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침노 당하는 천국 (마11:12-15)

본문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 라 ! 이 유명한 말씀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의 소식을 들 으신 예수님께서 그를 격찬하신 후에 바야흐로 도래한 신약 복음 시대의 한 특징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격찬하신 세례 요한! 그는 광야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사람이 아니 라고 하였습니다(마 11:7). 그는 철두철미하게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고 현실의 쾌락에서 춤추는 왕궁의 쾌락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1:8).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 면서 사는 사명의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닦는 전령사요 선구자였던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교량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큰 떼를 이루면서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요한이 활동하고 있는 유대 광야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과 자신에게 몰려드는 그 군 중들의 모습을 가리켜 마치 군세를 몰아 쳐들어오는 어떤 침략자들의 모습으로 묘사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있다.'는 말을 사용하였 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는 세례 요한 시대부터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 새로운 백성의 역사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기 시대의 특징을 알려 주시기 위한 유도적 표현입니다. 왜 예수님과 세례 요한에게 침략자와 같은 모습의 군중이 운집하였을까 세례 요한 과 예수님의 설교에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I. 메시지의 주제가 된 하나님의 나라(천국)입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에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 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의 메시지의 주제가 천국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 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라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 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역 제일성(第一聲)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에나 예수님의 설교에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가 주제였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말쿠드' 요, 아람어는 '멤라카'입니다. 이 말속에는 세 가지 내용의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곧 주권자의 통치, 왕의 통치입니다.
둘째는 일정한 경역(境域)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통치 영역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그 통치와 경역 에 포함되는 전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은 막연한 상상이 나, 어떤 추상적 이상이나, 철학적 사색의 추론이나, 심리학적 종교현상의 개념이 절 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적이고, 내용적이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것입니다. 천 국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왕국으로, 초자연적이요 절대 완전한 영원의 세계입니다. 이 천국 운동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왕국의 세계인데, 사실상 예수님의 초림으로 출발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지상의 교회 운동으로 그 진행을 삼고, 예수 자신의 재림으로 그 완성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벌써 신약시대가 천국 운동의 처음 단계임을 역설하고 있었습니다. 마태 복음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하였습니다. 마 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0절 중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그 많은 비유의 주제는 '천국'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여러 다른 비유의 대부분은 '천국'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중대한 것은 세례 요한에게 그리고 예수에게 사람들이 떼를 지어 물밀듯이 몰려온 것은, 저들이 부드러운 옷을 입은 궁중의 가인(佳人)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의 사람이요,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살던 사람이 었습니다. 예수님은 고운 풍채도 없고, 모양도 없고, 사람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사 53:2). 그는 천한 동리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에게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 사람들이 떼 를 지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집이나 회당에 사람들이 가득 차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바닷가나 산이나 성전에나 사람들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예수님 이 계신 빈 들판이 그에게 몰려 온 군중들로 가득 차 버렸습니다. 왜 사람들이 몰려들었을까 바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군중들은 그 무엇 을 보려고 몰려든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으려고 몰려든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살 기 위하여 모여들었습니다. 저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와 메시야 왕국의 소망 때문이었 습니다.
※세례 요한, 그리고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있었습니다. 유대가 아 닌 하나님의 나라, 로마제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 죄악의 나라가 아닌 무죄 세계의 나라, 고통의 나라가 아닌 평안의 나라, 절망 과 불안의 나라가 아닌 기쁨과 소망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현재가 아닌 미래가 있었 습니다. 순간이 아닌 영원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 군중들에게 복음이 된 것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소식 이 군중들의 본질적 갈증을 시원케 해주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 소식이 사람의 사람된 본질적 욕구를 채워 주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영생의 미래가 고통스런 현재를 시원케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Ⅱ. 침노하는 군중들을 봅니다. 마태복음 11장 12절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 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침노'라고 하는 단어는 이 본문에만 나타나는 말입니다. '힘' + '침범한다'의 합성어로서 '힘으로 침범한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6절에는 같은 내용의 말을 '침입'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율법과 선 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 로 침입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침노'라고 하는 이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1 어떤 확실한 동기가 있는 말입니다.
2 확고한 목적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3 그 동기에 따르는 목적(욕구)을 성취시키기 위한 과감한 행동, 결사적 행동, 막무가내적 행동이 수반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침노하는 군중입니다. 어떤 군중입니까
1. 큰 무리의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큰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5, 6절에 이때에 예루살 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 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도 나오고, 군인들도 나오고, 공무원들도 나오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 정말 유유상종하는 무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저들은 정말 목마른 사슴들이었 습니다. 예수께 나온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귀머거리는 듣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기쁨의 소식 앞에 춤을 추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실로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마 11:5). 예수님은 세례 요한 이 옥에서 보낸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요한에게 알려 주라고 하였습니다(마 11:5). 저들은 모두 나라의 본 자손들에게서 사실상 추방(쫓겨남)당한 자들이었습니다. 저 들은 세리들이요, 창녀들이요, 가난한 자들이요,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심령이 가 난한 죄인들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약한 자들이요, 무명한 자들이요, 소외된 자들이요, 천한 자들이요, 고통 당하던 자들입니다. 저들은 손(客)이요 외인(外人)들이었습니다. 실로 세상에 사는 저들은 큰 무리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었습니다(계 7:9). 저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 와 사마리아와 땅끝에서까지 몰려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 노하는 큰 군중들이었습니다.
2. 참으로 끈질긴 무리들이었습니다. 침노하는 무리! 이것은 힘과 활기, 진지한 노력과 추구를 의미합니다. 죽음에 이 르는 열정과 행동을 소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자아는 부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와 함께 삶의 구조와 기질이 변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타락한 자신의 본성을 제어하는 은총을 입 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향한 자들이었습니다(마 7:13-14). 저들에게는 넘치는 수고와 투옥, 수없이 맞는 매, 세상에서의 고립, 동족인이나 이방인의 위험, 굶는 것, 목마름, 헐벗음 따위는 아예 아랑곳이 없었습니다. 저들은 천국의 입성을 위하여 안팎에서 도전하는 온갖 죽음의 세력들과 싸움합니다. 저들은 저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 구원의 복음에 대하여 강한 욕구를 가지고 그곳을 향하여 질주할 뿐이었습니다. 저들은 저들 몫에 태인 십자가의 성격을 너무나 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향도, 친구도, 부모도, 형제도 용감하게 결별하는 예측 불허의 결단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온갖 불의의 세력, 칼날, 전쟁 앞에 용맹했습니다. 돌로 맞는 것, 톱으로 켬을 당 하는 시험, 칼에 죽는 것, 양과 염소의 가죽옷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을 감수 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히 11:38). 정말 끈질긴 무리들이었습니다. 거룩한 침노자들이었습니다. 거룩한 다툼의 전사들 이었습니다. 의분에 용맹한 성난 군중들이요, 성난 투쟁자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주 자주 마치 침략자와 같은, 무엇에 욕구하는 성난 군중들의 모습을 보 게 됩니다. 많은 이권(利權)이 매개된 주택 청약에 몰려드는 군중을 봅니다. 대학 진 학을 결정할 마지막 시간에 입학에 유리한 대학의 접수 창구로 몰려드는 군중들을 봅니다. 어떤 백화점의 밍크 세일 소식을 듣고 그 백화점에 몰려든 군중들의 소동을 볼 때도 있었습니다. 유명하다는 연예인들의 쇼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군중들의 발걸음 을 봅니다. 금번에 다시 한국에 온 세기적인 미국의 가수 마이클 잭슨(M. Jackson) 공연 앞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부른 수많은 곡(off The wall; 1100만 장, Thriller; 4600만장, Bad; 2500만장, Dangerous; 2300만장, History; 1400만장… 등)을 듣기 위하여 그가 가는 모임에 몰려드는 군중들은 마치 침략자처럼 보였습니다. 그 공연장으로 몰려든 흥분하는 군중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모든 군중들 의 모습은 일종의 '침략자'같이 보여집니다. 자기가 목적하는 욕구 성취를 위하여 힘 으로 밀어부치는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런 류의 행동은 너무나도 순간적이고 세상적일 뿐입니다. 육이요 정욕적일 따름입니다.

2,000년 기독교는 거룩한 다툼, 거룩한 침노의 역사입니다. 온갖 거짓 종교와 국 가의 박해, 문화와 역사의 난동 가운데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국을 향하여 질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과연 거룩한 침략자들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렇게도 천 국의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용기와 목적과 행동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이 것은 전 인생의 욕구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을 위시한 역대의 박해자들은 그 박해를 이기면서 나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고, '저들은 마치 다른 나라에서 온 침략자처럼 보였다.'라고 하 였습니다. 이것은 세상 중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바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전사(戰士)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침노자들은 천국의 존재론적 의미를 확실히 하는 자들입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이 세상의 나라와 본 질적으로 다릅니다. 빌라도 총독 앞에서 예수님이 이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요 18:36). 그리고 이 나라는 '믿음과 회개'라고 하는 초자연적 은혜의 조건으로 만들어 갑니다(막 1:15, 엡 2:8). 그 믿음의 행진이 마치 침략자처럼 보여진 것입니다. 그 믿음의 힘으로 밀어부치는 필사적 행동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로 좇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선택과 소명과 사명을 확실히 합니다. 자신과 또 다른 사람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으려는 거룩한 침략자가 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그런 사람들에게 취득되어지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데니 (Denny)는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씨만 좋은 호인들의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영전(靈戰)의 전사(戰士)들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매튜 헨리(M. Henry)는 '…하늘나라는 비웃는 자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 아니라, 수고한 자를 위해 편히 쉬게 하려고 의도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고 쟁취(爭取)의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마 11:12). 침노당하는 천국은 바로 우리 생존의 소망입니다. 우리 생존의 활로입니다.-할렐루야!-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92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