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주님이 본 시대관 (마11:16-19)

본문

사람은 누구나 어릴 때의 추억이 다 있습니다. 특히 자신이 자라 온 시대적 환경에서 공통적인 놀이들을 영원히 기억하게 됩니다. 여기 60대 이상의 성도 님들이 자라올 때 그 시절의 놀이들이란 기껏 하 여 술래잡기나 남자들은 병정 놀이를 하였거나, 아니면 제기차기, 그리고 여자들 은 고무줄 넘기나 땅따먹기, 아니면 널뛰기나, 그네타기등을 하면서 놀은 추억들 이 다 생각날 것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기억하는 것은 봄이 되면 뒷산에 올라가 진달래꽃을 따먹던 생각이며, 장선 강에 나가서 고기를 잡던 생각들이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참으로 그 동심의 세월이 그리울 뿐입니다.
그런데 그 때에 친구들 간에는 때때로 놀이에 대하여 의견이 갈리기도 했습니다. 어떤 아이는 술래잡기를 하면서 놀자고 하는데, 어떤 아이는 병정놀이르 하자고 합니다. 그럴 때 의견이 많은 쪽으로 기우려 지면 소수의 아이들은 따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끝내 따로 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소수의 아이들은 자기 들과 놀이를 같이할 친구들을 불러 댑니다. "영철아! 놀자!철수야! 놀자!" 그렇게 불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기분이 축 늘어져 혼자 집으로 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를 바로 장터에 놀이를 하자고 불러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그렇게 비유하였습니다. 2000년전에 이미 오늘 우리들의 시대를 '장터에서 놀이를 하는 아이들과 같다 고 하였습니다. 제 동무들을 불러 놀자고 하나 응답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관찰력이었습니다. 놀이를 하자고 불러도 응답하지 않고 무 각해진 시대가 오늘의 우리 시대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를 과학 문명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 어느때 보다 물질 문명이 발달하였고, 문화 수준이 그 어느때 보다 향상되 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는 주님이 비유를 들어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이 시대는 어떤 시대라고 하였습니까
1. 아이들 같이 순진성이 없는 시대라고 하였습니다.(16절) 여기서 '아이'라는 말은 원문에 보면 매우 어린아이를 말합니다. 즉 '파이디온'이란말인데 3살 이하의 어린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때 아이들은 순진하여 모방(模倣)성이 강하며 남의 것을 잘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의 행동 하나 하나를 유심히 보았다가 그대로 따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비유에 나타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 치 지 않는 어린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순진성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그만큼 이미 어른이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흉내를 따라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어린이들이 얼마나 영악해 졌는지 어른들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오라고 해도 하도 부모들로부터 세뇌를 당해서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만큼 순진성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현대 어린이들이 순진성이 없듯이 현대인간은 진실성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 다운 면이 있어야 하는데 어른이 다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순진성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어디일 까 너무도 거짓됨과 불의 함으로 늙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가끔 대화 속에, 때묻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서 "순진하긴."이런 말을 종종 합니다. 도리어 그런 사람이 걱정스러워진다는 말입니다. 적당히 영특하고, 적당히 세속화(世俗化)되어야지 그렇게 순진해서야,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물정 도 몰라서야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걱정스러움을 나타냅니다. 참으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순수성이 살아진 시대에서 적당히 타락하지 않고는 살기 힘든 시대가 되었으니, 이것이 과연 바르게 가는 세태라고 보십니까 어른 된 아이들처럼 경계의 대상은 없을 것입니다. 그 얘에게 함부로 말했다 가는 큰 코 다친다고 할 것입니다. 순진성이 살아진 어린이! 이것이 오늘의 시대 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 '진실성'이라고 봅니다. 주전 8세기경 선지자 하박국은 하도 악인들이 득세 하고 불의 한자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면서 사는 것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땅위에 강포가 성행하며 공의가 땅에 떨어져 시행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잠잠하시나이까, 어찌하여 패역을 목도하며 변론과 분쟁이 판을 치 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잠잠하고 계십니까 " 이때 하나님은 하박국의 질문에 대하여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니라" 고하 였습니다. 여러분!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여기 '믿음'이란 말은 '진실함' '신실함' '거짓이 없는 순진성'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볼 때, 이런 이 시대에서 신앙인들 이 살 수 있는 길은, 진실함으로 산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진실하지 못하고, 세상으로 달아 빠진 존재들이 되어졌기에 살 길이 막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약삭빠르게 행동하고, 적당히 타락해야 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자기들 생각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신앙인 이 살 길은 이러한 시대에서 '진실함'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서 진실이 살아진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2. 신앙의 기쁨이 없는 시대라고 하였습니다.(17절) 이것은 오늘의 우리 크리스천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봅니다.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춤추지 않는다'는 말의 원문에 보면 '우크 올케사데' 로 서 전혀 미동(微動)도 하지 않는 무감각(無感覺) 상태를 의미합니다. 찬송의 기쁨을 잊어버리고 말씀의 갈등과 도전을 잃어버린 무감각해진 상태 가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란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요즘 웬만한 것이 아니면 감동을 받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이 다 살아졌습니다. 언제나 얼굴에는 수심이 서려 있고, 반가운 일이란 하나도 없이 지냅니다. 무감동, 무감격, 무동정의 시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슬픈 시대입니다. 사람은 많은데 이웃이 되려고 하려는 노력은 눈곱만큼도 없어졌습니다. 모두가 타인(他人)입니다. 심지어 가족들 간에서도 이런 현상들이 굳어져 가 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즘에 영화들을 보세요. 모두 보면 폭력이 아니면 본능적 감각을 자극하려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웬만해서는 무감각해 진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 부흥회도 보면, '은사 집회', '축복 성회', '간증 집회'등등 성경에도 없는 용어들을 동원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집회에 가보 면 대부분 평범한 보통의 상식적인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자극적이고, 충격적이 고, 특수한 경우의 일, 즉 기적, 환상, 이상한 체험, 그리고 보통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어떤 특별한 일들에 관한 얘기들 뿐입니다. 그래야 자극을 받고, 그래야 감 동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크리스천의 신앙의 내용이 모두 '깜짝쇼'들이 아니면 관심과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편승 한 사이비 이단 거짓 목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참, 요즘 보면 목사라는 이름이 얼마나 부끄러운 대상과 지탄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왜들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고 보십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무감각해진 시대" 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이 말씀답게 선포되지 못하고, 그 말씀이 생활 속에 서 누룩이 되지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 하나만 보아도, 세상의 끝 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노아의 시대와 같게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모두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말씀에 대하여 등한히 여기며, 무감동의 때가 되어 그저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몰두할 때, 바로 그때가 마지막날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죄의 대한 슬픔과 아픔이 없는 시대라고 하였습니다.(17절b)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하였 습니다. 여기 '가슴을 치지 않다' 라는 말도 '우크 에코파스데'라는 말로서 '스스로 뉘우치거나' '전혀 슬픔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를 짓고도 마음의 가책이나 심령의 회개를 모르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 란 말입니다. 도리어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사회를 향한 반항뿐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성찰(省察)할 수 있는 눈이 멀어 자기를 보지 못하고 날마다 죄(罪)가운데서 방황할 뿐입니다. 아예 생각이 굳어진 상태에서 잔악스러워 갑니다. 회개와 뉘우침이 없이 살다 결국 스스로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자기들을 '지존파'라고 하고, 막가는 인생들이라고 '막가파'란 것을 조직하여 반 사회적 폭력 집단을 만들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저들의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 기득권 계층에 대한 무조건적 증오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에 행동에 대하여 전혀 늬우칠줄 몰랐습니다. 죄 의식이 없이 사람을 죽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유흥비 조달을 위하여는 아무런 짓을 해도 가책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의 적라나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죄의 물결 속에서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가치관이 이렁게 전락하였습니다. 도무지 양심이란 것이 작용하지 못합니다. 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열등의식으로 굳어진 마음들입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죄를 늬우칠줄 모릅니다. 도리어 부끄러움을 자랑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본 이 시대 관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 해답은 로마서 12:1절 이하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변화를 받으라'고하였습니다. 변화란 개혁을 의미합니다. 분명히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 개혁이 외적인 것 이 아니라고 내면적인 마음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의 선하신 뜻, 그분의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항상 분별하면서 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대한 과오를 범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 하지 못하고 겉으로 하기가 쉽습니다. 마음으로 변화된 자세를 먼저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봉사하는 일에서도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누구를 위한 봉사냐 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말로는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도, 그리고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 면서도 지극히 자기의 뜻을 내 세울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는 일,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을 항상 분별하면서 봉사해야 하겠는데, 무조건 내 의견에 틀리면 못하겠 다고 박차고 나가고, 내 자존심 상하면 하던 일도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세를 가지고야 어떻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분별이란, 생각이 따르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면, 늬우칠일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잘못한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기뻐할 일이라면 회개하 여야 하고, 하나님이 선하게 보실 일이라면, 내 자존심같은것은 굽힐 줄도 알아 야 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마지막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특징을 바로 깨달아, 우리의 본분을 잘 지켜서 주님 맞을 준비들을 바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지혜 이기 때문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빛의 자녀들의 행실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했습니다.(엡5:9)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 끄러움이니라"고 하였습니다.(엡5:10-12) 아무쪼록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 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다 주님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 히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92 페이지