이름을 예수라 하니라”(21, 25).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는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참조:A. MACLAREN). 요셉과 마리아에 대하여 좀더 생각하여 봅시다.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는 말에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다 같이 큰 시련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파멸될 것만 같으며, 그렇게도 열렬히 사랑하는 자와 완전히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결백하였으나 요셉은 그녀의 결백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마리아는 분명히 양심적으로 결백한 이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었습니다. 우리는 이 마리아의 행위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백한 자를 반드시 보호하실 것입니다. 마리아는 치욕을 당할 위험에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잔인하고 성급하고난폭한 사람과 관계(정혼)되었더라면, 치욕적인 죽임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유순하고 친절한 사람과 관계되게 하셨으며, 적당할 때 요셉은 그녀의 임신의 진상과 결백을 통고받았으며, 그녀를 충실하고 사랑하는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허물이 없는 양심을 간직해야 할 것이며,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명예를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공격을 받거나 환경이 우리를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당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변호해 주실 것이며, 파멸에서 우리를 구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에서 요셉의 사랑과 신중한 처리를 보며, 교훈을 얻습니다. 이러한 난문제를 당하여 우리는,-
첫째로,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둘째로, 불쌍히 여겨 서로 용납하고(엡4:32), 온유한 마음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셋째로, 끝까지 사랑하여 함부로 비판, 비난하지 않아야 합니다.-
넷째로, 그 충격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다섯째로, 주의 말씀에 신속히 복종해야 합니다. 요셉은 마라아의 외관상 부정에 대하여 이렇게 대처함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는 요셉과 마리아의 지혜와 헌신적 봉사로 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위하여 어떠한 봉사로 사시겠습니까 '성탄을 맞이하면서 다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탄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